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정의 아들, 세상을 치유하러 광야로 나서다"
[발굴] 의사 출신 독립운동가 2인의 삶
2008.08.14 14:32:00
"백정의 아들, 세상을 치유하러 광야로 나서다"
그간 행적이 잘 알려지지 않았던 의사 독립운동가 2인이 8·15 광복 63주년을 맞아 독립 유공자로 선정돼 화제다. 국가보훈처는 최근 독립 유공자 361명을 새로 선정해 발표하면서 중국, 만주에서 독립운동을 한 공으로 박서양, 신창희에게 각각 '건국포장'과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박서양(1887~1940), 신창희(1877~1926)는 제중원(현 연세대학교 의과대학)의 1회 졸업생(총 7인)으로 한국 최초의 의사이다. 이들은 나라를 잃자 의사로서의 안락한 삶을 포기하고 각각 중국, 만주에서 독립운동에 헌신했으나 그 구체적인 행적이 밝혀지지 않았다. 최근 학계의 연구로 이들의 행적이 일부 알려지면서 이번에 독립 유공자로 선정된 것.
  
  백정의 아들, 세상을 구하는 의사가 되다
  
▲ 박서양(제중원 졸업 앨범) ⓒ동은의학박물관

  이번에 독립 유공자로 선정된 박서양은 출신 배경부터 남다르다. 박서양의 행적을 추적해온 연세대 박형우 교수(의사학과)는 "그의 아버지 박성춘은 광대, 무대, 기생 등과 함께 사회의 최하층으로 취급받았던 백정이었다"며 "그는 백정의 아들로 태어나 한국 최초의 의사 7인에 낀 입지전적인 인물"이라고 설명했다.
  
  박형우 교수는 "전통 사회에서 억압받던 신분 출신이면서 성공한 의사였던 박서양이 식민지 현실을 외면하지 않고 이를 극복하고자 독립운동에 나선 박서양의 모습은 수많은 조선의 엘리트들이 근대 문명 수용이라는 이름으로 일제의 침략을 용인해온 것과 대조적"이라고 설명했다.
  
  박서양은 1908년 제중원 졸업 후, 모교에서 화학, 해부학 등을 가르치며 외과 환자를 진료했다. 그러나 일제의 국권 침탈 후, 박서양은 상대적으로 안락한 생활을 버리고 1917년 간도로 이주를 한다. 박서양은 간도에 병원(구세병원), 학교(숭신학교)를 세우고 독립운동에 적극적으로 나선다.
  
  박서양은 국내의 3·1 운동에 호응해 만주 지역에서 조직된 독립운동 단체 대한국민회에 적극적으로 참여해, 대한국민회 산하 군사령부의 군의로 임명되었다. 또 1920년대에는 사회주의 성향의 독립운동 단체라고 짐작되는 한족노동간친회의 간부로 활동하기도 했다.
  
  이렇게 만주를 무대로 독립운동을 펼치던 박서양은 1936년 한국으로 귀국한다. 박형우 교수는 "1931년 만주사변 이후 일제가 그가 설립한 숭신학교를 '불온 사상을 고취한다'는 이유로 폐교하는 등 사실상 만주에서의 독립운동이 어려워지자 귀국한 것으로 보인다"며 "그는 귀국한 지 4년 만에 해방을 5년 앞두고 55세의 나이로 영면했다"고 설명했다.
  
▲ 에비슨의 수술을 보조하는 박서양. 가운데 탕건을 쓴 사람이 바로 학생 시절 박서양이다. ⓒ동은의학박물관

  백정의 아들이 어떻게 의사가 됐을까?

  
  1894년 갑오개혁 이후에도 여전히 관습적, 제도적 신분 차별이 강고했던 당시 상황에서 백정의 아들이 어떻게 최초의 의사가 될 수 있었을까? 박형우 교수는 "박서양의 아버지 박성춘과 제중원 의사 에비슨과의 드라마 같은 인연이 한몫했다"고 설명한다. 이 두 사람의 인연은 에비슨이 장티푸스에 걸려 사경을 헤매던 박성춘을 치료하면서 시작되었다.
  
  박형우 교수는 "당시 박성춘은 신분을 차별하지 않고 자신을 헌신적으로 치료했던 에비슨에게 큰 감명을 받아서 기독교로 개종하고 그를 스승처럼 따랐다"며 "급기야 허드렛일도 좋으니 자신의 아들인 박서양을 에비슨이 데려가 교육을 시켜주기를 바랐던 것"이라고 설명했다.
  
  박성춘의 부탁을 거절하지 못한 에비슨은 박서양을 제중원으로 데려다 놓고, 처음에는 병원 청소, 침대 정리를 시켰다. 박서양이 이런 힘든 일을 아무 불평 없이 거뜬히 처리하자 에비슨은 그가 의학 공부를 할 자질이 있다고 판단하고, 1900년 그를 제중원의 정식 학생으로 받아들였다. 이런 박서양의 제중원 시절은 한 방송사가 2009년 드라마로 만들 예정이다.

  잊힌 의사 독립운동가, 신창희
  
  이번에 박서양과 함께 독립 유공자로 선정된 신창희의 생애 역시 그 동안 잘 알려지지 않았다. 신창희는 박서양보다 좀 늦은 1904년 제중원에 정식 입학해 4년 만에 의사 면허를 받고 졸업했다. 그는 1년간 모교에서 세균학 등을 가르치다가, 의주에 병원(구세병원)을 개원했다.
  
  이렇게 비교적 편안하게 살던 그 역시 3·1 운동을 계기로 독립운동에 뛰어든다. 그는 1910년대 후반부터 상해 임시정부에서 활동하면서, 독립군의 자금을 모금하는 일을 주로 맡았다. 또 그는 여운형, 김규식 이 주도해 창당한 신한청년당에 입당해 활동하기도 했으나, 1920년대 들어 좌우 노선 차이로 논쟁이 생기자 김구 등과 함께 탈당했다.
  
  박형우 교수는 "김구의 <백범일지>를 보면 신창희를 언급하고 있다"며 "신창희는 김구와 결혼하는 최준례의 언니의 남편"이라고 설명했다. 즉, 신창희는 김구의 손위 동서라는 것. 이런 사실을 염두에 두면 신한청년당의 노선 갈등 때 신창희가 김구와 행동을 같이한 것은 이런 사적인 관계도 작용을 했을 가능성이 크다.
  
  임시정부 파로서 계속 독립운동을 하던 신창희는 1920년대 어느 시점에 동몽골 지역으로 이주한 뒤, 계속 교회에 기반을 둔 활동을 펼치다가 1926년 2월 28일 폐렴으로 사망했다. 당시 그의 죽음을 애도한 <기독신보> 1926년 3월 31일자는 이렇게 쓰고 있다. 이 기사는 3.1운동 당시 <독립선언서>에 서명한 대표 33인 중 한 사람인 최성모였다.
  
  "1926년 2월 28일 하오 5시에 남다른 포부를 품고 수천 리 이역에서 표랑의 생활을 계속하던 신(창희) 군은 마침내 그 쓸쓸한 몽고 천지에서 영영 가버리고 말았다. 그는 일찍이 경성 세브란스의학을 졸업하고 얼마동안 내지에서 의사 일을 보다가, 국권의 상실과 민족의 실패를 통분히 여겨 필경은 따뜻한 고국을 떠나 자자단신으로 중국 천지를 편답했다.
  
  그러는 동안에도 그는 항상 동포를 사랑하는 정신이 끊이지 않고 어디를 가든지 자기의 배운 기술로 동포를 힘써 도와주며, 만리이역에서 고통 받는 형제를 많이 구호하여 주었다. (…) 아! 그의 육체는 이미 지하의 흙과 합하였으니 다시 볼 길이 없거니와 그 영은 하늘나라에서 영영 살아있으리라."

  
  7인 중 4인이 독립운동…진정한 '대의(大醫)의 삶'
  
  박형우 교수는 "제중원을 졸업하고 딱 100년 전에 첫 의사 면허를 받은 이들 7명 중에서 이미 김필순, 주현측은 독립 유공자로 선정돼 있는 상태"라며 "이번에 박서양, 신창희도 독립 유공자로 선정되면서 초기 의사 4인이 독립운동에 나섰다는 게 공식 인정을 받게 되었다"고 설명했다.
  
  박형우 교수는 "한국 의학의 문을 처음 연 의사들은 자기 일신의 영위만 추구하는 게 아니라, 사회적 책임을 다하고자 노력했다"며 "말 그대로 '대의(大醫)'의 모습이 어때야 하는지를 보여주는 그들의 삶은 오늘날의 의사 등의 지식인의 초라한 모습과 크게 대조된다"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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