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라 구한 박정희? 장준하는 왜 그리 판단했나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 <48> 5.16쿠데타, 일곱 번째 마당
나라 구한 박정희? 장준하는 왜 그리 판단했나
뿌리 깊은 나무는 바람에 쉽게 흔들리지 않는 법이다. 사회 전반의 분위기는 말할 것도 없거니와 이른바 진보 세력 안에서도 부박한 담론이 넘쳐나는 이 시대에 역사를 깊이 있게 이해하는 것이 절실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이러한 생각으로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를 이어간다. 서중석 역사문제연구소 이사장은 한국 현대사 연구를 상징하는 인물로 꼽힌다. 매달 서 이사장을 찾아가 한국 현대사에 관한 생각을 듣고 독자들과 공유하고자 한다. 여섯 번째 이야기 주제는 5.16쿠데타다. <편집자>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
[이야기 마당 1∼3] 한국전쟁
[이야기 마당 4∼8] 친일파
[이야기 마당 9∼15] 학살
[이야기 마당 16∼31] 해방·분단

[4월혁명, 여섯 번째 마당] 국민 죽이고 '야당 탓' 대통령, 미국도 안 지켜줬다

[4월혁명, 일곱 번째 마당] '참변은 너희 탓' 떠넘긴 대통령, 결국 쫓겨났다

[4월혁명, 여덟 번째 마당] '일본과 일전불사' 대통령, 속셈은 따로 있었다

[4월혁명, 아홉 번째 마당] 제자들의 의로운 죽음, 선생도 나라도 바꿨다

[4월혁명, 열 번째 마당] 결정적 순간, 야당 지도부는 비겁했다

[5.16쿠데타, 첫 번째 마당] 박정희 쿠데타 연재는 왜 그 신문에서 사라졌나

[5.16쿠데타, 두 번째 마당] 오랜 꿈 이룬 '박통'…대한민국은 짓밟혔다

[5.16쿠데타, 세 번째 마당] 박정희는 왜 한국인의 '노예근성'을 주목했나

[5.16쿠데타, 네 번째 마당] 청와대·참모총장의 위험한 선택…헌법은 죽었다

[5.16쿠데타, 다섯 번째 마당] 박정희 '은밀한 과거', 미국이 개의치 않은 이유

[5.16쿠데타, 여섯 번째 마당] 정치 깡패 이정재는 진정 죽어 마땅했나


프레시안 : 5.16쿠데타를 열렬히 지지한 사람들도 있었을 것 같다.

 

서중석 : 있었다. 극우 반공 세력이라고 해도 좋은데, 이 세력은 장면 정부 때 위기감을 계속 느끼고 있었다. '혁명 입법'이라고 해서 언론에서 계속 반민주 행위자와 부정 축재자 등을 철저히 다스려야 한다고 했기 때문이다. 자유당 간부급 이하조차 문제를 삼게 되면서, 이승만 정권에서 혜택을 받은 많은 사람이 불안하게 된 것이다.

 

사실 장면은 '혁명 입법'을, 개정 헌법을 통과시키고 법 4개를 만들어 한다고 했지만 제대로 안 했다. 자유당하고 같은 패까지는 아니어도 자유당이나 민주당이나 비슷비슷한 사람이었는데 어떻게 제대로 단죄하겠나. 부정 선거 책임자, 발포 책임자를 포함해 반민주 행위자를 철저히 징치하지 않았다.

 

다른 건 제대로 못했어도 단 하나 철저히 숙청한 건 사찰계 경찰이었다. 이승만 정권이 이걸로 지탱했다고까지는 못할지 몰라도 이승만 정권에서 특히 악명 높은 게 사찰계 경찰이었다. 여긴 친일파의 아성이었다. 친일파가 거의 다, 처음부터 진을 치고 있었다. 민주당이 이 사람들한테 제일 심하게 당했다. 그래서 거의 다 바꿔버렸다.

 

이것에 대해 경찰이나 극우 반공 세력은 '이러면 어떻게 빨갱이를 잡느냐'는 생각을 할 수가 있었다. 또한 1960년 12월에 네 차례에 걸쳐 지자체 선거가 있었다. 읍장, 면장, 읍의원, 면의원을 그때 다 뽑았다. 대다수는 자유당 하부 기관에서 일했던 사람들이다. 그건 하루아침에 없어지는 게 아니다. 무소속으로 나와서 다 됐다. 이들이 지방 유지인데, 이 세력도 '장면 정권 이거 되겠어? 우리 자유당만 때려잡고', 이런 생각을 안 할 수가 없었다.

 

프레시안 : 4월혁명 후 통일 운동이 활발하게 일어났다. 극우 세력은 이를 사회 혼란으로 규정했다. 일각에서는 이런 혼란 때문에 '5.16혁명'이 불가피했다는 주장도 한다.

 

서중석 : 1960년 가을 들어 중립화 통일안이 퍼진다. 1961년 2월엔 민족자주통일협의회(민자통)가 생기면서 통일 문제가 강하게 제기됐다. 이 무렵 2대 악법 반대 투쟁도 일어났다. 장면 정부가 반공법하고, 나중에 집회 및 시위에 관한 법률로 알려졌는데 이때는 데모 규제법이라고 불린 걸 만들려고 하니 반대 운동이 당연히 벌어진 것이다. 1961년 5월 초에는 서울대 민족통일연맹(민통련, 1960년 11월 발기 모임이 열림)을 넘어 19개 대학에서 참여한 민족통일전국학생연맹 결성준비위원회가 생겼다. 그러면서 "가자 북으로, 오라 남으로", "남북 학생 판문점에서 만나자", 이러지 않나.

 

이것 때문에 5.16쿠데타가 일어났다고 볼 수는 없다. 쿠데타 세력은 훨씬 이전부터 계획을 세워놓았다. 참 좋은 핑계거리를 줬다고는 볼 수 있다. 어쨌건 반공 의식을 강하게 가진 일반인 중 상당수가 이걸 불안하게 볼 수는 있었다. 더군다나 극우 반공 세력은 그렇잖아도 여러 가지가 불안한 상태였다. 군부에서도 일부는 이런 걸 불안하게 생각하지 않았겠나.

 

프레시안 : 장면 정권을 비판한 건 극우 반공 세력만이 아니었다.

 

서중석 : 장면 정권은 양측으로부터 심한 공격을 받고 있었다. 극우 반공 쪽으로부터 '너희들 무능한 것 아니냐'고 공격을 받고 있었고, 진보 세력도 '장면 정권이 무너져야 한다'고 외쳤다. 진보 세력이 참을성이 없었다고 할까, 통일 운동을 이승만 정권이 너무나도 억압했는데 상황이 달라져 그걸 할 수 있게 돼 그랬다고 할까.

 

특히 장면 정권의 기반이라고도 볼 수 있는 서북 세력에서 굉장히 반발하고 있었다. 서북 세력은 군에도, 재계에도, 경찰에도 다 들어가 있었다. 반공이 제일 센 데가 서북 세력이었다. 장면이 서북, 그러니까 평안도 계열이지 않나. (장면이 태어난 곳은 서울이지만 그의 부친이 평안도 출신이었다. 장면은 일제 강점기 때 가톨릭 평양 교구에서 활동하기도 했다. <편집자>) 장면 내각에는 평안도 사람이 꽤 있었다. 그런데 이 사람들도 (4월혁명 후 통일 운동 등을) 두려워하게 된 것이다. 그러니까 장면 정부가 여러 가지로 어렵게 된 점이 있었다.

 

어쨌든 이 세력이 쿠데타를 지지한다. 심지어 장면 정부에서 상공부 장관을 지낸 주요한(한국 최초의 근대시로 꼽히는 '불놀이'를 지은 인물. <편집자>)은 '혁명군'이라고 하면서 열렬히 반기고 구세주와 비슷하게 표현했다. 난 그걸 보고 깜짝 놀랐다. 이 사람은 일제 말에도 그렇게 일제 침략 전쟁을 찬양하더니만 이때도 이런 모습을 보였다. 주요한은 장면과 가까운 사이였는데도 그렇게 나오더라.

 

통일 운동 때문에 쿠데타? 그전부터 나라 뒤엎을 계획 세웠다

 

프레시안 : 4월혁명 후 통일 운동에 적극 참여한 이들은 어느 정도였나.

 

서중석 : 부유한 사람이 아니면 대학에 들어가기가 어려운 때였다. 대학생 상당수가 부유한 반공 가족의 일원이었다고 볼 수 있다. 민통련이 셌다고 얘기하지만, 민통련 관계자들이 이런 이야기를 하더라. "그러나 우리가 소수였다." 민통련이 1960년 11월부터 활동하는데 1961년 2.8 투쟁, 그러니까 한미경제협정 반대 투쟁을 할 때도 온 건 몇 백 명이었다. (한미경제협정의 주요 내용은 미국 경제 고문이 요청하면 경제 자료 등을 제공할 것, 미국 회사원과 교육자 및 기술자에게 외교관적 지위를 부여할 것, 한국 법률의 구속을 받지 않을 것 등이다. 불평등한 협정이었기 때문에 장면 정권과 미국에 대한 비판 여론이 커졌다. <편집자>)

 

2대 악법 반대 투쟁 때는 그보다 숫자가 많았지만, 1961년 5월 초 민통련이 아주 적극적으로 움직일 때 그렇게 숫자가 많았느냐. 여러 관계자에게 물어봐도 그건 잘 알기가 어렵다. 물론 5월 13일 (남북 학생 회담 환영 및 통일 촉진 궐기 대회가 열린) 서울운동장에 모인 건 3만 명이라고 보는 게 맞는 것 같다. 8000명으로 보도한 신문도 있지만, 3만 명 쪽이 더 맞는 것 같다. 그게 최고 숫자 아니었느냐, 난 그렇게 본다.

 

어쨌거나 급진 세력, 진보 세력은 5.16쿠데타에 눈앞이 캄캄했다. 쿠데타에 명백히 반대하며 피신하고 그랬다. 그런데 운동권이 어떤 생각을 했느냐 하는 것도 사실 그렇게 간단하지 않다. 조금 있으면 5.16 군사 정권에 흡수되는 사람도 있기 때문이다. 그런 걸 볼 때, 학생들이 쿠데타에 어떤 입장을 취했느냐는 건 여러 가지로 분석해야 한다. 그 이후 1960년대 총학생회의 행동 같은 것에서도 마찬가지로 이런 걸 감지할 수 있다. 당시 제일 데모를 잘한다는 데가 서울대 문리대였고 내가 거기 다녔는데, 거기 학생 중에도 항상 구파가 있었다. 어느 한쪽만 있던 게 아니다.

 

제일 재미난 건, 혁신계 중에서 쿠데타 후 잡힌 사람들은 감옥소에 다 들어갔는데 그중 일부가 감옥소에 가서도 쿠데타를 지지한 걸로 돼 있다는 것이다. 그분들 중 한 분한테 들은 이야기인데, 1963년 민정 이양으로 대통령 선거를 할 때 윤보선이 아니라 박정희를 찍는 게 좋다고 생각한 사람들이 있었다고 한다. 이유는 간단하더라. "윤보선은 분단 세력이고 한민당 골수분자 아니냐. 어떻게 우리 혁신 세력이 윤보선을 찍는다는 말이냐." 혁신 세력은 장면 정권, 윤보선 대통령 할 것 없이 다 미워했다. '이건 분단 세력이고 정말 나쁜 세력이다', 이렇게 본 것이다. 그와 달리 박정희는 좌익이던 박상희의 동생이라는 말이 감옥소 안에서 돌았을 수도 있고, 여러 가지가 작용해 일부에서는 그런 것도 있었다.

 

지식인의 경우도 어느 하나로 딱 얘기할 수 없다. 다만 나중에 민주공화당에 참여하는 사람들,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 고문이나 보좌 역할을 하는 사람들 중엔 저명한 지식인들이 있었다. 그런 경우 김종필이 탁월한 역할을 많이 했다고 하더라. 김종필이 논객으로서 설득력이 대단히 강했다고 한다. 거기에 참여한 유명한 정치학자 같은 사람들의 글 중에는 '그 설복에 우리가 넘어갔다'는 것도 나온다. 물론 그렇지 않은 지식인도 많았기 때문에, 지식인들이 어떤 태도를 취했느냐 하는 문제도 이야기하기가 쉽지 않다.


▲ 서중석 역사문제연구소 이사장. ⓒ프레시안(최형락)



장준하, "5.16 군사 혁명"에서 "밀수 왕초 박정희" 비판으로

 

프레시안 : 이 문제가 나올 때마다 빠지지 않고 거론되는 사람이 장준하다. 박정희의 라이벌인 장준하도 5.16쿠데타를 "민족주의적 군사 혁명"으로 높이 평가했으며 이는 5.16쿠데타가 시대의 대세였음을 보여주는 증거라는 주장이 끊이지 않는다. (관련 기사 : 박근혜 '아킬레스건', 장준하는 누구?)

 

서중석 : 장준하는 이 문제와 관련해 제일 논쟁이 많고, 그래서 여러 글에 등장한다. 장준하 하면 윤보선과 함께 박정희와 오랫동안 싸웠고, 그러다 의문의 죽음을 맞은 것 아니냐는 이야기가 강하게 있지 않나. 그런 장준하가 5.16쿠데타를 지지했다? 그렇다면 5.16쿠데타에 대한 지지가 그 당시엔 상당히 있었다고 봐야 하는 것 아니냐는 생각을 사람들에게 갖게 하는 모양이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심층적으로 이해할 필요가 있다.

 

여러 사람이 글을 쓸 때, 장준하가 5.16쿠데타 직후 몇 개 권두언에서 이야기한 것만 가지고 '장준하가 그렇게 했다', 이런 주장을 하는 것이 난 잘 이해되지 않는다. 장준하가 1960년 그리고 1961년 5.16쿠데타가 나기 전에 쓴 글들을 보면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면서 장준하가 어떤 분인가를 잘 분석하는 것이 아니고, 그냥 몇 가지를 가지고 '장준하는 이랬다'고 단정하는 건 좀 잘못된 것 아니냐는 생각을 하고 있다.

 

또 어떤 사람은 '장준하는 백범의 환생'이라고 써놨더라. 그것도 맞는 이야기가 아니다. 귀국할 때는 백범 김구의 비서로 왔지만 이분은 족청이라고 불린 조선민족청년단에서 상당한 활동을 했다. 그래서 일각에선 족청 단장이던 이범석과 무슨 관계가 있는 것 아니냐고 의심하기도 하지 않나. 백범이 그렇게 사거(1949년 피살)했는데, 한국전쟁 직후까지만 하더라도 장준하는 이승만 정부에 그렇게 비판적이지 않았다. 1953년 <사상계>가 처음 나올 때도 그랬다. 이승만 정부를 비판하는 건 1950년대 중반 이후다.

 

왜 그런가도 생각해봐야 한다. 장준하가 냉전 의식을 완전히 털어버리고 우리가 아는 그 유명한 민족주의자가 되는 건 어떻게 보면 1972년 이후라고 하는 게 더 맞다고 볼 수 있다. (1972년 이전 장준하는 민족보다 반공을 우선하는 모습을 보였다. 이승만의 단정 노선을 긍정적으로 평가하고 여운형의 좌우 합작을 비판한 데서도 이는 잘 드러난다. 그러나 1972년 유신 쿠데타 이후엔 민족주의자로서 분단에 도전했다. 장준하의 사고 체계에서 반공과 민족의 우선순위가 바뀐 셈이다. <편집자>)

 

그 이전엔 대단히 훌륭한 문필가, 아주 영향력이 있고 중요한 역할을 한 <사상계>를 이끈 분, 또 한일 회담 같은 때 박정희 반대편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 분, 그러니까 냉전 의식은 가졌지만 박정희와는 숙명의 라이벌이 될 수밖에 없는 투쟁을 많이 했던 분이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런 투쟁에서는 항상 희생적이라고 할까, 남이 못할 소리를 과감하게 했다. 예컨대 한국비료 사건 때 박정희 대통령에게 "밀수 왕초"라고 한 건 장준하가 아니면 못할 이야기였다.

 

(한국비료 사건은 1966년 9월에 터진 사카린 밀수 사건을 말한다. 삼성 계열사에서 일본 미쓰이로부터 사카린을 밀수입하다 적발된 사건이다. 청와대와 삼성의 유착 의혹이 제기되면서 사태는 일파만파로 번졌다. 장준하는 1966년 10월에 열린 규탄 대회에서 "밀수 왕초는 바로 박정희"라고 거침없이 주장했다가 구속됐다. 이병철 삼성 회장의 큰아들 이맹희는 훗날 회고록에서, 박정희 대통령과 이병철 회장이 공모하고 정부 기관들이 감싼 조직적인 밀수였으며 자신이 현장에서 사카린 밀수를 지휘했다고 증언했다. 한편 이 사건이 드러난 후 김두한 의원이 국회 본회의장에서 정일권 국무총리 등에게 "국민들이 주는 사카린"이라며 똥물을 투척했다가 제명되기도 했다. <편집자>)

 

이렇게 장준하의 결연한 모습과 냉전 의식 등을 종합적으로 보면서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일부 사람들이 몇 가지만 가지고 장준하를 판단하는 면이 있다.

 

역사학자 서중석의 진단
▲ "박근혜는 유신의 허깨비가 결코 아니었다"
▲ "박정희 신드롬, 박근혜가 지울 수도 있다"
▲ "<조선> 말대로면 이명박·박근혜 정부는 빨갱이"


1972년 이전과 그 후의 장준하는 달랐다

 

프레시안 : 4월혁명과 5.16쿠데타를 전후한 시기, 장준하는 어떤 모습을 보였나.

 

서중석 : <동아일보>만큼은 아니어도 장준하와 <사상계>는 4월혁명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1958년, 1959년, 1960년 초에 나온 <사상계>를 보면 이승만 정권을 아주 강하게 비판했다. 1960년 4월 마산 시위가 일어났을 때도 정권을 비판하는 논조를 강하게 띄고 있다. 4.19 이전에 <사상계>는 이미 상당한 역할을 했고 특히 4.19가 난 직후인 1960년 6월호 같은 건 정말 잘 만들었다. <사상계>를 돋보이게 만들었다.

 

이렇게 4월혁명 초기에는 <사상계>가 참 중요한 역할을 많이 했고 그 선봉에 장준하가 서 있었다. 1960년 8월호에 실린 '혁명상미성공(革命尙未成功)'은 장준하의 명문으로 알려져 있다. 나도 참 많이 인용하는 건데, 이거다.

 

"해외에서 독립 운동을 하였다는 인사들은 백안시를 당하고 그래도 조국 독립을 위하여 남북 만주나 중국 대륙에서 일생을 바친 혁명 선배들의 유가족들은 가두에서 문전걸식을 하게 되는 등 의는 떠나고 불의만 성장하여 충천하는 세력으로 이 땅을 뒤덮게 되었다. 누가 다시 애국을 하리오. 누가 다시 의에 살리오. 누가 자기의 몸을 민족의 흥망을 거는 제단에 불사르리오."

 

그 당시엔 독립 운동가를 다 혁명가라고 했다. 정말 대단한 문장 중 하나다. 장준하 같은 분이니까 이런 뛰어난 문장을 썼을 것이라고 보는데, 그러면서 혁명적으로 4월혁명을 해결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이었다. 그 당시엔 보수적인 언론도 이런 논조를 폈다.

 

그런데 그해 11월호 <사상계>를 보면 다른 주장이 나온다. 중립화 통일론이 등장하고, 민통련이 11월 1일 통일론을 주장하고 나올 때다. (1960년 11월 1일 민통련 발기 모임 참석자들은 대정부 및 사회 건의문을 채택했다. 기성세대는 분단의 책임을 지고 통일에 관한 젊은이들의 발언을 억압하지 말 것, 적극 외교로 전환해 총리가 미국과 소련을 방문할 것, 남북 서신 교환을 한시바삐 시행할 것 등이 주요 내용이다. <편집자>) 그런 통일론은 보수 세력을 깜짝 놀라게 했다.

 

이때 장준하가 '이데올로기적 혼돈의 극복을 위하여'라는 권두언을 썼다. '소련이 세계 적화를 위해 무슨 짓이든 다 하고 있고 그런 침투 작용 중 하나가 정신을 부패시키는 것인데, 한국 사람들 사이에서도 반미적 언사가 튀어나오고 중립 국가를 만들려 노력하기까지 이르렀다', 이런 내용이다. 여기서 문제 삼은 한국 사람들이란 통일 운동을 하던 사람들을 가리키지 않나 싶은데, 어쨌건 이만큼 한국이 위태롭고 평화 공존, 중립화 같은 술책에 넘어가고 있다고 주장하는 글이다.

 

프레시안 : 장준하 눈에는 장면 정권이 그런 통일 운동을 제대로 누르지 못하는 것으로 비쳤을 것이다.

 

서중석 : 그렇다. 이듬해 장면 정부의 국토건설본부에 참여하는 장준하가 장면 정부를 나중에 비판하는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장면 정부가 그런 걸 못 막았다는 것이다. 장준하뿐만 아니라 서북 사람들이 대체로 그랬다. (장준하는 평안북도 의주에서 태어났다. <편집자>) 그해 12월호에 쓴 권두언 '1960년을 보내면서'에서도 똑같은 소리를 하고 있다. 환상적 통일 논리를 주장하고 있다고 하면서 그걸 아주 강하게 비판하고 있다. 1961년 신년을 맞아 또 비판했다. 그러면서 5.16쿠데타가 일어나는 것이다. 5.16쿠데타의 핵심은 반공 태세 재정비 아닌가. 통일 논의를 금압하고 혁신계를 다 잡아들이지 않나. 이것에 대해 장준하는 주요한처럼은 아니겠지만 '그래도 이 위기에서 구한 것 아니냐', 이런 생각도 한쪽에 있었다.

 

장준하가 이 시기에 자신이 이런 태도를 취한 것에 대해 나중에 이야기하는 것이 있다. 함석헌과 자신이 역할을 나눠, 5.16쿠데타에 대해 한쪽에서는 지지하면서 다른 한쪽에서는 비판했다는 것이다. 어쨌든 많은 사람이 인용하는 것처럼 "민족적 활로를 타개하기 위하여 최후 수단으로 일어난 것이 다름 아닌 5.16 군사 혁명이다"라고 1961년 6월호에 써버렸다. 7월호에 가면 논조가 조금 다르다. 민주주의가 중요하다고 하면서 민정 이양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그렇지만 그해 연말까지 보면 대체로 5.16쿠데타를 지지하는 게 있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이분은 쿠데타가 나고 나서 얼마 후 중앙정보부에 끌려가 닦달을 당한다. 함석헌이 쓴 글 때문에 끌려갔다. 1962년부터는 <사상계>와 군사 정권이 정면 대립한다. 그러면서 장준하의 투쟁의 면모가 여실히 드러나게 된다.


▲ 장준하(왼쪽)와 함석헌(1975년 2월 21일). ⓒ연합뉴스



함석헌의 통찰력 "혁명은 민중의 것…군인은 못한다"

 

프레시안 : 장준하와 <사상계>를 이야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사람이 함석헌이다.

 

서중석 : 장준하와 함석헌을 동시에 생각해야 한다. <사상계>가 그렇게 유명하게 된 데는 장준하가 물론 절대적인 역할을 했지만 함석헌의 글도 굉장한 역할을 했다. 함석헌이 등장한 것도 <사상계>에 글을 쓰면서다. 그전엔 함석헌이라는 사람을 몇 명만 알았다.

 

<사상계>가 나온 직후 유명한 글 하나를 썼다. 최남선이 죽었을 때 <사상계>에서 '육당의 밤', '춘원의 밤' 행사를 열었다. 이렇게 친일파의 밤 행사를 열자 이걸 비판한 것도 같은 <사상계> 쪽 사람이라고 볼 수 있는 함석헌이었다.

 

함석헌은 큰 방향에서 틀린 적이 없었다. 항상 옳은 소리를 한 훌륭한 분이다. 이분이 천하에 명성을 알리고 <사상계>를 그렇게 드날린 건 1958년 8월호에 쓴 '생각하는 백성이라야 산다', 바로 이 글이다. '6.25 싸움이 주는 역사적 교훈'이라는 건데, 6.25 싸움에 대해 당시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알고 있던 냉전 논리를 정면으로 부정한 건 1950년대에 나온 글 중 이것 하나뿐이다.

 

"남한은 북한을 소련·중공의 꼭두각시라고 하고 북한은 남한을 미국의 꼭두각시라고 하니 있는 것은 꼭두각시뿐이지 나라가 아니다. 우리는 나라 없는 백성이다. 6.25는 꼭두각시의 놀음이었다. 민중의 시대에 민중이 살아 있어야 할 터인데 민중이 죽었으니 남의 꼭두각시밖에 될 것이 없다."

 

정말 잘 썼다. 지금 이야기해도 잡혀갈 수 있고 극우들이 '종북'이라고 막 뭐라고 할 만한 글이다. 1950년대는 너무나도 답답한 사회였다. 다 죽어 있는 사회였는데, 함석헌은 청신한 맛을 보여줬다. 냉전 의식에 새로운 정신세계를 열었다고 난 본다. 폭탄 같은 충격을 많은 사람에게 줬다. 이렇게 좋은 글을 쓰니, 냉전 시대인데도 그게 또 환영을 받더라. 재미난 나라다. (함석헌은 이 글 때문에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구속됐다. 필화 사건 후 <사상계> 구독자는 급격히 늘었다. <편집자>)

 

프레시안 : 함석헌은 '5.16을 어떻게 볼까'(<사상계> 1961년 7월호)라는 글을 통해 5.16쿠데타를 정면으로 비판했다.

 

서중석 : 4월혁명과 5.16쿠데타를 비교하며 비판한 글이다. "그때(4월혁명 때)는 믿은 것이 정의의 법칙, (…) 양심의 권위, 도리였지만 이번(5.16쿠데타)은 믿은 것이 탄알과 화약이다. 그만큼 (수준이) 낮다. 그때는 민중이 감격했지만, 이번은 민중의 감격이 없고 무표정이다. 묵인이다. (…) 혁명은 민중의 것이다. 민중만이 혁명을 할 수 있다. 군인은 혁명 못한다. (…) 반드시 어느 때에 가서는 민중과 버그러지는 날이 오고야 만다. 즉 다시 말하면, 지배자로서 본색을 드러내고야 만다." 이렇게 얘기했으니 박정희나 김종필 같은 사람은 얼마나 기분이 나빴겠나.

 

그러니까 함석헌과 역할 분담을 했다는 장준하의 말도 맞을 수는 있다. 어쨌건 이게 시중에 나간 지 4~5일 후 장준하는 중앙정보부에 출두해 김종필을 처음으로 만났다. (장준하와 김종필 사이엔 흥미로운 일화가 있다. 1960년 하극상 사건으로 군복을 벗은 예비역 중령 김종필은 국토건설본부 간부이던 장준하에게 이력서를 넣었다. 그러나 채용되지는 않았다. 장준하는 훗날, 그 사건으로 예편된 장교들을 그때 채용했다면 5.16쿠데타 같은 건 없었을지도 모른다는 이야기를 남겼다. <편집자>) 2주일쯤 지나서는 부정축재처리위원회라는 데서 나오라고 출두 명령서가 왔다. 장면 정부 때 김영선 재무부 장관이 <사상계> 빚을 갚으라고 변통해줬는데, 그걸 가지고 트집을 잡은 것이다. 이게 내내 말썽이 된다.

 

하여튼 이 당시 지식인이 어떤 태도를 취했느냐 하는 것에는 그 지식인이 어떤 사람이냐, 그리고 4월혁명과 5.16쿠데타 과정 속에서 어떻게 상황을 이해했느냐, 이런 것들이 큰 영향을 끼쳤다.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 마흔아홉 번째 편도 조만간 발행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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