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큐멘터리 영화 <경계도시 2>를 보는 내내 불편하고 괴로웠다. 비단 경계인의 신념으로 살아온 지식인 송두율 교수가 사실상 전향을 해야만 했던, 한국사회의 광기와 강요된 폭력을 마주하는 것 자체도 슬픈 일이었지만 그 동안 스스로 송두율의 존재가치를 잊고 살아왔다는 자괴감이 더없이 컸다. 그렇다. <경계도시 2>는 어찌할 수 없는 부끄럽고 무력한 자괴감을 불러 일으킨다. 극장문을 나서면, 좀 전에 본 카메라가 비춘 서글픈 한국사회의 초상이 오늘날에도 지속되고 있는데, '당신은 이를 방관하며 살고있지 않은가'라는 질문으로 세상을 맞이하게 된다. 그리고 초라하기 짝이 없는, 한없이 부끄러운 자신의 자아를 감싸 보듬게 된다. 역사에 무임승차했던 그 날의 아픔을 오롯이 육체적으로 견뎌내 보란듯이 말이다. 한국사회의 악몽으로 기록되어 마땅할 '경계도시인'들에게 그 날의 악몽은 이제 끝난 것인가, 오직 미래의 역사만이 그 답을 알 수 있으리라. 하지만 중요한 건 아직 끔찍하게도 '레드 컴플렉스'가 존재한다는 사실이다. 전적으로 송두율이 겪어야 했던 고초는 국가보안법이라는 비극으로부터 시작됐고, 아직 그 비극은 끝이 나지 않았으니까. 그래서 혹시라도 누군가 <경계도시 2>의 상영을 막으려는 움직임이 있지 않을까 하는 기우섞인 걱정이 들기도 한다. 아이러니하게도 '내 안의 레드 컴플렉스'라고나 할까?
| ▲ <경계도시 2> |
어쨌거나 영화를 떠나 나에겐 지식인 송두율 교수, 그 이름 자체가 각별했다. 대학에서 사회학을 전공했던 사람으로서 송두율, 그 이름 석자는 언제나 경외의 대상이었다. 그의 책을 읽지 않고선 사회학도라고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송두율은 많은 가르침을 선사한 지식인으로 전도유망한 학자였고 앞으로도 그렇다. 당연히 그의 책은 반드시 읽어야 하는 필독서였으며 세계적 석학인 위르겐 하버마스의 제자라는 후광은 더욱 그를 사모하는 계기가 되어 스스로 그의 제자임을 자처했다(물론 정신적인 측면에서). 이른바 외부의 주관적 시선이 아닌 북한 체제 내부의 입장에서 사고해야 한다는 '내재적 접근법'은 나에게 북한을 바라보는 새로운 눈을 선사했다. 또 북한을 자유롭게 넘나드는 송 교수의 방북 자체를 용기있는 학자의 신념으로 여겨, 기회가 닿는다면 독일로 날아가 그를 만나보고 싶다는 생각도 있었다. 그래서 대학시절, 학보사 기자로 활동하면서 그를 인터뷰 취재하겠다는 기획서를 제출해 독일로 날아갈까 했지만 여차한 이유로 서면으로 대신한 적도 있어 낯설지 않게 느껴지기도 한다.
아무튼 지식인의 사표로 존경했던 송두율 교수가 37년만에 고국으로 돌아온다는 소식을 접하고 기쁘지 않을 수 없었다. 남쪽과 북쪽, 양쪽이 모두 숨쉴 수 있는 틈을 만들고자 희망하고 노력했던 경계인 송두율 학자의 귀향 이야기에 한국사회가 귀를 기울일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더욱이 간첩 혐의로 입국금지 상태였던 재독 철학자 송두율 교수가 국정원의 체포영장이 발부된 사실을 알고도 귀국을 감행했기에 진실로 순조로운 앞날이 열리리라고 고대했다. 분단의 역사를 치유하고 새로운 역사의 장을 마련, 훗날 더욱 높은 시대적 평가를 받을 것으로 상상했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그는 귀국과 동시에 추락하기 시작했다. 마치 높이 비상하고자 했던 이카루스의 날개가 녹기 시작하자 급격히 추락한 것과 마찬가지로 그에게는 어느 새 '해방이후의 최대간첩'이라는 레테르가 붙어 있었다.
이렇듯 <경계도시 2>는 냉전체제의 산물인 분단을 경계삼아 남과 북이 나아야 갈 길을 치열하게 고민했던 지식인이 어떻게 파열과 몰락의 길을 걷게 되는지, 한 치도 과장없이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특히 노동당 가입 사실이 알려지면서 여론은 최악으로 치닫게 되고 그 결과 좌와 우, 진보와 보수를 막론하고 어느 누구도 경계인의 신념을 들으려 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를 윽박지르거나 혹은 훈수라는 이름으로 철저한 반성과 사실상 전향을 촉구했다. 단순한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역사적 대의와 시민사회의 진보적 힘에 헌신하라는 설명이 뒤따르면서. 하지만 내가 보기에 참으로 어처구니가 없었다. 우선 송두율 교수의 북한 노동당 가입이 그렇게 중요한 문제가 되는 것인 지 모르겠다. 그가 북한 노동당에 가입했다고 해서 어떤 피해를 줬는지 모르겠다. 아마도 분단의 기득권자들만이 송두율 교수의 북한 노동당 가입을 불온하게 생각할 것이다. 역사에 가정은 부질없는 일이라 하지만, 만약 그가 한나라당 당원 혹은 민주당 당원이었다면 열렬히 환영 받았을까? 그렇지도 않았을 것이다. 아마도 지식인 대접은커녕 송두율 교수의 또 다른 저의를 끊임없이 의심했을 것이다. 언젠가 김규항 칼럼니스트가 지적한 것처럼 "사람들이 의혹에 찬 눈으로 바라보는 송두율의 이런저런 행적들은 분단 조국을 살아가는 지식인이 가져야 할 최소한의 양식"일 뿐이다.
반성과 전향을 권유하는 사람들에 맞서 초지일관 포기할 수 없는 경계인의 철학을 설파하는 송두율 교수의 부인이 정말 인상적이었다. 때문에 송두율 부인이 사실상 이 영화의 주인공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결국 송두율은 경계인 사상의 승리자가 되지 못했으니까. 이 영화에서 잊을래야 잊을 수 없으며, 반드시 기억해야 하는 것이 있다. 나레이션에 나오듯이 모두가 송두율 교수에게 훈수두려 했다는 것. 단적으로 경계인의 철학을 이해한다면서도 사실상 사상 전향을 강권하는 주변 인물들의 태도다. 이들은 불쾌하고 졸렬했다. 물론 송두율 교수를 사랑하고 아끼는 마음에서 우러나온 고민과 대책들의 산물이겠지만, 그래도 이건 아니다 싶을 정도였다. 거칠게 표현하면, '먹물들의 한계'를 확인한 순간이라고나 할까? 진보적 지식인이라는 자들의 허명이 신랄하게 드러나는 대화의 수준은 거의 '헛소리'에 가까웠다. 불편을 넘어 혐오스러웠다. 지식인들조차도 레드 컴플렉스 안에 포섭된 존재며 그들조차도 분단이 낳은 희생양에 불과함을 확인한 순간이었다. 어느 누구도 국가보안법의 부당성을 이야기하지 않았다. 남한인지 아니면 북한인지, 양자택일만을 강요했다. 그러면서도 선택은 결국 송두율 교수가 판단하고 선택하는 것이라고 민주를 가장했다. 사상적 폭력에 가까웠다. 실로 엄청난 충격이었다. 이 사실 하나만으로도 <경계도시 2>를 봐야되는 당위가 설명될 정도였으니까. 진보적 색깔을 띈 인사조차 자기분열적인 증상을 내보이는 초라한 형국의 나라가 바로 대한민국이었다. 사상의 자유를 부르짖던 지식인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분명 교훈으로 삼아야 할 지점이다. 한 마디로 민주주의를 가장한 야만의 소굴이 우리 사회였으며 송두율은 단지 레드 컴플렉스라는 프리즘으로 야만을 더욱 도드라지게 했을 뿐이다.
| ▲ <경계도시2> |
<경계도시 2>의 제작사 이름이 감어인(鑒於人)필름이다. 감어인, 즉 사람에게 비추다는 뜻으로 이 영화의 핵심을 짚은 어휘로 부족함이 없다는 생각이 든다. <경계도시 2>는 송두율에 비친 한국사회의 초상을 다루지만, 결국은 자신의 얼굴을 비추는 영화다. 경계인의 진실과 크게 관계없이, 한국사회의 욕망에 혹은 자신의 욕구에 송두율을 자의적으로 해석했다는 것은 영화 말미의 "2008년 대법원은 대부분의 혐의에 대해 무죄로 판결한 항소심 결과를 확정하고, 독일 국적 취득 후의 북한 방문에 대해서도 무죄를 선고했다"는 자막이 증명한다. 어쨌거나 한국사회의 레드 콤플렉스를 뒤흔들었던 송두율 사건은 분단 기득권자의 세력이 아직도 만만치 않다는 것을 새삼 확인시켜 주기에 충분했다.
아무쪼록 독일에서 송두율 교수가 행복하길 기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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