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식경제 시대, 우리의 탈출구는?**
지난 회에서는 IT 산업을 중심으로 현재 우리나라 경제, 그리고 기술 구조의 문제점들을 간단하게 살펴보았다. 그 결과 앞으로 우리가 직면해야 할 도전들이 결코 만만한 것이 아님을 확인할 수 있었다. 혹자들은 그렇다면 도대체 대안이 뭔가, 이렇게 질문할 것이다. 그러나 대안을 말하기 위해서는 검토해야 할 중요한 사항들이 아직도 많이 남아있다. 한 가지씩 차근차근 짚어나가도록 하자. 오늘은 '지식경제'의 의미 그리고 과학과 기술 간의 지식 연관에 대해서 살펴보자.
'지식경제'라는 말이 유행어가 된 것은 사실 얼마 되지 않았다. 게다가 지식이라는 말을 광범위하게 사용한다면 인류 역사 이래 지식이 문제가 되지 않은 때는 단 한순간도 없었다. 가령 경제의 영역만을 고려한다면 투입 대비 산출의 차이를 결정하는 것은 지식의 양과 질 외에 다른 게 없다. 또한 무엇을 생산할 것인가를 결정하는 궁극적 요인 역시 욕망과 문화적 가치, 그리고 이 양자의 진화를 규제하는 지식의 발전이다.
이런 관점에서 보자면 경제 성장에 있어서 지식의 본질과 역할을 다음과 같은 3C로 표현할 수 있을 것이다.
기술은 자연 대상의 물리적 특징을 이해하고 법칙화함으로써 인간의 필요에 따라 새로운 물건을 만들어낼 수 있는 방식(Create)에 관한 지식이며, 경영이란 사람들의 욕망과 가치가 변화하는 방향을 예측하고 그에 따른 가치 상품을 가장 낮은 비용으로 생산할 수 있도록 기업의 자산을 효과적으로 조합(Coordination)시킬 수 있는 지식이고, 국가의 정책은 기업의 경영 행위가 전체 국민 경제에 조화롭고 긍정적으로 연결되도록 방향을 설정하며 그에 따른 산업-기술 구조를 구성(Configuration)하기 위해 필요한 지식이다.
(여기서 3C로 표현되는 지식경제의 핵심은 일반적으로 알려진 기업의 본질, 경제 정책의 본질과는 다르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특히 경제 정책의 핵심은 개발경제 시대의 규제(Regulation)를 통한 국가의 직접적인 개입과는 달리 전략적 산업-기술 기반 구축에 놓여져야 한다. 이에 대해서는 6회 이후 산업-기술 정책과 관련해 다시 거론할 것이다.)
***'지식경영'의 핵심은 무엇인가**
그러나 1990년대 중반 이후 등장한 지식경제라는 화두는 지식이 경제 성장에서 차지하고 있는 일반적인 중요성을 다음과 같은 사실 때문에 새삼 깨닫게 된 결과이기도 하다. 1980년대 이후 경제체제의 중심이 3차 산업 부문으로 이동했다는 점, 생산 과정의 기계화 및 자동화 그리고 기업 내부의 합리화뿐만 아니라 기업 내외의 '자산-지식 연결망(capability network)'이 점차 중요해진 점이 그것이다.
또 한 가지 주목해야 할 것은, 역설적이지만, 경제 성장이 진행되는 방향을 생산성 상승이 빠른 부분이 아니라 지식생산과 같은 생산성 성장이 가장 느린 부분이 결정하고 있다는 점이다. IT 기술의 발전으로 빠르고 광범위하게 정보가 공유되는 우리 시대에 지식 생산과 경영이 ‘시대의 화두’로 떠오르고 있는 것이야말로 단적인 증거이다.
특히 기술 혁신과 관련해서 보자면 새로운 모습이 나타나고 있다. 과학의 발전이 한편으로는 전문적 분화를 거듭한 반면, 또 다른 한편으로는 다양한 학제 간의 이론적 연관성이 계속 증가하고 있는 것이다. 이와 관련해 최근 각광을 받고 있는 나노기술의 발전이 시사하는 바는 의미심장하다.
분자 수준에 초점을 맞추는 나노과학에 이르면 물리학, 화학, 생명과학 내의 학제 분화는 가속화되는 반면, 이들 세 분야를 관통하는 이론적 기반은 사실상 구분이 힘들어진다. 뿐만 아니라 20세기 이후 중요한 기술 혁신은 예외 없이 모든 경우에 두 학제 이상의 과학 이론적 기반위에서 만들어졌다. 이러한 양상은 자연과학이나 공학의 분야에서 뿐만 아니라 사회과학의 영역에서도 마찬가지로 관철되고 있다.
지식산업의 발전은 이렇듯 전문화, 다양화되는 지식발전의 경향과는 반대로 바로 그만큼 집중과 연결의 필요성이 증대하고 있는 데서 근원을 찾을 수 있다. 그러나 집중과 연결을 통한 새로운 지식 창출은 결코 쉬운 과제가 아니다. 예를 들어 정보통신과 인터넷의 발전으로 과거 대영 도서관이 차지했던 역할은 이제 구글(Google)로 확실하게 이동했다. 지식이 단지 축적된 정보의 양을 의미한다면 구글과 야후가 세계의 유명 대학들을 능가해야 한다. 하지만 정보가 곧 지식은 아니다.
지식경영의 핵심은 통합과 집중이 이루어지는 지식 설계, 지식의 구조를 만들어내는 것에서 승부가 갈려진다. 따라서 근본 원리, 기초과학에 대한 깊이 있는 이론적 지식기반이 존재하지 않는 한 집중과 연결에 기반을 둔 하이브리드 지식생산은 불가능하다. 지식경영의 목표를 관통하는 맥락을 올바로 포착해서 그에 걸 맞는 구조를 설계하는 것이 갈수록 중요해지는 것도 이 때문이다.
***과학기술 수준 분석, 어떻게 해야 하나?**
우리나라의 세계적인 과학기술 수준에 대한 정부의 조사결과가 한 달 전쯤에 발표됐다. 세계적인 저널들에 실린 국내학자들의 논문수를 기준으로 보면 13위이고, 한국인 연구자의 논문이 다른 연구자에 의해 인용된 수를 기준으로 하면 43위라고 한다. 이 결과는 과거에 비해 상당히 나아진 것이 분명하지만 여전히 안심할 만한 수준은 아니다. 과학기술 지식 수준을 평가하기 위해서는 각 분야의 지식 특성을 더 정확하게 파악하고, 그에 따른 측정 기법을 개발, 보다 세밀한 조사를 해야 한다. 이를 지식경영의 관점에서 좀 더 자세하게 살펴보자.
일단 기초과학의 경우는 논문의 단순 등재 수보다는 피인용 지수가 훨씬 중요하며, 공학의 경우는 지식 연관이 특정한 영역과 방향으로 집중되는 특성상 우리나라 연구자들이 제출하는 논문들의 핵심 지식 접근도와 집중도가 중요하다. 예를 들어, 복잡한 내용을 거칠게 단순화하자면 다음과 같다.
기초과학의 경우는 학술지에 따라 매겨지는 등급(5등급)에 따른 가중치를 논문 게재수 및 피인용 지수와 함께 계산해야 하며, 공학관련 논문의 경우는 지식 지도 분석을 통해 세계적인 첨단 핵심 연구 분야를 추출한 뒤, 이 분야에 대한 논문의 접근도에 따른 가중치를 함께 계산해야 한다. 특히 과학-공학-기술로 이어지는 지식연관을 보다 정확히 파악하려면 이들 세 영역 각각에 대한 지식 지도 분석을 통해 핵심적 지식 구조(Core knowledge structure)를 추출하고, 이 지식 구조가 과학-공학-기술로 시간적으로 이행하면서 보여주는 동태적인 변화 양상을 추출해내야 한다.
이런 방식의 과학-기술 지식 분석이야말로 우리나라의 산업구조가 제기하는 과제, 전략 방향에 따라 과학기술정책이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야할지, 어떤 영역에 연구역량을 집중해야 할지, 정부가 개입해야 할 부문은 어디인지를 보다 구체적이고 분명하게 보여줄 것이다. 작년부터 특허맵이니 지식맵이니 연구 보고서가 제출되고 있긴 하지만, 안타깝게도 이런 류의 분석은 단 한 번도 이루어진 적이 없다.
굳이 이런 분석이 아니더라도 현재 발표된 과학지식 수준 조사 보고와 관련, 한 가지 우려스러운 것은 기초과학 피인용 지수가 논문 등재수에 비해 네 배 이상 턱없이 떨어진다는 점이다. 이는 직접적으로는 우리나라 기초과학 연구수준이 선진국 따라가기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음을 보여줄 뿐만 아니라, 단순 논문 등재수에 따른 연구자들의 업적 평가방식이 유지되는 한 기초과학 분야 연구의 질이 지속적으로 낮아질 가능성도 있다는 점이다.
***차세대 과학기술 잠재력 중국보다 뒤져, 희망은 어디에?**
한 가지 눈에 띄는 예를 들어보자. 차세대 기술 패러다임으로 불리는 나노기술과 관련해서 우리나라의 기술력은 빠르게 성장하고 있다. 단순 특허건수 연간 성장률로만 보면 만족스러울 정도이다. 그러나 앞서 말했던 지식-기술경영의 관점에서 본다면 몇 가지 심각하게 우려스러운 점 역시 발견된다.
2003년에 있었던 한 외국인 연구자의 보고에 따르면, 우리나라의 나노 관련 특허건수는 2002년 기준 세계 8위였다. 국가별 격차는 미국이나 일본과 비교할 경우 약 5백배에서 2백배 정도라고 한다. 그런데 연구방법의 차이가 있겠지만, 2004년 우리나라 특허청 조사에 따르면, 국가별 특허수 비교에서 세계 12위로 나타나 있다. 2년 사이에 네 계단 정도 밀려난 것이다.
하지만 정말 우려해야 할 것은 단순한 순위 후퇴가 아니다. 나노기술이 세상에 등장한지 20여년이 지난 지금 나노기술의 중심은 확실하게 톱다운(외부 기기의 조작을 통해 분자구조를 변경하는 것)에서 바톰업(물질의 분자구조가 스스로 변경, 재구성하도록 디자인 하는 것)으로 이동하고 있다. 그 결정적 분기점이 바로 2002~2004년이었다. 이에 반해 우리나라 나노 특허의 대부분은 톱다운 방식인 나노 소자 부문에 집중되어 있다. 기술 패러다임의 중심이 변화하는 시기에 일어난 순위 후퇴, 이게 정말 우려해야 할 일이라는 것이다.
특히 나노과학과 관련된 세계적인 최우수 학술지 5종에 대해 2004년부터 지금까지 개인적으로 모니터링한 결과를 보면, 한국인 저자는 손에 꼽을 정도임에 반해 우리나라를 뒤이어 7위를 기록한 중국인 저자들의 경우는 놀랄 만큼 폭발적인 성장세를 보여주었다는 점도 주목해야 할 부분이다. 이는 곧 특허나 논문의 단순 등재수가 아니라 지식 패러다임의 변화를 기준으로 놓고 볼 때 중국이 이미 우리나라를 앞질렀다는 것을 의미한다. (나노 기술 패러다임에 대한 구체적인 논의는 5회분에서 다뤄질 것이다.)
그러나 실망하기에는 아직 이르다. 과학 지식이 기술의 지식 원천인 것은 분명하지만 과학이 기술의 변화를 결정하는 것은 아니며, 기술의 발전이 과학의 발전을 추동하는 가장 강력한 추진력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마치 미국의 1920~1940년대가 그러했던 것처럼 말이다. 미국은 1920년대를 기준으로 볼 때 노벨상 수상자 수를 기준으로 영국, 프랑스, 독일을 이어 대략 4위 정도의 과학지식 수준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러나 1900년대 초반의 눈부신 기술 혁명은 그에 필요한 새로운 과학 영역을 등장시킨 것은 물론 1960년대를 거치면서 지금까지 부동의 세계1위를 유지하게 된다.
특히 몇몇 근본기술 혁명을 기반으로 탄생한 새로운 학문영역과 기업의 연구소에서 배출된 노벨상 수상자들의 숫자를 고려한다면 산업-기술 정책의 성공여하에 따라 얼마든지 판세를 역전시킬 수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래서 문제의 열쇠는 항상 전략적 설계(Strategic Configuration)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