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희 정권은 어쩌다 차관 망국 위기 자초했나
박정희 정권은 어쩌다 차관 망국 위기 자초했나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 <79> 경제 개발, 다섯 번째 마당
뿌리 깊은 나무는 바람에 쉽게 흔들리지 않는 법이다. 사회 전반의 분위기는 말할 것도 없거니와 이른바 진보 세력 안에서도 부박한 담론이 넘쳐나는 이 시대에 역사를 깊이 있게 이해하는 것이 절실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이러한 생각으로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를 이어간다. 서중석 역사문제연구소 이사장은 한국 현대사 연구를 상징하는 인물로 꼽힌다. 매달 서 이사장을 찾아가 한국 현대사에 관한 생각을 듣고 독자들과 공유하고자 한다. 아홉 번째 이야기 주제는 경제 개발이다. '편집자'


프레시안 : 지난번에 중화학 공업화와 중동 특수, 그리고 박정희 정권의 역할을 짚었다. 박정희 집권기 경제에서 빼놓을 수 없는 또 하나의 사안이 수출 정책이다.

서중석 : 중화학 공업을 박정희 정권의 최대 경제 실적이라고들 하지만, 사실은 국내외 여러 여건 속에서 그리로 가게 돼 있었다는 것을 지난번에 얘기했다. 그런데 초기엔 중화학 공업 발전이 제대로 안되다가 중동 경기로 재무 구조가 갑자기 좋아진 재계에서 적극 뛰어들면서 활성화됐는데, 정부와 기업들이 무분별하게 중화학 공업화를 추진하다보니까 나중엔 중복 과다 투자가 이뤄지고 수출 여건이 악화되면서 유신 경제의 발목을 잡았다는 것도 얘기했다. 그러니까 박정희라는 한 개인이 중화학 공업에서 차지하는 역할이 그렇게 크다고 보지는 않는다. 꼭 긍정적인 역할만 했다고 보지도 않는다.

박정희 대통령의 가장 큰 경제 정책으로 제시될 수 있는 것은 수출 제일주의라고도 이야기하고 어떤 사람은 수출 지상주의라고도 하는, 즉 수출입국이라고 하는 수출 정책에 있다고 볼 수 있다. 대부분의 학자들뿐만 아니라 정치가들도 박 정권의 가장 중요한 경제 정책으로 수출 드라이브 정책을 들고 있다. 1960∼1970년대 경제 발전과 관련해 지금까지 이야기한 것 가운데 박정희 개인의 역할이 그야말로 크고 중요했다는 것을 잘 보여주는 게 수출입국, 수출 드라이브 정책이라고 볼 수 있다. 1960년대 후반에서 1970년대에 걸쳐 박 대통령이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수출을 독려하는 모습은 많은 기업인한테 강렬한 인상을 줬다.

박 대통령은 수출을 증가시키는 데 그야말로 정력적으로 노력했다. 그런데 수출 정책을 채택하기까지 과정을 보면, 그리고 수출이 크게 증가하는 과정을 보더라도 박정희 1인한테 '잘했다'는 것을 돌릴 수 없는 점이 있다.

프레시안 : 어떤 점에서 그러한가.

서중석 : 미국의 대외원조법이 개정되면서 1958년부터 미국은 종래의 무상 원조를 개발 차관 기금으로 전환하고자 한국에 주는 원조 중 먼저 시설재 원조를 개발 차관으로 대체하는 방향으로 나아갔다. 그러면서 한국에 대한 무상 원조가 많이 줄어든다. 다시 말해 1958년부터 미국의 원조가 질적인 변화를 한 것이다. 지원 원조에서 개발 원조로, 증여에서 차관으로, 단기에서 장기 차관으로, 한미 간 쌍무 원조에서 여러 국제 기구를 통한 원조로 가게 된다. 순수 원조액이라고 볼 수 있는 건 1961년 이후 1억 달러 이하로 줄어서 1964년엔 8000만 달러가 된다.

이런 상황에서 이승만 정부는 오히려 환-달러 환율을 500대 1로 꽉 묶어놓았다. 미국이 아무리 불평하고 반대해도 그것과 상관없이 환율을 그렇게 낮은 수준으로 묶어놓고, 수출은 별로 생각하지도 않고 원조 물자를 어떻게 유리하게 사용하느냐를 주요한 경제 정책의 하나로 삼고 있었다. 그런데 이게 바뀔 수밖에 없게 된 것이다.

장면 정부가 등장하면서 이제 수출 경제 쪽으로 방향을 틀 수밖에 없었다. 500대 1에서 이승만 정권 말기에 650대 1이 된 환율을 장면 정부는 1961년 1월 1일에는 1000대 1로, 같은 해 2월 1일에는 1300대 1로 조정했다. 이때 야당인 신민당이나 여론의 반대가 굉장히 컸다. 인플레이션을 유발한다고 아주 반대가 심했다. 그럼에도 장면 정부는 그렇게 했다. 장면 정부는 무력했다고 얘기들을 많이 하는데, 단호하게 환율을 인상했다. 그리고 1961년 4월 11일에는 전년도 예산에 책정된 상공부 수출 시장 개척비 3억 환의 교부를 어떻게 할 것인가를 구체적으로 발표했다. (장면 정권의 조정 조치에는 환율을 정상화해 수출 경제로 나아가고자 한 것에 더해 공식 환율과 시장 환율을 맞추는 의미도 있었다. 비정상적으로 환율을 낮게 책정한 이승만 정권 때 시장에서 실제로 적용된 환율은 공식 환율의 2배가 넘었다고 한다. '편집자')

당시 차관을 들여오기 위해서라도 수출은 꼭 필요한 상황이었다. 수출을 통해 달러를 벌어들여야 그 차관을 갚을 수 있는 것 아닌가. 해외 차관이 필요했던 요인 중 하나는 저축률이 너무 낮았다는 것이다. 1962년에 필리핀, 파키스탄, 대만 모두 저축률이 10퍼센트가 넘었고 태국은 17.2퍼센트, 말레이시아는 20.6퍼센트였던 것으로 나오는데 우리는 한 자릿수였다. 그러니까 할 수 없이 해외 저축을 이용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외국에 시장을 의존할 수밖에 없고 그러려면 수출하는 길밖에 없지 않느냐, 이렇게 된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도 1950년대 말에서 1960년대로 들어가는 길목에서는 이제 수출 문제를 심각하게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장면 정부에서 틀어놓은 방향인 수출 경제 쪽으로 박정희 정권이 갔는가를 살펴보면, 초기에 상당한 기간 동안에는 그렇다고 보기 어려운 점이 있다.

원조 정책 바꾼 미국, 수출 경제로 나아간 한국

▲ 제8차 수출 진흥 확대회의를 주재한 후 주요 품목 현황을 살피는 박정희 대통령(1974년 9월 25일). ⓒ연합뉴스

프레시안 :
박정희 정권이 초기에는 자립 경제 성격이 강한 경제 개발을 지향하다가 미국의 반대, 화폐 개혁 실패 등으로 인해 경제 개발 계획의 성격을 바꿨다는 시각이 있다. 큰 틀에서 압축하면 내자 동원 중심에서 외자 동원 위주로, 수입 대체 산업 육성 중심에서 수출 주도 경제로 바꿨다는 주장인데, 이것이 적절한 설명인지 의문이라는 반론도 있다.

서중석 : 박정희 정권이 수출 경제로 가게 되는 결정적 계기, 공산품 수출 촉진 정책으로 급속히 전환하는 직접적 요인은 바로 외환 위기다. 외환 보유고가 너무 적게 되면서 엄청난 위기가 초래되고, 그것에 대비하기 위해 수출 경제로 전면적으로 바꿔나가는 것을 볼 수 있다.

5.16쿠데타 이듬해인 1962년에 이미 외환 보유고가 2억500만 달러밖에 안됐는데, 1963년에는 그게 1억 달러대로 떨어져 1억2100만 달러가 됐다. 이렇게 외환 보유고가 악화된 것은 원리금 상환을 고려하지 않고 1961년과 1962년에 단기 상업 차관을 도입했기 때문이다. 역시 쿠데타 정권이 적절하게 경제 문제에 대처하지 못했다고 볼 수 있다. 1965년 7월에는 외환 보유고가 1억100만2000달러로 돼버렸다. 이렇게 되면 국가가 부도날 수도 있다. 국가가 갖고 있는 돈이 1억 달러 정도 밖에 안 된다고 하면 이건 너무한 것 아닌가. 그러면서 '어떻게든 돈을 벌어들여야 한다. 그러려면 수출밖에 없다', 이렇게 된 것이다.

상황이 이렇게 되면서 정부가 1963년경부터 적극적인 수출 정책으로 방향을 틀어가는 것을 볼 수 있다. 1963년 1월 1일 수출입 링크제라는 것을 실시해 수출 대금 전액을 수입에 사용할 권리를 수출업자한테 부여했다. 1964년 5월에 가면 원-달러 환율을 130대 1에서 255대 1로 올렸다. 장면 정부가 환율을 인상하는 건 집권한 지 불과 몇 개월 만이었는데, 박정희 정권은 그보다 상당히 늦은 때에 이렇게 환율 정책을 쓰는 것을 볼 수 있다. 장면 정부보다 꼭 혁명적인 환율 정책이라고 볼 수도 없다. 1965년 3월에 가면 단일 변동 환율제를 실시하게 된다. 아울러 수출 금융 금리도 인하해 수출 정책을 적극적으로 펴는 걸 볼 수 있다. (제6대 총선이 치러지기 18일 전인 1963년 11월 8일 박정희는 "물가가 오른 이유는 민주당 정부 때 환율을 1300대 1로 인상했기 때문"이라고 장면 정권을 비난하고, "혁명 정부의 물가 억제책으로 이만한 정도로 유지한 것"이라고 자화자찬했다. 그로부터 반년 후 박정희는 환율을 약 2배로 올렸다. '편집자')


박정희 정권이 수출 경제로 전환한 계기는 외환 위기

프레시안 : 박정희 정권은 군사 작전을 하듯이 수출 증대 정책을 밀어붙였다. 그 결과 수출은 비약적으로 늘어나지만 그 밑바탕에는 노동자들을 말 그대로 쥐어짠 병영 같은 공장이 있었다. 놀라운 성장의 수치에 마음을 빼앗기지 말고, 열악한 작업 환경에서 저임금 장시간 노동을 견뎌야 했던 노동자들을 기억해야 하는 이유다. 한편 1960년대 후진국들의 산업화에서 남한이 다수의 제3세계 국가들과 결정적으로 달랐던 조건 중 하나는 외자 도입이 원활했다는 점이었다는 견해도 있다.

서중석 : 수출 경제 문제, 중화학 공업 문제를 비롯해 경제 발전과 관련된 모든 문제와 뗄 수 없는 것이 박정희 정권 때 비로소 차관 도입이 아주 용이해졌다는 것이다. 그 점을 생각해야 한다.

사실 1950년대에는 차관을 도입해 경제를 발전시킨다는 것이 쉽지 않았다. 유럽의 경우 제2차 세계대전으로 폐허가 되지 않았나. 급속히 복구가 이뤄지고 놀라운 경제 성장을 하기는 하지만, 유로 달러 그러니까 유럽 자본이 다른 지역으로 이동하게 되는 건 주로 1960년대에 가서 이뤄진다. 1964년 박정희 대통령이 서독을 방문한 큰 이유 중 하나는 바로 이 차관 문제였다. 그때 서독은 박 정권 요구대로 해주지 못했다. 다시 말하면 일본, 서독처럼 제2차 세계대전 후 선발 경제 주자이던 나라들도 자본 수출을 많이 하게 되는 건 조금 뒤의 일이라고 이야기할 수 있다. 특히 한국, 대만이 중화학 공업 시대를 맞이할 때 선진 공업 국가에서 대규모 자본이 쉽게 이동할 수 있게 된다. 또 그때는 중동에서 오일 달러가 빠른 속도로 축적되는데, 이게 또 지구를 돌기 시작하지 않나. 그러면서 차관 도입이 용이해지는 것을 볼 수 있다.

1960년대 초까지 차관 도입이 얼마나 어려운 문제였는가 하는 것은 한일협정을 봐도 알 수 있다. 청구권 자금에서 '무상'으로, 사실상 배상에 가까운 것으로 주는 건 3억 달러였지만, 그에 더해 2억 달러 장기 저리 차관과 일본 정부의 상업 차관 3억 달러 알선 부분이 청구권 관련 내용에 들어가 있다. 이 시기에 차관을 얻기가 얼마만큼 어려웠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예 아니겠는가. 그런데 1960년대 후반에 오면서 자금 유통이 원활해진다. 그전에는 하고 싶어도 잘 안되는 상황이었다. 장면 정권도 차관을 생각하고는 있었다. 주로 일본 쪽에서 어떻게 해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많이 했다.

프레시안 : 1960년대 초반까지와 달리, 1970년대 후반에는 차관을 너무 많이 들여와 문제가 된다.

서중석 : 외자 도입이 한국에서 어떤 식으로 이뤄지는가를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어느 시기부터 그것이 원활해지는가를 잘 알 수 있다. 1959년에서 1966년 사이에는 차관이 3억2500만 달러밖에 안 됐다. 그런데 1967년 한 해에 차관이 2억3000만 달러나 들어오고, 1968년에는 1959년에서 1966년 사이에 들어온 것보다 더 많은 3억3900만 달러의 차관이 들어온다. 그 후 계속 늘어난다. 그래서 1959년에서 1971년 사이에 총 25억7300만 달러의 차관이 들어온다.

그 이후에 늘어나는 걸 보면 이것보다도 속도가 더 빠르다. 이건 한국 경제가 커졌기 때문에 그만큼 신뢰를 받아 그렇다는 점도 있지만, 그만큼 국제 간 자본 이동이 그전 시기와는 달라졌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제3차 경제 개발 5개년 계획 기간인 1972년에서 1976년 사이에는 차관을 54억3180만 달러나 들여왔다. 그전 10여 년간 들여온 차관의 두 배가 넘는 액수였다. 중화학 시대라고도 이야기하는 1977년에서 1979년에는 73억2320만 달러나 들어왔다.

그런데 이때쯤 되면 한국에 차관 망국론이 등장하기 시작한다. 외채 망국론이라고도 부른다. 뭐냐 하면, 외부 조건이 좋다보니까 대기업들이 중화학 공업에 뛰어들면서 정부에서 보증해 차관을 마구 들여온 것이다. 그래서 원리금 상환 압박이 아주 심각해졌다. 원리금 상환 이자를 보면 1977년에서 1979년 사이에 원금을 43억4560만 달러, 이자를 무려 24억8380만 달러나 물게 됐다. 두 개를 합치면 68억2940만 달러였다. 이 시기에 들여온 차관 73억2320만 달러와 맞먹는 액수였다. 이제는 차관을 들여오는 액수하고 차관을 갚아야 하는 액수가 같아지는 식이 된 것이다.

그 당시 네 나라가 '이대로 가면 외채로 붕괴할 것'이라는 이야기를 들었다. 바로 브라질, 아르헨티나, 멕시코, 한국이었다. 그렇게 될 뻔했는데 1980년대에 들어서면서 새로운 변화가 일어났고, 중화학 공업을 강력하게 조정하는 등의 여러 정책을 쓰지 않나. 또 중동 특수는 1980년대에도 여전히 잘됐다.

▲ 박정희 정권은 군사 작전을 하듯이 밀어붙여 수출을 늘렸다. 그 밑바탕에는 노동자들을 말 그대로 쥐어짠 병영 같은 공장이 있었다. 이는 노동자들의 저항을 불러일으켰다. 사진은 1979년 신민당사에서 농성하는 YH 여성 노동자들. YH 여성 노동자들의 저항은 유신 체제의 몰락을 앞당겼다. ⓒ연합뉴스



차관 망국론 자초한 박정희 정권

프레시안 : 모라토리엄(채무 지불 유예)을 선언한 멕시코(1982년), 브라질(1983년) 등과 달리 한국은 1980년대 중후반 3저 호황을 계기로 다시 도약의 길에 들어선다. 그러나 차관 망국론이 나올 정도로 여러모로 문제가 많았음에도 한국 경제의 구조 개혁은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고, 결국 1997년 IMF 외환 위기를 맞는다. 다른 것을 하나 짚어보면, 한국과 여러 측면에서 비교되는 대만은 경제 개발 초기에 어떤 모습을 보였나.

서중석 : 대만의 경우 1958년에 이미 중요한 경제 정책 개혁이 이뤄졌다. 복수 환율 시스템을 단일 시스템으로 전환하고, 관세와 무역 제한을 완화하고, 기업법을 제정해 절차를 간편하게 하고, 투자를 장려하기 위한 법을 만들었다. 이런 것들을 1958년에 단행한 것이다. 그래서 1960년에 들어서면서 수출이 증가한다.

대만에서 그런 개혁을 한 1958년은 한국에서 이승만 정권 시절이다. 한국도 이승만 정권 때 여기에 맞췄어야 했다. 그런데 이승만 정권은 모든 것에 앞서 정권 유지에 골몰하다보니까 경제 정책을 제대로 쓰지 못하고, 오히려 3.15 부정 선거를 저지르는 쪽에 신경을 썼다. 장면 정권 때 어느 정도 하려고 하는데 5.16쿠데타가 바로 일어났다. 5.16쿠데타 정권도 초기에는 대만과 같은 수출 정책을 제대로 쓰지 못했다. 그러면서 대만이 이 부분을 먼저 한 것이다. 나중에는 두 나라 다 수출입국, 수출 드라이브 정책으로 가게 된다.

대만이 수출 촉진 정책으로 나아가는 데 미국의 입김이 많이 작용했다고 한다. 대만과 마찬가지로 한국의 경우에도 미국 국제개발처(AID), 그리고 미국의 영향 아래 있는 세계은행에서 수출 지향적 공업화 전략을 세우도록 한국에 적극적으로 권장했다. 미국은 박정희 정권 초기에 수출입 정책을 세우는 데 아주 중요한 역할을 했다.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 여든 번째 편도 조만간 발행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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