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도에 도착하기 전날인 6일, '한국 피스 프로젝트팀'은 피스보트 위에서 일본비폭력평화대(NPJ) 공동대표인 오하타 유카타 대표와 인터뷰를 가졌다. 비폭력평화대는 인도 간디로부터 유래한 시민의 비폭력 개입이라는 발상에 기인, 분쟁지역에 개입해 평화적으로 문제를 해결하려는 국제단체다. 여타 국제평화단체가 구호활동을 중심에 둔다면 이들은 '분쟁의 원인'을 없애는 데 주력하려 한다는데 차이가 있다. 피스프로젝트팀의 김박태식(비폭력평화물결)씨가 글과 사진을 보내왔다. 편집자.
<일본 비폭력평화대 오하타 유카타 대표> 사진 이정용 기자
문: 비폭력평화대(이하 NP)에 대해 간략히 설명해달라.
유타카 : 시민의 비폭력 개입이라는 발상은 간디로부터 유래한다. 간디는 ‘비무장ㆍ비폭력 평화군대’를 만들 것을 제창하였고 1980년대에 이르러 세계각지에서 이러한 뜻을 가지고 실천하는 활동이 시작된다. 국제평화여단(Peace Brigades International, PBI), 평화의 증인(Witness For Peace), 평화교구회(Pastors for Peace), 걸프피스팀(The Gulf Peace Team), 기독교평화메이커팀(Christian Peacemaker Teams), 발칸피스팀(Balkan Peace Team), 국제우화회(IFOR) 등이 그러한 활동을 하는 단체이다.
NP는 1999년 헤이그 평화회의에서 제안되었고 3년 후 인도 델리에서 본격적인 출발을 하였다. 이전과는 달리 큰 규모로 분쟁지역에 개입하려 한다. 2천명의 현장 활동가, 4천명의 예비인원, 5천명의 지원자를 만드는 것이 목표다. 이러한 규모를 운영하기 위해서는 연간 8백만 달러(약 1백억원) 정도가 든다. 아직은 시작단계지만 꾸준히 성장하고 있다.
지금은 스리랑카를 대상지역으로 정해 11명의 평화활동가를 실험적으로 파견했다. 그들은 태국에서 훈련을 받고 지난 9월부터 스리랑카의 콜롬보에 파견되어 3개월의 훈련을 마친 후 2년 동안 활동하게 된다. 이러한 실험이 성공하게 되면 보다 대규모로 모집하여 비폭력운동을 본격화할 것이다.
문 : 훈련내용에는 어떤 것이 있는가?
유타카 : 훈련은 3주에 이어 3주, 6주로 구성된다. 비폭력운동의 역사, 카운셀링, 상대방의 이야기 듣기, 역할 훈련, 현지 정치단체의 역학 익히기, 인간관계 만들기, 팀과의 관계만들기, 원고 쓰는 능력 등을 공부한다. 주로 오전에는 현지언어를 익히고 오후에는 토론을 한다. 합숙방식으로 운영하며, 아무 것도 안 하는 시간에도 24시간 팀 속에 있어야 한다.비폭력 훈련을 마친 후 팀으로 나뉘어 현장으로 들어가서 활동하게 된다.
문 : 인간방패와 같은 활동인가?
유타카 : 우리는 ‘인간방패’라는 말을 쓰지 않는다. 인간방패라고 하면 특공대와 같은 느낌을 준다. 우리는 상대방의 양심에 호소하고 안전을 지키는 활동을 한다. 분쟁이 있는 현장에서 갈등을 조정하고 분쟁을 해결하는 다양한 활동을 벌인다.
문 : 일본 NP의 역사와 운영에 대해 설명해달라.
유타카 : 일본에서는 2000년 12월부터 NP의 창립자 중 한 사람인 데이빗 핫 소우와 준비를 하여 NPJGroup이라는 지원그룹을 만들었고 작년에 지금의 단체로 공식 출범했다. 스리랑카에 파견된 11명 중에 오시마 미도리라는 일본인도 참여하고 있다.
일본 NP에는 50명 정도의 회비를 내는 회원이 있다. 개인기부를 중심으로 하되 재단에서 후원을 받는 것도 시도하고 있다. 그러나 대부분의 재단이 환경문제나 국제 구호 등에 관심이 있고 평화운동에는 지원하지 않는다. 올해 오타카 재단으로부터 30만 엔을 받은 것이 전부이다. 독일의 Civil Peace Service의 예처럼 NP와 같은 활동을 유럽에서는 정부가 직접 하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일본에서는 아직 평화운동에 대한 사회적 지원이 턱없이 부족하다. 일본 NP는 공동대표 2명과 15명의 임원, 그리고 한 명의 반상근활동가(본인이 겸임하고 있다)로 운영된다.
문 : NP에 참여하기 전에는 어떤 활동을 했나
유타카 : 92년 9월 미국에 갔을 때 PBI(국제평화여단)를 만나게 되었고 비폭력행동에 동참하여 93년 10월부터 94년 6월까지 스리랑카에서 활동했다. 처음은 노동조합의 참관인으로 갔었는데 당시 노동조합에서는 그들의 요구를 받아들이지 않으면 자살을 하는 등 폭력적인 방식을 사용하는 경우가 많았다. 이들에게 평화적인 방법을 설득하고 또 집회나 시위에 참관하여 이들을 보호하는 일을 했다. 주로는 위급한 사람들을 보호하는 일을 했는데, 변호사, 저널리스트 등 주요인물이 암살의 위험에 놓여 있을 때 그 옆에 같이 동행하면 테러를 막는 효과가 있다.
당시 스리랑카에서는 경찰에 끌려가서 고문을 당하고 행방불명이 되는 경우가 많았는데, 이 역시 의뢰가 들어오면 데모행렬, 반정부 시위에 방문하여 그들을 보호하는 일을 했다.
등에 노란 표식을 붙이고 현장에서 나가면 현지 사람들이 함부로 하지 못한다. 특히 일본에서 스리랑카 정부에 많은 지원을 하고 있기 때문에 일본인을 함부로 하지 못한다. 그러나 너무 눈에 띄면 경계감을 일으키기 때문에 조심스럽게 행동해야 한다. 또한 지역분쟁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그 지역의 풍습을 존중해야 한다.
문 : PBI에 대해 간단히 설명해달라.
유타카 : PBI 1981년 멕시코에서 만들어져서 현재 세계 18개국에 지부를 가지고 있다. 콜롬비아, 인도네시아, 콰테말라, 엘살바도르, 스리랑카, 북아메리카, 타이티로 평화활동가를 파견한 역사를 가지고 있다. 활동가나 난민의 생명의 안전을 지키는 일을 주로 하며 국제적 감시활동이나 정보전달을 한다. 분쟁에 개입하는 활동은 상대방에서 의뢰가 들어올 때 움직인다. 요청하지 않았는데 우리가 판단해서 개입하게 되면 중립성의 문제가 생기기 때문이다. 피해자의 입장에서 지원 활동을 하는 것은 물론이다. 함께 위험을 부담하자는 생각이고, 이념이나 정치적 색채와는 상관이 없다. 중립성을 지키려다보니 공격성이 부족한 것이 사실이다. 실제로 과테말라의 경우에만 중재 활동을 했고 나머지는 거의 개인의 안전을 지키는 것에 중점을 두었다.
문 : PBI와 NP의 차이점은?
유타카 : 가장 큰 차이는 규모에 있다. PBI는 규모가 크지 않다. 작은 규모라서 기동적으로 움직일 수 있는 장점이 있다. NP는 아직 아이디어의 단계이긴 하지만 큰 규모로 분쟁에 개입하고자 한다. 기존의 PBI에 힘을 싣는 방법도 있지만 새로운 틀로 새롭게 시작하는 것이 좋겠다는 판단이었다. 실제로 PBI의 활동은 언론에 별로 나오지 않았지만 NP는 시작부터 일본 언론에도 몇 번 다루어졌다.
PBI 활동가는 급료를 받지 않으나 NP는 현장에 파견된 활동가에게 활동비를 준다. 가족들을 부양하고 현지에서 쓸 수 있는 비용을 주는 것이다. 활동비를 주지 않는 경우 1년 정도 자원활동 기간이 지나면 제3세계 사람들은 경제적인 이유로 활동을 지속할 수 없게 된다. 결국 잘 사는 북반구 사람들만 남게 되고 어떤 사람들은 이것을 평화제국주의라 일컫기도 한다. PBI는 10일의 훈련을 받은 후 현장으로 들어감에 반해 NP에서는 60일 동안의 훈련을 받아야 한다.
사진2 <스리랑카에서 훈련을 받고 있는 비폭력평화대 팀원들과 함께. 맨 왼쪽이 오하타 대표>
문 : 이러한 활동이 효과가 있는가?
유타카 : PBI를 하면서 어려웠던 점은 활동의 성과를 정확히 파악할 수 없었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개인방어를 해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을 때 그것이 PBI의 성과인지 아니면 우리가 없었어도 아무 일 없었을지 알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활동의 성과를 긍정적으로 보는 시각이 많다. 뉴욕타임즈에서도 과테말라의 활동은 성과가 있었다고 평가했다. 또 우리가 인터뷰를 통해 현지 단체활동가로부터 직접 들었던 것은 우리 때문에 현지의 비폭력행동이 힘을 얻는다는 말이었다.
스리랑카의 경우 좋은 기회라고 생각한다. 여러 가지 어려움은 있겠으나 스리랑카 정부와 타밀 반군(LTTE) 사이에 대화를 하고 있다. 정치적 화해가 없으면 비폭력 개입의 활동도 쉽지가 않다. 더불어 시민, 지역주민의 협력이 있어야 평화정착이 가능하다. 이러한 조건 위에서 비폭력운동이 좋은 성과를 낼 것을 기대한다.
문 : 개인적인 여정을 소개한다면
유타카 : 1963년에 태어났다. 재수학원에서 아키라고 하는 영어선생을 만났는데 그는 ‘아시아인을 위한 영어’(English for Asian)라는 강좌를 만들기도 한 깨어있는 사람이었다. 대학을 졸업하고 도쿄사회복지연구소(Social Welfare Institution of Tokyo)라는 단체에서 3년 동안 일을 했다. 그리고 워킹홀리데이 비자로 호주로 건너갔는데 여기에서 아키 선생의 소개로 평화운동단체를 만나게 되었다.
91년 걸프전이 났을 때 평화운동의 필요성을 절감하게 되었다. 그 전에는 정치라든가 논쟁 같은 것을 불필요한 것으로 생각하고 꺼렸으나 진정한 평화를 위해서는 행동을 해야 한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이 때 일본에서는 걸프전에 지출한 90억 불이 위헌이라는 소송이 붙었는데 이 운동에 참여했다. 2000명이 법정투쟁을 벌였고 걸프전이 ‘더럽고 부정의한 전쟁’이라고 강력히 주장했다.
운동의 과정에서 어떻게 하면 전쟁을 막을 수 있는지 고민하다가 92년 9월부터 1년 동안 미국에 머무르면서 PBI를 만났고 비폭력행동에 동참하여 93년 10월 스리랑카로 파견되어 다음 해 6월까지 활동했다.
문 : 개인적인 갈등은 없었는지
유타카 : PBI를 만나서 위험을 접하게 되었다. PBI에서는 현장으로 가기 전에 계약서 비슷한 것을 쓰는데 피해에 대해 단체에서 책임을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처음에는 갈등을 했으나 일본에 있을 때 비폭력을 외쳤던 내가 바로 그러한 행동을 만났는데 두렵다고 피하게 되면 이전에 외쳤던 말과 주장이 무의미해지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두려움을 극복하고 PBI 활동에 동참하게 되었다. 이것은 불교의 가르침이기도 했다.
문 : 평화운동에 적극 나서게 된 계기가 있다면
유타카 : 평화헌법의 서문이 있다. 일본에 있을 때에는 그것을 읽지도 않았었지만 바깥에 나가서 접하게 되면서 최고의 발상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것을 반드시 지켜야 한다는 일본 사람으로서의 의무가 있다는 것을 느꼈다.일본에만 있었다면 ‘바쁘다’ ‘시간이 없다’고 핑계를 대며 접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미국에 있으면서 오히려 일본인이라는 자각이 강해졌다.
사진 3. <물레를 가지고 실을 뽑는 시범을 보여주고 있는 오하타 대표>
문 : 물레를 가지고 다니는 것이 인상적이었다. 간디를 언제 접하게 되었는가?
유타카 : 간디를 제대로 만나게 된 것은 스리랑카에서였다. 그 전에는 그저 독립을 위해 활동했던 사람 정도로만 알고 있었는데 PBI 활동을 위해 스리랑카에 있을 때 인도 간디아슈람에 들를 수 있었다. 여러 가지로 대단한 사람이라는 것을 알았다. 간디는 어떤 작은 행동이라도 의미를 두고 실천한 사람이었다. 문화적 충격을 받고 일본에 돌아와 간디에 관한 책을 찾아보면서 심취하게 되었다. 특히 “간디의 경제사상”이라는 책을 통해 현대 경제의 문제를 깊이 생각하게 되었고 그래서 물레를 구해 돌리게 되었다.
문 : 마지막으로 한국에 한 마디 한다면
유타카 : 한국과 일본은 슬픈 역사를 가지고 있다. 상처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오랜 시간이 걸리겠지만 공을 들이면 극복할 수 있을 것이다. 비폭력 행동이 관계의 치유에 도움이 될 것이라 믿는다.
프레시안에 제보하기

프레시안에 CMS 정기후원하기

전체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