황석영의 '오래된 정원'에 가보니…
[특집] 영화〈오래된 정원〉 전주 촬영현장
황석영의 '오래된 정원'에 가보니…
바람엔 아직 쌀쌀한 기운이 묻어나지만 꽃들은 봄기운이 완연하다. 매화와 산수유가 지천으로 터지고, 목련 꽃망울은 도톰하게 살이 올랐다. 전주 시내 중심가에서 조금 빗겨 외곽에 자리한 완산구 은석골은 그러나 계절의 감각에서 살짝 빗겨나 있다. 바람에 마른 소리로 흔들리는 대나무를 보면 겨울인데, 마당엔 상추와 파가 청청하게 자라고 있다. 텃밭 건너편엔 잘 익은 감이 달린 감나무가 서 있고 그 옆으론 단풍나무와 수선화가 같이 자란다. 게다가 평상에 놓인 노랗게 익은 참외까지. 도무지 계절을 종잡을 수 없는 조화다. 이런 걸 두고 '春來不似春'이라고 하던가. 봄은 왔으되 진짜 봄은 오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어쩌면 그건 이곳에 모인 사람들 때문인지도 모른다. 지금 여기서는 따뜻한 봄을 얘기할 계제가 아니다. 여기 사람들은 지금 오랜 시간 동토(凍土)였던 과거 시절에 대해 얘기하고 있다. 지금 여기는 황석영 원작의 <오래된 정원>을 영화로 만들고 있는 촬영현장. 영화 <오래된 정원>은 지난 1월초에 크랭크인 돼 현재 막바지 촬영중이다. <오래된 정원>은 <그때 그사람들>과 <바람난 가족> 등 사회성 짙은 작품을 만들어 왔던 임상수 감독의 숙원의 작품이다. 그런데 왜 이 '오래된 정원'에는 아직 봄이 오지 않은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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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과 사랑 사이를 오갔던 한 청년의 이야기

<오래된 정원> 촬영현장 ⓒ청년필름

<오래된 정원>은 정치범 오현우(지진희)가 출소하는 장면으로 시작해 과거와 현재를 오가며 진행된다. 17년 전 광주 민주화운동에 참가했던 현우는 도망자 신세가 되어 갈뫼로 숨어든다. 그리고 미술교사 한윤희(염정아)는 그런 그를 기꺼이 받아준다. 그러나 혼자만 안전하다는 죄책감과 동료들에 대한 죄스러운 마음까지 숨길 수 없었던 현우는 어느 날 그곳을 떠나 서울로 올라가고, 무기징역을 선고 받는다. 감옥에서 보낸 17년의 세월. 윤희는 이미 세상을 등졌고, 혁명과 사랑에의 정열로 넘치던 청년은 아픔을 가슴에 오롯이 새긴 나이 든 어른이 되어 버렸다. 현우와 윤희가 사랑을 나누는 '갈뫼 생활'은 초봄 무렵 시작돼 초가을까지 6개월여 동안, 짧게 지속된다. 갈뫼 세트장은 그래서 봄과 여름, 가을의 모습을 모두 껴안고 있다.

소설처럼 영화 역시 80년대를 아프게 살아낸 두 남녀의 가슴아픈 사랑을 그린다. 17년 세월이 넘는 시간동안 애틋한 사랑을 나누는 오현우와 한윤희 역은 각각 지진희와 염정아가 맡았다. 봄기운과 겨울바람이 교차하는 이곳 전주의 한 시골마을, 등 뒤로 산을 이고 눈앞으로 저수지의 잔잔한 물결이 펼쳐지는 이곳 '갈뫼'에서 황석영을 넘어 임상수식의, 시대를 뛰어넘는 러브 스토리가 만들어지고 있다.

이 날 공개된 촬영 분은 갈뫼를 떠나 서울로 가기로 마음먹은 현우와 그런 현우의 마음을 눈치챈 윤희의 복잡한 마음이 부딪히는 장면이다. 텃밭에서 채소를 따다 생각에 잠긴 현우를 향해 "어떡할 거야? 정말 서울로 올라갈 거냐구?"라며 차갑게 쏘아 붙이는 윤희. "여기 있을 때만이라도 나만 생각해주면 안될까?"라는 대사를 당당히 내뱉는 윤희는 말없이 모든 상황을 지켜보고 묵묵히 견뎌내는 황석영 원작 속 윤희와는 사뭇 달라 보였다. 직접 시나리오 작업까지 한 임상수 감독은 말한다. "소설 속 인물들이 다소 숭고해 보였다. 두 사람을 발에 땅을 딛고 있는 보통의 사람으로 바꾸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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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보다는 '사랑'에 초점

숭고한 인물과 보통의 사람으로 대비되는 것처럼 황석영의 <오래된 정원>과 임상수의 <오래된 정원>은 살짝, 다르다. 황석영은 <오래된 정원>을, "중심 줄거리는 러브 스토리지만 80년대를 관통하는 이야기를 통해 20세기를 돌아보는 소설"이라고 밝힌 바 있지만 임상수 감독은, "시대적인 문제들은 거의 걸러내고 두 사람의 러브 스토리에 좀 더 집중할 계획"이라고 말한다. 임 감독은 특유의 말투로 이렇게 얘기한다. "징징거리지 않는, 우아하고 슬픈 러브 스토리가 될 것이다. 영화가 개봉되면 그래서 아주 우아한 눈물바다가 만들어질 것이다."

역사의 소용돌이 한가운데 있는 두 사람의 러브 스토리가 영화로 만들어지기까지, 무엇보다 소설가 황석영과 영화감독 임상수가 손을 잡기까지 어려움도 많았다. 2004년 8월 MBC 프로덕션은 황석영과 판권을 계약하고 <오래된 정원>의 영화화를 공식 발표했다. 하지만 7개월이 넘는 시간동안 어떤 감독도 연출을 하겠다고 나서지 않았다. 그때 임상수에게서 전화가 왔다. <그때 그사람들>의 차기작으로 <오래된 정원>을 생각하고 있던 임상수가 판권이 이미 팔린 걸 알고 스스로 연락을 해 온 것이다. 1년이 넘게 허공에 떠 다니던 이 프로젝트는 그렇게 결실을 맺게 됐다. 일단 감독이 결정되자 다른 일들은 순조롭게 진행됐다. 17년의 시간을 뛰어넘어 사랑을 보여줄 남자로 지진희가, 사랑과 아픔을 감내하지만 시대를 바라보는 시선만은 단단한 여자 한윤희로 염정아가 캐스팅됐다.

하지만 사람들은 얼핏 미스 캐스팅이라고 여겼다. 특히 한윤희 역의 염정아가 그랬다. 굳이 <범죄의 재구성> 때의 팜므파탈형 모습과 <장화, 홍련> 때의 신경 날카로운 계모를 들먹일 필요도 없었다. 염정아는 그냥 보는 것으로도 '한윤희'와는 썩 잘 맞는 조화는 아니다. 그러기에는 너무 도시적이고, 강하고, 도드라졌다. 사실 염정아 자신도 캐스팅에 의아해 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그녀는 한윤희 캐릭터를 위해 궁리에 궁리를 했고 그 바람에 시나리오를 읽고 또 읽고, 또 읽었다고 한다. 반면에 17년의 시간을 오고 가며 연기해야 했던 지진희는 시간의 벽을 그리 어렵게 느끼지는 않는 분위기였다. "굳이 나이 든 연기를 해야겠다, 젊은 연기를 해야겠다, 다짐하지 않고 자연스럽게 연기했다." 현장의 느낌을 살리고 싶어 다른 작품과 달리 '미리 결정짓고 오지 않는다.' 그냥 현장의 소리와 느낌에 몸을 맡긴다는 것.



두 사람의 연기에 대해 임상수는 자신에 차 있다. 염정아에게서 새로운 모습을 끌어내는 것이 재미있고, 지진희에게선 배우로서의 존재감을 새롭게 확인하고 있다는 것.

"소설 <오래된 정원>은 한국의 80년대 민주화 운동에 관한 집대성이자 결정판 같은 작품"이라고 생각한다는 임상수 감독은 "거대한 사회적 변화 앞에 놓인 개인의 왜소함과 그 쓸쓸함을 위로할 수 있는 사랑을 담담하게, 그러나 폭풍 같은 강한 감정으로 동시에 담아내겠다"고 말했다. 현재 80% 이상의 촬영을 끝낸 영화 <오래된 정원>은 오는 4월 3일께 크랭크업하고 후반 작업을 거쳐 가을 무렵 개봉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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