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촛불 1년, 박정희 체제는 결코 끝나지 않았다"
"촛불 1년, 박정희 체제는 결코 끝나지 않았다"
[인터뷰]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 저자 서중석 성균관대 명예교수 ①
2017.10.24 10:28:22
2013년부터 <프레시안>에 연재됐던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 중 박정희 유신 체제를 본격적으로 파헤친 단행본 9, 10, 11권이 발간됐다. 이번에 발간된 세 권은 1972년 10월 17일을 비상계엄 선포로 시작된 '유신 쿠데타'와 관련 각각 △유신을 왜 일으켰나(9권) △왜 유신 체제를 막지 못했나(10권) △유신의 뿌리, 일본 군국주의(11권) 등을 살펴보는 내용으로 구성됐다.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는 1945년 해방 후 1987년 6월 항쟁에 이르기까지 우리나라의 민주화 흐름을 짚어보는 기획으로 해방과 분단을 다룬 1권, 한국전쟁과 민간인 학살을 다룬 2권, 이승만 독재와 이에 맞선 조봉암의 비극을 그린 3권, 4월 혁명을 다룬 4권에 이어 5권부터는 박정희 군사독재 정권의 탄생과 전개 과정을 다루고 있다. 이번에 유신 체제를 해부하는 세 권의 단행본에 이어 향후 6월 항쟁에 이르는 과정도 다뤄질 예정이다.

<프레시안>은 촛불 시위 1주년이자 11월 14일 박정희 탄생 100년을 맞아 저자인 서중석 성균관대학교 명예교수를 만나 촛불 시위의 의의를 되새김과 동시에 유신 체제와 한국의 앞날을 조망하는 인터뷰를 마련했다.

촛불 시위가 없었다면 박근혜 정부 하에서 성대한 박정희 탄생 100주년 행사를 지켜봤을 수도 있었던 상황에서, 서 교수는 여전히 한국 사회에 '박정희 신드롬'이 만연해있다며 이를 극복하지 않고서는 미래를 설계하기 어렵다고 지적했다.

인터뷰는 지난 12일 <프레시안> 박인규 이사장과 대담 형식으로 진행됐다. <프레시안>은 이번 인터뷰를 세 편에 나누어 소개한다. 다음은 인터뷰 주요 내용이다.

▲ 서중석 성균관대 명예교수 ⓒ최형락(프레시안)


프레시안 : 지난해 10월 말 박근혜 정부의 이른바 '국정 농단' 사건이 터지면서 서울에서 대규모 시위가 일어났다. 이후 헌정 사상 처음으로 대통령이 탄핵당하면서 조기대선이 치러졌다. 1960년 4월 혁명 이후 부마 항쟁, 광주 항쟁, 6월 항쟁으로 이어지는 민주화 운동의 흐름 속에서 이번 촛불 시위의 의의는 무엇일까?

서중석 : 4월 혁명과 부마항쟁, 광주항쟁과 6월 항쟁을 이어받은 위대한 민주주의 운동이자 우리 사회를 새롭게 만들려는 운동이었다. 특히 11월 하순에서 12월 초에 100만 명이 참여한 집회가 두 번 열렸는데, 이는 1960년 4월 19일 서울 집회와 1987년 6월 10일, 18일, 26일에 있었던 집회를 떠오르게 했다. 촛불 시위대의 함성을 들었을 때 우리 사회에도 정의가 뜨겁게 살아있다는 생각과 함께, 이런 모습을 보며 감명을 받지 않을 사람들이 있을까 싶었다.

1960년 4월 혁명 때는 200명 가까운 희생자가 나왔는데, 이는 광주항쟁 때 희생자와 비슷하다. 6월 항쟁 당시 10일~26일에 국한시켜서만 보더라도, 시위 참가자들은 하루도 빠지지 않고 그 지독한 최루가스를 견디며 불굴의 투쟁을 전개했다. 당시 투쟁하는 모습을 지켜보면서 정말 이런 대단한 투쟁이 있을까 싶은 생각이 들었다. 광주나 부마항쟁 또한 두말할 필요 없이 대단했고.

이러한 투쟁들은 우리 사회를 크게 바꿔 놓았다. 4월 혁명이 1945년 8·15에 이은 제2의 해방이라고 생각하는데, 4월 혁명은 새로운 사회를 만들어나가고 새 출발을 할 수 있게 해준 계기가 됐다. 박정희가 유신 쿠데타를 일으켜 1인 독재정권을 세우는 데 1961년 5.16 쿠데타를 일으킨 지 11년 이후에나 가능했다는 점도 4월 혁명의 영향이 얼마나 심대했는지를 보여준다. 4월 혁명의 힘 때문에 박정희가 좀 더 빨리 독재정권을 세우고 싶었어도 그렇게 하지 못했다.

1980년대 민주화 운동에도 4월 혁명의 진한 여운이 남아있다. 1980년대에 4.19를 전후로 대학가에서 목소리가 나오고 민주화운동이 강렬해졌다. 여기에 5월, 광주를 기억하면서 훨씬 더 큰 투쟁으로 나아갔다. 그러다가 6월 항쟁으로 가게 되는 것인데, 4월 혁명이 계속 우리 사회에 영향을 미친 것이다.

6월 항쟁은 제3해방이라고 부르고 싶은데, 이 항쟁을 통해 민주화의 도도한 흐름을 이룩했기 때문이다. 비록 중간에 이명박-박근혜 정부가 훼손시키는 행위를 많이 했다고는 하지만, 이 항쟁으로 획득한 절차적 민주주의가 지금까지, 그리고 앞으로도 계속 살아남을 것이라고 본다. 6월항쟁은 또한 문화혁명이기도 했다. 그때부터 우리가 부르고 싶은 노래를 부르고, 보고 싶은 영화를 보고, 읽고 싶은 책을 읽을 수 있는 학문적 예술적 자유를 누렸고, 언론의 자유도 확대되었다.

그런데 촛불 시위가 '촛불 혁명'으로 이어질 수 있을지에 대해서는 당시도 그렇고 지금도 속단할 수 없을 것 같다. 다만 촛불 시위 이전에는 박근혜 정권이 그렇게 몰락할지는 예견하지 못했다.

프레시안 : 이번 촛불 시위가 4월 혁명이나 6월 항쟁과 다른 구체적 이유는 무엇인가?

서중석 : 촛불 시위는 '박근혜 퇴진'이 중심이었다. 한때 박근혜 퇴진 주장은 <조선일보>나 종편(종합편성채널)에서도 찬동했다. 그게 당시 국민들의 일반 의사였다. 이는 4월 혁명이나 6월 항쟁과 같은 고난의 투쟁 속에서 이뤄진 성과와 차이가 있다.

또 촛불 시위에서 민주화 및 우리 사회의 미래와 관련해 4월 혁명이나 6월 항쟁과 같은 강한 메시지가 있었는지에 대해 좀 회의적이다. 촛불 시위가 대단한 역할을 했지만, 그 역할 이상으로 우리 사회를 한 단계 더 나아가게 하는 데는 한계가 있었다.

프레시안 : 촛불시위는 박근혜 정권이 만들어 낸 민주주의 역행을 바로잡은 정도지, 새로운 길을 뚫어낸 것으로 보기는 어렵다는 뜻인가?

서중석 : 민주주의를 복구했다는 부분은 성과가 있지만 역행을 바로잡았다는 측면은 생각해 볼 여지가 있다.

촛불 시위를 촛불 혁명으로 승화시키려면 폭넓은 민주주의 교육이 이뤄져야 한다고 본다. 독일의 정치 교육, 곧 민주주의 교육을 연상할 수 있는데, 그 민주주의 교육은 박정희 신드롬을 해체시키는데 큰 역할을 할 것이다.

이런 민주주의 교육에서 한국은 다른 나라와 달리 대단히 특이한 중요성을 갖는 게 있다. 그게 바로 현대사 교육이다. 다른 나라들은 현대사에 대해 기본적인 소양이 있다. 그런데 한국은 정치인, 지식인, 언론인, 학생 등이 현대사에 대해 막연하게 추측만 하고 감성적‧획일적‧도식적으로 이해하고 있지 깊이 있는 인식이나 명료하고 분명한 인식을 못하고 있다.

진보세력이 1980년대 인식에서 얼마나 나아가고 있는지도 반성해야 한다. 뉴라이트가 주장하고 있는 것들을 일반 사람들에게 얼마나 설득력있게 반박하고 잘 설명해줄 수 있는지, 이런 능력이 결핍돼있지 않은지 점검해봐야 한다. 현재와 같은 상태라면 과연 한국에 미래가 있을까? 박정희 신드롬이 약화될 수 있을까? 촛불 시위가 촛불 혁명으로 승화될 수 있을까?

한국사람들은 굉장히 역동적이다. 이게 지금까지 한국의 민주화 운동이 현대사에서 긍정적 역할을 한 기본 요인이 돼왔다. 그런데 거기에 지적 능력이나 성찰이 수반되지 못한다면 이를 뛰어넘는 사유를 할 수가 없다. 일제시기부터 지금까지 형성된 수구 세력에 적절하게 대처할 수 있느냐는 문제도 여기에 포함된다.

현대사에 대해 어느 때보다도 깊은 관심을 가지고 민주주의 교육을 시켜야 한다. 수구세력이나 뉴라이트의 이데올로기를 비판하고 합리적 보수와 진보주의가 이땅에 뿌리 내리도록 하는 활동을 해나가야 한다.

촛불 시위가 혁명으로 되기 위해서는 그러한 지적 성찰적 노력이 반드시 필수적으로 갖춰져야 한다. 북핵 문제 대처, 한반도 평화 달성, 국제사회에서 자주성과 자율성을 갖는 데에도 현대사에 대한 명료한 이해와 북한에 대한 정확한 통찰력은 아주 중요하다고 본다.

▲ 지난해 12월 3일 사상 최대 규모의 촛불집회 전경 ⓒ프레시안(최형락)


'유신'이 몸에 밴 박근혜, 새 시대와 어울리지 않았다

프레시안 : 촛불 시위의 배경을 두고 다양한 분석이 나오고 있지만, 일단 박근혜 전 대통령의 무능함과 반민주적인 사고가 가장 표면적인 이유가 된 것으로 보인다.

서중석 : 박근혜 대통령이 취임했을 때, 나는 <프레시안>과 인터뷰에서 박 대통령이 우리 사회에 좋은 방향으로 기여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지만 한 가지는 해낼 것이라고 전망했다. (☞관련 기사 : "박정희 신드롬, 박근혜가 지울 수도 있다") 

지금까지 우리 사회를 망쳤고 우리 미래의 암적인 장애 요인이 '박정희 신드롬'인데, 이 신드롬이나 박정희에 대한 지지 열기를 크게 감소시킬 것이라고 예상했다. 그리고 이게 박근혜 대통령의 최대 공로가 될 것이라고 말한 바 있다. 박근혜가 박정희의 실체를 보여주는 것과 함께 박근혜의 무능 때문에도 박정희 정권이 우리가 상상하던 것과 다르다는 인식을 할 수 있게 하지 않겠냐는 예측이었다.

2012년 대선 당시 민주화 운동 세력이나 민주 언론이 과연 선거에 적극적으로 임했냐 하는 문제는 논쟁의 여지가 있다. 그렇지만 많은 사람들이 박근혜 후보는 문제가 심각하니까 떨어뜨려야 한다는 노력을 벌였고, 역사학자들도 이만열 선생이 중심이 돼서 나름대로 노력을 했다. 한홍구 성공회대 교수가 모 일간지에 장기간에 걸쳐 유신 체제의 성격에 대해 글을 쓴 것도 그 일환이었다.

나도 학술 발표 등을 통해 유신 체제 비판 활동을 했다. 선거를 얼마 앞둔 발표에서 유신 말기의 정치적 경제적 난맥상, 박정희의 정신적 상황, 왜 그렇게 철옹성처럼 보인 유신 체제가 쉽게 붕괴되었는가 등을 분석하면서 박근혜와 최태민 관계를 비중있게 다뤘다.

발표장에서 발표를 마친 뒤 그 자리에 참석한, 잘 아는 정치인으로부터 박근혜와 최태민의 관계에 대한 자료가 더 없느냐는 질문을 받았다. 그런데 선거가 막바지에 이르렀는데도 이상하게 정치권과 언론에서 당시 박근혜-최태민 관계의 문제점을 별로 거론하지 않았다.

당시 정치인들에게 이 문제를 짚고 넘어가야 한다고 강하게 주장했던 이유는 크게 두 가지였다. 박근혜와 최태민의 불미스러운 소문이 중요한 게 아니라, 두 사람의 관계에 대한 박근혜의 대응을 보면 박근혜가 제대로 국정을 운영할 사람인지, 옛날식으로 표현한다면 나라를 망칠 사람인지 아닌지를 잘 보여준다고 그 정치인에게 역설했다. 그래서 이 점을 정치권에서 크게 문제 삼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박정희 정권의 '라스푸틴'으로 불리는 최태민의 권고에 의해 '구국여성봉사단'이 만들어졌고, 이를 통해 이들은 유신 체제를 수호하는 일역을 맡았다. 그런데 그 당시 최태민에 심각한 문제가 있다는 이야기가 나오면서 치안본부에서 최태민을 조사했다. 하지만 이를 조사했던 치안본부 관계자들만 사표를 내는 일이 발생했다.

뿐만 아니라 박근혜와 최태민이 밤에 자주 만난다는 소문이 돌 때 청와대 민정 수석비서관이 최태민의 비행을 조사해서 여러 차례 박정희에게 보고했는데, 이 역시 먹혀 들지 않았다. 또 1978년 김재규 당시 중앙정보부장이 최태민에 대해 뒷조사를 한 결과 최태민이 재벌들이 기탁한 수십억 원을 횡령하고 불륜관계가 있다는 사실이 드러나서 대통령에게 이걸 보고했는데, 박정희는 김재규와 그 보고서를 작성한 간부를 앉히고 다른 쪽에 최태민과 박근혜를 앉혀서 소위 '친국'이라는, 있을 수 없는 이상한 짓을 했다.

그런데 이런 중요 기관의 보고나 ‘친국 사건’이 있을 때 박근혜는 아주 강하게 반발하면서 그런 사실을 부인했고 자신의 행위를 정당화하면서 이를 유야무야한 일로 덮으려고 했다. 나중에는 검찰에서도 조사했는데 중앙정보부 조사와 별 차이가 없다고 나왔다.

내가 특별히 강조한 것은 이거다. 이렇게 많은 문제들이 드러났다면 박근혜가 최태민과 관계를 단절하든가, 구국여성봉사단 활동을 다른 방식으로 한다든가 하는 조치를 취했어야 했고, 최소한 잘못을 인정해야 했는데 박근혜는 전혀 이런 행동을 보이지 않았고, 그 이후에도 그래서 1990년대와 그 이후에도 계속 말썽이 났다. 이는 박근혜가 어떤 행태의 정치를 할 것인지를 너무나도 잘 보여주는 것이라고 판단했고, 그래서 이 부분을 대선에서 크게 문제 삼고 부각시켜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런 사람이 대통령이 되면 나라 꼴이 어떻게 되겠나 말이다.

또 한 가지 학술 발표나 다른 자리에서 역설했던 것은 박근혜가 유신 체제에서 상당한 역할을 했고, 그 유신체제로부터 지대한 영향을 받았다는 점이다. 인간은 청소년기나 청년기에 받은 영향이 평생을 간다고 하는데, 박근혜는 젊었을 때 유신체제밖에 보고 배운 것이 없었다. 그리고 거듭 강조하지만 유신체제에서 중요한 위치에 있었다. 육영수가 사망한 이후 박근혜는 퍼스트레이디의 역할을 했는데, 상당히 중요한 역할이었다.

더군다나 박근혜는 민주주의가 무엇인지 익히거나 생각해볼 수 있는 기회를 가지지를 못했다. 만나는 사람도 굉장히 협소했고, 그들은 박근혜를 추켜올리기만 했다. 박근혜가 대통령이 될만한 사람인지를 판단하는 데는 이런 점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다.

▲ 지난 2013년 2월 25일에 열린 제 18대 대통령 취임식에서 박근혜 대통령이 거수경례를 하고 있다. ⓒ프레시안(최형락)


지난해 촛불 시위가 한창일 때 박근혜 4촌 형부인 김종필은 <시사저널>에 박근혜가 아버지, 어머니의 나쁜점을 그대로 닮았다고 말했다. 역사가 아이러니한 것이 사실 박근혜가 아버지 때문에 인기가 높아졌고 대통령까지 됐다고 볼 수 있는데, 바로 그 아버지 때문에 박근혜가 결국은 탄핵을 받아서 쫓겨나게 됐다고도 볼 수 있다. 아버지 때의 경험, 유신 체제 때의 잘못된 경험이 고스란히 전달되었기 때문이다.

유신 시대 대통령은 왕보다도 더 힘이 강했던 '지존(至尊)'이었고, 절대적 위치였다. 여성관계든 어떤 분야든 일반 대통령이 할 수 있는 일을 넘어선 행위를 해도 아무도, 어떤 기구도 통제할 수 없었다. 그렇지만 박근혜가 대통령에 당선됐을 때는 유신시대 때의 박정희와 같은 위치를 가질 수 없는 민주주의 시대였다.

여기서 큰 간극이 생겨나는데 그걸 박근혜가 이해할 수 있었을지 의문이다. 그동안 공주로만 존재했기 때문에 유신 시대의 현실을 몰랐고, 더군다나 새 시대가 시작된 2000년대를 과연 체감할 수 있었을지 모르겠다. 현실감이 상당히 결핍될 수 있었다고 본다.

전두환 전 대통령이 이번에 출판한 회고록에 박정희 권력은 절대권력의 마성이 너무나 강했다고 평가했다. 뭐 묻은 개가 뭐 묻은 개 나무라는 식으로 써놓은 셈이지만, 이 말 자체는 틀린 게 아니라고 본다.

박정희는 당시 스스로 뭐든지 다 할 수 있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박근혜는 그걸 옆에서 항상 배웠다. '사적 권력의 무한정한 질주' 라고 할까? 바퀴 빠진 수레가 어디론가 질주하는 것 같았는데, 그런 상태에서 국가 운영의 심각한 일탈현상이 일어났다. 유신 시대에 박근혜가 이런 것들을 아주 잘못 배운 것이다.

그러다보니 박근혜 정부에서는 중요한 일에서 공론화 과정을 거치지 않고 독단적으로 결정하는 일이 많았다. 예컨대 북핵 문제에 대해서도 북한이 곧 붕괴할 거라고 생각하면서 붕괴쪽으로만 몰고 갔고,-일부에서는 최순실 쪽에서 그런 관념을 심어줬다는 이야기도 있던데,-어쨌든 북한에 대한 그런 시각을 가지고 강경 일변도로만 나갔고 북핵 문제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했다. 만약 제대로 대처했다면 지금 북핵 문제가 저 정도까지 될 수 있었을까? 박근혜 정부는 북핵 문제가 더 이상 커지지 못하도록 실질적으로 대처하지 못했다.

개성공단 문제만 해도, 개성공단이 갖는 대단히 중요한 상징성이 있는데 공단 중단 결정을 할 때 과연 공론화 과정을 거쳤는지 의문이다. 또 한일 간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합의할 때도, 역사교과서 국정화를 결정할 때도 그랬다. 당시 교육부 책임자도 실제로는 소극적이었다. 심지어는 <조선일보>에서도 역사교과서 국정화가 결정되기 전까지는 국정화로 가야 한다는 주장을 한 사설을 본 적이 없다. 그런데 순식간에 결정됐으니, 위에서 밑으로 내리꽂은 거라고 볼 수밖에 없다.

사드 배치 결정도 북한과 관계뿐만 아니라 중국‧러시아 관계를 비롯해 한국이 어떻게 나아가야 하느냐는 새로운 시대적 상황이 있음에도 성급하게 결정됐다. 박정희 때 옆에서 보고 배운 경험이 영향을 미쳤다고 볼 수 있다.

일부에서 박정희 대통령이 막걸리 마시고 모내기 하는 모습 때문에 서민 대통령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 같은데 유신 체제 하에서는 성장 위주 정책을 쓰면서 재벌과 가진 자 중심으로 모든 정책을 펴나갔다. 노동자나 서민 위주의 정책은 거의 없었다. 아파트 정책만 보더라도 당시 언론에서도 서민층을 위한 아파트를 지어야 한다고 이야기했지만 대형아파트 중심으로 지어졌다. 이것도 유신체제의 성장 위주 정책과 관련이 있었고 그러다 보니 YH여성노동자신민당농성사건, 부마항쟁 등이 일어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박근혜 역시 서민들을 이해하지 못했던 것 같다. 세월호 사건이 단적으로 보여주는데, 세월호가 침몰했을 당시에, 인명 구조를 위해 가장 중요했던 그 시간에 박근혜가 뭘 했는지 국민들이 전혀 모르고 있지 않나?

박정희가 서민을 무시한 정책을 계속 펴다가 YH 사건, 부마항쟁이 일어나 유신 체제가 붕괴했다. 세월호 침몰이 박근혜 몰락의 하나의 큰 요인이 되기도 했다. 박정희 유신 체제에서 박근혜가 퍼스트 레이디 역할을 한 것이 오히려 이후에 정치를 하는 데 큰 걸림돌로 등장할 수밖에 없었다.

박정희 체제, 촛불 이후에도 여전하다

프레시안 : 지난 2007년 대선에서 이명박 당시 한나라당 대통령 후보가 당선됐을 때 일부에서는 두 번의 수평적 정권교체를 이뤘기 때문에 대한민국의 민주주의는 안착됐다고 평가하기도 했다. 이제는 진보와 보수의 건전한 정책 대결이 있을 거고 민주주의가 퇴행하지는 않을 거라는 전망이었다. 물론 한편으로는 보수가 다시 정권을 잡으면 민주주의가 퇴행할 수 있다는 예측도 있었다. 그런데 결과적으로 이명박-박근혜 정부의 행태를 보면 후자가 현실이 된 것 같다.

이명박-박근혜 정부는 그 강도는 약하지만 점진적 쿠데타라는 평가를 들을 정도로 유신 체제와 흡사한 면을 보였다. 이제 촛불 시위로 박정희 체제가 끝났다고 볼 수 있을까

서중석 : 성급한 판단이다. 전혀 그렇지 않다고 본다. 물론 박근혜의 퇴진과 구속으로 박정희 신드롬이 상당히 많이 훼손됐다. 그렇지만 박정희의 망령이 수구 세력을 다시 살려냈고 이명박-박근혜 정권을 불러낸 상황을 다시 한번 되돌아봐야 한다. 박정희 신드롬으로 이득을 보는 세력이 강고하게 존재하는 한 박정희 신드롬은 상당한 힘을 가질 수 있고 박정희 체제도 결코 끝나지 않는다.

박정희 신드롬을 보면서 이상하다고 할까? 중요한 현상이라고도 볼 수 있지만, 현대사 전공자로서 많은 생각을 갖게 하는 현상을 보게 된다. 그에 대한 지지가 집권 기간이었던 18년보다 사후에 더 강고해진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는 점이다. 박정희만 환생하면 우리 경제가 살아나고 우리나라가 잘 될 것 같은 분위기가 있었다. 이는 분명히 착각인데, 그러한 박정희 신드롬이 존재했고, 지금도 사라지지 않고 있다.

박정희가 집권하던 18년 동안 그가 많은 지지를 받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이건 현대사를 잘 모르는 사람들이 하는 이야기다. 박정희 신드롬이 한창이었을 때 열기를 보면, 집권했을 당시에는 더 강력한 지지가 있었을 것이라고 상상해볼 수 있지만 그야말로 착각이다.

박정희가 쿠데타를 일으키고 첫 번째 치른 1963년 대통령 선거에서 그는 윤보선 민정당 후보를 간신히 15만 표 차로 제치고 당선됐다. 서울에서는 그야말로 압도적으로 윤보선이 이겼다. 당시 윤보선과 벌인 사상논쟁에서 누가 더 유리했는지의 문제는 둘째치고, 남도 지방이 수재로 큰 피해를 입었던 상황이 영향을 미친 측면이 있다. 쿠데타를 일으킨 박정희는 미국에서 들여온 밀가루를 이때 대규모로 살포했다. 이게 박정희 당선에 더 큰 원인을 제공했다. 그래서 밀가루 선거, 밀가루 대통령이라는 이야기가 나온 것이다.

밀가루 때문에 전라도와 경상도에서 박정희 표가 많았다. 이 때문에 이 선거를 남북 선거라고도 부르는데, 전라도‧경상도에서도 도시에서는 윤보선이 이긴 곳이 많았다.

1967년 대선이 박정희가 가장 표를 많이 얻은 선거인데 여기서도 전라도와 충청남도, 경기도, 서울 등 서쪽에서는 박정희가 모두 패배했다. 박정희가 집권했던 1965~66년부터 우리 경제가 좋아지고 있었는데 서부지방에서 신선함이 없는 윤보선이 이겼다는 것은 박정희 지지가 여전히 약했다는 것을 보여주는 징표였다.

박정희가 이길 수 있었던 것은 특정 지역에서 표가 많이 나왔기 때문이었다. 특히 경제 개발이 시작되면서 혜택이 경상도에 집중됐고, 영남에서의 압도적 지지로 서쪽 지역에서의 열세를 뒤집었다.

1971년 대선은 당시 중앙정보부가 계속 초긴장 상태에 있었다는 점을 보더라도 알 수 있듯이 박정희-김대중 후보가 용호상박 백중지세의 기세로 맞붙었다. 도무지 누가 이길지 알 수 없는 선거였다. 물론 여기도 결정적으로 특정 지역의 몰표가 더 크게 선거를 좌우했다.

유신 체제에서는 '과연 이게 선거냐'라고 이야기할 수밖에 없는 선거만 있었지만, 그나마 1978년 12월 12일 치러진 총선이 예전 선거와 유사했다. 당시 이 총선에서 신민당은 공화당보다 1.1% 더 표를 얻었다. 여기에 통일당이 얻은 표까지 합하면 야당이 여당에 8.5%나 앞섰다. 유신체제에서, 그것도 긴급조치 9호가 국민을 벙어리로 만들었던 때 치러진 선거라고 하더라도, 그래도 선거에 가깝게 치러진 선거가 이거 하나였는데, 여기서도 박정희가 졌다.

박정희가 집권 시절에 이른바 '경제대통령'으로 국민들에게 인식됐다면 1971년 선거에서 그렇게까지 아슬아슬한 시소 게임을 벌였을까? 유신체제가 경제에 그렇게 유리한 체제여서 경제를 발전시켜놨다면 12.12선거에 농민까지 반대를 찍은 결과가 나왔을까? 그런데 죽은 박정희가, 2000년대 이후에 두 번의 정권을 탄생시키는 놀라운 위력을 발휘했다.

▲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 9, 10, 11권 (서중석 지음, 오월의 봄 펴냄, 2017)


그러면 박정희 신드롬은 무엇이 문제일까? 크게 세 가지를 꼽을 수 있다. 우선 민주주의에 대한 강한 회의나 부정을 보여준다는 점이 문제다. 우리 사회에 꼭 민주주의가 필요하냐, 민주주의가 밥 먹여 주냐, 한국인에게 민주주의가 적당한 거냐는 등의 말이 2000년대 치러진 선거에서 공공연하게 등장했다. 파시즘적인 증상이나 징후가 2000년대까지도 여전히 위력을 발휘한 셈이다. 민주주의가 맞지 않는다는, 유신 체제 때 주장했던 것이 지금도 여전히 살아있는 것이다.

이명박 당선에 기여했던 성장‧경제 제일주의도 박정희가 유신 시대에 그렇게 부르짖었던 주장이었다. 여전히 많은 국민들이 여기에 빠져 있는데 이 주장이 강한 영향을 갖고 있는 한 박정희 신드롬이나 유신 체제에 대한 비판 의식은 생겨날 수 없다고 본다.

또 하나의 요소는 반공주의다. 요즈음은 ‘종북’이라는 말이 더 쉽게 다가오지만, 박정희 시기의 반공주의는 이승만 시기의 반공주의와도 또 다른 측면이 있다. 박정희 시대를 겪은 사람들은 기억이 나겠지만, 당시 반공교육을 받다 보면 북에는 인간이 아닌 흡혈귀 혹은 이리나 승냥이가 사는 땅 같았다. 오죽하면 북한을 방문했던 소설가 황석영이 방북기 <사람이 살고 있었네>에서 "북한에도 사람이 살고 있다"고, 그런 희화적인 말을 했을까.

박정희는 끊임없이 남침 위기의식을 불러일으켰다. 그래서 전 국가를 병영 국가화했고 전 국민을 간첩 잡기에 동원했다. 애인도, 친척도, 이웃도 간첩이 될 수 있다면서 전 국민이 서로를 의심하게 만들었다.

박정희 신드롬의 이 세 가지 요소는 모두 인간성을 파괴하는 효과를 낳는다. 민주주의에 대해 회의적 반응을 보이는 것도 그만큼 인간성이 마멸된 것 아닌가? 성장‧경제 제일주의가 추구하는 세상에서는 서민이 존재할 수 없고 일반 사람들이 인간답게 살 수 있는 조건이 만들어지기 어렵다. 특히 반공주의가 심하게 인간성을 파괴했다.

그런데 한국 사회에서는 여전히 박정희 신드롬이 힘을 발휘하고 있다. 그러면 박정희 신드롬이 왜 이런 위력을 갖게 됐을까? 이 부분에 대해 우리가 충분히 되돌아보지 못한 것 같다.

핵심은 반공교육이었다. 유신체제에서 반공교육은 인간성을 이렇게 까지 파괴시킬 수 있느냐 라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북한 주민들에 대해 증오심이나 적개심을 갖게 하는 것이 과연 초등‧중등학교 시기의 교육 내용으로 적합한 것이지 의문이다. 어떤 내용이든, 어떤 방식이든 초중등학교 학생들에게 증오나 적개심을 키우는 교육은 잘못된 교육이다.

장구한 세월의 군사 독재 문화를 이야기하지 않더라도 박정희가 집권하던 18년 동안 성장기를 가졌던 사람들을 생각해보자. 2012년 대선 때 투표장에 많이 갔던 50~60대 다수가 여기에 해당하는 세대다. 당시 이들에게 대통령은 박정희 한 사람이었다. 이들은 박정희=대통령'이라는 등식 속에서 유년기와 청년기를 보냈다. 특히 유신 치하에 들어가면 학교 교육이나 TV를 통해 박정희가 얼마나 위대한 지도자인지 끊임없이 주입당했다. 1970년대에는 1950, 60년대랑 달라서 여성들도 대부분 고등학교를 진학했기 때문에 교육의 역할이 훨씬 커졌고 내용적 측면에서도 박정희 때의 반공교육이 이승만 때보다 훨씬 더 강했고 구체적이었다.

또 박정희 유신 체제 시기에는 그 이전과 달리 TV나 라디오가 상당히 많이 보급돼있었다. 1970년대 말에는 가구당 TV가 한 대는 있을 정도로 많은 TV가 보급됐다. 당시 별다르게 즐길만한 대중문화가 없었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저녁 식사를 한 뒤 TV를 봤다. 그런데 뉴스든 연속극이든 정부 홍보물이든 TV 프로그램이 주로 반공 또는 박정희 대통령이 얼마나 위대한 인물인지에 대한 내용이 주를 이뤘다. 물론 유신체제, 그것도 긴급조치시대여서 박정희 비판은 어디서건 한마디도 할 수 없었다.

2012년 50, 60대의 투표 성향을 두고 본인들이 땀 흘려 일한 것이나 고난을 젊은 세대가 몰라준다는 점에 대한 반발이라는 분석이 나왔는데 이 점도 중시해야겠지만, 더 크게 작용한 것은 유년기 청년기에 어떠한 영향을 받았는가 하는 점이고, 이것에 영향을 받은 사람들 다수에 의해 박근혜 정권이 탄생할 수 있었다.

이러한 결과가 나오는 것을 막기 위해서라도 현대사에서 박정희 신드롬 문제를 풀어야 한다. 이게 해결되지 않는 한 우리 미래는 있을 수 없고 한반도의 평화와 동북아의 새로운 관계망 형성도 생겨날 수 없다.

'박정희 신드롬', 민주화 세력에게도 책임 있다

프레시안 : 박정희 정권이 국민들을 상대로 엄청난 선전전을 한 것은 사실이지만, 민주화 세력들이 적절한 대안을 제시하지 못한 측면도 여전히 국민들 사이에 '박정희 신드롬'이 강하게 자리잡은 원인이 됐던 것 같다.

서중석 : 민주주의 가치를 추구하던 세력도 성찰해야 할 부분이 있다. 박정희 신드롬의 중요 요소로 민주주의에 대한 회의가 있는데, 적지 않은 한국인이 민주주의에 대해 회의를 갖게 된 데에는 민주주의 세력도 잘못한 것이 있다.

▲ 서중석 성균관대 명예교수 ⓒ최형락(프레시안)

물론 1970, 80년대에는 민주화 세력의 헌신적인 희생이 있었다. 그렇지만 1987년 12월 대선 때 양김(통일민주당 김영삼, 평화민주당 김대중 후보)이 적절히 대응했는지 생각해봐야 한다. 1980년 서울의 봄 시기에 양김이 저질렀던 '대통령병'이 고스란히 1987년 대선 때 되살아났다.

민주화 운동을 주도적으로 이끈 세력의 상당수가 김대중 당시 평민당 후보에 대해 '비판적 지지'라는 이름으로 일방적으로 김후보를 지지했다. 그런데 이게 그 사람들과 입장을 같이 하지 않는 사람들이 볼 때, 또 양김의 출마 때문에 노태우 정권이 등장한 것을 볼 때 과연 적절했는지는 의문이다.

이런 행위가 일반 사람들에게 민주화운동 전체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을 심어준 측면이 있다. 그렇지 않아도 수구 보수 세력들 사이에 민주화 세력에 대한 부정적 인식이 있었는데, 마치 그에 대한 근거라도 생긴 것처럼 이제 민주화 세력에 대한 부정적인 부분을 강조할 수 있게 되었고, 그것은 일정하게 민주주의의 퇴조를 불러왔다.

1988년 4.26 총선에서는 어땠나? 단적으로 말해서 소선거구제는 지금까지 아주 심각한 지역주의가 뿌리 깊게 살아있게 만든 계기였다. 당시 재야에서 이제는 양김이 단결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왔지만 또 실패했고, 그러면서 특정 정치가가 강력하게 주장했던 소선거구제가 채택돼 87대선보다도 더 심한 지역주의가 자리 잡게 됐다.

여기에 중대선거구를 주장했던 김영삼 측이 득표에서는 평민당보다 4% 이상 앞질렀지만, 부산·경남이라는 지역적 특성으로 제3당으로 전락하면서 코너로 몰렸다. 김영삼은 대통령이 되려는 강한 의지가 있었고 정치적 생존을 위해 노태우-김종필 측과 합당을 선택했다. 지역주의는 박정희 신드롬의 온상이 되었다는 점에서도 망국병이었다.

그런데 더 놀랍고 무서운 일은 독재정권 아래서 선명 야당을 주장했던 김영삼 쪽 정치인들이 김영삼이 대통령에서 물러난 이후에도 계속 신한국당이나 한나라당 등에 남아있었다는 점이다. 그러면서 민자당 탄생 이전에는 야당 세력이 강했던 경상도 지역이 전부 특정정당 지지세력이 되고, 호남처럼 어느 한쪽으로 몰표를 던지는 현상이 일어나게 됐다. 이런 상황이 우리 정치를 계속 힘들게 했고 민주주의가 제대로 자리 잡게 하는 데 결정적인 장애 요인이 되었다. 이러한 과정에서 민주주의에 대한 회의가 커졌고 수구 세력들은 그것에 대한 자신들의 논리를 만들어냈다.

과거의 잘못이나 악행에 대해 반성할 줄 모르고 뻔뻔스럽게 나와도 괜찮은 분위기가 생긴 것도 우리의 미래, 즉 촛불 혁명을 가로막고 있다. 촛불 시위와 박근혜 구속 이후에도 수구적 정당과 언론은 그 이전과 다름없는 소리를 계속 외치고 있다. 이것도 역사적으로 살펴볼 필요가 있다.

1979년 10·26으로 박정희 유신체제가 붕괴하자 심지어 유신체제 수호에 앞장섰던 유신정우회 정치인들까지 잘못을 시인했다. 6월항쟁 직후에도 그런 분위기가 없지 않았다. 특히 전두환·신군부정권을 찬양했던 언론계가 반성하는 것 같았다.

그러나 대선과 총선, 노태우 정권의 등장과 민자당의 출현 이후 전두환 정권에 붙었던 정치인이나 신문 종사자, 지식인들은 본색을 드러냈다. 특히 전두환 신군부의 입법회의나 민정당에 가담했던 민간인들이 반성을 하지 않은 채 야당 당수까지 되고, 진보적 언론인으로 각광을 받는 것도 혼란을 초래했다.

민자당 출현 얼마 후부터 모습을 드러낸 박정희 신드롬은 1995년 해방 50년을 맞으면서 수구 언론의 노력도 가세해 힘을 얻었고, 1997년 외환위기-IMF사태가 일어나자 날개를 단 듯했다. 여기에 뉴라이트가 등장하면서 그들 나름의 현대사 논리까지 발전시켰는데, 여기에 대응해야 할 측에서는 별다른 지적 대응을 하지 못했다. 그러면서 이명박-박근혜 정권이 등장하기에 이르렀다. 2016년 촛불 시위가 갖는 한계로 이런 부분들이 논의되기 어려웠고, 또 여전히 경제 제일주의 등 박정희 신드롬이 깔려 있기 때문에 우리 사회는 아직도 위태롭다고 볼 수 있다.

프레시안 : 김대중-노무현 정부도 양극화 부분에 대해 제대로 대처하지 못하지 않았나.

서중석 : 김대중 대통령이 신속한 경제 회복을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는데, 그러면서 주요 공기업을 외국자본에 많이 넘겨줬다. 약간 더디더라도 참았어야 했는데 강하게 긴축 정책을 벌이면서 신자유주의 정책을 썼다. 노무현 정부 역시 신자유주의 정책을 펼쳤다. 당시 상황에서 어쩔 수 없는 부분도 있었고 박정희 경제정책의 유산도 작용해 새로운 모색이 힘들어진 측면도 있다.

이런 과정 속에서 민주화 세력이 제대로 국정 운영을 하지 못하는 것 같은 인상을 일부 국민에게 주게 됐다. 그래서 박정희-전두환 시대에 대해 회고적 향수를 불러 일으켰고 이는 퇴행적 사고를 갖게 만들었다.

프레시안 : 촛불시위에도 불구하고 박정희 신드롬은 여전히 죽지 않고 강고하게 남아있고, 일종의 세력으로 구축돼 있는 상황인 것 같다.

서중석 : 과거에 대한 성찰이 결핍되면 그렇게 될 수 있고, 이른바 정계와 재계, 언론계의 기득권 세력은 박정희 신드롬이 있어야 살 수 있다고 생각한다. (2편에서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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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호 기자 jh1128@pressian.com 구독하기 최근 글 보기
외교부·통일부를 출입하면서 주로 남북관계를 취재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