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균아… 나는 너다. 너는 나고."
[구술] 김미숙 "이제 저는 용균이의 죽음 하나만 보지 않아요" 下
2019.10.26 12:21:45
"용균아… 나는 너다. 너는 나고."

고 김용균 사망 사고는 위험의 외주화가 만연한 한국사회에 경종을 울렸다. 여러 문제점이 지적되고 있지만, 2018년 12월 법 제정 28년 만에 산업안전보건법이 일부 개정됐다. 지난 8월 고 김용균 사망 사고 특별조사위원회는 위험의 외주화가 고 김용균 사망 사고의 진짜 원인이라는 내용의 보고서를 발표했다.

그러나 하청 노동자의 사망 사고 소식은 끊이지 않고 있다. 지난 12일 평택의 리모델링 현장에서 승강기를 설치하던 노동자가 추락사했다. 지난 7일 고성의 화력발전소 건설 현장의 파이프 안에서 용접작업 중이던 노동자가 질식사했다. 매해 300명이 넘는 하청 노동자가 산재로 사망한다.

이러한 현실을 바꾸고자 고 김용균 투쟁을 진행했던 이들이 더 긴 호흡의 싸움을 위한 거점을 준비하고 있다. 10월 26일 출범하는 김용균재단(홈페이지 : http://yongkyun.nodong.org)이다. 김용균재단은 고 김용균 추모 사업, 위험의 외주화 근절 투쟁, 산재 피해자 및 유가족 지원 활동 등을 벌인다는 계획이며 후원회원을 모집하고 있다.

<프레시안>은 김용균재단 출범에 맞춰 백서 <김용균이라는 빛>에 실린 김미숙 씨의 구술 전문을 두 편에 나눠 싣는다. 구술에는 자식을 잃은 부모의 심정, 그리고 그 죽음에 구조적 원인이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함께하는 사람들과 힘을 모아 이를 바꾸겠다고 마음먹는 과정이 드러나 있다.

삶의 전부를 잃고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이 일이 있기 전까지 저는 앞만 보고 살았어요. 너무 살기 힘드니까. 애 아빠는 아파서 병원에 있지, 용균이 키워야지, 학교 보내야지. 돈 벌어 살기만도 바쁜 시간이었어요. 저는 사회생활을 고등학교 마치고 계속했어요. 결혼하고 잠깐 시부모님하고 산 적이 있는데 그때하고 용균이 낳고 잠깐 빼고는 쉰 적이 없죠. 이 일 있기 전까지 다닌 회사는 2교대 근무를 했는데, 한 달에 딱 하루 쉬었어요. 제가 일을 대충하는 스타일이 아니에요. 회사에 누를 끼치지 않으려고 열심히 했어요. 제가 이윤을 많이 내야지 회사를 오래 다닐 수 있으니까요. 저도 한 집안의 가장이었잖아요. 잘리면 안 되었어요.

힘들었죠. 그래도 애가 있어서 좋았어요. 배 속에 있을 때부터 용균이 커가는 모습을 바라보는 그 마음이 너무… 좋았어요. 걔만 잘 자라주면 더 바랄 게 없었죠. 용균이가 어릴 때 구미에서 안 살고 할머니 댁이랑 가까운 시골 동네에서 살았거든요. 임고서원 옆에 있는 임고초등학교라는 곳에 다녔어요. 애가 어려서부터 병치레를 많이 했어요. 공부 신경 쓰지 말고 맘 편히 건강하게 살기만 바랬죠.

어느 날은 용균이가 학교에서 은행을 주워서 커다란 봉지에 한가득 들고 왔어요. 그 무겁고 냄새 나는 걸. 평소에 엄마가 몸에 좋다고 은행을 줍는 모습을 봤나 봐요. 너무 고마운 마음에 고무장갑 끼고 깨끗이 씻고 말려서 잘 먹었던 기억이 나요. 정말 애가 이쁜 짓을 골라서 했어요. 저희 시댁에 가면은 사촌들이 다 용균이보다 어려요. 용균이가 명절 때 할머니 댁 가기 전에 꼭 슈퍼에 가요. 가면 과자를 잔뜩 사요. "왜? 이거 너 다 먹을 거야?" 그러면 "아니, 동생들 나눠줄 거야. 같이 먹으려고 사는 거야" 그러면서 아주 즐거워하던 모습이 기억나요.

그러니 애가 학교 가기 전에 제가 걱정을 좀 했어요. 이렇게 순한데 학교 가서 친구한테 얻어터지고 오면 나 어떡하지. 그래서 애한테 얘기를 했어요. "너 학교 가서 누가 싸움 걸어오면 어떻게 할 거야?" 그랬더니 "엄마, 내가 그냥 말로 잘 설득을 할 거야"라고 해요. "그러다 너 한 대 때리면 어떡해?" 그래도 말로 해보겠대요. 아이고, 내가 교육을 저렇게 시켜놓아가지고. (웃음) 어떻게 해야 돼, 맨날 맞고 오면? 이런 생각을 했죠. 어려서부터 그런 마음이었기 때문에 용균이는 커서도 심성이 곱고 깊었어요.

대학교를 대구에 있는 영진전문대로 갔어요. 구미에서 거기까지 통학을 했어요. 애 아빠가 기숙사에 안 보내겠다고 했거든요. 애 아빠는 용균이가 고등학교 때까지는 외박하는 것도 못 하게 했어요. 질이 안 좋은 환경에 놓일까 봐 걱정을 많이 했죠. 물가에 내놓은 자식마냥 맨날 어디 뭐가 잘못될까 걱정했어요. 만약에 용균이가 어디를 가잖아요. 그러면 애 아빠는 지도를 찾아서 어디 가면 뭐 타고, 또 어디 가서는 뭐 갈아타고, 이런 것까지 다 가르쳐줘요. 용균이는 "아빠, 나 이거는 할 수 있어, 제발 그거까지는 하지 마" 그럴 때도 있었지만 나쁘게 받아들이지는 않은 거 같아요. 엄마 아빠가 항상 자기 옆에 있고 싶어했던 마음을 잘 알기 때문에요.

이 일 나고 초반에 세월호 유가족 분들이 오셔서 저를 많이 안아주셨어요. 그분들한테 제일 처음 묻고 싶던 거는 애 없이 어떻게 살았는지였어요. 세월호 유가족 영석이 엄마는 애가 하나밖에 없었잖아요. 그 아이를 잃고 아픔을 어떻게 견디고 있을지 그게 제일 궁금했어요. 저는 정말 살아갈 자신이 없었거든요. 세월호 사건이 일어났을 때 저는 그 한 해를 암울하게 보냈어요. 아무리 빛이 화사하게 맑은 날이라도 내 마음이 정말 어두웠거든요. 저 부모들은 어떻게 살까. 정말 힘들겠구나. 그래도 산 사람은 산다는데 어떻게든 살겠지 저는 한 다리 건너서 남의 일이라고 생각하고 살았던 거죠. 저런 일 나는 겪지는 않겠구나. 근데 내가 겪더라고요. 어느 순간 저 사람이 내가 되더라고요.

사회가 이렇게 안전하지 않다는 걸 모르고 살아서 정말 이 어둠의 마음. (눈물) 참지 못하는 분노. 내 희망 내 삶을 송두리째 잃어버렸잖아요. 우리는 용균이 초등학교 졸업할 때까지 애를 우리 사이에 놓고 잤어요. 용균이 얼굴을 서로 보겠다고요. 그만큼 소중한 아이가 그렇게 열악하게 일하는 환경에 있었고 그렇게 처참하게 찢겨 죽었잖아요. 어떤 부모가 저처럼 이렇게 험악하게 자식을 (흐느낌) 어떻게 감당해야 할지 모르겠고 이제 무엇을 희망으로 삼고 살아야 할지 아무리 생각해도 없어요. 잘 살고 싶지도 않고, 웃고 살고 싶지도 않아요. 우리는 가정이 부서졌어요.

영정 사진 속의 애를 보면서 그랬어요. 용균아 나는 너다. 너는 나고. 네가 그렇게 된 다음부터 엄마는 죽었다. 너는 죽었지만 엄마 속에 있으니까, 네가 하고 싶은 거 내가 다 해줄 거다. 그것이 내 삶의 목표가 됐어요. 그거라도 붙들고 살고 싶어서. 저는 크게 두려울 것도 없어요. 이제 가진 거라곤 몸 밖에 없잖아요. 싸우다가 져봤자 제가 잃을 게 이 몸 밖에 더 있어요? 저는 그렇게 생각해요.


▲ 고 김용균을 그린 그림. 사단법인 김용균재단 준비위원회 제공.


짧고도 길었던 시간

초반에 대책위에게 (유가족의 권한을 대신하도록) 위임장을 써줬거든요. 그때는 원청, 하청 사람들하고 대책위하고 실랑이가 있었어요. 회사 쪽에서는 대책위 보고 왜 너네끼리만 유가족하고 접촉하느냐는 거예요. 자기들도 유가족을 만나 이야기하겠다고. 그래서 시민대책위한테 힘을 실어주기 위해서 위임장을 써줬어요. 그게 있어야지 시민대책위가 저 사람들한테 휘둘리지 않고 힘을 내서 일할 수 있겠구나 싶어서요. 그 위임장을 3일 만에 써줬다는 이야기를 나중에 듣고서는 깜짝 놀랐어요. 저는 그 시간이 엄청나게 길었다고 생각했거든요. 한 10일은 지나고 써준 느낌이었어요.

위임할 때는 저 혼자 결정했어요. 급한 마음에 다른 가족들하고 상의를 안 했어요. 그런 점이 좀 미안해요. 그렇게 중요한 일인데 저 혼자 결정했다는 게. 아무리 좋은 결과가 나왔더라도 상의는 했어야 되는데 늘 마음에 걸려요. 애 아빠는 집이 구미잖아요. 고향이 영천이에요. 그래서 옛날부터 야당 쪽(현 자유한국당)에 응원을 많이 했고, 이 일을 겪고 나서 많이 혼란스러워했어요. 한달쯤 지났을 때, 애 차가운 데 넣어놓고 얼마나 기다려야 되느냐고 얘기하길래 제가 그랬죠. 애를 불에 태워서 묻거나 영안실 차가운데 넣어놓거나 뭐가 다르냐고. 이러나저러나 애는 돌아올 수 없다고. 우리한테는 용균이 누명을 벗기는 거, 억울한 거 풀어내는 거, 그게 중요하지 않냐고 설득을 했죠. 애 아빠가 그래도 제 설득에 공감해서 여기까지 온 거 같아요.

싸우는 동안 가족들이 큰 힘이 되어줬어요. 사고 난 후 첫날인가 두 번째 날인가, 서부발전 김병숙 사장이 왔어요. 신발도 안 벗고 들어오고 있었는데, 저는 그 사람이 서부발전 사장인지 몰랐어요. 언니가 먼저 알아 보고 "니가 무슨 낯짝으로 여길 오냐!"고 호통을 쳐서 쫓아보냈어요. 두 번째는 제 동생이 막아줬어요. 특히 동생은 제 옆에서 항상 스케줄 관리해주고 제 몸처럼 챙겨줬기 때문에 크게 의지가 됐죠. 정말 너무 감사해요.

산안법 개정 때문에 국회에 갔었잖아요. 3일 동안 갔어요. 대책위를 통해 산안법이라는 게 있다는 걸 처음 들었어요. 사고를 낸 원청을 처벌을 하는 법이 있다. 그게 통과돼야지 원청을 처벌할 수 있는 조건이 된다. 유가족으로서는 당연히 개정해야 되는 거잖아요. 강력하게 밀었죠. 과정이 쉽지는 않았어요. 국회 들어간 첫날에는 그래도 좀 될 거 같은 느낌이 들었는데 그다음 날부터는 정말 판이 뒤집혔다, 옳게 됐다, 마음을 들었다 놨다 했죠. 이 법이 왜 가로막히고 통과가 안 되는 건지 이해가 안 갔어요. 때로는 소리도 지르고, 때로는 읍소도 하면서 했어요.

그런데 통과된 개정안에는 용균이 동료들이 안 들어가 있잖아요. 발전회사들도 사람들 다치고 죽어 나가는 게 엄청 심한데 그 법에 속하지 않아서 처벌을 못하잖아요. 용균이 법이라고 하는데 도대체 뭣 때문에 용균이 법이라고 하는 건지 모르겠어요. (사업주 처벌 규정도) 상한선을 언급하는데 하한선은 옛날이나 똑같고 누가 뒤로 물러나게끔 법안을 만들어서 통과를 시켰는지 정치인이나 기업의 입김이 들어가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많이 들어요. 민영화가 되고 사람들이 이렇게 죽어 나가는 걸 당연시하는 정부나 기업들의 태도는 아직까지도 고쳐지지 않았구나 하는 생각에 정말 괘씸했죠.

(12월 28일에) 문재인 대통령께서 저희한테 만남을 요청하셨는데, 그 만남은 제가 하지 않겠다고 거절했어요. 그냥 위로의 말뿐인 만남은 제가 원하는 만남도 아니고 그럴 필요도 없으니까요. 저는 사람들이 대통령 면담이 특혜니 용균이 시체장사니 이런 얘기를 할 때, 댓글 봤지만 흔들림이 없었어요. 제가 원하는 게 사람들한테 피해가 가는 게 아니고 많은 사람들을 살릴 수 있는 길이잖아요. 상처 입거나 신경 쓰지 않았어요. 저는 용균이 지키지 못한 부모 잖아요. 그거가 너무 애한테 죄스러운 마음이기 때문에 저에게 그것보다 큰 상처는 없어요.

새해가 되면서는 마음이 많이 조급했죠. 신정 끼고 구정 끼고, 또 조금 더 있으면 선거도 있고 그러니까요. 우리가 설전에 장례 치르도록 (합의안에 응해달라고) 요구는 했지만 안 될 줄 알았어요. 사람들이 다 같이 싸워주고 여기저기 백여 개 넘게 단체들이 합심해서 나중에는 합의를 그런대로 잘 끌어냈던 거 같아요.

혼이라도 함께 살고 싶어요


합의안 끌어낸 다음에는 당연히 장례 치른다고 생각했어요. 근데 장례를 치르는데 아주 크게 했잖아요. 저는 그런 행사를 난생처음 보고 겪었어요. 이런 건 티브이에서 대통령 장례 치를 때만 봤거든요. 어안이 벙벙했던 거 같아요.

이제 진짜 용균이 장례를 치르는 거잖아요. 나는 아직 애 얼굴도 제대로 못 봤는데. 용균이를 태안으로 보내기 전까지는 제가 애를 계속 데리고 살았잖아요. 딱 3개월 떼어놓았어요. 그 사이에 딱 한 번 집에 왔고, 그때 잠깐 얼굴 보고는 죽고 나서야 다시 본 거잖아요. 영안실에서는 길어봤자 몇 분 정도 밖에 못 봤어요. 그 뒤로는 한 번도 못 봤는데 벌써 장례를 치르고 떠나간다는 게, 이게 실감이 안 나요. 무슨 꿈을 꾸는 건지, 이게 진짜 현실인지… 그냥… 잘 모르겠어요. 용균이가 금방이라도 올 거 같은데… 그러면 내가 그동안 다니면서 떠들었던 건 뭐지? 애가 죽었다고 떠들었는데.

애가 갔다고 그러는데 아직도 어딘가는 있을 거 같아요. 그런데 전화를 해도 안 받고 톡을 해도 안 받아요. 전화기를 들면 그 안에 용균이 영정 사진도 있고 무덤 사진도 있어요. 애가 뼛가루가 되어서 묘에 들어간 거까지 내 눈으로 다 봤는데, 우리 아들이 여기 묻힌 게 맞나? 이름은 표시가 되어있는데. 이런 게 ‘죽은 것’인가

부모들은 다 이렇게 느낄 거예요. 울음도 안 나오더라고요. 빈껍데기인 그런 느낌으로 다녀요. 그냥 허망하다, 모든 것이. 내가 아무리 잘 먹고 잘산다한들 자식이 없는데 무엇이 좋은 건가 좋을 게 없어요. (침묵) 용균이가 혼이라도 집에 들어와서 살았으면 좋겠어요, 혼이라도. 얼마 전에 이사를 했는데, 용균이 방이라고 하나 내줬는데, 용균이가 진짜 올까? 용균이한테 여기가 네 방인 거 말해주고 싶은데. 근데, 아무 표시가 없잖아요. (울음) 자기 물건 있으니까 당연히 자기 방이라고 엄마가 주셨네,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까. 이런 생각 하고 있어요.

애 아빠가 자기는 제일 힘든 게 그거래요. 애를 평생 볼 수 없다는 거. 단 한 번이라도 볼 수 있다면 아무리 오랜 세월이 흘러도 기다릴 수 있는데, 그럴 수 없잖아요. 그래서 빨리 죽어서 애 곁에 가서 있고 싶다고, 그게 행복한 거라고 얘기를 해요. 제가 그랬죠. 정말 영이 있고 만날 수만 있다는 확신만 있다면 가면 좋지. 근데 그게 없잖아. 만약에 용균이하고 못 만나고 그냥 죽음만 이루어진다면 더 억울한 거 아닌가. 그렇게 애 아빠를 설득하고 있어요. 


▲ 고 김용균 백서 <김용균이라는 빛> 북콘서트에서 단상에 오른 김미숙 씨. 사단법인 김용균재단 준비위원회 제공.


우리가 빛이 된다면


자식을 잃고 부모가 눈 뜨고 밥 먹고 살고 있는 자체가 맨날 죄인 같아요. 하지만 죽지 않으면 사는 거잖아요. 살고 있다면 의미 있는 삶을 살아야죠. 그동안 제가 이 일을 겪으면서 사람들한테 많이 도움을 받았잖아요. 그 사람들께 제가 일일이 인사를 못 해요. 그러니 이 사람들의 가정을 지키고 안전한 사회를 만드는 데 일조를 해야 되겠다는 마음이 드는 거죠.

한화공장 폭발사고 유가족들을 만나러 갔었어요. 그때가 사고 나고 11일째 됐었어요. 기자들한테 매달려도 취재 올 생각을 안 하고 정말 암울했대요. 힘이 자꾸 빠지고 '이대로 끝나는 건가' 생각하고 있었는데 저희가 간 거였어요. 기자들하고 같이. 그분들이 저한테 "엄마 정말 장하다. 우리는 그렇게 못할 거 같다"고 얘기해서 제가 그랬어요. 저도 3개월 전까지는 그냥 보통 아줌마였다고. 이렇게 할 수 있는 거는 내가 잘 나서가 아니고 엄마라서 그렇다고. 엄마라서 자식 억울한 거 풀어줘야 하고, 또 내가 할 수 있는 게 이것밖에 없어서 한 거라고. 누구라도 할 수 있는 일이니 용기 잃지 말고 하라고.

그 다음부터 그 사람들이 기자회견도 하고 그러더라고요. 직접 가서 보지는 않아도 인터넷에 뜨는 소식을 보고 있었거든요. 목소리를 내고 있구나, 그때 가보길 참 잘했다, 이런 생각을 했어요. 앞으로도 억울하게 죽임당하고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는 사람들에게 찾아가서 힘을 줘야 되겠구나. 나도 할 수 있는 일이 있구나.

용균이 사고 나고 어떤 단체 얘기를 들었는데, 거기도 비정규직 때문에 논의가 막 시작되고 있던 상태에서 용균이 일 터지고 바로 정규직으로 전환됐다고 그래요. 우리가 투쟁한 여파가 사회 곳곳에 미치고 있다는 걸 깨달았어요. 우리가 잘하고 있구나. 용균이의 죽음을 제가 엎어버리면 또 그냥 잠잠하게 넘어갈 수 있는 거였잖아요. 근데 이렇게 다들 힘 모아서 싸워서 사회가 조금이라도 좋게 바뀌고, 어떤 사람들에게는 우리가 빛이 되고 있구나. 더 잘해야 되 겠다고 느끼죠.

지금 다른 산재 유가족들하고 한 달에 한 번씩 만나고 있어요. 유가족들하고는 그냥 서로 만나 말하는 자체가 위로예요. 무슨 말을 하더라도 큰 상처가 안 되고, 어떻게 보면 자기 가족들보다도 오히려 더 이해가 더 깊어요. 제주도 이민호 아버님, (삼성 반도체 산재 유가족) 황상기 어르신, 혜경이하고 혜경이 엄마 저한테 많은 위안을 주셨어요. 여태까지 잘 싸우게끔 만들어주신 분들이에요.

또 다른 피해자가 생기면 그 사람들의 잘못이 아니라는 걸 밝히는 데 저희도 힘을 보탤 거예요. 안전하지 않은 사회 한곳 한곳이 다 폭로가 돼서 사람들의 인식이 바뀌기를 원하거든요. 안전에 대한 이야기가 계속 꾸준히 이어지게끔 하고, 지금 인권단체라든지 이런 분들도 꾸준하게 가게끔 하고 싶고. 누가 대신해주지 않는다는 걸 아니까 제가 나서서 하려고 해요. 자식을 잃은 유가족들은 죽을 때까지 이 한이 풀리지 않을 거란 말이에요. 그 누구보다도 절박하고, 절실해요.

지금은 따로 방을 얻어 살고 있지만, 태안에 있다 서울에 처음 왔을 때는 '꿀잠'(비정규노동자쉼터)에 머물렀어요. 1월 22일에 왔었네요. 꿀잠에는 각계 각층 다양한 사람들이 엄청 많이 와요. 고공농성이라든지 콜트콜텍 이런 분들의 투쟁을 보면서, 이 사람들이 죽기 살기로 싸우고 있다는 걸 많이 느꼈어요. 저는 이런 일이 있다는 걸 모르고 살았거든요. 꿀잠에서는 그런 사람들에게 먹고 잘 곳을 제공해주잖아요. 사회에 이런 곳이 있다는 게 너무 좋은 거죠. 처음 알았어요. 이런 곳이 있다는 걸.

제가 처음 안게 한두 개겠어요? 제가 있는 세상이 밝음에서 어둠으로 들어와 있는 느낌이거든요. 그 어둠 속에서도 밝음을 위해서 싸우고 있다는 거. 어두운 곳에서도 밝은 곳이 존재한다는 거. 아, 희망이 있구나. 그런 걸 본 거죠. 싸우면 되겠구나. 노조가 있으면 자기 권리를 지킬 수 있다는 걸 여기서 배웠어요.

꿀잠에 들어올 때 처음부터, 아! 보호받는 느낌이 들었어요. 이 사람들은 누구를 괴롭히는 거를 절대 용납을 안 할 사람들이잖아요. 밖에서는 누가 힘들게 하거나, 누가 괴롭힐 거라고 생각하고 맨날 방어적인 자세인데 여기는 그런 게 없잖아요. 아픔도 같이 모여서 감싸주고 도와주는 사람들을 보니까 완전 차원이 달라요. 제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아듣겠어요? 같이 살아야만 힘이 되니까. 저는 싸우는 사람들 옆에 있으면 힘이 나요.

이 기사의 구독료를 내고 싶습니다
일부 인터넷 환경에서는 결제가 원활히 진행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국민은행 343601-04-082252 [예금주 프레시안협동조합(후원금)]으로 계좌이체도 가능합니다.
ama@pressian.com 다른 글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