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V. 다가오는 세계: 군사화, 인플레이션, 불황**
***4. 1990년대: 군사-석유 자본 동맹과 기술-합병 자본 동맹**
앞에서 나온 이야기를 잠깐 정리해본다. 1990년대에 지배적 자본 집단이 평균적 자본의 축적을 능가하는 차등화 축적의 방법으로 사용했던 것은 지구적 규모에서의 인수 합병이었다. 그런데 2000년 벽두로 들어오면서 그러한 인수 합병의 물결은 분명히 사그라지고 말았다. 그래서 지배적 자본 집단이 평균을 능가하는 실적을 올릴 방법이 모호해지고 말았다. 만약 이렇게 되어 이들의 자산 증가율도 평균적 자본의 수준으로 떨어지고 만다면 이는 그 지배적 자본 집단의 입장에서는 참기 힘든 '차등화 축적의 위기'가 아닐 수 없다. 그런데 인수 합병 이외에 차등화 축적을 달성할 수 있는 또 하나의 유력한 방법이 있다. 이는 자신들의 우월한 권력을 가격 결정력으로 전환시켜 가격 인상을 통하여 매출에서의 이윤율(마크업)을 증대시키는 '깊이 지향' 축적 양식이다.
인플레이션을 그리워하는 소리는 이들 뿐 아니라 세계 경제 전반에서도 나오기 시작한다. 1990년대에 계속된 경제 성장과 과잉 설비 투자의 영향으로 인하여 가격 수준은 안정된 수준을 유지하였다. 그런데 세계 각국 경제의 부채 비율은 1930년대 대공황 직전을 훨씬 능가하는 수준으로 올라가 있는 상태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디플레이션으로 인한 부채 위기가 촉발될 경우 그 결과는 실로 걷잡을 수 없는 것일 수밖에 없고, 특히 2000년 기술주 폭락 이후로 이러한 우려는 주요한 경제 행위자들 사이에 확산되기 시작하였다. 따라서 세계 경제가 인플레이션의 기조로 옮아가는 것이 지배적 자본 집단의 이익에서나 전체 경제의 관점에서나 강력하게 선호될 만한 조건이 창출되었다.
사실상 인플레이션은 최소한 지난 반세기 동안 미국 경제의 경험을 볼 때에, (신)고전파 경제학의 주장과 달리 노동에서 자본으로 또 중소 자본에서 대규모 자본으로 소득을 재분배하는 강한 경향을 갖는다. 또 통념과 달리 인플레이션은 경제 성장이 아닌 전체 경제의 침체를 동반하는 경향을 띠며, 따라서 경기 침체와 물가 상승이 동반되는 현상인 스태그플레이션은 오히려 정상적인 현상으로 보아야한다.
그런데 인플레이션이라는 현상은 몇몇 개별 행위자들이 만들어낼 수 있는 간단한 과정이 아니다. 인플레이션은 몇몇 개별 행위자들이 만들어낼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전체 경제의 행위 규범의 변화를 전제로 하는 전반적인 것이며, 또 이는 기존의 사회적 경제적 권력의 구조가 재구조화되는 근본적인 '사회적 위기'를 수반하는 경향이 있다. 따라서 인플레이션의 방향으로 세계 경제가 전환하기 위한 두 가지 정도의 조건을 생각해 볼 수 있다. 첫째, 전체 경제의 행위자들이 발맞추어 인플레이션으로 행위 규범의 전환을 이룰 수 있게 하는 강력하고도 보편적인 신호가 있어야 한다. 둘째, 그러한 전환에 필요한 전체 사회에 걸친 위기는 특히 전쟁과 같은 군사적 분쟁 갈등의 형태로 표출될 가능성이 높다.
여기에서 우리는 이 연재의 2부에서 보았던, 닛잔/비클러가 군사-석유 자본 동맹(Weapondollar-Petrodollar Coalition)이라고 불렀던 집단의 동향에 다시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이들이야말로 인플레이션으로의 전환에 필요한 이 두 개의 조건을 창출하는 데에 대단히 근접한 거리에 있는 집단이기 때문이다.
***인플레이션과 원유 가격 인상**
현대의 세계 경제에서 원유는 분명히 가장 비중이 큰 기본 생산 요소의 하나임에 틀림이 없다. 따라서 원유 가격 상승-원가 상승-국제적인 인플레이션으로 연결짓는 통념이 나오는 것도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닛잔/비클러는 이러한 인과 관계 설정에 대해서 좀 더 조심스럽다. 분명 원유가 상승이 비용 상승에 끼치는 영향이 존재할 것이다. 하지만 1970년대 석유 위기 이후 각국의 기술 개발 등의 노력으로 에너지 효율성은 두 배로 늘어온 반면 원유의 '실질' 가격은 계속해서 하락해왔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1980년까지만 해도 원유 생산 총액은 세계 총 생산의 7.5%를 점유했으나 2001년이 되면 2.1%까지 하락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 연재의 2장에서 보았듯이, 닛잔과 비클러는 원유가의 결정 요인이 실제의 공급량이나 비용보다는 '희소성에 대한 인지(perceived scarcity)'와 같은 심리적 요인임을 지적한 바 있다. 실제 원유의 공급이 '물질적으로' 희소한가 아닌가보다 장래의 경향에 대한 불안 심리가 원유가를 좌우하는 더욱 중요한 요인이라는 것이다. 원유 가격과 인플레이션의 관계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의 관계가 있다고 볼 수 있다. 세계 경제 전체는 1970년대 오일 쇼크 당시 일종의 '파블로프의 개'에 필적하는 강한 심리적 외상을 입은 바 있다. 따라서 원유 가격이 세계 경제의 원가에 끼치는 영향이 실질적으로 어떠한가와 무관하게, 1970년대에 놀란 적이 있는 세계 경제에 있어서 원유 가격의 상승은 여전히 물가 전반의 동향을 결정짓는 대단히 강력한 심리적 요인으로 작용할 수 있다. 즉, 원유 가격의 상승은 대단히 강한 예측력을 보여주는 인플레이션의 선행 지표가 될 것이다. 닛잔/비클러는 다음의 그림을 통해 이를 입증하고 있다.
[그림 1]
(caption) 미국 소비 물가 지수를 이용하여 불변 달러로 표현한 원유가. 출처: International Financial Statistics through WEFA (series codes: L64@C110 for CPI in the industrialized countries; L76AA&Z@C001 for the price of crude oil; L64@C111 for the U.S. CPI).
1970년대 초까지의 소위 석유의 '자유 공급(free flow)'의 시대에는 원유 가격은 일정하게 유지되었기에 물가 수준과는 아무런 상관관계를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1970년대 초의 1차 오일 쇼크 이후 원유 가격의 등락과 선진국 물가 수준의 등락이 보여주는 상관관계는 대단히 밀접한 것임이 분명하다. 더욱이 한 가지 더 주의할 것은 두 계열의 시간차이다. 두 계열의 등락의 시점을 주의 깊게 관찰해보면 원유 가격의 등락이 물가 수준의 등락에 항상 몇 개월씩 먼저 벌어졌다는 시간적 선후 관계를 확인할 수 있다.
원유가 등락, 인플레이션, 또 이윤율의 관계를 보여주는 [그림 1]이나 또 이 전의 연재에서 나온 그림들은 모두 반세기 정도의 시간 지평에서의 추세를 보이는 것들이다. 세계 경제의 주된 행위자들은 이렇게 오랜 기간 동안 안정되게 반복되는 추세와 패턴이라면 분명히 학습하고 인지하여 행동 결정의 길잡이로 삼을 것으로 보는 것이 더욱 자연스럽다. 따라서 닛잔/비클러는 원유 가격 상승이 지배적 자본 집단을 포함한 전체 경제의 행위자들에게 '인플레이션'으로 행위 규범이 전환되었다는 것을 알리는 일종의 효시(嚆矢)와 같은 기능을 하는 것으로 보는 것이다.
우리는 2장에서 흔히 생각하는 바와는 달리 OPEC 국가들과 주요 석유 메이저 기업들은 원유 가격의 인상을 놓고 공통의 이해관계를 가지고 있다는 닛잔/비클러의 이론을 살펴보았다. 인플레이션의 촉발에 있어서 석유 자본의 동향과 위치에 대해 주의 깊게 살펴볼만한 이유이다.
***1990년대: '인동초'가 된 군사-석유 자본**
군사 자본에게나 석유 자본에게나 1980년대 후반 이후의 '지구화' 시대는 실로 고된 시절이었다고 할 것이다. 이 연재의 3장에서 보았듯이, 시장 자본주의의 지구화와 발맞추어 벌어진 세계적 인수 합병의 축적 양식은 석유 자본 그리고 군사 자본의 이익과 정반대의 조건을 필요로 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1990년대의 '어제의 세계'를 떠받치던 몇 가지 주요한 조건들이 있다. 세계 어디로든 쉽게 이동할 수 있는 지구적 자본의 이동성이 보장되어야 한다. 신흥 시장들(emerging markets)을 중심으로 곳곳에서 높은 경제 성장이 이루어지고 이를 엔진으로 삼아 세계 경제 전체도 성장한다. 또 이러한 세계 경제 전체의 성장을 매개하고 또 이용할 수 있도록 지구적인 금융 자본의 이동성이 철저하게 보장되어야 한다. 그리하여 주식 가격은 안정된 상승세를 보이고 긍정적인 사업 전망의 예측이 가능해진다. 이를 이용하여 대규모 기업들은 주가 상승의 과대 평가 효과(hyping)를 노리는 인수 합병에 착수한다. 이렇게 굴러가는 세계 경제에 '쥐약'처럼 해로운 것이 있다면 그것은 유가 상승과 군사 분쟁일 것이다.
유가 상승은 신흥 산업국들의 경제 성장을 둔화시키고, 환율 변동 등의 불확실성으로 자본의 이동성을 저해하며, 전체적인 사업 전망의 예측을 비관적으로 하거나 불투명하게 만든다. 따라서 낙관적인 장기 전망을 전제로 한 인수 합병 등의 프로젝트에 큰 걸림돌이 된다. 군사 분쟁이나 지구적인 전쟁 위기도 마찬가지이다. 중심부 국가들에서 지리적으로 떨어진 국지적인 몇 개의 분쟁이면 모를까, 강대국들의 이익이 전면적으로 얽힌 지정학적 요충지나 중근동 등에서의 군사 분쟁은 마찬가지의 결과를 낳게 된다.
따라서 '평화 배당금(peace dividends)'과 '석유에 절은 세상(world awash with oil)'이 1990년대의 경향을 포착하는 두 개의 중요한 핵심어가 된다. 1980년대 초만 해도 한때 배럴 당 80$(2002년 불변 달러)에 달했던 원유 가격은 1980년대 후반부터 급락하여 1999년 급기야 10$까지 떨어지게 된다. 하지만 1990년대식의 축적 양식이 절정을 달리던 당시 이러한 낮은 유가는 필연적인 것이었고 또 앞으로도 계속 그렇게 될 필요가 있는 것이었다. 그래서 1999년 3월 6일자 이코노미스트 지(The Economist)의 기사 "석유에 빠져 죽는다(Drowning in Oil)"는 '세계가 석유에 절어'있으며 '앞으로도 그럴 듯 하다'고 예측한다.
군수 자본 쪽의 상황도 좋을 리가 없다. 냉전이 종식된 1990년대에 군사 지출 삭감을 막기 위한 온갖 노력에도 불구하고, 클린턴 정부가 들어서면서 미국의 GDP 대비 군사 지출은 대폭 삭감되고, 2000년의 3.8%까지 떨어지고 말았다. 이 숫자로만 보면, 미국은 이제 2차 대전 이전의 '고립주의 미국' 수준으로 되돌아가고 만 셈이다.
[그림 2]
출처: Nils Petter Gleditsch, The Peace Dividend (Amsterdam and New York: Elsevier, 1996); U.S. Department of Commerce through WEFA (series codes: GDP
for GDP; GFML for military spending).
결국 1990년대는 군사-석유 자본 동맹에게는 실로 어려운 시절일 수밖에 없었다. 1970년대의 세계에서 최고의 전성기를 구가했던 이들도 그 시절을 참고 버티는 것 밖에 도리가 없었을 것이다.
***기술-합병 자본 동맹과 군수-석유 자본 동맹**
이렇게 창졸간에 '인동초'가 되지 않을 수 없었던 지배적 자본 집단 내에서 군수-석유 자본 동맹의 실적이 저조했으리라는 것은 쉽게 예측할 수 있다. 그런데 이들의 실적의 추이를 차등화 축적의 관점에서 더욱 흥미롭게 고려하기 위해 생각해야 할 요소가 또 하나 있다. 이는 닛잔과 비클러가 기술-합병 자본 동맹이라고 부른 집단이다. 이 집단은 1990년대 나스닥 등에서 전성시대를 구가하던 또 거기에 근거하여 활발한 합병을 이루던 컴퓨터 서비스, 정보 기술, 이동 통신 등등의 관련 집단들을 일컫는다.
차등화 축적의 핵심은 여타 집단과의 비교 속에서 얼마나 그들을 능가하는 속도의 자산 증가를 이루었는가이다. 따라서 군수-석유 자본 동맹에게 닥친 차등화 축적의 위기의 절박함을 제대로 짚어보려면, 지배적 자본 집단 내의 경쟁 상대인 이 기술-합병 자본 동맹의 실적을 대상으로 비교해보는 것이 의미가 있을 것이다.
[그림 3]
주의: 순 이윤은 주식 시가를 주가-수익률(PER)로 나누어 계산하였다. 계열들은 월간 단위 자료를 나타내며 12개월 이동 평균으로 다듬어져 있다. 출처: Datastream (series codes TOTMKWD for world total; OILINWD for integrated oil; DEFENWD for defense; INFOHWD for information technology hardware; TELEQWD for telecom equipment; SFTCSWD for software and computer services).
[그림 3]은 지구적 순 법인 이윤(global net corporate profit)에서 각각의 집단이 차지하는 몫을 퍼센트로 나타낸 것이다. 이 그림에 나타난 바의 1970년대와 1990년대의 기간을 비교해보면 그 두 기간은 특히 군수-석유 자본 동맹에게 천국과 지옥을 오가는 것과 같은 시기였음이 극적으로 드러난다. 1970년대와 1980년대 초 전 세계 이윤의 20%에 육박하던 군수-석유 자본 동맹의 이윤 몫은 90년대 들어와 3%까지 떨어지는 '모욕과 수모'를 당하게 된다. 한편, 1970년대에 군수-석유 자본 동맹에 적수가 되지 못하던 기술-합병 자본 동맹의 이윤 몫은 1980년대에 거의 엇비슷한 수준으로 경쟁을 하는 듯 싶다가 1990년대에 들어오면 후자를 멀찍이 제치고 그 절정기였던 2000년 초에는 전 지구 기업 이윤의 14% 몫의 파이를 잘라 가져간다.
1980년대 한국 노동자들에게 계급의식을 주입하려 애쓰던 박노해 시인의 시 중에 "독이 있어야 비약이며, 바이트가 있어야 선반이며, 밸이 있어야 노동자다"라는 구절이 있다. 계급적 이익의 각성에 있어서 '독'이나 '밸'로 친다면 지배적 자본 집단이 노동자에게 뒤떨어질 리 없다. 개중에서도 실로 가공할만한 위력을 보여주었던 군수-석유 자본 동맹이 과연 '독'없이 '밸'없이 이러한 수모를 당하고만 있었을까. [그림 3]에서 한 가지 더 흥미롭고도 극적인 반전이 보여진다. 2000년을 전후로 그렇게 '모욕적인' 군수-석유 자본의 수난은 드디어 바닥을 치고 그들의 이윤몫도 위로 솟아 오른다. 그리고 이와 궤를 같이하여 기술-합병 자본 동맹의 이윤 몫은 뚝 떨어지고 만다.
이렇게 거울로 뒤집은 듯한 정확한 역상의 경향이 벌어진 것이 우연일까. 물론 아니다. 2000년 이후에 벌어진 일련의 주요한 사건들-기술주 폭락, 9.11 테러, 아프간과 이라크 침공 등-은 한쪽에는 재난이요 다른 쪽에는 호기일 수밖에 없는 일들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그림 3]에 나타난 2000년 이후 두 계열이 보여주고 있는 극적인 대조는 우연도 아니며 '자연스러운' 것이다. 그런데 의문은 쉽사리 가지지 않고, 모습을 바꾸어 계속된다.
그 '일련의 사건들'은 '우연히' 생겨난 것이었을까.
분명히 이런 질문은 '음모 이론'의 영역에 닿아 있다. 그것이 '우연'이었는지 아니면 군수-석유 자본 동맹의 이익과 어떤 '인과 관계'를 갖고 있었는지를 증명할 자료가 있을 것 같지도 않고, 또 설령 있다 하더라도 쉽사리 얻어질 리가 없다. 따라서 이런 질문에 계속 집착하면서 근거없는 추측을 남발하는 것은 사회과학적 차원에서는 아무 소득이 없는 일이다. 닛잔/비클러는 구할 수 있는 자료 그리고 있었던 일 공표된 자료들을 꼼꼼히 모아 그럴 법한 설명틀을 만들어 내고 그것에 근거하여 미래의 향방에 대해 조심스런 진단을 할 뿐이다. 분명히 말할 수 있는 것은, 그 '일련의 사건들'이 석유 가격의 인상 그리고 세계적인 군사 분쟁이라는 인플레이션 발생의 두 가지 조건과 긴밀한 사건이라는 정도일 뿐이다. 나머지의 판단과 추측은 각자 알아서 할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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