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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에 장금이는 없었다…알렌에게 무릎 꿇은 한의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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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조선에 장금이는 없었다…알렌에게 무릎 꿇은 한의학"

[의학사 산책] 한국 최초의 서양 병원 제중원

조선시대 진료 기관은 한의학에 기반을 둔 내의원, 전의감, 혜민서의 삼의사가 근간을 이루고, 구휼 기관으로 활인서가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1882년 조선 정부가 대민 의료 기구인 혜민서를 혁파한 것은 국가 체제의 안정성 확보와 관련하여 매우 곤란한 일이었다.

알렌의 민영익 치료

이런 상황에서 한 선교사의 내한은 한국에 서양 의학이 본격적으로 도입되는 계기를 마련한다. 1884년 9월 최초의 선교사로 내한하여 서울에 거주하고 있던 미국인 의사 알렌(H. N. Allen · 1858~1932)이 바로 그 주인공. 1884년 12월 4일 갑신정변에서 민비(사후 1897년 명성황후로 추존)의 조카 민영익이 칼에 찔려 사경을 헤매자, 묄렌도르프는 알렌에게 치료를 맡겼다.

▲ 알렌. ⓒ동은의학박물관
알렌은 이전까지 조선에서 이루어지던 어떠한 한방 치료와도 구별되는 전혀 다른 형태의 서양 외과 의술로 밤새 정성을 다해 환자를 치료했다. 우선 자상을 깨끗이 소독하고, 꿰맨 후 붕대를 감았다. 머리의 출혈 부위는 명주실로 봉합하여 지혈시켰다. 다른 부위의 상처도 깨끗이 소독해 스펀지로 감싼 후 붕대를 감아 출혈을 막았다.

모두 스물일곱 군데를 꿰매고 한 군데는 혈관을 경색(梗塞)시켜 잡아매고 심을 넣어 반창고를 붙였고, 상처마다 거즈를 대고 붕대를 감았다. 이전에 종기나 째던 한의학과는 근본적으로 다르게 해부학 지식을 이용한 치료법을 시행했던 것. 인체 구조를 정확하게 이해한 이런 외과 치료는 당시 사람은 상상도 못했던 의술이었다.

다행히 알렌의 치료는 효과가 있었다. 알렌은 중대한 고비를 넘기자, 12월 8일 민영익이 소생했다고 보고하였다.

칼에 찔린 환자를 치료하지 못한 한의사

알렌은 당시 미국에서 상당한 실력을 갖춘 의사는 아니었다. 하지만 한의사들이 갖지 못한 서양 의술, 특히 외과 의술을 갖고 있었다는 것은 큰 이점이었다. 알렌이 도착하기 전 모여 있던 열네 명의 한의사들은 민영익을 치료하기 위해 애썼지만 자신들의 의술로는 어쩔 수가 없었다.

알렌은 한의사들이 시커먼 송진 꿀(혹은 일종의 고약)을 민영익의 상처에 집어넣으려는 것을 목격하고 놀랐다. 알렌이 치료를 시작하자, 한의사들은 강하게 반발했다. 그러나 알렌은 결국 스물일곱 군데의 상처를 꿰매는 등 치료를 통해서 민영익의 생명을 구했다. 서양 의학의 완승이었다.

여기서 우리는 한의학을 폄하하려는 게 아니다. 다만 외과 분야의 환자를 치료하는 데 당시의 한의학 체계는 큰 공백이 있었다. 민영익의 치료는 그 단적인 증거였다.

최초의 서양식 병원 제중원이 세워지다

민영익의 치료 과정에서 서양 의학, 특히 외과 의술에 대한 조선인의 호응을 확인한 알렌은 1885년 1월 27일 민영익을 통해 서양 의학을 시술하는 병원의 설립을 조선 정부에 공식적으로 제안하였다. 이것이 바로 제중원 설립의 기초가 된 알렌의 병원 설립안이다.

알렌은 병원 설립안에서 설립 목적이 질병 치료뿐 아니라 한국인 의료진 양성임을 밝혔다. 알렌은 해외 선교의 원칙대로 의료와 교육을 앞세웠고, 한국인 의료진 양성이야 말로 의료 선교를 보다 용이하게 할 수 있는 방법이라고 생각했다.

고종의 윤허로 병원의 설립은 빠르게 진행되어 1885년 4월 10일 한국 최초의 서양식 병원인 제중원이 재동(현 헌법재판소 구내)에서 개원하였다. 제중원의 개원은 조선 근대사의 중대한 한 장면이자, 의학사, 교회사, 교육사에서도 대단히 중요한 의의를 지닌 역사적 사건이었다.

▲ 홍역식의 집을 병원으로 개조한 재동(현 헌법재판소 구내) 제중원. ⓒ동은의학박물관

역사의 아이러니

결과를 놓고 보면 갑신정변은 아이러니한 사건이었다. 우선 서양 문물의 도입을 미룬다며 일으킨 정변은 실패했고 칼에 찔린 민영익은 엉뚱하게도 서양 의사 알렌에 의해 생명을 구했다.

정변이 실패하여 홍영식은 참살 당했지만, 그의 집은 한국 최초의 서양식 병원으로 개조되었다. 홍영식이 원했던 것이 바로 이런 서양식 병원이 아니었던가! 또 당시 현장에서 사관생도를 지휘하던 서재필은 미국으로 망명하여 한국인 최초의 의사가 되었다.

이렇게 보면 3일 천하로 끝났다고 평가되는 갑신정변이 완전히 실패한 것은 아니었다. 제중원이라는 한국 최초의 서양식 병원 건립과 최초의 의사 서재필의 배출로 이어졌으니 말이다.

제중원 규칙의 제정

조선 정부는 알렌과 협의하여 제중원의 운영과 관련된 규칙을 정했는데, 그 결정 과정과 내용이 흥미롭다. 규칙을 마련하기 위해 조선 정부는 우선 일본인 의사 가이세 도시유키(海瀨敏行)의 자문을 구했고, 12조로 된 '병원 규칙'의 초안을 4월 3일 알렌에게 통보하였다. 알렌은 이 초안에 대해 자신의 의견을 개진하였고 이것이 반영된 최종의 공립 의원 규칙이 제정되었다.

초안과 최종 규칙을 비교해 보면, 조선 정부와 알렌의 입장을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다. 초안은 제1조와 제2조에 병원을 담당할 책임자를 임명하고 관리 두 명을 두되 한 명은 상임(常任)으로 병원 운영에 참여한다고 조선 관리의 역할을 구체적으로 명기함으로써 제중원에 더 많은 권한을 가지려는 의도를 보였다.

그렇지만 알렌과의 협의 과정에서 이 부분이 삭제되었다. 즉 제중원에서 입장을 강화하려는 조선 정부의 의도가 협의 과정에서 좌절되었다. 이런 사정 때문에 시작부터 제중원은 이중적으로 운영될 수밖에 없었다. 선교사들에게 모든 권한이 위임된 일종의 위탁 경영이었던 것이다.

▲ 1885년 당시 재동 제중원의 복원 모형. ⓒ동은의학박물관

제중원의 이원적 성격

조선 정부는 제중원을 외아문 산하에 두었다. 제중원은 조선 정부와 알렌 개인의 관계 속에서 설립되었지만, 근본적으로는 조선과 미국의 외교 관계를 반영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또 동문학이나 육영공원의 경우 정부의 필요에 따라 외국인 교사를 채용하고 일정 기간 신분 지위와 보수를 보장한 것에 비해, 제중원 의사들은 이 같은 규정이 없었다. 이는 의사들이 조선 정부와의 관계에서 피고용자의 위치에 있지 않았기 때문이었고 당연히 의사에 대한 보수 규정도 없었다.

조선 정부는 하급 관리를 파견하여 필요한 경비 지원과 함께 의료진을 돕도록 했다. 제중원의 재정도 이원적으로 이루어졌는데, 그 운영과 관련하여 시사하는 바가 크다. 건물의 수리 비용, 일꾼들의 급료, 장례 비용, 음식비, 피복비, 연료비 등 일반 운영 경비에 해당하는 부분은 주사의 소관이었고, 의약품, 의약 기구, 학교 비품 구입 등 의료와 의학교육에 관련된 경비는 의료선교사의 소관이었으며 외아문에서 직접 받아 집행하였다.

조선 정부는 제중원의 개원에 즈음하여 '치료가 어려운 질병이 있는 자는 모두 내원하여 치료받아 국가에서 널리 구제하고자 하는 뜻에 부응하도록 할 것'을 알렸다. 제중원은 전통적인 온돌방을 사용하였고, 40병상 수준의 병실과 하루에 외래환자 100명을 치료할 정도의 시설을 갖추었다.

광혜원에서 제중원으로

한편, 고종은 4월 12일 병원의 명칭을 '널리 은혜를 베푸는 집'이란 뜻으로 '광혜원(廣惠院)'이라 붙였다. 하지만 2주일이 지난 4월 26일 병원의 명칭을 '사람을 구제하는 집'이란 의미의 '제중원(濟衆院)'으로 개칭하였다.

▲ 제중원 부녀과에서 진료했던 엘러스. ⓒ동은의학박물관
제중원이라는 명칭은 조선 정부의 의료정책에 대한 입장이 강하게 반영된 것으로 보인다. 본래 '제중'은 <논어>에 나오는 '박시제중(博施濟衆)'의 준말로 국가가 백성에게 인정을 베푼다는 의미로 이전부터 널리 사용되었던 표현들이었다.

진료에서 이룬 평등

제중원 설립 후 알렌, 헤론, 빈튼이 차례로 책임을 맡았다. 하지만 이들 이외에도 각 선교부에서 파견한 많은 의료선교사들이 제중원을 거점으로 활동하였다. 여자 의사인 엘러스(Annie J. Ellers), 호튼이 내한함으로써 제중원에 여성만을 위한 진료를 할 수 있었다.

제중원에서의 진료는 그 대상 범위가 매우 넓었다. 전국에서 환자들이 몰려들었는데, 거지나 나병 환자, 궁중의 높은 양반을 가리지 않고 모든 계층의 사람들이 같은 병원에서 진료를 받았다. 이는 당시 신분상의 차별과 남녀 간의 차별이 엄존하던 우리나라의 봉건적 관습을 깨뜨리고 만민이 평등하다는 것을 보여준 파격적인 사건이었다.

자료 1

▲ 1885년 알렌이 고종에게 서양 병원의 설립을 건의한 병원 설립안 원문(왼쪽)과 한문 번역(오른쪽). @서울대학교 규장각

서울의 조선 국왕과 폐하의 정부를 위한 병원 설립안

최근의 소요이래, 저는 몸에 박힌 총탄을 제거하거나 화기에 의한 상처를 치료하기 위해 그리고 다른 이유로 아픈 사람들을 치료하기 위해 많은 조선인에게 호출되었습니다.

저는 제가 할 수 있는 일은 했습니다. 그러나 이들 가운데 많은 사람들은 저의 처소에서 멀리 떨어져 살고 있어 왕진을 가기가 어려웠습니다. 그것은 민영익 각하와 부상당한 청나라 군인을 치료하기 위해 저의 많은 시간이 투여되었기 때문입니다. 일부 재력 있는 환자들은 나의 처소 근처에 방을 얻었으므로 저는 그들을 매일 볼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많은 가난한 사람들은 적절한 시설의 부족으로 치료를 받을 수가 없었습니다. 저는 미국 시민으로서 조선 국민을 위해 제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하려고 합니다. 만약 정부에서 약간의 시설들을 제공한다면 병든 사람들은 서양과학에 의해 치료를 받고, 부상당한 군인들도 돌볼 수 있는 장소가 생기는 것이므로 조선정부로서도 큰 이익이 될 것입니다.

그리고 이곳은 젊은이들에게 서양의 의학과 보건학을 가르치는 기관이 될 것입니다. 미국의 모든 도시에는 하나 이상의 병원이 있습니다. 서울에도 병원은 하나 꼭 있어야 하고 적은 비용으로 만들 수 있습니다.

저는 기꺼이 정부의 관심 아래 병원의 책임을 맡으려고 하며, 저의 업무에 대한 보수는 없어도 됩니다. 필요한 것은 쾌적한 장소에 위치한 커다란 한옥 한 채와 1년 단위의 운영비가 전부입니다. 이 운영비에는 조명, 땔감, 조수 · 간호원, 잡역부로 일할 사람들과 가난해서 음식을 마련할 수 없는 환자들을 위한 음식과 약값 300불 정도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 제안을 수락하신다면, 여기에서 일할 다른 미국인 의사를 6개월 내에 구할 것이며, 우리는 보수를 받지 않고 함께 일할 것을 약속드립니다. 우리의 생활비는 미국에 있는 자선 단체에서 지원을 받을 것입니다. 현재 이 단체는 북경, 천진, 상해, 광동과 다른 중국 도시들의 병원에 지원을 하고 있는데, 이 중 두 곳은 이홍장(李鴻章)이 재정 지원을 한 곳입니다.

이 제안을 수락하신다면, 그 기관은 왕립병원(His Corean Majesty's Hospital)이라고 부르게 될 것이고, 고통 속에 있는 국민들이 적절하게 치료받는 것을 보는 기쁨을 폐하에게 안겨드릴 것입니다. 또한 이로 인해 의심할 여지없이 백성들은 폐하에게 더욱 친근감을 느낄 것이며, 백성들의 사기는 올라갈 것입니다.

알렌 (서명)

자료 2

1885년 (음력) 2월 공립 의원 규칙

▲ 공립 의원 규칙(1885). ⓒ서울대학교 규장각
제1조 생도 약간 명(幾員)이 매일 배우는 시간은 오전 7시부터 오후 4시까지이며, 휴일을 제외하고는 마음대로 놀 수 없다. (학업에) 정통하고 탁월하여 중망을 얻은 자는 공천하여 표양한다.
제2조 생도는 약의 배합 및 제조와 기계 등의 설치를 담당하며 한결 같이 의사의 지휘를 따라야 한다.
제3조 서기 2명은 각 항의 문서와 계산을 담당하며 하나하나 상세하게 해야 한다. 6월과 12월에 통계를 낸 후 공립의원의 각 관서에 고감(考鑑)하게 한다.
제4조 당직 2명은 각 방을 정결하게 하고 의약의 여러 도구 및 원내의 물품을 관리한다. 이유 없이 물품이 없어졌을 때는 처벌을 받는다.
제5조 문지기[門直] 2명 가운데, 한 명은 외문에서 환자의 성명을 먼저 기록하고 차례대로 패(牌)를 지급한 후 들어가도록 하며, 다른 한 명은 중문에서 갑·을 등등의 순서가 적힌 앞의 패를 거두어 살핀 후 의사를 만나도록 한다. 빈패(貧牌)를 소지한 사람에게는 원패(元牌)가 모두 들어간 다음에 들어가도록 한다.
제6조 환자가 외문에서 이름을 기록할 때 동전 2전을 납부하며 가족이나 의탁할 자가 없는 경우에는 빈자패(貧字牌)를 지급하여 들어가게 한다. (그리고) 패를 살핀 후에야 가지고 들어가게 한다.
제7조 사환은 5명 이내이며, 2명은 주방의 일을 담당하고 다른 2명은 뜰을 청소하고 아궁이에 불을 지피는 등의 여러 일을 맡으며 나머지 사환 1명은 물을 긷는다.
제8조 환자가 몸을 움직이지 못하여 의사를 요청해 의사가 몸소 왕진한 경우의 비용은 한 번에 동전 50냥을 선납한 후에야 의사를 만날 수 있다.
제9조 입원한 환자는 자신의 치료비를 예와 같이 가져와야 하는데, 상등 환자의 1일 치료비는 동전 10냥, 중등 환자는 5냥, 하등 환자는 3냥이다. 가족이나 의탁할 자가 없는 사람에게는 공립의원(의 예산)에서 그 비용을 보전(補塡)한다.
제10조 약값은 상‧중‧하등의 환자가 사용한 물품에 따라 돈을 치르도록 하며, 가족이나 의탁할 자가 없는 사람에게는 공립의원(의 예산)에서 그 비용을 지급한다.
제11조 공립의원에 임용된 모든 사람에게는 세 사람의 보증을 받아 추천을 통해 임명한다. 만약 물품이 없어졌을 때는 물품의 값을 해당 담당자에게 징수하고 담당자가 감당하지 못할 때에는 곧 세 사람의 보증인에게 징수한다.
제12조 간병하는 시간은 오후 2시에서 4시까지이다.
제13조 만약 문병인이 아닌데도 함부로 들어왔을 경우에는 그 사람을 중징계하고 문을 담당한 사람에게도 태벌을 가한다.
제14조 문병인을 제외하고 학도와 간사인을 보러 오는 자가 있을 때는 외문에서 문지기를 통해 연락한 후 들어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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