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희 주민번호는 신문 1면에 실렸지만…"
"박정희 주민번호는 신문 1면에 실렸지만…"
[기자의 눈] 정보보호 첫 걸음은 수집 최소화
2014.01.28 15:01:40
"박정희 주민번호는 신문 1면에 실렸지만…"
고대 로마인들은 너도나도 목욕을 즐겼다. 당연히 상·하수도 시설이 필요했고, 이를 위한 기술이 발달했다. 잘 갖춰진 수도관은 로마제국의 자랑이었다. 그런데 수도관은 ‘납’으로 만들어졌다. 구하기 쉽고, 가공이 쉬운 금속인 탓이다. 

지금 우리가 듣기엔, 오싹한 이야기다. ‘납’이 사람 몸에 얼마나 치명적인 위험을 끼치는지, 우린 잘 알고 있다. 하지만 우리가 고대 로마인들을 비웃을 자격이 있는지는 의심스럽다. 

주민번호 이용 전산망, 납으로 된 수도관

박근혜 대통령이 지난 27일 현행 주민등록번호를 대체할 수단을 찾으라고 지시했다. 최근 발생한 카드정보 유출 사고 때문인데, ‘소 잃고 외양간 고치는 격’이다. 현대 한국인들은 너도나도 전산망을 이용한다. 당연히 전산 인프라가 필요하고, 관련 업체가 성업 중이다. 

잘 갖춰진 전산망은 한국의 자랑거리다. 그런데 전산망은 무조건 ‘주민등록번호’를 요구한다. 한국인들에겐 무조건 ‘주민등록번호’가 부여돼 온 까닭에, 전산 인프라 구축이 쉬웠다. 한국이 1997년 외환위기 이후 급속한 정보화를 이룰 수 있었던 배경에는 전 국민 주민등록번호 제도가 있었다. 모든 사람에게 각각 다른 번호가 부여되고, 다들 그 번호를 외우고 있다. 데이터베이스를 구축하고, 활용하는 입장에선 아주 편리하다.    

그러나 쉬운 길을 택하면 반드시 대가가 따른다. 고대 로마인들은 가공이 쉽다는 이유로, 납을 수도관 재료로 썼다. 그 대가는 치명적인 납 중독. 현대 한국인들은 개발과 관리가 쉽다는 이유로, 주민등록번호가 필수적인 전산망을 사용한다. 그 대가에 대한 본격적인 청구서는 아직 날아오지 않았다. 

박정희 정부가 도입한 주민등록증

현행 주민등록번호 제도를 도입한 건 박정희 전 대통령이다. 5.16쿠데타 이듬해인 1962년, 주민등록법이 만들어졌다. 1968년 1월 21일 북한 특수부대원 31명이 청와대를 습격한, ‘김신조 사건’을 계기로 급류를 탔다. 주민등록번호와 함께 주민등록증이 발급됐는데, 주민등록증 1호와 2호는 박정희 전 대통령 부부의 몫이었다. 박 전 대통령 부부가 받은 번호는 각각 110101-100001과 110101-200002였다. 이런 내용이 당시 신문 1면에 실렸다. 

지금 우리가 보기엔 황당한 일이다. 대통령 부부의 주민등록번호를 언론에 공개하다니. 하지만 불과 얼마 전까지 우리가 모니터 앞에 앉아서 하던 일도 별 차이가 없다. 신뢰하기 힘든 업체가 관리하는 인터넷 사이트에 주민등록번호를 입력했다. 이게 얼마나 황당한 일인지, 지금 우리는 깨닫는 중이다. 

비록 늦었지만, 이번 전산 사고를 계기로 정부가 개인정보 보호에 관심을 쏟는다면 다행한 일이다. 그러나 정부의 의지에 쉽게 믿음이 가지 않는다. 개인정보 보호의 첫 걸음은 정보 수집을 최소화하는 것이다. 책임 있는 기관이 그걸 관리하게 하는 게 그 다음이다. 

원격의료 도입, 민감한 의료정보 보호받을 수 있을까?

전산망을 개발, 관리하는 업종을 SI업종이라고 하는데, 이 분야에선 다단계 하도급과 불안정 고용이 만연한 지 오래다. 그래서 정보 관리의 책임이 모호한 경우가 흔하다. 전산 사고가 잇따르는 한 배경이다. 정부가 이번 사고를 계기로 SI분야의 다단계 하도급과 불안정 고용에 대한 대책을 마련하기로 했다는 말은, 아직 듣지 못했다. 이보다 앞선 문제, 즉 개인정보 수집을 최소화하는 일 역시 마찬가지다. 개인정보 수집을 전제로 진행되는 정책 사업이 지금도 많다. 이에 대한 중간점검이 필수적이지만, 아무런 소식이 없다. 

대표적인 게 최근 의료계에서 논란이 된 ‘원격의료’다. 이 사업이 현실화 되면, 개인의 의료 정보에 대해 민간 IT업체가 접근할 길이 열린다. 여성의 산부인과 진료 기록 등 민감한 정보들이 과연 안전하게 지켜질 수 있을까. 지금처럼 다단계 하도급과 불안정 고용이 만연한 조건에서라면, 불안감은 더욱 증폭된다.

우리가 납으로 된 수도관을 쓰고 있고, 납 성분이 해롭다는 걸 알았다면, 해야 할 일은 분명하다. 비용과 시간이 들더라도, 납으로 된 수도관을 철거해야 한다. 마찬가지다. 주민등록번호 입력이 필수적인 전산망이 위험하다는 걸 알았다면, 더 이상 꾸물대선 안 된다. 충분한 비용을 들여서 전산망을 새로 구축해야 한다. 아울러 원격의료 등 민감한 개인정보 수집이 필요한 정책 사업 역시 다시 검토하는 게 옳다.
 

▲ 박정희 전 대통령에게 주민등록증이 발급됐다는 <경향신문> 기사.


mendrami@pressian.com 다른 글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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