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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우재의 연극 '7인의 기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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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장우재의 연극 '7인의 기억'

[김석만의 '연극 창작 노트'] <2> 서울+기억 창작시리즈

서울시극단은 2009년을 맞아 창작연극을 개발하기로 결정하고 창작연구개발사업을 추진한다. 제조회사로 본다면 신상품을 생산하기 위한 연구개발(R&D) 프로젝트인 셈이다.

일반적으로 창작연극을 만들어내려면 희곡작가에게 작품을 의뢰하거나 아니면 공모전을 통해 우수한 희곡을 선발하거나 또는 단원들과 함께 워크숍을 통해서 작품을 개발하는 게 보통의 경우이다. 그러나 서울시극단은 대학로의 젊은 작가, 연출가 등 공연 전문가들과 공동의 작품 개발 사업을 추진하였다. 그 배경에는 대학로 연극계가 상업주의 경향에 젖어들고 있는 현실이 자리잡고 있다.

▲ 2009년에 거행한 창작포럼 안내문

현대 한국 연극의 동력은 1960년대부터 시작한 동인(同人)극단에서 비롯된다. 동인제 극단의 태동은 1920년대 토월회, 극예술연구회 등에서 시작되어 모름지기 연극을 한다고 하면 극단에 들어가야 한다는 말이 바로 동인제 극단이 아니고서는 연극 활동을 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본격적인 동인제 극단은 1960년대 실험극단의 창단이 계기가 되었다. 물론 토월회, 극예술연구회 사이에 신협(신협)이 있었고, 이들의 학생극(대학극) 지도활동이 있었다. 실험극단에 자극을 받아 민중, 가교 등이 탄생했다. 일제시대 동경유학생 유치진, 서항석 이후에 새로운 세대가 동인제 극단을 중심으로 자라났다.

동인제 극단의 활동은 연극에 대해 아카데미즘과 프로정신을 지향하였다. 흥행이라든가, 객석 점유율을 따지는 극장경영적 측면은 중요한 이슈가 아니고 동인의 합의와 설득에 의해 실험적이며, 때로는 고전의 소개 등 의미있는 창작작업에 활동의 중심을 두었다.

동인제 극단의 와해, 또는 몰락

동인제 극단은 1990년대에 들어서 위기를 맞게 된다. 1980년대에 접어들자 대학 연극반 출신의 젊은 연극쟁이들은 더 이상 기성 동인제 극단에 들어오지 않게 된다. 1970년대의 민주화 운동과 1980년대 반독재민주운동을 겪으면서 대학의 연극반, 탈반 출신의 연극쟁이들은 번역극을 연극의 중심에 둔 기성세대와 단절을 선언하고 주로 창작연극을 생산하게 된다. 그 전과는 다른 의미의 동인제 극단도 생겨났지만, 한편 과거와 다른 시장경제체제가 제작 측면에서 흥행의 중요성이 부상하게 된다. 자연스럽게 동인제 체제의 연극 제작 방식보다는 전문 기획 제작시스템이 도입되고 자본의 논리와 시장의 논리가 예술창작의 세계에도 영향을 미치기 시작한다. 기획, 제작 능력을 갖추지 못한 동인제 극단은 서서히 와해되기 시작한다. 1990년대부터 개인 기획자, 제작자는 서서히 전문역량을 구비해나가고 전문집단으로 부상한다. 동인제 극단이 과거 30년동안 축적해온 정보와 인맥은 고스란히 제작사로 이동하고 동인제 극단이 와해된 자리에 기획사가 자리를 잡는다.

기획시스템의 도입으로 연극제작은 보다 전문적인 구조와 과정을 얻게 되었으나 공연행위는 흥행이 최우선의 과제로 떠오르게 되었다. 어느덧 대학로에서 흥행에 성공하는 연극제작의 공식 같은 게 나오기도 했다. 적은 수의 배우와 감미로운 연애이야기, 장기공연이 가능하려면 구매력있는 젊은 여성관객을 모을 수 있는 소재를 다뤄야 하는 것처럼 연극이 가벼워졌다. 일시적 현상과도 같은 제작 형태가 자본의 힘과 시장의 구조 속에서 영구히 자리를 잡을 것 같았다.

이런 환경 속에서 실험적인 창작활동은 위축되고, 흥행이나 당장의 화제를 불러오지 못할 소재를 다루는 연극은 아예 사라질 듯한 위기를 맞게 되었다. 그런 와중에서도 선구적인 창작정신을 갖춘 연극집단의 공연이 당당하게 자리를 잡고 있기는 하지만, 개개인 창작자들은 의기소침하지 않을 수 없었다.

서울시극단의 '서울+기억' 창작 시리즈는 이와 같은 배경에서 탄생되었다. '창작연극을 위한 공동연구개발'이 모토였다. 서울시극단은 2009년 서울시민이 자랑할만한 연극을 만들고자 대학로에서 창작연구개발에 뜻을 함께할 젊은 희곡작가, 연출가들과 함께 '창작포럼', '창작인큐베이팅 워크숍' '무대독회'를 진행하였다. 지난 해 말 연극 일곱편이 창작 아이디어가 무대독회에서 나왔다. 그 가운데 두편, <7인의 기억>과 <순우삼촌>이 금년도 창작연극으로 선을 보이게 된 것이다.

장우재의 '7인의 기억'

극단 '이와삼'의 장우재 연출은 작년 서울시극단의 창작포럼에서 정병호 교수의 특강, <화동주보>사건을 다룬 '7인의 기억' 특강을 처음 들을 때는 아무런 창작의욕이 없었다고 했다.

2009년초 한양대 문화인류학과 정병호 교수의 '7인의 기억' 프로젝트를 처음 들었을 때 그렇게 마음이 움직이지 않았다. 개인적으로 역사나 정치를 이야기 하는 것에 익숙치 않기 때문이다. 또한 내가 그만한 의식이 있나 해서다.

아니, 그렇게 살고 있나 해서다. 그러다가 창작포럼에서 열린 정병호 교수의 강연을 듣고, 특히 마지막에 '나더러 시를 쓰란다' 라는 에피소드를 들을 때 그 분의 기억 속에 담겨 있는 속울음을 들었다.

역사적인 문제가 한 개인을 통과할 때 부는 어떤 작은 따뜻한 바람을 느꼈다.
그러면 거창한 스케일이 아니더라도 한 개인을 통과한 어떤 바람 같은 역사 이야기는 해 볼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그리고 나서도 망설였다. 이 시대가 그런 얘기를 듣고 싶어할까라는 의문이 들어서다. 그러다 혹시 시대적인 아픔 을 지닌 시인과 같은 인물에게 딸이 있으면 어떨까 싶었다. 아이폰을 들고 아바타에 열광하는 현재 20대의 딸, 그 딸에게서 아버지의 그 바람은 어떻게 작용하는지 문득 궁금해졌다.


(장우재, '7인의 기억' 창작의 발상에서...)

▲ 극단 '이와삼' 창단공연작 '차력사와 아코디온'(좌) 연출가 장우재(우)

창작의 발상은 아주 우연한 계기에 자리를 잡는다. 하나의 씨앗은 제자리를 잡으면 뿌리를 내리고 싹을 돋우고 줄기와 가지를 펴고 자라서 거목으로 자라난다. 창작 포럼은 이러한 창작의 발상을 키워내기 위한 자리였다. 극단 '이와삼 (2와 3)'의 작가이자 연출가인 장우재에게 창작의 발상을 얻게한 정병호 교수의 '나더러 시를 쓰란다'는 과연 무엇일까? 얼마나 대단한 시일까?

그가 시를 쓰란다.

▲ '화동주보' 제작자 한 명이 1978년에 낸 동인지
<화동주보>의 제작자 가운데 한 명이 제일 먼저 잡혀간다. 그의 이름은
'7인의 기억'에서 서종태라는 역할이다. 서종태는 제일 먼저 잡혀가서 기관에서 심하게 맞는다. 그 이유로 그는 석방되고 나서도 그때의 상처로 사회에 적응을 하지 못하고 세상을 등진다. 가끔 친구 를 만나는데 만나면 시화전을 열자고 한다. 그는 시인이고 또 동인지 '보신각(普信閣)'을 내기도 했다.

'7인의 기억'의 장우재 작가, 연출가의 마음을 동하게 만든 '그가 시를 쓰란다' 라는 시는 한 친구가 과거의 기억에 가슴 아파하는 친구를 그리워하며 읊는 소리다. 세상을 등진 시인 친구가 보신각에서 시화전을 한번 열자고 한다는 얘기를 듣자 누군가 그럼 그 얘기를 그대로 시로 써보라고 권한다. 그래서 나온 게 '그가 시를 쓰란다'는 시다. 장우재 연출은 여기서 이 작품의 위대한 창작의 발상을 얻었다.

나더러 시를 쓰란다.
그 녀석이 시를 쓰란다.
어떻게 쓰나. 그동안 머리로만
살아온 내게 시를 쓰란다. 우리
보신각에서 시화전이라도
한 판 하자고 한다.
우린 이렇게 살고 있다.


(정병호 구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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