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복지국가 골든타임
[장석준 칼럼] 복지 확대의 때를 놓치지 말자
지금, 복지국가 골든타임
모든 일에는 때가 있다고 한다. 때를 놓치면 안 된다고 한다. 어떤 경우는 때를 놓치고 나면 그 결과가 돌이킬 수 없는 업보가 된다. 뒤늦게 벌충하려고 해봐야 도저히 뒤집기 어려운 업보로 굳어진다. 개인도 그렇지만, 집단 역시 그러하다. 요즘 흔히 쓰는 말로 하면, '골든타임'이 있다는 것이다. 사회과학풍으로 다시 말하면, 한 사회가 중대한 역사적 국면에 이룬 성공/실패는 이후 가장 바꾸기 힘든 단단한 구조로 남는다는 이야기다.

세계사에서는 아마도 1860년대를 예로 들 수 있겠다. 이 무렵 지구 자본주의 무대에 나설 준비에 성공한 나라는 훗날 대체로 성공했다. 반면 바로 이 시기에 전통에 안주했거나 변화를 시도했더라도 실패한 나라는 이후 역사가 험난했다. 1860년대에 각각 통일된 국민국가로서 자기 정비에 성공한 미국과 독일이 전자의 대표 사례다. 같은 시기에 메이지 유신을 단행한 일본 또한 이에 포함된다. 이에 반해 러시아와 중국이 시도한 내부 개혁은 성공적이지 못했다. 다음 세기에 두 나라에서 일어난 혁명은 이미 이때 잉태되고 있었다.

하지만 가장 참담하게 때를 놓친 나라는 따로 있었다. 조선이었다. 1860년대에 조선은 두 이웃나라(일본, 중국)와 달리 지구 자본주의에 응전할 준비를 전혀 하지 않았다. 일단 이 시기를 허송세월하고 나자 그 뒤에는 좀처럼 이 실패를 만회할 수 없었다. 식민지, 분단, 전쟁의 긴 백년이 뒤따랐다. 그리고 아직까지도 우리는 150여 년 전의 실기 탓에 짊어진 업보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이런 이야기를 꺼내는 것은 지금이 1860년대와 같은 중대한 변화의 길목이 아닐까 싶어서다. 2008년 금융위기 이후 지구 자본주의는 기존 신자유주의 노선을 그대로 반복해서는 출구가 없음을 절감하고 있다. 엘리트 편에서든 그 반대쪽에서든 대안을 찾으려고 안간힘을 쓴다. 아직 해답은 불분명하지만, 온 세상이 답안 찾기 강박에 휩쓸리고 있는 것만은 틀림없다.

바로 이런 때에 대한민국은 150여 년 전 조선이 그랬던 것처럼 때를 놓치고 있었다. 다시 참혹한 실기의 운명을 반복하려는 듯 보였다. 금융위기 '이후'라는 전 지구적 시간과 겹쳤던 이명박, 박근혜 정권기에 그랬다. 참으로 다행스럽게도 나는 지금 과거 시제를 쓰고 있지만 말이다.

평화의 골든타임은 놓치지 않은 것 같지만 

2010년대에 대한민국은 하나도 아니고 최소한 세 가지 측면에서 때를 놓치고 있었다. 첫째는 평화의 골든타임이다. 2000년 남북정상회담으로 열린 평화의 물길은 미국 조지 W. 부시 정부의 등장으로 벽에 부딪혔다. 8년 뒤에 등장한 버락 오바마 정부마저 북미 관계 해결에 미적대고 남한에서는 한나라당-새누리당 정권이 이어지면서 교착 상태는 장기화됐다. 이를 나름대로 돌파하려는 북한의 핵무장 역시 상황을 파국으로 모는 듯 보였다. 남북의 평화 이니셔티브가 무력화될수록 한반도는 19세기 말처럼 열강의 각축장이 돼 갔다.

둘째는 복지국가 전환의 골든타임이다. 대한민국은 적어도 1990년대부터는 복지국가로 나아갔어야 했다. 그러나 복지가 확대되기는커녕 외환위기가 오고 신자유주의 시대가 열렸다. 외환위기의 응급 처방으로 부랴부랴 몇 가지 복지제도가 도입됐지만, '생산적 복지'라는 이름으로 처음부터 시장주의의 족쇄가 채워졌다. 복지 결핍과 경쟁 격화라는 이중고는 연대와 공감의 기반을 허물어뜨리며 사회 자체를 와해시키기 시작했다. 이에 맞서 이명박 정권 시기에 아래로부터 보편 복지 요구가 대두했다. 그러나 이후에도 국가기구는 이 요구를 억누르거나 기만하기만 했다.

셋째는 산업구조 전환의 골든타임이다. 한국 자본주의의 고도성장을 낳은 주력 산업들은 중국의 부상과 함께 위기에 봉착했다. 이 와중에 미국과 서유럽에서는 금융위기 이후의 궁지를 대대적인 혁신으로 돌파하자는 움직임이 일었다. 그 핵심은 정보화 혁명의 성과를 제조업에 접목하자는 것이다. 한국의 국가, 자본도 뒤늦게 이 대열에 합류하자고 외친다. 그러나 정작 가장 중요한 기본 토대가 없다. 새 산업구조를 지탱할 에너지 체제가 갖춰지지 않았고, 미래 산업에 부응할 교육 기반도 없다. 이런 토대 없이 헛된 구호만 따라 외치는 가운데, 기존 주력 산업만 사양길을 걷고 있다.

2016~2017년 촛불은 어찌 보면 이렇게 다층적, 복합적 측면에서 다시 때를 놓치고 있던 상황을 반전시키려는 개입이었다. 무의식적이지만 필사적인 대중의 개입이었다. 물론 '복지 확대'나 '한반도 평화'가 주된 요구도 아니었고, '제4차 산업혁명'론은 오히려 촛불 이후에 더 유행했다. 그러나 촛불 시민들은 막연하게나마 대한민국의 시간이 세계의 시간에 뒤처지고 있음을 느끼고 있었다. 그리고 본능적으로 공격의 화살을 이런 교착 상태의 핵심 고리 중 하나인 새누리당 정권에 집중했다.

그러고 나서 2년 가까이 흘렀다. 지금의 상황은 어떠한가. 위에서 나는 '때를 놓치고 <있었다>'고 표현했다. 다행히도 한 가지 측면에서는 골든타임을 놓치지 않은 것처럼 보여서다. 바로 한반도 평화 문제다. 지난주에도 지구 전체를 들었다 놨다 하는 소동이 있었지만, 어쨌든 비핵화와 종전, 평화 프로세스는 돌이킬 수 없는 궤도에 오른 듯하다. 대단한 역사의 반전이다. 문재인 정부도 칭찬받을 만하고, 이 정부를 만들어낸 촛불 시민들도 자축할 만하다.

그러나 축하는 여기까지다. 한반도 평화 말고 다른 측면들은 어떠한가. 복지국가와 산업구조 전환에서도 우리는 골든타임을 놓치지 않고 있는가? 답은 부정적이다. 이 글은 산업구조 전환 문제를 깊이 다루지는 못하지만, 이 영역에서는 여전히 허망한 구호만 들린다. 에너지 체제 전환은 핵발전 기득권 세력에 막혀 시작도 못하고 있다. 점점 더 전환의 적기로부터 멀어지는 것 아닌가 싶다.

복지국가 전환의 경우도 그렇다. 정부는 '소득 주도 성장'을 구호처럼 내걸며 이 영역에서 돌파구를 열 것만 같았다. 그러나 막상 실질적으로 추진된 것은 최저임금 인상뿐이다. 이마저도 이제는 상여금, 복리후생비의 최저임금 산입으로 '줬다 뺏는' 최저임금 인상이 되고 있다. 정부 경제 노선이라는 '소득 주도 성장'론에 따른다면 정부가 재계에 임금 인상을 압박해도 시원치 않을 판인데, 오히려 재계의 로비에 최저임금 인상 공약 이행마저 주저하고 있는 것이다.

임금으로 소득 증대가 힘들다면, 공격적인 재정 확대 정책을 통해서라도 소득 증대 효과를 내야 한다. 그러나 정부는 이 방면에서도 소극적이다. 복지를 조금씩 늘리기는 한다. 청년구직촉진수당도 신설했고, 건강보험 비급여 항목 중 일부를 급여화하기도 했다. 하지만 복지국가 전환이 돌이킬 수 없는 현실임을 체감하게 해줄 정도의 조치는 아직 없다. 대개 이전 정부(새누리당 정부조차)도 해오던 극히 점진적인 복지 확대 과정을 잇는 내용뿐이고, 이 궤도를 보다 급진적인 방향으로 꺾는다는 신호가 나오지 않고 있다.

산업구조 문제에서 정부에 아무 생각이 없는 것처럼 보인다면, 복지국가 문제에서는 사태가 그다지 심각하지 않다고 판단하는 듯하다. 한반도 전쟁 위기만큼은 분초를 다투는 문제가 아니라고 보나 보다. 한데 그렇지 않다. 복지국가 전환 측면에서도 한국 사회는 어쩌면 골든타임의 마지막 몇 분 안에 있는지 모른다. 이 영역에서도 지금 이 사회가 경험하는 것은 또 다른 '전쟁' 위기다. 연대의 제도적 기반과 의식이 거의 해체된 탓에 파편화될 대로 된 사회 집단들 사이에 내전이 벌어지고 있다.

노키즈존 논란, 청년임대주택 건설을 둘러싼 세대 갈등, 여성혐오와 그 반작용. 최근 한국 사회가 겪고 있는 당혹스러운 분란들이다. 여성과 남성이, 세대와 세대가, 문화와 문화가 부딪힌다. 상대편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사회 자체가 존립할 수 없음을 잘 알면서도 서로 공격하고 미워한다. 마치 한 인간의 몸에서 심장이 폐를 공격하고 위장이 소장과 충돌하는 격이다. 함께 죽자는 길이다.

물론 각각의 문제에는 고유한 모순과 연원이 있다. 따라서 이 모든 분란이 다 한 가지 문제 탓이라고 이야기한다면, 그만한 오류가 또 없을 것이다. 하지만 한국 사회의 어떤 특징이 각각의 모순을 단순한 긴장과 갈등을 넘어 내전으로 비화시키고 있다는 것 또한 분명한 사실이다. 그 특징이란 바로 소득-자산의 극심한 불평등이고 이를 완화할 사회적 노력과 제도의 부족이다. 어떠한 실질적 안전망도 없이 오로지 경쟁에만 내맡겨진 사회집단들이 불만과 적개심을 다른 사회집단을 향해 표출하고 있는 것이다.

이 추세를 뒤집는 데에도 때가 있다. 때를 놓치면 영구 내전을 피할 수 없다. 내전 양상이 나타나기 시작한 초기에 사회가 개입해 연대와 공감의 복원에 나서야 한다. 그러지 않으면 사회집단들 사이의 반목이 너무나 심해져 어떤 해결책을 시도할 집단의지 자체가 더 이상 형성되지 못하는 상황이 올 수 있다. 지금 한국 사회는 이런 상황을 향해 시시각각 나아가는 중이다.

게다가 이 문제에서 때를 놓치게 되면 이는 한반도 평화 측면에서 기회를 놓치지 않았던 행운을 오히려 불운으로 반전시킬 수도 있다. 서로 접촉이 없던 두 사회의 전면적 접촉은 어떤 점에서든 충격을 주지 않을 수 없다. 흔히 북한 사회의 충격만을 이야기하지만, 우리 쪽 충격 또한 만만치 않을 것이다. 벌써부터 자본 진영은 한국어를 쓰는 풍부한 저임금 노동력 풀의 개방 가능성에 군침을 다시고 있다. 어쩌면 남쪽에 이미 존재하는 저임금 노동자들에게 남북의 평화는 남한 내부의 또 다른 전쟁의 격화를 뜻하게 될 수도 있다.

일이 이렇게 튀지 않으려면 한반도 평화만큼이나 복지국가 전환 측면에서도 골든타임을 놓치지 말아야 한다. 대한민국이 복지국가의 기본 꼴을 이미 갖춰가는 상황에서 한반도 경제권이 형성되어야 한다. 복지 확대는 이제 한반도 평화보다 더 속도를 내 추진돼야만 한다. 태평하게 최저임금 인상 속도를 늦추자는 이야기나 할 때가 아니다.

실업급여-부조 확대에서 출발하자

당장에 획기적 확대가 필요한 복지제도는 한, 두 개가 아니다. 그 중에서도 나는 실업부조제도 도입을 강조하고 싶다. 현재 고용보험에서 지급되는 실업급여가 있지만, 지급 기간이 1년이 안 된다. 최장 8개월이던 것이 새 정부 들어 그나마 한 달 늘어 9개월이 될 예정이다. 반면 독일은 1년이고 스웨덴은 14개월, 프랑스, 스페인, 노르웨이는 2년이며, 덴마크는 심지어 4년이다. 일단 실업급여 지급 기간이 최소한 1년으로는 확장돼야 한다.

하지만 실업급여는 어디까지나 고용보험 가입자만 받을 수 있다. 한국 노동자들 중 상당수가, 특히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여전히 사회보험 사각지대에 있다. 더구나 취업 경력 없이 이제 막 노동시장에 진입한 청년 구직자는 고용보험에 가입돼 있지 않다. 따라서 청년 실업자는 똑같이 실업의 고통을 겪으면서도 아무런 복지 혜택을 누리지 못한다. 청년구직촉진수당이 도입됐다지만, 아직은 월 30만 원씩 3개월 지급에 불과하다.

실업부조제도를 본격 실시해야 한다. 실업급여 지급 기간을 넘기고도 취업하지 못했거나 고용보험에 가입하지 못한 이들에게 국고로 실업수당을 지급해야 한다. 실업부조제도의 금액이나 지급 기간은 현행 실업급여와 비슷한 수준으로 현실화해야 한다. 지금도 조짐이 뚜렷이 나타나고 있지만, 앞으로 산업구조 전환 과정에서 구조적 실업이 지속될 위험이 있다. 고용보험제도 개선과 실업부조제도 도입은 이런 구조적 실업의 고통을 완화할 선제 조치가 될 것이다.

게다가 실업부조제도는 의미 있는 정책 실험의 장이 될 수 있다. 핀란드에서 기본소득(실은 이름만 비슷한 다른 프로그램이었지만) 정책 실험을 실시했다는 소식이 화제가 된 바 있다. 우리도 이런 접근법을 취할 수 있다. 특히 청년층에게 실질적인 수준에서 상당 기간 현금 급여(실업수당)를 지급하고 그 효과를 확인해볼 수 있다. 이는 기본소득제도 도입을 둘러싼 논의의 중요한 자료가 될 것이다.

아무튼 이제 복지 확대의 속도가 재조정돼야 한다. 문재인 정부에서도 변함이 없는 점증 기조나 방식이 아니라 급증이 필요하다. 대한민국 역사에 없었던 공격적인 재정 확대가 필요하다.

현 정부와 관료들의 상상력에 맡겨서는 이뤄질 수 없는 일이다. 진보정당과 사회운동이 단호히 요구하고 나서야 한다. 이번에도 다시 때를 놓쳐서는 안 된다는 다급한 마음으로 나서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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