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 10%만 손해 보면, 실업자도 월급 받는다"
[토론회] 국민기초생활보장법 제정 10년 토론회
2009.09.04 13:56:00
"국민 10%만 손해 보면, 실업자도 월급 받는다"
"제도가 축소된 자리를 시혜로 메우려한다."

3일 오후 서울 통인동 참여연대 느티나무홀에 모인 사회복지 전문가들은 현 정부의 복지정책 기조를 이렇게 요약했다. 이날 기자회견, 토론회는 오는 7일 국민기초생활보장법(기초생활보장법) 제정 10년에 맞춰 열렸다.

"'시혜'에서 '권리'로"…기초생활보장법 제정 10년

외환 위기 후유증이 채 가시지 않았던 1999년, 김대중 정부가 마련한 국민기초생활보장법은 한국 사회복지 역사에서 결정적인 분기점으로 꼽힌다. '불쌍한 사람들을 돕는 일' 쯤으로만 여겨지던 복지가 '누구나 누려야 하는 권리'로 인정받는 계기가 됐다.

그리고 다시 10년이 지났다. 경제 위기 역시 다시 찾아왔고, 가난한 사람들의 처지는 더 열악해졌다. 그렇다면 1999년 제정된 기초생활보장법과 비슷한 조치가 다시 만들어지고 있는가. 그렇지 않다.

오히려 이명박 정부는 내년도 기초생활보장 예산요구액을 삭감했다. 최저생계비 역시 물가인상률에도 못 미치는 역대 최저인 2.75%로 결정됐다. 10년 전과 비슷한 상황이 벌어졌는데, 제도가 오히려 축소됐다는 진단은 그래서 나왔다. 대신 이명박 정부는 '친서민'이라는 구호를 내세울 뿐이다. 사회 안전망이 뚫린 자리를 메우는 일은 '불쌍한 사람들'을 걱정하는 '여유 있는 사람들'의 몫으로 밀려났다.

양극화 10년, 기초생활보장법 한계는 여전

이날 모인 전문가들이 한결 같이 안타까워한 것도 이 대목이다. 이태수 꽃동네현도사회복지대학교 교수, 이찬진 변호사, 허선 순천향대 사회복지학과 교수 등은 이날 회견에서 "모든 국민의 생존권 보장이 국가의 의무이며 나이나 근로능력 유무와 무관하게 소득이 최저생계비 이하인 모든 국민에게 수급권을 인정한 국민기초생활보장법의 제정은 복지가 '시혜'가 아닌 국민의 '권리'임을 천명한 획기적 사건"이라고 밝혔다.

하지만 튼튼한 제도적 뒷받침 없이 권리를 천명하는 것만으로 되는 일은 없다. 기초생활보장법은 사회복지의 불모지대였던 한국에 복지가 권리라는 개념을 심는 일에 불과했다. 김대중 정부는 강력한 신자유주의 구조 조정을 추진했고, 뒤따라 집권한 세력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 결과, 양극화가 심각해지면서 복지 수요는 늘었지만, 기초생활보장법은 제정 단계에서 그다지 진화하지 않았다. 이날 전문가들 역시 "양극화와 빈곤의 확산 등 지난 10년 간 전개된 사회경제 구조의 변화는 현 제도의 유효성과 적실성에 대해 여러 가지 의문을 가져왔다"고 말했다.

비수급 빈곤층 410만 명…사회복지 사각지대

올해 초 정부 자료에 따르면, 빈곤층임에도 기초생활보장제도 수급자가 되지 못하는 사각지대 규모는 410만 명으로 전인구의 약 8.4%이다. 총 빈곤인구는 585만 명으로 전인구의 11.9%이며 이 가운데 기초생활보장 및 긴급복지 수혜자는 175만 명으로 빈곤인구 전체의 29.9%에 불과하다. 나머지 70.1%는 공공부조의 사각지대에 놓여 있는 것이다. 특히 소득과 재산이 모두 현행 기초생활보장 수급기준에 해당하는 데도 부양의무자기준으로 인해 수급자가 되지 못하는 사각지대는 100만 명으로 전체 빈곤인구의 17%나 된다. 한마디로 현행 기초생활보장법은 구멍투성이라는 이야기다.

이날 참여연대 건물 지하에 모인 전문가들은 기초보장법 제정 과정에서 산파 역할을 한 이들이다. 그래서 기초생활보장법에 대한 애정이 깊다. 이는 현행 기초생활보장법의 한계를 지적하는 이들의 목소리가 더 강한 힘을 갖는 이유이기도 하다. 이들은 사회복지 영역에서 '또 다른 패러다임의 변화'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이들이 생각하는 변화의 큰 방향은 간명하다. '실제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에게 적절한 시기에 적절한 정도의 도움이 주어지는 제도'가 그 방향이다.

임기 초 경제위기…기초생활보장법 도입한 DJ vs 복지 예산 삭감한 MB

이 방향으로 나가는 첫걸음으로 이들은 △수급권자 선정 조건에서 부양의무자 규정을 제외하는 부양의무자 범위의 개선 △전년도 도시근로자 가구 중위소득의 40% 이상으로 최저생계비 합리적 설정 △최저주거기준 등의 현실성을 고려한 재산의 소득환산제 개선 △차상위 계층 확대와 인적관리 의무화 △수급내용에 대한 정확한 고지의무를 통한 급여 관련 비위 예방 △일반근로의 소득공제 포함 및 추정소득 산출시 최저임금 적용 등의 제도개선 등을 꼽았다.

이는 사회 안전망의 보호 바깥에 있는 비수급 빈곤층을 기초생활보장법의 테두리 안으로 포괄하기 위한 최소 조건이다. 이날 모인 전문가들은 정부와 정치권이 이런 조건을 신속하게 수용할 것을 강력히 촉구했다. 이날 회견을 마치며, 이들은 "지난 10년 전 김대중 전 대통령이 IMF 경제위기 상황에서 복지정책을 확대발전 시켰던 것을 반면교사 삼기를 바란다"라고 강조했다. 똑같이 임기 초에 경제위기를 맞았지만, 김 전 대통령과 반대로 복지 예산을 삭감한 이명박 대통령을 향한 강력한 질타다.

"양극화에 덮친 경제 위기, 사회 안전망 강화는 필수"

뒤따라 열린 토론회는 현행 기초생활보장법의 한계를 넘어서는 '또 다른 패러다임의 변화'를 위한 모색의 자리였다. 이영환 성공회대 사회복지학과 교수가 "국민기초생활보장법 제정 10년의 의미"라는 주제로 기조발제를 맡았고, 허선 순천향대 사회복지학과 교수와 이태수 꽃동네현도사회복지학과 교수가 "국민기초생활보장법 10년의 한계와 과제", "국민기본선 어떻게 확보할 것인가"라는 주제로 각각 발제를 했다. 그리고 곽노완 서울시립대 도시인문학 연구소 교수, 곽정숙 민주노동당 의원, 남기철 동덕여대 사회복지학과 교수, 류정순 한국빈곤문제연구소 소장, 박능후 경기대 사회복지학과 교수, 이찬진 변호사 등이 토론자로 참가했다.

이날 사회를 맡은 문진영 서강대 사회복지학과 교수는 "각을 세워 달라"고 토론자들에게 주문했지만, 토론 분위기는 내내 화기애애했다. 물론 대립 지점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사회 양극화가 심각하게 진행된 상태로 경제위기를 맞은 지금, 사회 안전망을 대폭 강화해야 한다"라는 인식에 모두 공감했지만, 큰 방향에 대해서는 조금씩 이견이 있었다.

▲ '국민기초생활보장법 제정 10년의 한계와 과제' 토론회 ⓒ참여연대

복지 비용 부담자와 수혜자 일치시키는 보편주의 복지

논쟁은 주로 곽노완 교수가 제안한 기본소득제를 중심으로 벌어졌다. 이는 정부가 모든 국민에게 일정한 급여를 주는 제도다. 핵심은 '모든 국민'이다. 가난한 사람만, 장애가 있는 사람만 급여를 받는 게 아니다. 이는 '보편주의냐, 선별주의냐'라는 사회복지 분야의 전통적인 쟁점과 맞물려 있다. 경제력, 또는 노동능력이 일정 기준 이하인 이들만 지원하는 정책이 '선별주의'라면, 모든 국민을 대상으로 삼는 게 '보편주의'다. 기본소득제는 전형적인 '보편주의' 정책인 셈이다.

복지 수혜자를 특정 집단으로 한정하는 순간, 복지 축소는 필연적이라는 게 '보편주의' 지지자들의 생각이다. 복지비용을 내는 이들과 수혜자가 분리된 구조 때문이다. 예컨대 부유층인 당신이 낸 세금으로 정부가 빈곤층을 돕는다고 하자. 당신은 아무런 반대급부 없는 지출을 하고 있다는 생각을 하기 쉽다. 이런 생각이 널리 퍼지면, 복지 수준이 나아지기 어렵다.

하지만 '보편주의' 지지자들의 생각대로, 비용을 부담하는 이와 혜택을 보는 이가 일치한다면 복지 수준은 파격적으로 뛸 수 있다. 유럽의 공공의료가 이런 방식이다. 가난한 사람도, 부유한 사람도 같은 병원에 가야한다. 부유한 사람만 따로 더 높은 의료 수준을 누리는 게 불가능하므로, 현재 의료 수준에 불만이 있는 부유층은 공공 의료 전체의 개선을 요구하게 된다. 따라서 공공의료 확충을 위한 세금 인상에 부유층 역시 동의할 수 있다.

고교 평준화로 공립학교에 입학하게 된 재벌 2세가 학교 건물 전체를 뜯어고치게끔 한 것과 비슷한 이치다. 모든 학생이 같은 건물을 써야 하므로, 건물에 불만이 있는 재벌 2세는 학교 전체에 돈을 써야 했다. 그 결과, 모든 학생들이 좋은 건물을 이용하게 됐다. 한국의 건강보험 체제, 국민연금 등도 '보편주의'에 가까운 면이 있다.

복지 사각지대, 낙인 효과…기초생활보장법의 그늘

곽노완 교수는 이날 특정 집단만을 대상으로 삼는 복지가 갖는 한계에 대해 자세히 설명했다. 수급자 자격을 엄격하게 제한하는 기초생활보장법에서는 복지 사각지대가 생기는 게 필연적이라는 지적이다. 수급자에 대한 낙인 효과 역시 심각한 문제다. 수급자가 자책감을 갖기 쉽고, 사회적으로 무시당할 가능성이 있다는 게다. 또, 자격이 없는 이가 수급하는 부정수급 등이 자주 일어나면 제도 자체에 대한 불신이 깊어질 수 있다는 부작용도 있다.

수급자를 심사하는 관리 인력을 대대적으로 확충해야 한다는 점도 부담이다. 단순 행정업무에 지나치게 높은 인건비가 쓰이게 된다는 것. 곽 교수는 "복지 제도가 발달한 서유럽의 경우 현금급여액의 10~20% 수준에 달하는 관리비용(인건비, 사무실 유지비 등)이 사회적으로 낭비되고 있다"고 밝혔다.

일할 능력이 있지만, 일하기 싫어하는 이들에게까지 급여를 주는 기본소득제가 노동 의욕을 떨어뜨린다는 비판에 대해서도 곽 교수는 할 말이 많았다. 일할 맛을 잃어버리게 한 것은 복지가 아니라 일하지 않고 많은 돈을 번 사례라는 게다. 그는 "GDP의 사실상 60%에 달하는 불로소득·투기소득이 노동의욕을 감퇴시킨다"라고 말했다. 그리고 이런 투기소득을 세금으로 환수해 기본소득으로 돌려주자는 게 그의 생각이다.

"기본소득제, 주거·교육·의료 공공성 없으면 '생색내기'에 불과"

이런 주장에 대해 다른 참가자들 역시 취지는 동의했다. 하지만 미묘한 엇갈림이 있었다. '현물이냐, 현금이냐'라는 사회복지 영역의 쟁점과 맞물린 논란이다. 이찬진 변호사는 "삶의 조건 영역에서 공공성이 극도로 축소되고, '투기적 시장화'로 인해 왜곡된 현실에서 '기본소득' 형태로의 제도 전환을 한다고 한들 빈곤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지 의문"이라고 말했다.

사교육비와 대학 등록금, 주거비용, 의료비 등이 기본소득 이상으로 올라버리면, 아무 소용이 없다는 지적이다. 요컨대 현금 지원만으로는 부족하며 현물 지원이 필수적이라는 것. 교육과 의료, 주택을 직접 지원하는 제도가 뒷받침 돼야만, 기본소득제가 힘을 가질 수 있다는 지적이다. 기본소득제를 도입한 정부가 통화량을 늘려서 화폐 가치를 떨어뜨린다면, 기본소득제는 '생색내기'에 그칠 수 있다는 지적도 있다.

교육, 의료, 주거 및 기타 사회서비스 부문에서 '현물 지원'을 대폭 강화해야 한다는 지적에는 모든 참가자가 동의했다.

"추상적 논의에 시급한 현안이 묻힐 위험" vs "'발상의 전환' 필요"

이태수 교수는 약간 다른 측면에서 기본소득제 주장의 위험성을 지적했다. 한국처럼 사회 안전망이 거의 없는 사회에서는 너무 앞서가는 주장일 수 있다는 게다. 당장 시급한 복지 현안이 추상적인 쟁점에 가려질 수 있다는 것. 이 교수는 "복지제도가 이미 다양하게 갖춰져 있는데, 이게 너무 복잡해서 간결하게 정리할 필요가 있을 때 기본소득제 주장이 설득력을 가질 수 있다"고 말했다. 지금은 텅 빈 백지 위에 다양한 복지제도를 채워 넣어야 할 단계라는 생각이다.

다양한 비판에 대해 곽노완 교수는 '발상의 전환'을 주문했다. 그는 "얼핏 보면, 복지예산을 GDP 7% 수준에서 7.5% 수준으로 높이자는 게, GDP 50%를 복지에 쓰자는 주장보다 더 현실적인 것 같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고 말했다. 복지예산을 점진적으로 늘려가는 방식은 정권의 성격, 해당 부처 관료의 이해관계 등에 따라 끊임없는 역풍을 맞게 된다는 것이다. 개혁적인 정부가 복지 예산을 약간 늘려도, 이어 집권한 보수 정부가 다시 되돌리고 하는 과정을 거치다보면 복지 예산은 영원히 제자리걸음이라는 설명이다.

하지만 파격적인 변화를 이루고 나면, 이를 되돌리기는 쉽지 않다. 오히려 이 경우는 제도 자체를 근본적으로 다시 설계하는 것이므로 그동안 관료주의로 낭비돼온 부분을 제거하기도 쉽다. 곽 교수는 "기본소득제 도입으로 손해를 입는 비율은 국민의 10%정도에 불과하다. 나머지에게는 이익이다"라며 "기본소득제 도입으로 이익을 얻는 90%가 강력히 요구한다면 '복지 부문에서의 돌이킬 수 없는 파격적인 변화'는 충분히 가능하다"라고 주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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