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아 수준 영어로 뭘 하겠단 말인가?"
[인터뷰] 한국문학번역원 윤지관 원장
2008.03.10 08:07:00
"유아 수준 영어로 뭘 하겠단 말인가?"
"영어를 한마디도 못하더라도 자기 존재의 충일함을 견지하고 실현하는 데 도움을 주는 교육이 영어 지배의 세상일수록 더욱 중요하다."

이명박 정부의 영어 교육 정책을 둘러싼 논란이 계속되고 있다. "모든 학생이 고등학교만 졸업하면 기본 생활 영어로 대화할 수 있도록 하겠다"고 공언한 새 정부 영어 교육 정책이 현실적으로 가능하냐는 문제를 떠나 목표 자체를 수정해야 한다는 비판도 이어지고 있다. '영어 회화'를 목표로 삼은 교육정책은 이른바 '국제화 시대'라 불리는 현대 사회에서 너무나 뒤떨어진 발상이라는 것이다.

영어학자들은 사실 이 같은 논란이 갑자기 튀어나온 게 아니라고 지적한다. 이미 오랫동안 이 문제를 고민해온 학자도 꽤 있다. 이명박 정부의 영어 교육 정책을 비판하는 듯한 위의 발언은 이미 지난 2001년 한 학술지에 실렸던 글이다.

당시 이 글을 썼던 덕성여대 윤지관 교수(영문학과)는 지난해 일군의 영어학자와 함께 <영어, 내 마음의 식민주의>(당대 펴냄)라는 제목으로 한국 사회와 영어와의 관계를 짚는 글들을 엮은 책을 펴냈다. 1990년대 후반~2000년대 사이에 쓰여졌던 이들의 주장은 영어 열풍이 더욱 심해진 요즘, 더욱 설득력을 갖고 다가온다.

최근 윤지관 교수의 이름은 전혀 다른 사안으로 여러 언론에 보도되기도 했다. 그가 원장으로 재직 중인 한국문학번역원에서 오는 9월 개원을 목표로 준비 중인 번역아카데미 때문이다. 현재 한국 문학 작품을 외국어로 번역할 수 있는 외국인 번역가는 고작 81명. 번역아카데미를 통해 10년간 300명의 외국인 전문 번역가를 길러내겠다는 번역원의 목표는 지금껏 우리나라의 외국어 정책이 얼마나 불균형적이었는지 보여주는 단적인 사례다.

지난 3일 서울 강남 한국문학번역원에서 윤지관 원장을 만나 현재 영어교육 논란에 대한 입장을 물었다.

"말만 가르치는 교육으로는 '문맹' 벗어날 수 없다"
▲ 윤지관 한국문학번역원 원장. ⓒ한국문학번역원

"실용영어를 비판할 건 없다. 그런데 실용영어라는 관념을 만들어서 거기에 지나친 의미를 부여하는 것은 문제다."


윤지관 원장은 '실용영어'를 강조하는 최근의 흐름을 놓고 "언어를 실용과 비실용적 언어로 구분하는 것 자체가 이분법적인 사고"라며 우리나라 영어 교육의 문제점을 지적했다. 일반적으로 한국 사회에서 영어 교육은 '실용영어'와 '교양영어'로 구분돼 왔다. 기존 독해 위주의 교육은 '교양영어'로 통칭되면서 회화 능력이 떨어진다는 지적이 잇따르자 말하기·듣기 위주의 교육이 강화됐다. 이를 '실용영어'라고 불렀다.

윤 원장은 "언어에 실용성만 있다고 생각한다면 아주 낮은 차원, 의사소통 차원에서만 언어의 역할을 한정하는 것"이라며 "그것을 언어 정책의 전부로 삼는 것은 문제가 있다"고 말했다. 그는 "영어 회화, 말하기·듣기가 부족하니까 보완하는 교육제도가 필요하다는 것은 교육자라면 누구나 과제로 삼고 있다"며 "그러나 교육의 목표를 그렇게 설정하는 것이 곧 올바른 언어 정책은 아니다"라고 지적했다.

영어 회화가 강조되는 풍토가 조성된 뒤 대부분 대학에서는 기존 교양영어 강의를 회화 위주의 실용영어 강의로 전환했다. 영어로 의사소통을 못하기 때문에 국제사회에서 경쟁력이 떨어진다는 논리가 전사회적으로 널리 퍼지고 있는 사회적 분위기와 맞물려서였다. 이에 대해 윤 원장은 "어느 정도는 맞다. 그러나 말하고 듣는 것이 영어 실력의 전부가 되는 건 아니다"라고 말했다.

"어린애들이 유식한가? 책을 읽고 문제점도 볼 줄 알아야 경쟁력이 생기는 것이다. 내용은 대충 이해하고 말만 잘 한다고 해서 경쟁력이 생기는 게 아니다. 즉 콘텐츠를 제대로 이해해야 한다. 그래야 문맹을 벗어나는 것이다. 말을 잘한다고 경쟁력이 생긴다는 주장은 참 피상적인 관찰이다. 날씨, 길찾기 등 생존 영어 수준에 촛점을 맞춘 교육이 위주가 되면 정작 필요한 고급 영어를 구사해야 하는 사람까지 길러지지 않게 된다."

"제2외국어 포기하는 외국어 정책은 더 큰 문제만 낳을 뿐"

윤지관 원장이 지적한 우리나라 영어교육의 또다른 문제점은 '영어의 물신화'였다. 그가 말하는 '물신화'는 곧 "영어로 출세하는 사회"다. 그는 이미 2001년의 글에서 우리나라의 영어 광풍을 '영어 숭배'라고 묘사한 바 있다.

"프랑스어에 접근하는 정도에 따라 자신의 식민지적 정체성을 탈각해 서구인에 접근할 수 있다고 착각했던 당시 마르티니크 사람들이 '자기의 땅'에서 유배당한 셈이라면, 영어에 대한 숭배에 빠져 모국어가 자신의 삶에서 가지는 의미조차 망각하는 사람들은, 김남주 시인의 의역을 빌리자면 '자기의 언어에서 유배당한' 것이다. 이산이 하나의 흐름을 이루는 세계화의 시대이지만, 누가 강제한 것도 아닌데 자신의 땅에서 스스로를 이산의 올가미에 빠뜨리는 것이야말로 은밀하게 진행되는 식민화 과정의 한 극점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윤 원장은 인터뷰에서도 "한국의 영어 물신화가 점점 더 심해지고 있다"며 "마치 명품에 대한 숭배처럼, 그것을 '가지게' 됐을 때 얻는 심리적 만족감 같은 것에 불과하다"고 꼬집었다. 그는 "언어를 언어 그대로 봐줘야지 너무 과잉된 의미를 부착시키는 건 잘못"이라며 "소통하기 위한 외국어를 물신화하는 것에서 외국어 공부의 왜곡이 시작된다"고 지적했다.

"외국어는 소통하기 위한 것이다. 즉 우리 자신의 언어를 잘 가꿔야 소통을 통해 전달할 수 있는 '콘텐츠'가 생기는 것이다. 한국어를 진작하는 정책을 펴면서 영어를 잘하자고 하면 말이 된다. 그런데 영어를 잘하기 위해선 국어가 어떻게 되도 좋다, 심지어 영어를 국어로 하면 어떻겠냐는 주장까지 나온다. 우리 자신의 정체성, 자기 자신의 혼을 넘겨 버리는 것과 다름 없다. 자기 삶의 콘텐츠를 상실하는 것이다."

영어에 대한 숭배는 국어 교육을 소홀히 하는 현상뿐만 아니라 다른 외국어까지 외면하는 풍토를 낳았다. 대학가에서 프랑스어, 독어, 러시아어과 등 소위 제2외국어 학과가 전멸 위기에 처한 건 이미 오래전 일이다. 윤 원장은 "언어 정책에 투여할 수 있는 자원이 한정돼 있는 데 비해 영어에만 지나치게 투자를 해서 다른 언어를 죽이면 오히려 문제는 더 커진다"며 "각국 언어에 각각 관심을 기울이는 식으로 정책이 변형되야 한다"고 지적했다.

이는 번역계의 인력난과도 직결된다. 윤 원장은 "과거 프랑스어, 독일어 등이 대학에서도 제법 인기가 높았을 때 배출된 인원이 있어 지금까지는 (번역계가) 그럭저럭 버텼다"며 "다들 영어만 하면 된다는 분위기 속에서 자연히 그런 인력이 급격하게 줄어들고 있고, 앞으로는 제2외국어 전문인력도 점점 사라질 것"이라고 우려햇다.

"상거래에 필요한 회화? 중요하지만 국력 기울일 문제 아니다"

윤 원장은 영어 물신의 풍토 속에서 우리 사회가 간과하는 것은 '우리만의 콘텐츠'를 확보하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에 대한 문제라고 지적했다. 그는 "이것은 번역원의 이념이기도 하다"며 "판매 차원을 넘어 우리가 도달한 문화적 성취를 교환하고 의견을 나누는 근거를 마련하기 위해서는 민족문화를 키우고, 번역을 통해 이를 해외에 전달하고, 동시에 해외 문화를 번역해 흡수하는 일"이라고 말했다.

"우리에게 콘텐츠가 없다는 비판이 있다. 그러나 사실 우리 문화 속에 콘텐츠가 깔려 있는데 그걸 개발할 수 있는 창의력이 없다는 게 진짜 문제다. 아무리 영어를 잘한다고 해도 그 속에 담을 우리만의 콘텐츠가 없으면 경쟁력은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영어 교육도 마찬가지다. 영어 속에 있는 내용을 읽어내는 능력을 기르는 게 아니고 상거래 수준에서 필요한 영어 회화만 계속 하면 콘텐츠를 생산하기는 힘들다. 물론 의사소통도 중요하지만 국력을 기울여서 할 문제는 아니다. 오히려 부작용만 생긴다."

"번역·해외 인적자원 개발에 대한 투자가 진짜 '선진화'"

윤지관 원장은 "영어를 온 국민이 할 정도로 되지도 않겠지만, 투여한 것에 비해 나오지 않을 것"이라며 "오히려 굉장히 비실용적인 면이 많을 것이다"라고 분석했다. 그는 국제사회에서 경쟁력을 기르기 위해서 국가적 차원의 역량이 투여돼야 할 곳은 다른 데에 있다며 '발상의 전환'이 절실하다고 주장했다.

"해외 인적자원을 개발해서 한국어를 익히게 하고, 우리 문화의 전파사가 되도록 길러내는 일이 중요하다. 그런 것이 깊은 차원에서 실용적인 정책이 될 수 있는 것이다. 당장 물건을 파는 것 못쟎게, 우리 문화, 우리의 콘텐츠를 소개할 사람들이 해외에 자리잡고 있어야 하지 않나. 실용의 의미에 대해 더 깊은 연구와 판단이 필요하다. 10년 이상을 내다보고 실용성의 기반을 구축해야 하는 것이다."

이는 곧 한국문학번역원이 준비하고 있는 번역아카데미의 설립 목적이기도 하다. 오는 9월 2년 정규 과정(주간)으로 신설되는 번역아카데미는 매년 영어·독일어·프랑스어 등 주요 언어권별로 2∼3명씩 모두 30명 가량을 모집해 전문 번역가를 양성할 계획이다. 중국어 22명, 영어 17명, 프랑스어 7명, 독일어 4명 등 81명에 불과한 외국인 전문 번역가로는 한국 문학의 세계화가 더디기만 할 것이라는 판단에서다.

문제는 해외 인력뿐만 아니다. 사회적으로 외국 문학 작품, 또는 문화 상품을 들여오는 데 반해 우리 문화를 '수출'하는 것에 대한 관심은 현저히 낮았다. 윤 원장은 진정한 '선진 사회'가 되기 위해서는 번역에 대한 사회적 관심이 지금보다 훨씬 높아질 필요성이 있다고 강조했다.

"정책입안자들부터 일단 번역은 2차적인 일, 허드렛일로 생각하는 습관이 아직까지 있다. 또 학술적인 업적으로도 잘 인정되지 않는다. 오히려 논문 한편 쓰는 것보다 책 한 권을 번역하는 일에 더 많은 노고와 지식을 쏟아야 하는데 논문 한편 쓴 것 정도, 혹은 그 이하로 평가된다."

윤 원장은 "번역은 세계화에서 가장 핵심적인 도구"라며 "도구인 만큼 잘 해야 하는 것인데도 불구하고 사회적 투여는 너무나 적다"고 비판했다. 번역에 기울이는 투자는 외국 상황과 비교하면 상당한 차이가 있다. 윤 원장은 "1970~80년대 일본 이상의 국력을 갖췄는데도 불구하고 우리나라 번역계의 현실은 그 당시 일본보다도 뒤떨어진다"며 "일본이 노벨상을 거저 받은 게 아니다"라고 지적했다. 우리나라에 번역원이 생긴 것도 지난 2001년으로 약 7년이라는 짧은 역사를 갖고 있다.

윤 원장은 마지막으로 "번역이 제자리를 찾을 수 있는 기반을 세우는 데 협조를 해달라"며 "새 정부가 들어섰기 때문에 의욕적으로 그런 일들을 판단할 것이라 본다. 기대를 걸고 있다"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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