팜므파탈을 이기지 못한 뱀파이어, <박쥐>
[이택광의 영화읽기] 죽음에의 항복 vs. 모든 것을 알고도 끝까지 살아갈 용기
팜므파탈을 이기지 못한 뱀파이어, <박쥐>
* 스포일러 있습니다.

"뱀파이어에게 윤리가 있다면?" 박찬욱 감독의 <박쥐>는 이런 질문을 던지는 것처럼 보인다. 그렇게 생소한 문제는 아니다. <할로우맨>이나 <헐크>에서 비슷한 주제의식을 발견할 수 있으니 말이다. 이런 궁금증은 실제로 다소 우스꽝스러운 철학적 논의를 전제하는 것이기도 하다. 마치 중세에 "여자가 영혼을 가졌다면?"이라는 남성적 호기심을 연상시키기 때문이다. 계몽을 거친 현대인이 보기에 여자와 영혼의 상관관계를 진지하게 논의하는 중세인은 얼마나 웃긴 존재들인가?

▲ 박쥐

이 영화는 뱀파이어 장르영화에 익숙한 관객들이 보기에 웃음을 터뜨릴 수밖에 없는 장면들을 마구 보여준다. 서양 괴물 중에서도 '꽃남' 계열에 속할 법한 간지 작살 뱀파이어를 찌질한 꼰대의 전형으로 만들어버리는 것도 그렇고, 뱀파이어의 최고 무기인 송곳니는 어디 가고 쪽가위를 사용해서 피를 빠는 것도 그렇고, 여하튼 뱀파이어 영화 치고는 궁상스럽기 그지없다. 판타지인 뱀파이어 장르에 현실감을 입혀보겠다는 취지였을 수도 있고, 좀 거창하게 말해서, 시종일관 전작들을 관통해온 박찬욱 스타일의 '자연주의'가 여기에서도 위력을 발휘하는 것일 수도 있다.

어쨌든 전체적으로 이야기를 끌고 나가는 방식은 관객의 몰입을 방해한다. 마치 브레히트의 상황 극처럼, 현실의 부조리와 모순을 그대로 드러내기 위해 관객과 극중 인물 사이에서 벌어지는 동일화를 끊임없이 가로막는 것이 <박쥐>의 특징이다. 블랙유머는 영화의 전개를 지연시키고, 뱀파이어 영화에 흔한 비장미를 소멸시킨다. 배경음악으로 자주 등장하는 바흐의 칸타타 <나는 만족하나이다>(Ich habe genug)는 이 영화를 종교적 색채로 뒤덮지만, 실제로 종교는 껍데기만 남은 것으로 그려질 뿐이다.

이처럼 <박쥐>는 가톨릭적 세계관을 보여주는 것 같지만, 사실은 그 세계의 종언을 암시한다. 그래서 뱀파이어로 변한 상현은 가톨릭 신부였으면서도 가톨릭 신앙을 배반할 수밖에 없었던 루터 같은 존재이다. 슬라보예 지젝이 말하는 것처럼, 루터의 믿음은 신의 존재를 부정하는 순간에 발생한다. 무신론자의 신앙인 셈이다. 어떻게 보면 무신론자만이 진정한 신앙을 가질 수 있는 것이고, 이것이 바로 근대적 세계의 조건이다. 신앙은 기복의 문제라기보다 '진리'를 갈구하는 그 '갈증'이기 때문이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박쥐>의 영문제목이 '갈증'(thirst)이라는 게 상당히 징후처럼 느껴진다.

"뱀파이어에게 윤리가 있다면?"이라는 질문은 뱀파이어가 억압과 구속으로부터 해방된 존재라는 걸 암시한다. 이 질문은 <올드보이>에서 이우진이 오대수에게 던졌던 "너희들은 이걸 알고도 살아갈 수 있을까?"라는 물음을 변주한 것처럼 들린다. 태주가 상현의 팔에 안겨 건물 사이를 날아다닐 때, 그 표정은 환희로 가득하다. 상현처럼 태주도 뱀파이어가 됨으로써 욕망의 해방을 맞이하지만, 그 결과는 평소에 꿈꾸었던 것과 다르다. 상현에게 집으로부터 벗어나게 해달라고 호소했지만, 정작 억압이 사라지자 태주의 태도는 돌변한다. 어디론가 도망가자는 상현의 부탁에 태주는 "내 집 놔두고 어딜 가느냐"고 일침을 놓는다.

▲ 박쥐

<올드보이>에서 그랬던 것처럼, 이 지점에서 박찬욱 감독은 모든 걸 알아버리면 아무도 살아갈 수 없다고 되풀이해서 말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태주는 증상의 소멸을 원했던 것이 아니라, 그것의 지속을 원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은 어디까지나 표면적으로 그렇게 보일 뿐이다. 태주가 팜므 파탈이라는 사실을 확인하는 순간 영화는 새로운 국면을 맞는다. 정신분석학에서 여성은 남성의 증상이다. 남성에게 여성은 에덴동산에서 추방당한 최초의 전락을 암시한다. 이 말은 상징적 대타자에게 헌납한 지고지순한 쾌락의 대상이자 동시에 끊임없이 자신의 욕망을 환기시키는 매개로서 여성을 인식한다는 뜻이기도 하다. 이런 맥락에서 성적으로 개방적이고 육감적인 팜므 파탈은 남성에게 존재론적 소멸 자체, 다시 말해서 죽음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상현이 드러내는 '윤리'는 태주라는 팜므 파탈로부터 자신을 떼어놓고자 하는 자기 보전 욕망의 표현일지도 모른다. 결국 태주에 대한 욕망은 상현의 내면에 있는 죽음 충동이기도 한 것이다. 마지막 장면에서 태주가 상현의 구두를 꺼내 신는 것은 이 사실을 암시하는 것처럼 보인다. 사실 태주는 상현의 무의식이었던 것이다. 태주는 상현의 대상에 머물 수 없는 팔루스를 가진 '여성'이다. 태주는 상징적 대타자의 법을 체현하고 있기에 여성적 섹슈얼리티를 '의미화'할 줄 아는 존재이다. 말하자면 상현이 원하는 여성적 섹슈얼리티를 태주는 표현할 줄 안다.

태주는 상현 자신보다 더 상현이 원하는 것을 말해줄 수 있는 존재이다. 태주라는 기표는 상현의 대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독자적으로 존재한다. 여성이면서 남성을 필요로 하지 않는 자기 충족적 존재, 다시 말해서 태주는 '여성'이라기보다 '남성이 아닌 존재'일 따름이다. 따라서 남성의 정체성을 확인시켜줄 '여성'이 아닌 태주를 품는 순간, 상현의 남성성은 위기에 봉착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상현이 고민하는 자살과 순교의 차이는 상징적 대타자와 주체의 관계에서 발생한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박쥐>는 이 문제에 대한 해명에 그렇게 열성을 부리지 않는다. 상현은 욕망의 해방 이후에도 계속 해방 이전의 고민에 집착한다. 해방이라고 믿는 것이 사실은 또 다른 억압이라는 것을 말해주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이 영화는 확실히 정신분석학적이다. 어쨌든, 박찬욱 감독은 최종적으로 '아버지의 법'을 지키는 것을 윤리라고 말하려는 것 같다. 여전히 그는 '돌아온 탕아'의 신화에 탐닉하고 싶은 모양이다. 그래서 이 영화는 사드처럼 자신의 억압을 극장화해서 보여준다는 측면에서 도착적이다.

그러나 아쉽게도 아버지의 이름을 다시 호명하고 그 법의 그늘 속으로 들어가는 것에서 윤리적 근거를 찾는다는 건 지극히 근대적인 해결방안이다. 그만큼 철 지난 한계를 되풀이하는 것이기도 하다. 한국 사회는 여전히 법의 계몽이 필요한 곳이지만, 그렇다고 예술까지 나서서 계몽주의자 노릇을 할 필요는 없지 않을까? 게다가 <박쥐>가 채택한 아방가르드적 미학을 존중한다면 더더욱 그렇다. 상현이 태주와 함께 '자살'하는 건 그 개인에게 '순교'의 행위일 수 있지만, 태주의 문제를 소멸시키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품고 갈 수 있는 결단에서 진정한 윤리가 발생한다. 죽음에 항복해버리는 것이 아니라, 태주처럼 끝까지 살기 위해 발버둥치는 것이 이 영화가 전해야하는 윤리적 메시지인 것이다. 그 모든 것을 알고도 끝까지 살아갈 수 있는 용기, 거기에서 근대성의 한계를 넘어갈 수 있는 삶의 가능성도 열리는 게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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