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악마의 연금술', 세상을 홀리다"
출구전략이냐, 더블딥이냐 논란이 한참이던 시기, 한 분이 필자에게 이렇게 물었다.
"욕심을 부리는 것이 아닙니다. 은행 이자 보다 조금 높은 수익을 안정적으로 올리고 싶습니다. 어디에 투자해야 할까요?"
한편으로는 자본시장에 대한 불안감을 표현하는 말이었지만, 다른 한편 은행 이자율이라는 하한선과 '정상적인 것'으로서의 초과이익 확보 전략, 그리고 소박함의 뉘앙스까지를 통틀어 볼 때 그것은 자본시장에 대한 단단한 신뢰를 표현하는 말이었다. 어쩌면 이 이중적 심리가 현시기를 보여주는 중요한 단면이 아닐까 싶다.
역사적 원가 회계에서 시가 회계의 원리로
자본시장에 대한 신뢰가 세상을 지배했다. 부의 흐름을 규제하는 각종 제도들이 이 신뢰에 기초해 자신의 모습을 변화시켜왔다. 이 제도들이 자본시장에 의탁하는 이들에게는 상을 주고, 자본시장에 거리를 두는 이들에게는 벌을 내렸다. 다시 자본시장은 '믿을 수밖에 없는 것'이 되어갔다.
우선 기업을 규제하는 제도적 틀이 모습을 바꿨다. 미국을 중심으로 1980년대를 거치면서 확산된 '시가회계' 원칙은 기존의 '역사적 원가 회계'와는 완전히 다른 것이었다. 무엇보다도 기업과 자본시장 사이의 관계 차원에서 중요한 변화가 나타났다.
기업이 보유하고 있는 자산은 자본시장에서 현재 거래되는 가격에 따라 '시장가치'로 기록되고 공개되어야 했다.(역사적 원가 회계에서 자산은 구입 당시의 비용, 즉 역사적 원가로 기록됐다.)
이제 시장가치로 기록되는 자산을 통로로 삼아 자본시장과 기업의 영업실적이 서로 연결된다. 자본시장의 가격변화가 직접적으로 장부에 기록되는 기업의 현금 흐름을 변화시켰으며, 투자자들은 이렇게 변화한 현금흐름 실적을 기초로 기업에의 투자여부를 결정한다.
기업은 산업관련 법률이나 국가의 산업정책, 노동조합과의 협상같은 것 보다는 자본시장의 규제에 민감하게 반응하게 되었고, 기업 자신도 스스로를 생산조직이라기 보다는 자본시장 행위자로 탈바꿈시켜갔다.
미래지향적 통화-재정 원리의 성립
통화-재정 원리도 중요한 변화를 겪었다. 새로운 정책원리가 이른바 케인즈주의적 수요관리 정책을 대체해갔다. 이 새로운 정책원리의 성격을 요약하자면 이렇다.
첫째, 통화-재정 정책은 '미래지향성'(forward looking)을 그 기본 논리로 삼게 됐다. 기본적으로 자본시장, 금융시장은 관련 가격 정보를 적절히 반영하여 가장 효율적인 시장배분을 만들어가게끔 되어 있다.
시장은 이미 중앙은행의 정책 행동이나 정부의 재정지출 의도까지도 기대에 반영하여 가격을 조정해가기 때문에, 한 개인과 마찬가지로 중앙은행이나 재정당국도 시장과의 게임에서 승자가 될 수는 없다. 중앙은행이 경기를 부양하기 위해 임의적으로 명목 이자율을 낮출 경우, 단기적으로는 효과를 발휘할 수 있으나 보다 먼 미래까지 고려한다면 결국에는 인플레이션만 야기하고 경기부양 효과는 무력화되거나 투기 수요를 창출하는 역효과를 낳게 된다. 재정정책도 마찬가지다. 현재의 재정지출은 미래의 조세 증가나 가격 상승으로 인해 그 효과가 상쇄될 수밖에 없으며, 민간 투자 의지를 감소시키는 것으로 귀결될 수 있다.
둘째, 통화-재정 정책은 당국의 재량적 결정에 맡겨져서는 안되는 것이 되었다. 미래지향성 원리라는 것이 사실상 시장 외부 개입의 무력성을 표현하는 것임을 고려할 때 당연한 귀결이겠지만, 통화-재정 당국도 시장의 결정을 준수해야 한다.
통화정책은 주어진 규칙에 따라 시장상황에 '반응'하는 것이 되어야 한다. 일정 기간 동안의 물가 목표를 설정하고 이 물가 목표를 달성할 수 있도록 시장상황과 반응함수에 따라 단기 이자율을 조정해가는 것이 중앙은행 자신의 가장 중요한 목표가 됐다. (물가안정 목표제)
재정정책은 기본적으로 균형 재정의 규범하에 운영되어야 하며, 조세-재정에 기초한 자금 순환을 최대한 줄여 재량의 여지를 제거하고 자금이 민간-자본시장에서 돌도록 보장하는 것 자체가 중요한 목적이 됐다(예를 들면 감세 정책). 이런 식으로 통화-재정 정책이 가장 중요한 업무는 자본시장의 판단과 작동을 보호하는 일이 되어갔다.
표준화된 금융 규제 원리 : 바젤
바젤 기준과 같이 표준화된 금융 규제 원리도 도입됐다. 1980년대 초 부채위기를 겪으면서 은행의 건전성, 안정성을 관리할 수 있는 규제원리에 대한 논의가 본격화됐다.
바젤협약의 의도는 우선 '국제 은행 시스템의 건전성과 안정성을 강화시키는 것'이었으나, 이와 함께 '국제은행 간 경쟁상의 불평등 요소를 감소'시키는 방향으로 나아가는 것이 중요한 목표로 제기됐다. 이 때 불평등 요소란 상이한 국가 은행 시스템에서 나오는 상이한 규제수준으로부터 나오는 것이었다. 거꾸로 이야기하자면, 바젤 기준이 적용되는 한 국가 차원에서 이루어지는 은행에 대한 규제는 약화, 해체되어야 하는 것이 됐다.
그렇다면 은행의 건전성과 안정성은 누가 규제할까? 일단 규제자는 금융시스템 스스로였다. 물론 바젤협약이 제시한 자기자본비율의 준수 여부를 감독하는 것은 형식상 각국 금융감독 기구에 부여된다.
하지만 자기자본비율이 상승하고 하락하는 것이 거래 상대자 리스크를 보여주는 지표가 되고, 이에 따라 자금조달 비용이 변화하도록 하는 금융시스템의 자기조정성이 훨씬 중요한 감시망이었다. 어떻게 규제할까? 리스크를 계산하여 그것을 드러내도록 하는 것을 통해서다. 주어져 있는 리스크 가중치를 대입하거나 일정한 모델에 따라 리스크를 계산하여 그것을 개별 금융기관의 실적이나 거래비용에 반영하도록 하는 것이었다. 전체 금융 시스템의 안정성은 개별 금융기관들과 관련 거래자들이 똑똑하게 리스크를 관리하면 보장될 일이었다.
게임의 규칙 : '자산가격을 상승시켜라'
▲ 영국 런던의 금융가 '더 시티(the City)'로 이어지는 '밀레니엄 다리'가 지폐와 동전 이미지로 장식돼 있다. ⓒFineextra.com |
기업은 사회적으로 필요한 재화를 생산하는 생산조직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자본시장에서 거래되는 자산이기도 하다. 퇴직 후의 삶은 분명 내 생애과정의 일부분이지만 또 한편으로 보험 상품의 원천이기도 하다.
하지만 어떤 기업이 가치가 높고 어떤 기업이 낮은가 하는 것, 내 퇴직 후 삶의 가치는 어느정도인가 하는 것에 대해 자본시장 외부의 가치 평가는 의미없는 것이 되어갔다.
자본시장 밖에서 판단하고 행동할 수 있는 재량은 제한됐고, 미래 소득을 이자율과 리스크 프리미엄으로 할인하는 방식과 다른 어떤 가치 평가 방식도 일종의 '장애요소'인 것으로 취급됐다. 그것은 공상과 같은 것이었을 뿐 아니라 리스크를 감수하지 않고 이익을 얻으려는 부도덕한 짓이었다. 나아가 탄소를 배출할 수 있는 공기, 인간의 지적 신체적 능력, 사회적 책임 같이 예전에는 '자산'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하기 어려웠던 것들도 연이어 '자산'으로 장부에 기록되기 시작했다.
자본시장의 자기조정성은 이렇게 몇가지 제도들의 도움을 받아 그 모습을 갖춰갔다. 이제 세상은 곧 자본시장이요, 인간은 곧 투자자이며, 세상 만물은 곧 투자 상품인 것으로 상상된다면, 그 속에서 작동하는 게임의 규칙은 분명해진다. '자산가격을 상승시켜라. 이를 위해 모든 것을 끊임없이 구조조정해라'라는 것. 세상만물은 '자산'이라는 이름을 얻기 위해 스스로를 변화시키고, 더 높은 자산 가치를 부여받기 위해 조직과 관행과 생각의 습관을 변화시켜야 했다.
바벨탑, 안전한가?
2008년 리먼 브라더스 파산과 그 이후의 위기는 분명 충격적인 것이었다. 게임의 규칙을 지탱하던 제도묶음들에 큰 '충격'을 가했다는 점에서 그것은 충격적이었다. 여전히 수많은 논쟁의 와중에 있고, 정책적 시도들 자체도 갈팡질팡을 반복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지만 회계기준, 통화-재정정책, 금융규제 원리 등의 제도들에 중요한 변화가 나타나고 있음을 감지하기 어려운 것은 아니다.
2009년 4월 미국 재무회계 기준 심의회는 시가회계의 기본원칙을 변경해 위기에 빠진 금융기관들에게 특정 자산을 시장가치로 평가할 것인지, 말 것인지를 결정할 재량권을 부여했다. 이후 회계 원칙의 신뢰성에 대한 논란은 금융기관들이 영업실적이 문제시될 때 마다 반복되어 나타나고 있다. (최근에는 뱅크 오브 아메리카가 모기지사 컨트리와이드로부터 인수한 모기지 자산의 손실을 과도하게 낮게 평가하여 시장가치를 부풀린 것 아니냐는 문제제기가 확산되고 있다.)
각국 정부는 중앙은행에게 '물가 안정' 외에 '금융안정'이라는 목표를 새롭게 부과하고 있다. 중앙은행의 물가안정 기능만으로는 자본시장의 불안정성을 관리할 수 없으며, 중앙은행을 비롯한 중앙기구가 금융기관이 운영하고 있는 자산에 대한 모니터링과 감독을 강화해야 한다는 취지다. 이 연속선상에서 주요 금융기관에 대한 중앙은행 및 정부의 직접적 감독도 강화되고 있다.
또 바젤위원회는 새로운 건전성 감독 원리(바젤 3)를 제시했는데, 여러 논란에도 불구하고, 여기에는 기존 바젤의 감독원리와는 상충되는 논리들이 포함되어 있다. 기존의 것이 개별 금융기관을 대상으로 리스크 관리를 촉진시키고자 하는 미시건전성 감독 원리에 기초하고 있었다면, 바젤3에 포함되어 있는 금융기관 레버리지 비율에 대한 규제나 (국가별 자율성을 부여하기는 했으나) 경기대응 완충자본 규제(couter cyclical capital buffer) 등은 거시적 차원에서 신용의 확장을 제한하는 논리들을 담고 있다.
제도 변화들은 여전히 논란의 와중에 있으며, 진행형이다. 하지만 그 변화는 지난 수십년간 작동해왔던 게임의 규칙을 강화시키고 지탱했던 제도묶음들이 해체, 잠식되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는 것이 분명해 보인다. 반면에 여전히 '자본시장의 자기조정성', '계산가능한 리스크'라는 상상에 대한 기본적인 신뢰는 유지되고 있는 것 같다(특히 자본시장의 세상에서 더 명민하게 행동해서 이익을 봤던 이들, 그럼으로써 사회에 보다 큰 힘을 발휘할 수 있었던 이들일수록 그렇다).
일반적인 경기 변동을 보여주는 추세선의 어떤 한 점으로 현재를 파악하려는 시도들, 다시 좋았던 예전의 시절로 돌아갈 수 있다는 '출구'에 대한 전망, 여전히 감소될 줄 모르는 재테크 서적 출판 추이, 자산 투자를 통해 은행이자 보다 약간 높은 수익을 안정적으로 올리고 싶다는 소박한 희망 같은 것을 경유해 이 상상은 계속되고 있다.
바벨탑의 꼭대기에서는 계속 탑을 쌓아가고 있는데, 그 밑기둥은 허물어지고 있는 그림이 그려지는 건, 너무 엉뚱한 상상일까? 이것이 과도한 상상이 아니라면 우리는 스스로 미래의 더 큰 충격을 만들어가고 있는 건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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