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기를 팝니다' 미국의 '죽음 행상꾼'들
[전쟁국가 미국 3강·⑧] 현존위험위원회(CPD)와 반공군사주의
'위기를 팝니다' 미국의 '죽음 행상꾼'들
1950년, 야당인 공화당이 국내 빨갱이 사냥에 골몰해 있는 동안 집권 민주당은 대외 패권의 확보 방안을 고민하고 있었다. 1950년 4월 작성된 NSC-68은 핵전력 및 재래식 군사력의 대폭 강화를 해결책으로 제시했다.

두 달 후 발발한 한국전쟁을 계기로 미국은 대대적 재무장에 돌입할 수 있었고 1952년 말이 되면 영구 전쟁국가로 탈바꿈한다. 국방 예산은 1950년 이전에 비해 3-4배 늘었고 핵무기와 재래식 군사력이 대폭 증강됐다. 특히 2백만 명 가까운 상비군 체제가 정착되면서 수 십 만 명의 미군이 서유럽과 동아시아 등 세계 도처에 상시 주둔하게 됐다.

상비군 체제와 미군의 해외 상시 주둔은 미국 역사상 처음 있는 일이다. 건국 이래 미국은 상비군 보유를 극력 꺼렸다. 군대는 민주주의에 대한 위협이라고 봤기 때문이다. 미군의 해외 주둔도 전례가 없는 일이었다. 상비군 제도와 미군의 해외 주둔은 건국 이래 미국의 역사적 전통에서 벗어나는, 매우 엄청난 변화다.

한국전쟁은 이러한 변화를 가능케 한 중요한 계기였다. 하지만 한국전쟁의 충격만으로 전쟁국가를 완성할 수는 없었다. 미국의 대대적 재무장이 반드시 필요한 이유를 국민들에게 설득시켜야 했다.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NSC-68은 기획 단계부터, 민주당 내부에서조차 이견과 반대가 만만치 않았기 때문이다. 고립주의 성향의 공화당은 결사 반대였다.

이런 상황에서 하버드대 총장을 비롯한 일단의 지식인들이 대국민 설득 작업에 나섰다. 이들은 소련이 군사력으로 세계를 정복하려 하며 이는 미국의 안보에 대한 '현존하는 위험(Present Danger)'임을 각인시켰다. 즉 소련의 군사력이 미국인의 생명, 자유, 재산권을 침해할 수 있음을, 따라서 이를 막기 위해 미국의 대대적 재무장이 반드시 필요하다는 점을 설득해냈다. 그 결과 1952년 말에는 '반공군사주의(Containment Militarism)'가 확고한 국민적 합의로 정착된다.

훗날 역사가들은 1950년 당시 소련이 군사력으로 세계를 정복할 의사도 능력도 없었다고 말한다. 그러나 당시 미국인의 의식 속에서 소련은 세계를 군사 정복할 의도와 능력을 가진 위험한 집단이었다. 이 때문에 미국과 서유럽 등 자유세계의 대대적 재무장이 필요하다는 합의가 형성될 수 있었다. 월터 리프먼이 말한 '동의의 조작(Manufacturing Consent)'이 가능해진 것이다. 이러한 이데올로기 작업을 해낸 조직이 바로 '현존위험위원회(Committee on the Present Danger: CPD)'다.

대학 총장과 고위 언론인, 전직 관료와 기업가 등으로 구성된 민간 로비 조직인 현존위험위원회는 1950년 12월부터 소련의 군사적 위협을 내세워 미국 및 서유럽의 재무장을 적극 옹호했다. 이를 통해 야당인 공화당의 반대를 무력화하고 국민들의 동의를 얻어냄으로써 미국의 군사주의를 영속화 하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

특히 이후에도 미국에서는 중요한 고비마다 새로운 '현존위험위원회'가 나타나 평화국가로의 전환을 가로막아 왔다. 1976년 11월에는 두 번째 CPD가 결성돼 닉슨과 키신저가 시작한 데탕트를 좌초시켰다. 2004년에는 과격 이슬람세력에 대항하는 세 번째 CPD가, 급기야 올해 3월에는 중국을 주적으로 삼는 네 번째 CPD가 출범해 활동 중이다.

CPD는 2차 대전 이후 미 대외정책의 패턴을 극명하게 보여주는 사례라고 할 수 있다. 가상의 적, 또는 과장된 외부의 위협을 이유로 내부를 통합하고 통제하는 것이다. 그 요체는 군사주의다. 이 때문에 제리 샌더스라는 연구자는 CPD를 '위기를 파는 행상꾼들(Peddlers of Crisis)'이라고 부른다. 위기를 내세워 자신들의 목표, 즉 군사주의를 관철시킨다는 뜻이다. 그가 1983년에 펴낸 같은 이름의 책을 바탕으로 첫 번째 CPD 활동을 살펴본다.

한국전쟁 위기 속 출범한 1차 현존위험위원회

첫 번째 CPD는 1950년 12월 12일 공식 출범했다. 중공군의 한국전 개입으로 미국이 큰 위기에 몰렸을 때다. 이에 앞서 11월 30일 트루먼 대통령은 원자탄 사용을 시사했다가 영국의 반대로 물러선 바 있다.

이날 제임스 코난트 하버드대 총장과 트레이시 부어리스 전 육군부 차관, 과학계의 거물 바네바 부시 등 CPD 창립 멤버 세 명은 워싱턴 윌라드호텔에서 창립 성명을 통해 "소련의 침략 음모"야말로 "현존하는 위험"이라고 선언했다. 이들은 소련의 위협을 저지하기 위해서는 유럽의 재무장이 시급하며, 미국은 보다 많은 병력과 물자와 원조를 유럽에 보내야 한다고 강조했다. 나아가 미국의 18세 이상 모든 남성에게 병역 의무를 지워야 한다고 촉구했다.

한편 이날 뉴욕타임스는 애치슨 국무장관이 나토 장관회의 참석을 위해 곧 브뤼셀을 방문할 것이라면서 "미국 정부는" 북한의 남침이 핵심지역인 유럽에 대한 미국의 관심을 돌리려는 소련의 술책으로 보고 있다고 전했다.

다음 날인 12월 13일 CPD는 국방부에서 오프더레코드 브리핑을 듣고 국방부 관리들과 안보문제에 대해 비공식적인 논의를 했다. 이날 트루먼 대통령은 의회 지도자들을 불러 소련과의 전쟁 가능성이 높아졌다면서 국방비 증액의 필요성을 역설했다.

12월 14일 트루먼 대통령은 51회계연도의 네 번째 추가 국방예산(NSC-68/4)을 요청하는 한편 국가비상사태를 선언했다. 이날 애치슨은 국가안보회의(NSC)에서 "군부가 원하는 규모의 병력을 모두 확보한다 해도 충분하지 않다. 유럽 우방국들이 원하는 원조를 모두 해준다 해도 충분하지 않다. 병사들을 무장시킬 무기들을 모두 생산한다 해도 충분하지 않다. 총동원 체제를 갖춘다 해도 충분하지 않다"며 상황의 엄중함을 강조했다.

12월 15일 트루먼은 전국 라디오 방송을 통해 "우리의 가정, 우리의 국가, 우리가 가치 있다고 믿는 모든 것들이 중대한 위험에 빠져 있습니다. 이 위험은 소련 지배자들에 의해 제기된 것입니다"라고 밝혔다. 전쟁은 한반도에서 일어났지만 실제로는 "유럽과 세계 다른 지역들도 역시 중대한 위험에 직면"했다는 것이다.

나아가 이러한 "현존하는 위험"에 대응하기 위해서는 미군 병력을 350만으로 늘려야(CPD가 요구한 수치) 하고, 무기 생산을 대대적으로 증강하며, 서유럽 동맹국들과 군대를 통합하고 강화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12월 20일 트루먼은 당시 콜럼비아대 총장이던 아이젠하워를 유럽연합군 최고사령관에 임명했다. 이에 앞서 유럽을 방문한 애치슨이 서유럽 국가들과 함께 유럽 통합 방위력 구성에 합의한 데 따른 조치다.

이렇게 해서 미국의 국방예산(1951 회계연도)은 당초 135억 달러에서 482억 달러로 3.6배 늘어난다. 그런데 늘어난 국방예산의 대부분은 한국전쟁보다는 유럽 재무장에 사용됐다. 일례로 1950년 후반 서유럽에 대한 군사물자 원조는 전년 대비 2배로 늘었다.

중공군의 참전으로 한국전쟁이 위기에 빠졌지만 트루먼 행정부의 정책 우선 순위는 미국 및 유럽의 재무장과 유럽에 대한 대대적 군사지원, 그리고 군사동맹을 추진하는 것이었다. 트루먼 행정부에게 한국전쟁은 대대적 재무장의 빌미였을 뿐이다.

CPD의 활동 목표 역시 한국전쟁이 아니었다. 미국의 대대적 재무장, 그리고 서유럽에 대한 대규모 미군 병력 파견과 군사 원조가 목표였다. CPD에는 하버드대를 비롯해 프린스턴, 브라운, 버클리, 미시간대 등 10여 개 명문 대학의 총장들이 중심적 역할을 했다. 제임스 코난트 하버드대 총장이 CPD 의장이었고, 미국대학협회 회장이자 브라운대 총장인 헨리 리스턴은 집행위원이었다.

미국 최고 교육기관의 수장들이 당면한 한국전쟁을 제쳐놓고 미국과 서유럽 군사동맹 결성을 적극 설득하러 나선 이유는 무엇일까? 대학 총장들이 대국민 설득에 최적임이라는 판단 때문이었다.

트루먼 행정부는 한국전쟁 자체의 수행보다는 미국 및 서유럽의 대대적 재무장과 나토 결성을 더 중요시했다. 후자야말로 미국 세계 전략의 핵심이었다. 재무장에는 엄청난 자금과 인력이 투입돼야 한다. 하지만 당시 트루먼 행정부는 미 국민에게 더 많은 피와 땀을 제공하라고 설득하기가 어려운 형편이었다. 공화당의 매카시즘 공세로 국무부는 빨갱이들의 소굴로 낙인 찍혔고 트루먼 행정부는 공산당에 유약하다는 비난을 받고 있었다.

결국 NSC-68의 실천을 위해서는 저명한 민간 인사들에 의한 대국민 설득 작업이 필요했고 하버드의 코난트 등 명문 대학의 총장들이 앞장을 선 CPD가 그 역할을 해낸 것이다.

1951년 4월 미군 10만 파병이 의회의 승인을 받고, 10월에는 기존 경제 원조(마셜 플랜)를 군사 원조로 대체하는 상호안보법이 의회를 통과하면서 이러한 목표는 이뤄진다. 이로써 1949년 4월 출범했으나 서류상 조직에 불과했던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는 명실상부한 군사동맹으로, 그리고 미국의 반공군사주의는 완성된다. CPD 창립에 이르는 과정을 되돌아본다.

유럽의 중도주의를 봉쇄하라

이미 1949년 초부터 트루먼 행정부에게는 '현존하는 위험'이 있었다. 그것은 소련의 군사력이 아니었다. 서유럽의 이탈 가능성이었다. 1948년부터 시행된 마셜 플랜에도 불구하고 경제 재건이 늦어지면서 서유럽이 중도주의로 기울어질 가능성이 높아진 것이다. 서유럽의 이탈을 막기 위한 대책이 대대적 재무장이었다. 그리고 이를 정당화하기 위해 소련의 군사력을 '현존하는 위험'으로 대중에게 제시한 것이다.

2차 대전 후 미국의 가장 중요한 대외정책 문서로 불리는 NSC-68은 딘 애치슨과 폴 니츠의 작품이다. 애치슨은 1949년 1월 21일 국무장관으로 승진했고, 1950년 1월 조지 케난 대신 니츠를 국무부 정책기획단장에 기용했다. 니츠는 NSC-68을 실제 작성했다. 둘 다 월가의 국제변호사 출신으로 대기업의 이익이 곧 미국의 국익이라고 생각했다. 또한 미 대외정책에서 군사력의 역할을 중시했다.

그런데 1949년 초까지 서유럽의 경제 부흥이 지지부진하면서 서유럽의 향배가 이들의 근심거리였다. 중도주의로 기울지도 모른다는 우려였다. 서유럽으로서는 막강한 군사력을 가진 이웃, 소련과 대결하기보다는 화해하고 교류하는 것이 자연스러운 선택이었다. 게다가 공화당과 국민 대다수는 퍼주기라며 마셜 플랜을 반대했다.

서유럽은 전후 세계 자본주의 복원의 핵심 파트너였다. 서유럽이 이탈한다면 미국의 세계 전략은 차질을 빚을 수밖에 없다. 따라서 서유럽을 미국의 세력권에 묶어놓기 위한 특단의 대책이 필요했다. 그 핵심이 군사주의였다.

즉 대대적 재무장을 통해 첫째, 소련의 견제를 무력화 시킨다. 다시 말해 미국의 행동의 자유를 확보한다. 애치슨은 이를 '힘의 우위(Position of Strength)'에 바탕을 둔 협상이라고 표현했는데, 실상은 미국식 일방주의다.

둘째, 군사 원조의 형태로 서유럽에 대한 경제 지원을 강화한다. 경제 지원에 대한 미국 여론의 반대를 극복하기 위한 꼼수다. 이를 위해서는 소련의 군사적 위협을 크게 부풀릴 필요가 있다.

셋째, 군사동맹을 통해 서유럽을 미국 세력권 안에 묶어 놓는다. 즉 미국의 봉쇄정책은 소련이라는 외부의 군사적 위협을 막는 것과 함께 서유럽이라는 내부의 이탈을 막는다는 이중의 의미를 갖는다. 이 때문에 봉쇄정책은 이중 봉쇄(Dual Containment)라고도 불린다.

미국 및 서유럽의 재무장과 군사동맹 결성이라는 책략이 성공하기 위해서는 소련의 군사적 위협이 미국의 안보에 현존하는 위험이라는 점을 미 국민에게 인식시키는 것이 가장 중요한 선결 과제였다. 그래야 대대적 재무장에 필요한 자금과 인력을 끌어낼 수 있기 때문이다.

이것이 NSC-68의 핵심 논지다. 애치슨은 이미 1949년 1월부터 이러한 복안을 갖고 있었다. 그는 국무장관 취임 직후 국방 예산에 대해 "턱없이 부족하다...미국 경제가 감당할 수 있는 규모에 비해 너무나 적다"고 불평했다. 대공황 이후 2차 대전까지 20년간 계속된 재정적자를 메우기 위해 연간 국방예산 상한을 135억 달러로 대폭 낮춘 데 대한 불만이었다.

애치슨의 불평에 동조한 이가 폴 니츠다. 그는 1949년 봄 '미국의 군사적 위협이 현실성을 가지려면 국방예산이 300억-400억 달러는 돼야 한다'고 말했다. 실제로 군사력을 증강해야만 소련을 겁 줄 수 있고 서유럽을 미국 편에 묶어둘 수 있다는 얘기다. 소련의 첫 핵실험 6개월 전, NSC-68 작성 1년 전이다. 흔히 미국의 재무장(NSC-68)은 소련 핵실험 및 중국 공산화에 대한 대응이라고 말하지만 실상은 그 이전, 1949년 초부터 검토가 시작된 것이다.

니츠는 1949년 여름부터 국방예산에 대한 제약이 미국의 대외정책에 심각한 장애물이 되고 있다고 주장했다. 또한 미국과 소련 경제의 비교 연구를 통해 미국은 대규모 군비 증강을 감당할 충분한 경제력이 있으며, 오히려 군비 투자가 미국 경제에 도움이 된다는 결론을 도출했다. 이른바 군사케인스주의다.

1949년 9월 소련의 핵실험 사실이 밝혀지고 10월 중국 공산화가 확정되면서 미국에서는 공산주의에 대한 위기의식이 갑자기 증폭된다. 트루먼 대통령은 1950년 1월 30일 수소탄 개발을 결정하는 한편 국무부와 국방부 합동으로 대외 정세의 급변에 대한 대응방안을 연구하도록 지시했다. 그 결과 나온 것이 NSC-68이다.

조지 케난 vs. 딘 애치슨

이로써 미국의 대외정책은 조지 케난의 봉쇄(Containment)에서 애치슨-니츠의 봉쇄군사주의(Containment Militarism)로 바뀐다. 두 정책의 결정적 차이는 군사력의 역할에 있다. 케난은 군사력을 대외정책의 보조적 요소로 본 반면 애치슨-니츠는 군사력, 특히 핵무기를 결정적 요소로 파악했다.

봉쇄정책의 창시자 케난은 자신의 회고록에서 "내가 말하고자 한 봉쇄는 소련의 정치적 위협에 대한 정치적 봉쇄였지, 군사적 위협에 대한 군사적 봉쇄가 아니었다'고 말한다. 그는 또 '서방에 대한 소련의 위협은 정치, 경제, 외교적 차원'이며 '설사 군사적 위협이 있다 해도 그것은 특정한 분쟁지역의 제한적인 군사적 도전으로, 미국의 기존 군사력으로 대처 가능한 것'이라고 지적했다.

특히 케난은 핵무기 사용에 반대했다. 1950년 2월 17일 자 메모에서 그는 "미국의 전쟁 계획에서 현재의 핵무기 의존을 즉각 탈피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소련이 재래식 군사력으로 서유럽을 침공하면 자동적으로 핵무기로 대응한다는 핵 인계철선(nuclear tripwire) 전략을 포기하라는 것이다. 그는 재래식 군사 공격에 대한 미국의 핵 반격은 외교적 참사로 이어질 것으로 봤다. 핵무기의 파괴력으로 적을 굴복시키기보다는 국제여론의 반발을 살 것이라는 얘기다. 나아가 미국이 핵무기를 독점한 상황에서도 중국의 공산화나 소련의 동유럽 장악을 막지 못했다는 점에서 핵무기의 정치, 외교적 효용성은 거의 없다고 판단했다.

반면 애치슨은 소련의 핵실험에 대해 수소탄 개발로 맞서는 등 핵무기의 가치를 높게 봤다. 니츠 역시 NSC-68을 통해 "즉각 사용할 수 있는 총 군사력의 우위가 확보되지 않는다면 '봉쇄'정책은-이는 계산된 점진적 강제라고 할 수 있다-허풍에 불과할 뿐"이라면서 특히 전략 핵무기에서의 우위가 결정적으로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하지만 애치슨-니츠의 반공군사주의 노선은 현실을 정확하게 파악한 것도, 트루먼 행정부 내의 다수 의견도 아니었다. 국무부 최고의 소련 전문가인 케난과 찰스 볼렌은 NSC-68의 대대적 재무장 계획에 대해 그야말로 경악했다고 한다. 우선 소련에게는 군사력으로 세계를 정복할 능력 자체가 없다는 것을 너무나 잘 알았기 때문이다. 그도 그럴 것이 소련은 1958년 이전까지 미국을 타격할 수 있는 장거리 폭격기조차 갖지 못했다.

애치슨은 1950년 1월 케난을 정책기획단장에서 해임한 데 이어 남미로 장기 출장을 보냈고 볼렌은 프랑스의 미국 대사관으로 유배를 보냈다. NSC-68을 작성하는 동안(2월 중순-3월 말) 이들의 간섭을 차단하기 위한 조치였다.

그러나 트루먼 대통령도 국방비를 일거에 3-4배 증액하는 데 대해서는 난색을 표했다. 특히 재정 보수주의자인 루이스 존슨 국방장관은 결사 반대였다. 즉 트루먼 행정부 내에서도 대규모 재무장에 대한 반대가 만만치 않았던 것이다. 하물며 야당인 공화당, 그리고 일반 국민을 설득하는 것은 결코 쉬운 과제가 아니었다.

'매우 거대한 선전 장치'

NSC-68 추진 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과제는 대국민 설득이었다. 즉 국민들에게 소련의 군사적 위협을 각인시켜 대규모 재무장에 대한 동의를 이끌어내는 것이 결정적으로 중요했다.

예컨대 1950년 2월 17일 국무-국방부 정책검토위원회에서 백악관 경제자문회의 의장 레온 케이설링과 전 전쟁부 차관보이자 금융가인 로버트 로벳은 '국방 예산 500억 달러 돌파는 경제적 문제가 아니라 정치적 문제'라는 데 의견을 같이 했다.

미국 경제력은 국방예산 500억 달러를 감당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경제에 도움이 될 수 있지만 문제는 국방비를 단숨에 3-4배 인상하는 데 대한 대중들의 저항을 어떻게 무마하느냐는 것이었다. 특히 당시 매카시즘 열풍으로 양당이 극단적으로 대립하고 있는 상황에서 트루먼 행정부가 대국민 설득에 나서기는 어려운 일이었다.

3월 10일 같은 회의에서 록펠러재단의 체스터 바나드 의장은 "지금 우리가 필요로 하는 국가적 노력에 대한 국민적 지지를 얻기 위해서는 정부 혼자만의 힘으로는 어렵다"면서 "신망 있는 민간 인사들의 도움을 받아야" 한다고 제안했다. 그는 그러한 인물로 아이젠하워(당시 콜럼비아대 총장), 제임스 코난트(하버드대 총장), 로버트 스프롤(버클리대 총장) 등을 꼽았다.

이어 3월 16일 회의에서 로버트 로벳은 "우리는 우리의 이야기를 국내외에 널리 전파하기 위해 매우 거대한 선전 장치를 갖춰야만 한다"고 말했다. 그러나 "신망 있는 민간 인사들의 활동이 대통령 임명에 의해 추진되는 모양새는 좋지 않다"고 경고했다. 대중들이 보기에 (그러한 선전 작업에) 정부가 개입한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처럼 NSC-68 추진세력들은 계획 작성 단계부터 대국민 설득 방안을 치밀하게 검토하고 있었다.

사실 미국 정부는 냉전 초기부터 공포 마케팅을 적극 활용했다. 1947년 3월 냉전을 공식화한 트루먼 독트린 발표 당시 아서 반덴버그 상원의원은 "대통령이 직접 의회에 가셔서 온 나라에 확 겁을 주십시오"라고 말했다.

당시 국무차관이었던 애치슨은 보통사람들에게 대외정책을 받아들이게 하려면 '단순, 과격, 무식한 방법으로 요점을 강조해야" 하며 "진실보다도 더 선명하게" 핵심을 부각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즉 미국의 대외정책 수행을 위해서는 소련의 위협을 실제보다 과장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그는 NSC-68에 대해서도 이 계획의 목표는 정부 고위지도자들의 집단지성에 강력한 충격을 가해 대통령이 (대규모 재무장에 관한) 결단을 내리는 것은 물론 이 결단이 실행되도록 하기 위한 것이라고 밝혔다. 소련의 군사력을 의도적으로 과장한 것은 바로 그 때문이었다.

애치슨은 1950년 초 정부 내 최고 소련 전문가인 조지 케난과 찰스 볼렌을 워싱턴에서 쫓아내면서 NSC-68 작성을 관철시켰다.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트루먼 대통령을 설득해 즉각 군사 개입을 결정했고, 7월에는 전쟁 수행을 이유로 106억 달러 규모의 추가 국방 예산을 요청했다. 그런데 이 가운데 절반이 넘는 60억 달러가 유럽에 대한 군사 원조였다.

재정 보수주의자인 루이스 존슨 국방장관은 국방비 증액, 특히 유럽에 대한 군사원조에는 결사 반대였다. 결국 트루먼 대통령은 9월 12일 존슨 국방장관을 전격 해임하고 전 국무장관 조지 마셜을 그 자리에 앉혔다. 특히 주목할 것은 국방 부장관에 로버트 로벳을 기용했다는 점이다.

로벳은 NSC-68 작성에 관여하면서 재무장 계획의 실현을 위해서는 '매우 거대한 선전 장치'가 필요하다고 말했던 바로 그 인물이다. 국방장관 존슨의 해임과 마셜, 로벳의 기용은 애치슨-니츠 라인의 승리였다. 즉 트루먼 행정부 내의 재무장 반대 세력이 제거된 것이다.

존슨 국방장관 경질 사흘 후인 9월 15일, 애치슨은 뉴욕에서 서유럽 외무장관들과 만나 미국의 대규모 군사 원조 및 미국-서유럽 군사동맹 결성에 관한 미국의 계획을 설명하고 동의를 받아냈다. 이제 다음 과제는 미국 국민들에게 대대적 재무장의 필요성을 설득하는 것이었다.

부어리스와 코난트

CPD 출범은 1950년 8월 두 사람의 만남에서 시작됐다. 트레이시 부어리스 전 육군부 차관과 제임스 코난트 하버드대 총장이다. 부어리스는 NSC-68 찬성파로 서유럽에 대한 경제지원과 군사원조를 통합하자는 '부어리스 리포트'를 작성한 인물이다. 마셜 플랜에 대한 공화당의 거센 반대를 무력화시키기 위해서는 안보를 전면에 내세우는 편이 유리하다는 것이다. 구체적으로 서유럽으로 하여금 군사물자를 생산케 하고 이를 미국이 사들이자는 내용이다. 하지만 이 리포트로 존슨 국방장관의 노여움을 사 차관직을 사퇴했다.

1950년 8월 부어리스는 코난트를 만나 안보 상황의 엄중함을 호소했다. 소련의 군사적 위협으로 미국의 안보가 심각한 위험에 처했음에도 국민은 물론 의회도 이러한 위기상황을 직시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실제로 7월 트루먼이 의회에 요청한 국방예산 증액은 공화당은 물론 민주당 소속 존슨 국방장관의 반대에 부딪힌 상황이었다. 유럽에 대한 군사원조가 문제였다.

부어리스의 호소를 들은 코난트는 "저명인사들을 불러 모아 계획을 세우고 대중들에게 제시합시다, 대중들이 의회에 편지를 보내 상황의 엄중함을 일깨워야 합니다. 귀하의 말씀을 듣고 보니 지금 미국은 잠들어 있군요. 깨워 일으켜야만 합니다"고 답했다. 그러자 부어리스는 "총장께서 그런 위원회의 리더가 돼주실 수 있습니까?"고 요청했다.

훗날 코난트는 자서전에서 "당시에는 몰랐지만 바로 그때 우리는 CPD 창설을 시작한 것이다. CPD는 한국전쟁이 끝날 때까지 유용한 역할을 했다"고 회고했다.

부어리스가 코난트에게 협력을 요청한 것은 그가 미국 최고 명문 대학의 총장이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는 상아탑 속의 학자가 아니었다. 1차 대전 때부터 미국의 전쟁 노력에 적극 동참한 정부 내 핵심 인사였다. 화학자였던 그는 1차 대전 당시 화학무기 개발에 참여했고, 2차 대전 때는 바네바 부시와 함께 원자탄 개발 등 미국 과학기술계의 연구 업적을 전쟁 역량으로 실현시키는 데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

또한 일본에 대한 원자탄 공격을 결정한 '임시위원회(Interim Committee)'의 일원으로서 사전 경고 없이, 인구밀집지역에 원자탄을 투하한다는 결정을 주도했다. 나아가 2차 대전 이후 원자탄 사용의 정당성을 옹호하는 데 앞장섰고, 미국의 안보를 위해 보편복무제도가 필요하다고 역설했던 인물이다. 한마디로 말해 코난트는 군사주의의 신봉자였다.

더 중요한 것은 두 사람 모두 NSC-68 작성에 관여했던 인물이라는 점이다. 코난트는 자문위원이었고 부어리스는 검토위원회 위원이었으며 NSC-68 실현을 위한 보고서(부어리스 리포트)를 만들기도 했다. 또한 CPD 회원의 절반 가까이는 2차 대전 이후 국방부, 국무부의 고위 관리를 역임했거나 미국의 대외 개입을(2차 대전 참전, 마셜 플랜) 위한 각종 시민 로비 조직에서 활동했던 인물들이었다. 뉴욕타임스를 비롯한 언론들은 CPD가 정파를 초월한 중립적 인사들인 것처럼 소개했지만 실제로는 트루먼 행정부의 핵심 인사들이자 미국의 군사화를 지지하는 인물들이 대다수였다.

CPD의 주요 멤버는 의장 제임스 코난트, 부의장 트레이시 부어리스를 필두로 로버트 패터슨(전 육군부 장관), 윌리엄 클레이튼(전 국무부 차관보), 윌리엄 도노반(전 OSS 국장), 줄리어스 옥스 아들러(뉴욕타임스 부사장), 헨리 리스턴(브라운대 총장, 미국대학협회 회장) 등이다.

코난트는 부어리스와의 만남 이후 당시 미국대학협회 회장인 헨리 리스턴 브라운대 총장에게 다음과 같은 편지를 보냈다. 이때부터 대학 총장들이 CPD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된다.

"저는 유럽에 100만 미군 병사를 빨리 배치할수록 좋다는 입장입니다. 따라서 병력 규모를 300-500만으로 늘리기 위해 즉각 나서야 한다고 생각합니다...제 생각에 지금 필요한 것은 보편복무제도를 위한 장기적이고 건전한 계획을 세우는 것입니다. 앞으로 수 개 월내에 만일 대학 총장들께서 이러한 계획을 제출하신다면 대단히 큰 보탬이 될 것입니다."

내부자들의 '시민회의'

1950년 9월 28일 '시민회의(Citizen's Conference)'라는 이름의 비밀회의가 열렸다. 참가자는 일반 시민들이 아니라 학계와 언론계, 그리고 재계의 거물급 인사 약 50명이었다. 제임스 코난트(하버드대), 헨리 리스턴(브라운대) 등 7개 대학 총장이 주최한 이 모임에는 뉴욕타임스의 줄리어스 옥스 아들러 부사장을 비롯해 제네럴 모터스의 알프레드 슬로언 회장, J.P. 모건의 조지 휘트니 회장, 존 D. 록펠러, 체이스맨해튼은행의 윈스롭 올드리치 총재 등 이른바 오피니언 리더들이 참여했다.

당시까지 일반에 알려지지 않았던 NSC-68의 내용을 공유하고 12월 현존위험위원회(CPD) 출범 때 발표될 창립 성명을 검토하는 자리였다. (극비문서였던 NSC-68의 내용이 일반에 공개된 것은 1975년이다)

이날 모임에서는 당시 콜럼비아대 총장 아이젠하워가 기조연설을 했다. 그는 "첫째, 소련의 목표는 세계 정복이다. 이를 위해 소련 지도자들은 기꺼이 군사력을 사용할 것이다" "둘째, 미국 국민은 현 위기 상황에 대해 책임이 있다. 2차 대전이 끝나자마자 국민들은 병사들을 고국으로 데려오라고 소리 높여 외쳤다. 우리는 지금 그(때 이른 군비 해제) 대가를 치르고 있다"고 말했다. 이어 현 위기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서는 군사비 지출을 대폭 늘리고 18세 이상 모든 남성들의 군 복무, 즉 보편복무제도를 시행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즉 소련은 미국 안보에 현존하는 위험이며, 미국은 이에 적극 대응해야 한다는 얘기다. 아이젠하워 장군은 2차 대전 승리의 주역이며 미국인에게 가장 사랑받는 군인이다. 따라서 그의 발언은 대단한 설득력을 갖는다. 시민회의 주최자들도 바로 이러한 점을 노리고 아이젠하워를 발제자로 내세운 것이다. NSC-68을 일반 국민들에 설득하기에 앞서 오피니언 리더들의 동의를 구한 것이다. 즉 CPD 출범에 앞선 사전 정지 작업이었던 셈이다.

10월 초 코난트는 로벳 국방 부장관을 만나 CPD 출범을 논의했다. 2차 대전 당시 과학계를 대표해 국립국방연구위원회(National Defense Research Committee) 위원장을 역임한 그는 로벳은 물론 마셜 국방장관과도 막역한 사이였다. 이어 코난트는 마셜에 서한을 보내 그의 의견을 물었다. 마셜이 CPD가 하려는 일을 긍정적으로 판단한다면 11월 중간 선거 후 1951년 초 의회가 열리기 전 기간에 "위기의 시기에 취해야 할 조치들에 관한 여론을 환기시키기 위해" 활동에 나서겠다고 밝혔다. 마셜은 "여러분들의 제안은 매우 중요한 것"이라며 환영했고, 11월 20일 자신의 국방장관 집무실에서 코난트 등을 접견했다.

이처럼 CPD는 태동부터 실제 활동까지 트루먼 행정부와의 긴밀한 공조 아래 진행된 것이다. CPD는 1950년 12월부터 소련의 위협을 내세워 미국과 유럽의 대대적 재무장을 선동했으나 공화당의 반발 또한 만만치 않았다. 1951년 1월부터 약 6개월 동안 CPD는 의회 증언, 대언론 성명 발표, 라디오 연설, 소책자 발간 등을 통해 대중들의 위기의식을 고조시킴으로써 공화당의 고립주의, 그리고 아시아우선주의를 격파하고 개입주의, 유럽우선주의를 관철해 나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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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필자 소개
서울대학교를 나와 경향신문에서 워싱턴 특파원, 국제부 차장을 지내다 2001년 프레시안을 창간했다. 편집국장을 거쳐 2003년부터 대표이사로 재직했고, 2013년 프레시안이 협동조합으로 전환하면서 이사장을 맡았다. 남북관계 및 국제정세에 대한 전문 지식을 바탕으로 연재를 계속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