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인의 기억>의 시대적 배경
아버지 세대는 한국전쟁이 끝난 후 태어난 베이비 붐 세대인 50대 중반의 세대이고 딸 세대는 아바타와 아이팟에 익숙한 글로벌 세대인 20대 젊음의 세대이다. 한 세대의 기억은 자연스럽게 다음 세대로 연결되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경우는 일정한 부분을 지워버린 채, 또는 가려버린 채 기억을 묻어 버리는 경우가 너무나 많다. 세상이 너무나 빨리 바뀌는 탓도 있을 것이다. 특히 이 연극의 배경이 된 <화동주보> 사건을 기억하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화동주보> 사건
1972년 10월 17일 박정희는 10월 유신을 발표하여 영구 집권을 획책한다. 게엄군이 출동하여 도심을 장악하고 탱크, 장갑차와 무장한 병력이 세종로 광화문에 등장한다.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모르는 젊은 고등학생에겐 무장한 군인이 멋지게 보였는지도 모른다. 당시 경기고등학교 2학년 재학생 하나가 학교에 가서 등굣길에 본 군인과 군장을 멋있다고 자랑하자 다른 학생이 "야, 뭐가 멋있어, 민주주의가 죽은 거야!"라고 한마디 한다. 그런 대화가 계기가 되어 문예반장, 신문반장 등 학생 일곱 명이 모여 사회 시간에 배운 헌법과 유신헌법을 비교하는 스터디 그룹을 만들게 된다.
비상국무회의는 10월 27일 헌법개정안을 의결 공고하게 되는 데, 새 헌법에는 대통령이 삼권을 통제하고, 6년 임기의 대통령제도, 통일주체국민회의를 설치하고 국회의원의 3분의 1을 대통령이 뽑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
유신헌법 개정안이 공고되자 이들 7인은 바로 비판문과 반대 선언문을 작성하고 10월 29일, 일요일 저녁에 학교에 들어가 각 교실 책상 서랍과 사물함에 유인물을 집어넣는다. 다음날 학교와 수사 당국은 발칵 뒤집힌다. 군경합동수사가 시작되고 하나둘씩 체포되기 시작한다. 11월 초, 이들은 서울 게엄사령부 군사법정에서 구속영장을 발부 받고 필동 수도경비사령부 헌병대로 이관 최조를 받고 밤에 서대문 형무소에 입소하게 된다. 그러다 이들은 갑자기 전원 수도경비사령관 윤필용 사령관실로 불려가게 되고 윤필용 사령관의 지시에 의해 석방된다. (나중에 확인한 결과 1980년 가을까지 이 사건은 선고 유예 상태였다고 한다.)
11월 말에 이들은 다시 학교로 복귀하고 졸업 후에 대학에 가고 사회로 나가서 평범한 시민으로 세상을 살게 된다. 그 이후 수많은 정치적 변화 속에 이 사건은 세인의 기억에서 거의 완전하게 사라지고 만다.
| ▲ 1971년 4월 5일, 매년 한 명을 뽑는 명예 보이스카웃 상을 받는 정병호. 박정희 대통령이 직접 메달을 수여하고 있다(왼쪽). 거리행진 선두에 선 정병호(오른쪽). |
<7인의 기억> 프로젝트
세월이 흘러 <화동주보> 사건은 세인의 기억에서 완전히 사라졌음은 물론, 당시 <화동주보> 제작에 참가한 당사자들조차 그때의 기억을 제각기 다르게 추억하고 있을 수밖에 없어진다. 당사자들 사이에서도 다른 기억의 굴절과 각색 과정에 주목한 한양대학교 교수 정병호는 <7인의 기억> 프로젝트를 연구하게 된다.
내가 이렇게 얘기하면 거창하지만, 실제로 오늘 이 이야기를 오늘 나누는 건, 투사로서가 아니라, 이렇게 들어가서 감옥살이 했던 청소년들, 이제 약 40여년 후 각자 그 일을 왜 어떻게 겪었는지를 다르게 기억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마치 <15소년 표류기> 마냥 하나의 모험으로 기억한다. 그러나 우리 모두는 각자 과거를 달리 추억 하고 있다.
덕성여자대학교 교수 정진웅에 의하면 "기억을 불러내는 행위는 과거의 체험을 경험화시키는 행위"라고 설명한다. 현재의 관심사, 욕구 등이 반영되어 과거의 기억을 불러낸다. 객관적 사실을 기억하는 게 아니라, 해석적 주체로서 적극적으로 과거의 체험을 불러내어 의미화시키는 것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이제 서울시극단의 연극 <7인의 기억>(장우재 연출)은 무엇을 의미화 시키려는 것일까? (계속)
| ▲ <7인의 기억> 주요 출연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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