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은 허상이다"
[철학자의 서재] <독일 프랑스 공동 역사 교과서>
2009.11.14 16:26:00
"민족은 허상이다"
역사 교과서는 왜 중요한가

몇 해 전 체세포 배아복제 환상을 주었던 황우석 사태는 한국인에게 희망과 좌절의 극단을 오가게끔 한 희대의 오도된 사건이었다. 황우석 사태 이후 연구 윤리의 경각심과 그에 따른 재정비 사업이 세계적으로 확산되었을 정도로 이 사태는 전 세계 사람들까지 놀라게 한 사건이었다.

체세포 배아복제 논란이 한창이던 당시 비판자 그룹에게 던졌던 황 박사 주변 사람들의 공격적 논리는 간단했다. '국제적인 특허를 통해 막대한 이익이 창출되는 애국적인 행위인데, 왜 발목잡느냐'라는 논리로 일관했다. 이런 류의 사이비 애국심 논리는 민족이라는 집단의식을 방패막이로 하고 있다. '한민족 최초의 위대한 발견'이라는 식으로 매체가 한 개인을 영웅으로 받쳐준 역할이 한 술 더 떴다. 개인을 집단으로 위장하거나 개인을 민족으로 대체함으로써 개인의 욕망구조를 전체에 투영시키는 방식이다. 특히 개인의 물질적 혹은 정치적 권력이 확장될수록 그들의 집단 대체 의지는 더 커진다.

그런데 이 상황에서 아주 특이한 점이 따라온다. 황우석 사태를 아직도 옹호하는 사람들은 민족의 고통을 주었던 제국주의 흔적을 청산하고자 하는 사회적 흐름에 대하여 강한 반발을 하는 집단과 겹치는 경우가 많다는 점이다. 이는 한국사회의 역설적인 현주소로 여겨진다. 사소한 예를 들어 보자. 인터넷 댓글 경향을 보건데 <친일인명사전> 발간에 강한 반발을 하는 사람들이 황우석 사태를 옹호하는 사람들과 기묘하게 겹치고 있음을 느낄 수 있다.

왜 이러한 현상이 나타나는 것인가? 나는 우리 근현대사 속에서 민족이라는 개념이 권력 집단의 지배 논리로 악용되어진 오류의 문화에 기인한다고 판단한다. 그래서 민족의식도 따지고 보면 권력 집단을 옹호하는 논리에 자신도 모르게 편승한 집단 심리의 한 현상으로 본다. 이런 점에서 우리 한국인은 우리와 우리 후손을 위하여 우리의 근현대 역사를 바르게 공부하는 통로를 확보해야 한다.

그 통로 가운데 중요한 것이 바로 역사 교과서이다. 독일은 전쟁의 책임을 지면서 실질적인 전범처리 등의 과거사 반성과 성찰을 했지만 일본은 그와 유사한 실질적인 노력이 없었다. 이러한 불행한 역사의 사실도 역사 교과서가 제대로 되어 있지 않다면 지금의 청소년과 후대들은 당연히 모를 수밖에 없는 것이 우리의 현실이다. 일본의 태도는 일본 역사의 부분으로 그치는 일이 아니라 현재 한반도 역사의 왜곡과 저해를 가져오고 있다. 한반도에서 우리 스스로 일제의 흔적을 청산하기보다는 오히려 그런 흔적의 여파를 향유하고 있는 집단이 많았기 때문에 현재와 같은 일본의 태도가 가능하다고 본다.

이 점에 대하여 독일과 프랑스 사이의 역사적 관계를 비교하는 일은 중요하다. 프랑스와 독일은 19세기 초부터 제2차 세계 대전이 생긴 20세기 중반에 이르는 150년여 동안 무려 4번의 전쟁을 치룬 소위 역사적 앙숙이었다. 이러한 과거사를 갖는 유럽의 양국을 보면서 한국과 일본의 관계를 조명하는 일은 아주 의미있다.

▲ <독일 프랑스 공동 역사 교과서>(페터 가이스 외 지음, 김승렬 외 옮김, 휴머니스트 펴냄). ⓒ프레시안
두 국가 간의 제대로 된 화해를 하기 위하여 과거 역사에 대한 사실적 인식이 공유되어야 한다. 그러한 인식의 공유를 실천하기 위하여 독일과 프랑스는 양국 간 우호를 다짐하는 엘리제 조약을 1963년에 맺었고, 이 조약 40주 년 기념 사업의 일환으로 <독일 프랑스 공동 역사 교과서>(페터 가이스 외 지음, 김승렬 외 옮김, 휴머니스트 펴냄)를 같이 만들었다.

이 교과서는 단순히 유럽 어느 개별 국가의 역사 교과서라는 의미로 국한되지 않는다. 동북아의 평화로운 공존을 위하여 우리에게도 필요한 그런 의미를 갖는다. 마침 동북아역사재단에서는 이 책을 한국어로 번역하여 2008년도에 출간했다.

이 책의 번역은 단순한 번역이라는 작업을 넘어서 있다. 그리고 단순한 학교 교과서의 의미도 넘어서 있다. 이 책을 보면서 왜 우리는 일제의 과거사를 청산하지 못했는가라는 반성을 일게 했다. 이 책을 보면서 왜 우리는 겉으로는 일제 수탈의 역사를 성토하면서 속으로는 일제의 식민지 과거를 찬양하는 사람들이 그렇게 많은지를 반성하게 된다.

그리고 나는 이 책을 보면서 독일과 프랑스의 현대사 지식을 습득하려는 것보다 우리 한반도 문제를 해결하는데 많은 조언과 시사를 받았다. 우리가 말하는 민족이 과연 무엇인지에 대한 반성을 하게 되었다는 점이다. 그중에서 민족에 대하여 평소 내가 생각하던 것을 아래처럼 정리하는 계기를 주었다. 이 책에 실린 내용은 아니지만 말이다.

민족은 어디에 있는가

민족과 애국심을 떠들고 다니는 사람들이 실상은 일제 식민지의 역사를 감추기에만 급급하다는 점이 오늘의 현실이다. 그래서 이제 민족이라는 개념을 다시 살펴보아야 한다. 우리에게 민족이 과연 어디에 있었는지 냉정하게 되물어야 한다. 그 질문을 네 가지 범주로 나누어 보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① 혈통 민족주의 : 그중 첫째는 혈통적 민족주의가 과연 존재하는가라는 질문이다. 한반도의 순수하고 고유한 혈통적 민족 구성이 허상이라는 것은 이미 다양한 방법을 통해 밝혀진 사실이다. 중국의 한족이나 일본의 왜 민족, 그리고 우리 한반도 민족 모두 고유한 혈통이 아니라는 것은 유전전 계통 검사 결과를 통해 혹은 고고사적 증거 등을 통해 이미 논란의 여지없이 확인된 사실이다.

② 문화 민족주의 : 둘째 혈통 민족을 대체하는 개념으로 흔히들 문화적 민족주의를 제시하곤 하는데, 이는 민족의 개념을 권력으로 도용하려는 숨겨진 의도가 있어서 조심해야 한다. 예를 들어 미국은 당연히 다민족 국가이지만 동시에 가장 민족과 애국심을 강조하는 나라이다. 학생들 교실에 국기가 걸려있는 나라는 아마도 미국과 북한밖에 없지 않나라는 생각이 든다.

미국과 같은 소위 문화적 민족주의를 '열린 민족주의'라고 부르기도 한다. 열린 민족주의는 혈통과 무관한 개념이지만, 왜 그런 민족의 범주를 굳이 도입해야 하는가라는 비판적 질문을 먼저 던져야 한다. 쉽게 말해서 열린 민족주의 역시 민족 개념을 통해 혈통이라는 우생학적 프리미엄을 등에 업고 가려는 무의식적 의도를 담고 있기 때문이다.

③ 이념 민족주의 : 셋째 소위 '이념 민족주의'의 문제가 우리에게 심각히 당면해 있다. 이 책 <독일 프랑스 공동 역사 교과서>에서도 강조하고 있듯이 일본과의 과거사에 매달려 현재를 구속하는 것은 적실하지 않다는 점에 대해 나도 동의한다. 최근 발간된 <친일인명사전>을 신경질적으로 부정하는 불특정 집단에서 나타나는 대표적인 현상은 민족의 차이를 과거 일제에 두기보다는 북한에 둔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 왜 '친북인명사전'은 만들지 않는가라는 엉뚱한 비난들을 <친일인명사전> 발간사업에 참여한 사람들에게 직접적으로 퍼부어 댄다.

이는 새로운 방식의 민족주의이다. 혈통도 아니고 문화도 아니고 소위 이념적 대립의 대상으로서 가상의 민족적 경계선을 만들기에 혈안이 되어 있다. 나는 이런 가상 민족주의를 '이념 민족주의'라고 부른 것이다. 이념 민족주의는 혈통적 우생학 이상으로 상대이념 진영에 대한 배타적 반감을 노골적으로 표명한다. 화해보다는 차별을 강조하며 혈통적 우생학보다 더 강한 우생학적 차별주의를 거침없이 행사한다. 그 차별의 수준은 거의 생물학적 결정론에 이르는 정도라고 할 수 있다.

④ 방어 민족주의 : 마지막으로 방어적 민족주의 개념이 있다. 새로운 체제의 경제 제국주의라고 부를 정도로 약육강식의 논리가 지배하는 국제사회 속에서 약소국가가 살아남는 방식은 국가 구성원의 일체적 단결력에 있음을 강조하는 것이 방어 민족주의의 특징이다. 민족공동체 내부의 정신적 이념을 강화함으로써 외부 강대국의 침략에 방어하는 방법론으로 민족 개념을 정착시켜야 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민족이라는 말의 실상은 그 실체를 갖고 있지 않다. 민족의 정체성도 정해진 것이 없으며, 민족이라는 개념을 도입하는 발상도 타당성을 상실하고 있기 때문이다. 민족의 실체를 주장하는 것은 사회 전제에서 볼 때 실용적인 가치조차도 없을 정도다. 쉽게 말해서 민족의 실체를 포기하는 데서부터 경제적 위기를 타파할 수 있으며, 남북 대립을 화해로 가져올 수 있으며, 진정한 과학기술 입국이 될 수도 있다.

민족이라는 실체 없는 사이비 실체를 잡고 늘어지는 이유는 현재 속에서 자기 믿음이 약하기 때문이다. 이 책에서 나왔듯이 1969년 사민당 출신으로 독일 연방총리가 된 빌리 브란트(1913~1992)는 나치의 희생국이었던 폴란드 바르샤바 게토 추모비 앞에서 무릎을 꿇었다. 그때가 1970년도였다. 역사적인 사건이었다. 한 국가의 정치적 대표자가 과거를 용서받고자 한 그런 모습은 민족의 우상들을 폭로한 역사적인 전환이었다는 점이다.

그가 꿇은 무릎은 나치의 우생학, 민족 고유성, 이주 노동자, 여성 및 장애인 차별성, 권력을 옹호하는 가짜 애국심 등등을 과감히 내동댕이치고 새로운 삶의 체제를 정착시키겠다는 의지였다. 이러한 브란트 수상의 모습은 과거 독일 패전 이후 전범 재판을 이웃국가들의 요청대로 수용한 결과와 깊게 연관한다.

▲ 1970년 나치의 희생국이었던 폴란드 바르샤바 게토 추모비 앞에서 무릎을 꿇은 빌리 브란트(1913~1992). ⓒ프레시안

탈민족적 과거사 청산

그러나 한국의 상황은 너무 미진하다. 법적으로 일제의 과거사 청산을 위한 재판이 국제적인 차원에서 이루어진 적도 없으며 따라서 일본 역시 브란트 수상 같은 진정한 반성의 행동을 보이질 않는 것이다.

나는 이 책을 읽으면서 일제 청산을 요구하는 주장은 민족주의적인 주장이 아니라 탈민족주의라는 틀에서 이루어져야 한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민족의 허구에서 벗어나야 오히려 과거사 정리가 가능하며 나아가 일본과의 진정한 화해도 가능하다는 점이다. 앞서 이념 민족주의에서 말했듯이 이러한 탈민족적 태도는 남북한 화해와 통일에 결정적인 키워드로 될 것이다.

탈민족적 반성을 보여준 독일의 태도를 프랑스는 전폭적으로 수용하면서 프랑스와 독일의 모든 분야의 관계가 급속히 친밀해졌다. 이러한 양국 간 관계의 전환은 주변국가와의 지정학적 화해가 우선이라는 판단에 기인한다. 독일과 프랑스 사이의 지정학적 관계가 한국과 일본의 상황에 그대로 적용될 수는 없을 것이다.

이 책의 몇몇 단점의 하나는 독일이 반성한 것처럼 일본도 반성을 했을 것이라는 역사적 오류를 보이고 있다는 점이다. 한국의 역사학자들이 지적을 해주면 좋을 것 같다. 문제는 그러한 오류에도 불구하고 이 책이 주는 의미는 청소년의 올바른 역사인식을 위해 양국이 함께 노력했다는 사실에 있다. 그러한 공동의 노력은 글로벌 시대에서 세계를 향해 나가야 할 청소년들에게 민족의 허구를 깨고 크고 넓은 시야를 확보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말을 전하는 듯하다. 또한 이 책은 화해를 하기 위해서 반드시 역사의 오류를 수정하는 한편의 사과와 반성이 우선이라는 점을 지적한다.

혈통 민족이 허구라는 점을 인정할 때 비로소 서양에 대한 막연한 동경 혹은 이주 외국인에 대한 인권 차별 등이 없어질 수 있다. 문화의 속성을 잘 이해해야만 문화 민족주의가 자칫 정치 및 경제 권력자의 독재를 보증해주는 아류로 전락하는 것을 방지할 수 있다. 북한 사람들을 전혀 다른 우생학적 별종이라고 보는 이념 민족주의의 굴레에서 벗어나야 비로소 남북한 문제 해결의 조짐이 보일 것 같다.

이미 한국은 세계 경제 10위라는 경제 규모를 갖고 있다. 이런 규모에도 불구하고 한국은 국제사회에서 제대로 대접받고 있지 못한 것이 현실이다. 이 이유는 한국은 방어적 민족주의라는 이미지에서 여전히 벗어나 있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런 이미지에서 벗어나야 자유무역협정(FTA)과 같은 양자 간 국제 협상에서도 비굴하지 않게 밀리지 않을 수 있다.

이 책의 중요한 특징 중에서 가장 중요한 점을 나에게 꼽으라 한다면, 이 책은 그들의 국내 역사 교과서이면서 동시에 세계 역사 교과서라는 점이다. 유럽의 강세는 국내사와 국제사가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는 점을 그들 스스로 인식하는 데 있다. 한반도에 사는 우리도 마찬가지로 역사를 보는 시선을 넓힌다면 더욱 좋겠다. 우리만의 역사가 아닌 주변국과의 상관적 역사를 기꺼이 맞이할 수 있는 자신감을 청소년에게 넘겨줘야 하지 않겠나.

'철학자의 서재'는 <프레시안>과 한국철학사상연구회가 공동으로 진행하는 서평 연재입니다. 매주 주말 한국철학사상연구회 철학자들이 심사숙고해 선정한 책을, 철학자가 직접 심혈을 기울여 쓴 서평으로 소개합니다. <편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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