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레시안 books'는 창간 3주년을 맞아 '번역 특집'을 준비했습니다. 열두 명의 번역가들이 어떤 식으로든 기억에 남는 자신의 번역서 한 권을 골라 그에 관한 이야기를 들려주었습니다. <편집자> |
몇 년 전, 국제도서전 참석차 한국에 온 온다 리쿠 여사를 만났을 때, 내게 이런 질문을 했다.
"의뢰가 들어오면 마음에 드는 작품만 골라서 작업하세요?"그때, "아니요, 그냥 의뢰받으면 다 하는 편이에요."라고 대답해놓고 두고두고 생각날 때마다 머리를 쥐어뜯었다. 얼마나 없어 보이는 대답인가. 실제로 생계형 번역가인 나로서는 스케줄과 번역료만 맞으면 대부분 수락하는 편이긴 하지만(소설에 한해서), 그렇다 하더라도 그녀가 확인할 것도 아닌데, "네, 제가 좀 까다로워서 작업할 책을 아주 신중하게 골라요. 오호호."라고 대답했더라면 있어 보이고 좋았을 텐데 말이다. 그럼 온다 여사도 이런 사람이 내 작품을 번역했구나, 하고 흐뭇해했을 텐데… 라고 뒷북쳐봐야 소용없는 일.
되도록 외면하며 살지만, 어쩌다 인터넷에서 만난 서평 중에 '권남희 옮김이어서 일단 이 책을 믿고 골랐다'라는 글을 볼 때가 있다. 이것은 얼핏 좋은 말 같지만, 악평만큼이나 무섭다. 이런 분들이 하필 망작을 만나기라도 한다면 '권남희 옮김은 절대로 안 사야지'가 돼 버릴 테니 말이다. 일 년에 한두 권쯤은 '뭐 이런 거지같은' 하고 욕하면서 번역하는 책도 있으니 참조해주시기 바란다. 그래도 내 이름 석 자를 기억해주시는 독자를 위해서 깐깐하게 검토해서 고퀄리티의 작품만 번역하면 좋겠지만, 정중히 의뢰하는 편집자 앞에서 차마 작품의 품질 여부로 거절할 수가 없다. 물론 앞에서 얘기했듯 생계형 번역가인지라 '써요, 달아요' 하고 배부른 소리할 계제가 아니기도 하지만. 가끔 망작을 만날 때면 역자후기에 '이 책은 별로예요' 하고 독자와 나만 아는 암호라도 남기고 싶은 심정이다.
그러나 그런 책이 있는가 하면, 이 책 정말 좋은 책이니 꼭 한 번 읽어보세요, 하고 시청 앞에 가서 메가폰 들고 소개하고 싶은 책도 많다. 로또 1등 당첨되면 언문해독이 가능한 국민에게 한 권씩 돌리고 싶은 그런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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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배를 엮다>(미우라 시온 지음, 권남희 옮김, 은행나무 펴냄). ⓒ은행나무 |
이 책, <배를 엮다>(미우라 시온 지음, 은행나무 펴냄)가 그랬다. 역자 후기에서도 소개했지만, 이 책이 내게 온 경로가 재미있다. 일본 출판사인 이와나미쇼텐(岩波書店)의 편집자에게 어느 날 메일이 왔다. 재작년에 번역 생활 20년을 돌아보며 쓴 에세이집 <번역에 살고죽고>(마음산책 펴냄)를 출간했는데(아, 또 깨알같이 홍보한다), 그 책을 재미있게 읽었다며 한국 오는 길에 한번 만나고 싶다는 내용이었다. 그래서 만났는데 선물로 준 책이 바로 미우라 시온의 <배를 엮다(船を編む)>였다. 그녀가 선물로 이 책을 고른 이유는 첫째, 에세이집을 보니 내가 미우라 시온을 좋아하는 것 같고, 둘째, 미우라 시온이 이 책을 쓰기 위해 자기네 출판사에 직접 출퇴근하며 자료조사를 한 인연이 있어서라고 했다.
맞다. 미우라 시온은 내가 좋아하는 일본 작가 다섯 손가락 안에 든다. 그녀의 작품이 좀 기복이 있는 게 흠이지만, 유머 있고 재치 넘치면서도 묘사력이 훌륭한 그녀의 문장을 참 좋아한다.
<배를 엮다>는 '국어대사전을 만드는 사전 편집부'를 배경으로 한 이야기다. 얼마나 특이한 소재인가. 그냥 편집부도 아니고 '사전' 편집부라니.
활자중독증이 있었던 초등학교 시절, 국어사전을 볼 때마다 궁금했다. '이렇게 얇은 종이에 이렇게 작은 글씨를 이렇게 빽빽 채워서 이렇게 두껍게 만드는 사람은 대체 어떤 사람일까? 정말 사람이 하는 일이 맞을까? 이 많은 단어는 다 어디서 찾았을까?'
그러나 저절로 알게 될 때까지 궁금증을 꾹꾹 참는 게으른 성격이라, 지금까지도 모르고 있었던 사전 만드는 과정, 사전 만드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이런 식으로 만나게 될 줄이야. 책을 선물 받아 집에 오자마자 바로 읽기 시작했다. 솔직히 사전을 어떻게 만드는가 하는 궁금증보다 직업이 직업이니만큼 얼른 읽어보고 출판사에 추천해서 내가 번역해야지! 하는 계산이 컸을 것이다. 하지만 다 읽고 난 뒤에 감동과 함께 밀려온 것은 '좌절'이었다. 헐, 이건 번역할 수 있는 책이 아니네, 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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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배를 엮다>는 사전 '대도해'를 만드는 사전 편집부 사람들의 이야기이다. 지난 4월 이 작품을 원작으로 한 영화가 일본에서 개봉했다. |
그도 그럴 것이 국어대사전을 만드는 일이긴 하나, 그 '국어'가 '일본어'이지 않은가. 사례와 예문으로 나오는 미묘한 일본어 어감을 우리말로 번역한다는 게 과연 가능할까? 섣불리 번역했다가 욕만 복부 충만하게 듣게 될 것 같았다.
일본어를 아주 잘하는 친한 편집자에게 이 책 얘기를 넌지시 꺼내 보았다. 그랬더니 자기도 한 해 동안 읽은 책 중 최고라고 생각했던 작품인데, 차마 오퍼를 넣지 못했다고 한다. 편집과 번역이 너무 난해할 것 같다는 게 이유였다. 그녀가 일본에 출장을 갔을 때, 출판사 담당자가 이 책을 권하는데도 편집과 번역이 힘들 것 같다고 손사래 쳤다고 한다. 베테랑 편집자조차 그렇게 손을 든 책인데, 내가 어떻게 번역할 엄두를 내겠는가.
대신 어느 출판사에서든 이 책이 나왔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이렇게 좋은 책은 꼭 출간되어 많은 사람들에게 읽혔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의외로 책이 나오고 한참이 지나도 번역서가 나왔다는 소식이 들리지 않았다. 하긴 실력 최고인 베테랑 편집자도 저렇게 나오는데, 다른 편집자들 마음도 별반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게다가 일본에서야 이 책이 60만부 나간 베스트셀러라 하지만, 일본어 사전 만드는 얘기가 우리나라 독자에게도 과연 인기가 있을지 반신반의하는 면도 있었을 거다.
그러는 와중에 <배를 엮다>는 두둥~. 일본 서점 대상이라는 큰 상을 받는다. 서점 직원들이 뽑는 일본 서점 대상 수상작은 대체로 믿고 읽을 수 있는 책들이다. 재미에서도 작품성에서도. 수상을 하고나니 드디어 출판사들도 이 작품을 잡으려고 술렁거렸던 모양이다. 어느 날, 은행나무의 편집자에게서 전화가 왔다. "<배를 엮다>를 계약했는데, 번역 좀 맡아주시겠어요?" 하고.
내가 이 책을 읽은 지 무려 열 달이 지났을 때였다. 어찌나 놀랐는지. 생계형 번역가여서 어지간하면 수락한다고 앞에서 말했지만, 이 의뢰를 받았을 때만큼은 "아우, 저 그 책 번역 잘할 자신 없어요"라고 거절했다. 그러나 재차 부탁하기에 "그럼 한 번 더 읽어보고 답을 드릴게요" 하고 전화를 끊고는 다시 책을 열독했다. 번역이 난해할 것 같은 부분을 체크해보니 의외로 많진 않았다. 대표적으로 あがる와 のぼる의 차이라든가(둘 다 우리말로는 '올라가다'로 해석되니 '올라가다와 올라가다'를 비교하는 우스운 꼴이 되는 것이다), 조사 へ('헤'라고 쓰며 '에'로 읽는 이 조사는 '에, 로, 에게' 등등으로 해석된다)에서 특히 겁먹었던 것 같다.
그러나 열 달 동안 내 가슴에 있었던 책, 나만큼 이 책에 애정을 갖고 있는 번역가도 없을 것 같아서 기꺼이 맡기로 했다. 대신 편집자에게 많이 도와주셔야 돼요, 하고 부탁했지만, 그런 부탁은 할 필요가 없었다. 사전밖에 모르는 순수남인 주인공 마지메에 제대로 빙의한 편집자는 나 못잖은 애정과 열성으로 마지막 교정을 마칠 때까지 거의 매일이다시피 메일을 보냈다. 이때 주고받은 메일은 항상 같은 패턴이었다. 앞에는 교정 얘기(이 단어는 이렇게 고치면 어떨까요 식의)로 시작해서, 뒤에는 매번 '이런 책을 작업해서 행복해죽겠어요. 이런 책만 작업하면 좋겠어요'로 끝났다. 역자와 편집자가 시작부터 끝까지 그렇게 '조증'이었다. 사실 교정 문의 메일이 자주 오면 조금 짜증날 때도 있는데, 이때는 역자나 편집자나 마치 날마다 연예인 정보를 교환하며 좋아서 꺅꺅거리는 소녀 팬들 같았다는(웃음).
다행히 책이 나온 뒤, 많은 독자들이 사랑해주셨다. 번역이나 편집에 대해서 별 말이 없는 걸 보니 우리가 이 책에 쏟은 사랑이 헛되지 않았던 모양이다. 개인적 취향이 다르니 모든 독자들이 감동받진 않았겠지만, 그래도 8할 이상이 감동적이었다고, 좋은 책이었다고 평을 올려주셔서 기쁘기 그지없다.
권남희의 주요 저서 및 역서
<번역에 살고죽고>(마음산책 펴냄) <길치 모녀 도쿄 헤매記>(사월의책 펴냄)
<배를 엮다>(미우라 시온 지음, 은행나무 펴냄) <봄에서 여름, 이윽고 겨울>(우타노 쇼고 지음, 비채 펴냄) <애도하는 사람>(덴도 아라타 지음, 문학동네 펴냄) <밤의 피크닉>(온다 리쿠 지음, 북폴리오 펴냄) <부드러운 볼>(기리노 나쓰오 지음, 황금가지 펴냄) '무라카미 라디오' 시리즈(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비채 펴냄) 등.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