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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약을 실천하기, 문자를 해방하기, 삶을 번역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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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약을 실천하기, 문자를 해방하기, 삶을 번역하기

[프레시안 books] 남종신·손예원·정인교의 <잠재문학실험실>

1. 울리포, 1960년 파리

대략 20여 년 전, 파리의 한 서점에서 나는 레몽 크노의 <문체 연습(Exercices de Style)>을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책을 구입해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나는, 왜 그랬는지 지금도 잘 이해가 되지 않지만, 언젠가 반드시 이 책을 번역하겠노라 굳게 다짐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날 이후, 파리 유학생활의 즐거움이 하나 더 추가되었다. 레이몽 크노와 조르주 페렉의 작품을 중심으로, '이런 종류'의 글들이 눈에 들어올 때면, 어떻게 해서든 그 책을 손에 넣으려했고, 이렇게 대형서점이나 헌책방, 길거리 가판대나 심지어 골동품 가게를 돌아다니며 구입했던 '이런 종류의 책'들을 나는 남몰래 숨겨둔 꿀단지처럼 짬짬이 꺼내 읽으면서 그 일로 고단한 유학생활에서 커다란 위안을 받기도 했다.

이 책들은, 마치 몰래하는 외도와도 같아, 팽팽한 긴장감 속에서 간혹 맛보게 되는 느슨하고도 짧은, 그래서 더욱 강렬한 휴식 시간을 나에게 선사해주었다. 사실, 찾아내고 구입하고 읽는 과정 자체가 너무나도 즐거웠던 것 같다. 귀국해서 딱히 할 일을 찾지 못하게 될 경우, 어떻게든 스폰서를 물색해서 반드시 이 책들을 번역·출간해서 먹고 살 길을 개척하겠노라고, 지금에서 보면 순진하기 그지없는 생각을 그 당시에는 진지한 어조로 혼자 되뇌곤 했다.

내 목록은 그리 길지 않았다. 하지만 리스트에 올라있는 작품들 가운데 상당수는 지금 한국어로 출간되어 버젓이 세상을 떠돌아다닌다. 독자들의 폭발적인 반응이 있었던(있는) 것은 아니다. 대중의 호의적인 반응을 기대한다는 것 자체가 오히려 모욕이 될 수 있는 글들이라고 해야 할까? 원문의 난해함 때문에 번역도 잘해야 본전을 찾기 어려운 경우가 허다했을 것이다. 막대한 시간을 요구하는 작업이기도 해서(해보니 알겠다), 번역가의 생계에 크게 보탬을 주었다고 보기도 어려울 것이다. 그런데 실현되지 않은 내 리스트에 균형을 잡아준 것이 바로 울리포(OULIPO)의 <잠재문학(창조, 재-창조, 유희)>(Gallimard, 1973)이었다. 울리포가 뭔가?

울리포(OULIPO)? 이것은 무엇인가? 저것이 무엇이란 말인가 우(OU)는 무엇이냐? 리(LI)는 무엇이지? 포(PO)는 무엇인가?
우(OU), 이것은 바로 작업실(OUVROIR), 아틀리에이다. 무엇을 제작하려고? 리(LI)를.
리(LI), 이것은 문학(littérature), 우리가 읽는 것이자 지워버리는 것이다. 어떤 종류의 리(LI)를? 리포(LIPO)를.
포(PO), 이것은 잠재성(potentiel)을 뜻한다. 무수한, 잠재적으로 영원히 생산 가능한, 모든 까다로운 실제에 있어서 다량의, 무한정의, 문학에 대하여.
누가? 달리 말하자면 누가 이 가당찮은 기획의 책임자인가? 레몽 크노(Raymond Queneau), RQ, 초창기 창단자 중 한 사람, 그리고 프랑스와 르 리오네(François Le Lionnais), FLL, 공동 창단자이자 대부, 최초의 그룹 대표, 그 새로운 설립자 대표(Fraisident-Pondateur).
(<잠재문학실험실>(남종신·손예원·정인교 지음, 작업실유령 펴냄, 2013년, 115~118쪽. 모든 인용의 출처이며, 쪽수만 밝히기로 한다))



▲ <잠재문학실험실>(남종신·손예원·정인교 지음, 워크룸프레스 펴냄). ⓒ워크룸프레스
울리포 그룹에게 중요한 것은 "일정한 규칙을 세운 후 그에 따라 작품의 형식과 구조를 변형"(211쪽)하는 제약(contrainte)이라는 개념이었다. 제약은 예컨대, "단어나 문장, 글의 알파벳 철자를 해체한 후 새롭게 재조립하는 철자 바꾸기 제약 '아나그람(anagramme)', 앞에서부터 읽으나 뒤에서부터 읽어도 같은 회문(回文) 제약 '팔랭드롬(palindrome)', 특정한 글자를 지닌 단어를 제하고 글을 쓰는 제약 '리포그람(lipogramme)', 알파벳순으로 글쓰기, 쉼표와 구두점 없이 글쓰기, 정형시의 다양한 응용……"(알라딘 서평 인용. 저자 중 한 분이 서평을 작성했다는 사실이 여기서 드러나는 것 아닐까?) 등을 뜻한다. 스스로에게 부과하는 제약이 필경 사유의 개혁을 촉발하게 될 것이라고 생각했던 문학그룹이 바로 울리포였다. 제약을 설정한다는 가설을 실현해내면서, 울리포의 멤버들은 기존의 문학에서 무엇을 바꿀 수 있다고 생각했을까? 예를 통해 살펴보면 이해가 쉬울지도 모르겠다.

가방 속의 검은 달
나방의 피
다방에서 마시다

라방엔 수음 중인 피아노
마방엔 죽은 말
바방은 BAR방, 음탕한 매춘부가 되어버린
사방은 바늘처럼 어둡고 권태롭다


아방튀르 AVENTURE, 이것은 8인의 사무라이

자방에서 살인적인 폭풍우 몰려오다
차방의 찻잔은 하얀 우주선
카! 카이로 카방에서 독약을 마시고
타방에서 자살한 마도로스 친구
파방치다 그의 삶은 파도치던 파상풍

하! 하하하! 삶이란 고작
하방에서 듣는 묘비 위의 늙은 빗소리
- 함기석, '방에 대한 즉흥적 반응' 전문


말을 중심으로 세계의 질서를 재편하는 진지한 작업이 시인이 부여한 제약에서 촉발된다. 제약은 언어의 사용을 제한하는, 비교적 간단한 것이다. 그러나 한계를 부여하는 순간, 새로운 인식의 모험이 시작된다는 데 착상의 기발함이 자리한다. 제약은 이 작품에서 무의식을 들여다보고, 무의식 안에 살아 숨 쉬고 있는 잠재적인 이미지들을 드러내는 데 반드시 필요한 조건이며, 나아가 통념들로 굳어진 사회를 낯설게 만드는 중심이자 동력으로도 기능한다.

이 경우, 1차 제약은 "방"이며, "방"을 한 축에 붙들어 매놓은 다음, "방" 앞에 또 다른 제약으로 기능할 가-나-다-라-마-바-사-아-자-차-카-타-파-하를 순차적으로 붙여나간다. 통사를 새로운 구조로 이렇게 조합해낸 다음, 말이 말을 물고 들어오는 질서를 충실히 따르며, 한 차례 더 응용하여 그 결과를 연접해놓는다. 그렇게, 독서의 순서도 수평과 수직으로 교차되어 나타난다.

이 작품은 유사성의 원리를 약화시키는 제약을 적극 활용하여 인접성 자체를 낯설게 주조하는 데 성공적으로 합류한 예이다. 이러한 언어의 놀이는, 아직 실현되지 않은 현실(잠재적 현실)을 세계에서 활보케 하는 기폭제가 된다. 그리고 여기에 제약의 중요성이 있다. 울리포가 활용한 제약은 물론 그 종류나 원리에 있어서도 이보다 훨씬 복잡하며, 언어의 놀이에 국한되지도 않는다.

▲ <문체 연습(Exercice de Style)>(레몽 크노 지음, Folio; GALLIMARD edition 펴냄). ⓒfolio
그룹의 중심에 있었던, 크노의 <문체 연습>을 어떤 필요에 의해 나는 지금 다시 들여다보고 있다. 책의 일부를 대학원 수업에서 골치 아픈 몇몇의 다른 텍스트들과 함께 번역 대상으로 삼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아 끔찍하기도 하지. 번역에 그 무슨 해법이 있는 것도 아니고, 올바른 이론이라는 것이 따로 존재하는 것도, 실상 번역에서 이론이 그리 중요한 것도 아니고 해서, 번역에 관심 있는 자, 번역을 하는 것만이 번역을 이해하는 지름길이라는 모토를 내걸고 수업을 진행하고 있지만, 이게 만만치 않다. 이 크노라고 하는 작자의 실험이 다음과 같기 때문이다. 우선 "이야기"다.

이야기

어느 날, 몽소 공원 옆, 정오 가까운 시각에, 거의 만원이 되다시피 한 S선(요즘의 84번) 버스의 뒤쪽 승강대 위에서, 나는 리본 대신에 배배 꼬인 장식줄이 감긴 부드러운 펠트 모자를 쓰고 있는 어떤 사람을 보았는데, 그는 정말로 긴 목의 소유자였다. 이 사람은 승객들이 오르고 내릴 때마다 일부러 제 발을 밟았다고 옆 사람을 갑자기 불러 세우는 것이었다. 그러다가 그는 금방 빈자리에 제 몸을 던지려고 따지던 제 짓거리를 갑작스레 그만두는 것이었다.
두 시간이 지난 후, 나는 그를 생-라자르 역 앞에서 다시 보았는데, 맵시 좋은 재단사에게 위 단추를 올려 달게 해서 앞섬을 좀 줄이라고 외투를 가리키며 그에게 충고를 건네는 한 친구와 수다스런 대화를 나누고 있는 중이었다.


이야기(récit)는 등장인물이 어떤 장소에서 사건을 만들어내고, 그 사건을 묘사하는 시점을 분명히 드러내는 글을 총칭한다. 여기까지는 번역에 큰 어려움이 없다. 문제는 비교적 단출하다고 해도 좋을 "모자를 쓴 긴 목의 20대 중반 청년을 버스에서, 광장에서 두 번 우연히 마주치는 내용"(106쪽)을, 비단 이야기뿐만 아니라, 99가지 상이한 방식(완서법, 은유, 회고투, 놀람, 꿈, 주저, 확정, 주관적 서술, 부정문, 망설임, 욕설, 아나그람, 리포그람, 공식서한, 의성어, 주장, 무지, 단순과거, 대과거, 복합과거, 불완전 과거, 미래, 현재, 알렉상드랭, 감탄문, 과장법, 반복법, 속어, 의문문, 희곡, 철학투, 환상투, 더듬는 말버릇, 무례한 말투, 소네트, 오드, 자유시, 단가, 촉각, 시각, 청각, 후각, 미각, 전보, 명사구, 부사구, 단정적 어투, 고유명사, 영어투, 이탈리아어투, 무기력, 모던 스타일 등등)으로 변주하며 다양한 방식으로 문체를 실험해나갔다는 데 있다.

가령, 망설이는 어투와 욕설투로 이 간략한 대목을 크노는 이렇게 변주해낸다.

망설임

어디서 일이 벌어졌는지 내 당최 잘 모르겠는데……. 어느 교회에서였던가, 어떤 쓰레기통 안에서였던가, 혹은 어느 시체 안치소에서였던가? 어쩌면 버스 안이었을 수도? 거기에는 누군가가, 그러니까 누군가가 있었는데……. 대관절, 거기에 누가 있었던 거지? 달걀 꾸러미가? 양탄자들이? 자잘한 무 다발(대체 뭐라 불러야 하지?)이? 아니면 시체들이? 그랬다, 하지만, 시체 주위에는 살점들이 붙어 있었던 것 같고, 그래서 살아 있었을 거야. 나는 그게 맞는다고 생각하는데. 암튼 어떤 버스 안의 사람들이었을 테지. 그런데 눈에 띈 작자가 하나(혹은 둘?) 있었지 아마. 더 이상 뭣 때문에 그랬는지는 모르겠는걸. 과대망상증 때문이었나? 비만 때문이었나? 더 정확하게는……. 어쩌면 긴……. 코였나? 턱이었나? 엄지손가락이었나? 뭐 그런 것들이 도드라진 그의 젊음 때문에 보다 눈에 띄었나? 그게 아닌가봐. 그래, 목이었을 거야, 그리고 괴상한, 괴상한, 괴상한, 어떤 모자로 장식하고 있었던 걸 거야. 그 남자는 틀림없이 다른 승객 한 명(남자였던가, 여자였던가? 꼬맹이였던가, 늙은이였던가?)과 함께, 뭐였더라, 실랑이, 그래 바로 그걸 거야, 실랑이를 벌였지. 실랑이는 끝이 났는데, 그 실랑이는 뭐 이런저런 방식으로, 그러니까 십중팔구 상대방 중 한 명이 달아나버림으로써, 잘 끝을 맺게 되었지 아마.
내가 만난 게 아까 그 작자라고 생각하고 있는데, 그런데 대체 어디서 그를 만난거지? 어떤 성당 앞에서였던가? 어느 시체 안치소 앞이었던가? 어떤 쓰레기통 앞에서였던가? 그 작자는 그에게 뭔가에 관해 설명하고 있는 게 분명한 친구 한 명과 함께 있더군, 그런데 대체 무엇에 관해서? 무엇에 관해서? 무엇에 관해서?

욕설

우라지게 내리쬐는 태양 아래서 더럽게 오래 기다린 끝에, 나는 마침내 한 떼거지의 병신새끼들로 꽉꽉 들어차 퀴퀴한 냄새를 풍기는 어느 버스에 올라타게 되었다. 이 등신새끼들 중에서도 특히 상등신새끼는 더럽게 길쭉한 모가지를 쳐들고는 리본 대신 매듭을 두른 꼴값 떠는 뚜껑 하나 뒤집어쓰고 우쭐대던 여드름쟁이였다. 이 되바라진 새끼는 늙은 등신새끼 하나가 치매기로 지랄을 치며 제 발을 짓이기자 욕을 까대기 시작했다 : 하지만 이내 쫄아가지고는, 전에 앉았던 놈의 궁둥이 땀이 축축하게 남아있는 빈자리 쪽으로 잽싸게 토꼈다.
두 시간 후에, 나 참 정말 재수도 없지, 생-라자르 역이라고 부르는 거지발싸개 같은 그 무슨 유적 앞에서 또 다른 등신에게 뻐기고 있는 그 등신새끼가 다시 내 눈에 들어왔다. 그 새끼들은 여드름 같은 단추에 대해서 씨부리고 있었다. 나는 속으로 뇌까렸다 : 그렇게 여드름 같은 단추를 올라 달거나 내려 단다고 해도, 그 새끼, 지지리 못생긴 건 마찬가지라고, 그 상등신새끼 말야.


이렇게 하나의 단출한 이야기는 어떤 관점에서 접근하느냐에 따라, 다시 말해, 어떤 제약을 부여받느냐에 따라, 상이한 결과를 낳는다. 동일한 출발선에서 뻗어 나온 가지들은 결국 같다고 생각했던 뼈대마저 다른 것으로 바꾸어버리고 만다. 조르주 페렉이 알파벳 e를 제거한 소설 <실종(Disparition)>이나 반대로 모든 음절에 e를 포함한 낱말들로만 적어낸 <돌아온 자들(Revenentes)>을 집필한 것은 그에게 호사 취미가 있어서가 아니라, 제 글에 제약을 부여해, 미지의 세계를 개척하고자 하는 마음이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가 아직 들여다보지 못한 심연이 열리는 것은 결국, '언어에 의해, 언어 안에서'라는 사실을 그는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다.

울리포 멤버들 역시 언어를 통해 세계를 주관적으로 실현해보는 일에 사활을 걸고 있었다고 해야 한다. 물론 이러한 작업은 언어와 언어의 감추어진 무한한 힘에 주목하여, 전통 소설이 개진해왔던 '모험의 글쓰기(l'écriture de l'aventure)'에서 '글쓰기의 모험(l'aventure de l'écriture)'으로 소설의 포커스 자체를 바꾸어야한다고 생각했던 1960년대 누보 로망 그룹과도 이념적으로 그 궤를 나란히 하고 있었다고 하겠다.

▲ 울리포의 작가들. ⓒ(사진 출처 http://www.oulipo.net/)

2. 잠재문학실험실, 2013년 서울

그런데 이 지난한 언어·문화적 모험의 전선 위로 한국문학사의 굵직한 이름들이 불려나오고, 우리말 사전에서 곤히 잠자고 있는 낱말들이 대거 포진하는 일이 벌어졌다. 이뿐만이 아니다. 고어, 사어, 북한에서 쓰는 어휘들, 광고의 문구들, 속담과 지하철의 말들, 운문이나 격문, 저속한 말들이나 관념어들이 여기저기서 활개를 치면서, 기꺼이 제약의 화신으로 둔갑하여, 백지 위에서 현란한 퍼포먼스를 벌인다.

<잠재문학실험실>의 저자들은 "제약이라는 감옥에 스스로 갇힌 후, 이를 벗어나 잠재로 나아"가려고 애쓰면서, 울리포에게 제 작품을 헌정한다. <잠재문학실험실>은 무엇인가? 번역이자 창작이다. 사실 함정은 여기에 있다. 자크 루보와 마르셀 베나부의 울리포 선언문과 '울리포란 무엇인가?'을 판권 계약을 통해 한국어로 꼼꼼하고 정확하게 옮겼기에 이 작품은 번역이지만, 그것도 뛰어난 번역이지만, 앞서 리스트 운운하면서 그 중심이 되었다고 말했던 <잠재문학>에서 선보인 기발한 기법들을 차용하여 한국어와 한국문학에 적용하는 일을 감행하였기 때문에 창작이다.

그런데 말은 바로 해야 한다. 기발하고 뛰어난 창작이라고 할 때, 이 창작의 고유성이 번역의 속성에 기대고 있다는 사실을 놓쳐버리면, <잠재문학실험실>을 이해할 길이 묘연해진다. 더구나 울리포와 이들이 오롯이 하나로 포개어지는 것은 또 아니라고도 말해야 한다. 정체가 묘연해보여도 어느 한 곳으로 하중이 기울어지는 것은 아니다. 무슨 말인가? 이들에게는 번역이 창작이며, 창작이 곧 번역이라는 사실, 이 양자 사이의 경계를 허물었다는 사실, 그럴 수밖에 없는 성격의 글을 실현하면서 고유성을 쟁취했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사실 이들은 확신범이다.

모든 창작자에게는 두 개의 패가 있다. 거울과 가면, 창과 방패, 잠재문학작업실 작가들은 '제약'과 '잠재'를 가지고 문학을 재편성하려 했다. 문학에 수학, 과학, 생물학, 음악 등을 끌어들이며 일상적 기능에 속박되어 있던 문자를 제약을 통해 해방하고 그 속에서 문학의 잠재성을 발굴해내려 했다.
이 책 <잠재문학실험실>은 두 개의 패, 제1부 '잠재문학실험실'과 제2부 '잠재문학작업실'로 구성된다. 제1부는 한국어 통사론에 맞추어, 또는 이를 일탈하여, 최대한 또는 최소한 울리포적 제약을 수행한 실험실들로 구성된다.
제2부는 이 실험의 기반인 울리포에 대해 구체적으로 소개한 자료집이다. 물론 이는 잠재문학의 잠재성을 어떻게 드러내보일지 연구해본 여러 각도의 실마리에 지나지 않는다. (…) 제약이 잠재일 수 있는 한, 어떤 가능성은 열리는 셈이다. (서문, VII)


<잠재문학실험실>이 울리포에게서 영감을 받은 것은 분명하지만, 울리포의 영향 아래 안주하거나 울리포를 답습하는 일에는 관심이 없다. 기법을 차용하여 응용한다는 것은 생각보다 쉽지 않기에, 읽는 사람으로 하여금 어느새 찬사를 불러내지만, 그것만으로는 <잠재문학실험실>이 주었던 충격은 모두 설명되지 않는다. (아, 글이 길어지겠다) '빈혈'의 전문이다.



가지가지 나서 다감하던 라일락은 마음껏 바람을 사정하고 아우성치더니 자결하듯 차디찬 카논을 타파하고 파란만장 하혈했구나!



다 털리고 남은 가사(家事)에 나비가 앉았다 간다
막 잡힐 것같이
시름시름 앓고 간다


나풀나풀
가물가물
그렁그렁

멀고도 아득한 것은 죄다 다락에 두었구나
사그라질 듯 말 듯
곤두섰다 간다

라일락이 흩뿌려진 마당,
숨죽인 바람이 사진 속 아이들의 자장가를 흥얼거린다
차례가 와서일까
가깝고도 선연한 것은 죄다 카메라에 붙잡아두었구나

이 빛바랜 타지여
조용한 파란이여
희디흰 하늘이여


이 시는 "울리포의 제약 중 '알파벳순으로(abcdaire)' 써내려가는 글쓰기 방법"(94쪽)을 응용하여 "'ㄱ'의 제약은 매 단어의 시작을 가나다순으로 하되, '한 문장 구성'이라는 제약을 더 두었"고 "'ㄴ'에서는 자유롭게 풀되 명사에만 이 제약"을 적용한 것이다. 흥미로운 사실은 "내용에 제약을 두어 모두 어떤 소실과 일탈의 지점을 향하도록 했다"고 저자가 밝히고 있는 대목이다. 이 작품이 모방을 벗어나, 시로서의 고유한 가치를 확보하는 비결이 여기에 있다. 울리포의 제약을 기계적으로 적용한 것이 아니라, 그것을 창의적으로 응용하면서, 우리말의 잠재력을 표면화시키는데 기여하는 한편, 처연하고 처절하지만 절제된 어떤 심적 상태를 서정적으로 그리는 데 성공했다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가사" → "나비" → "다락" → "라일락" → "마당" → "바람" → "사진" → "아이들" → "자장가" → "차례" → "카메라" → "타지" → "파란" → "하늘"로 이어지는 제약의 산물은, 작품의 커다란 얼개를 이루지만, 그 짜임새에는 벌써 고유한 기획이 자리한다. 이 기획은 시적 재능에 다름 아니다. 다른 작품도 재능을 감추어 놓기는 마찬가지이다.

"총 48편의 시 제목들을 조합해" "시로 쓴 시"(80쪽) '사형수' 역시 크노의 조합문학, 그러니까 무한한 조합의 가능성을 실험한 '백조(百兆) 편의 시'에서 크게 영감을 받았지만, 관심은 벌써 크노의 시와는 근본적으로 상이한 지점을 실험하는 데 놓여 있다. "14행의 소네트 10편의 각 행들을 절단해 이를 조합하면 1014, 즉 일백조 편의 시가 생성되도록 설계한"(80쪽) 크노의 작품에서 차용해온 것은 따라서 제약 그 자체가 아니라, 제약의 특이한 성질이었을 뿐이다.

보들레르, 아폴리네르, 말라르메, 장 주네, 장 콕토, 릴케, 마야코프스키, 블레이크, 랭보 등의 작품 제목들을 차용하여 한편의 시로 완성한 '사형수'는 두 가지 면에서 주목할 가치가 있다. 기존의 번역 시집을 일일이 찾아내 인용하였다는 사실, 그러니까 번역자들의 노고를 표현하려고 했다는 점에서 번역을 대하는 태도가 목격된다는 것, 제목만을 나열하는 것이 아니라, 그 배치와 구성, 종결어미의 선택을 통해 한편의 시로써 존재할 완성의 가능성을 기획했다는 점이다. 이들의 작업에는 이렇게 번역이라는 형식으로 입회한 창작에로의 열망과 한국문학에 대한 오마주가 자리한다.

김수영의 '풀'이나 김춘수의 '꽃' 역시 변주를 거치지만, 그 텍스트의 주인은 영감의 원천이었던 울리포도, 김수영이나 김춘수도 아니다. <잠재문학실험실>의 저자들에게 중요한 것은 패러디의 효과보다는, 말 그대로 언어적 실험, 언어의 실험을 통해 우리 내면에 웅크리고 있는 한국어의 잠재력을 일깨우는 일이기 때문이다.

'삼층 빌딩'을 살펴보자. 이 작품은 "어휘를 능숙하게 다뤘던 울리포 작가들에게 사전은 물론 유용한 도구였다"고 지적하는 것처럼, 울리포에서 착안하여 "2002년 출간된 <염상섭 소설어 사전>에 수록된 어휘들을 주로 택해 쓴 현대 소설"이다. 그러나 여기에는 이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다. 염상섭의 소설을 완전히 해체하고서 다시 지어올린 독창성을 목도하는 일이 울리포의 흔적을 헤아리는 것보다 우선이라는 말이다. 다시 말해, 염상섭 소설에서 "당시 일반 언중의 생생한 삶의 무늬를 자연스럽게 살려내는 어휘"(87쪽)를 중심으로 완전히 재조합한 창조적 산물이라는 관점에서 보라는 주문을 우리가 받아들일 때, 비로소 작품의 묘미와 창작을 향한 진지한 열정이 살아나는 것이다.

염상섭의 소설을 어휘 단위로 분절해 모아놓은 사전을 뒤적거리며 새로운 작품을 만들어내는 일은 생각만큼 만만한 작업이 아니다. 그런데 신기한 것은 이 새로운 건축물의 설계도가 바로 염상섭 소설의 특징으로 꾸며졌다는 점이다. 이 작품을 우리는 역순의 산물이라고 부를 수 있겠다. 개개 낱말들을 비끄러매며 새로운 소설을 집필하면서 그 방향성을 문학사의 의의를 따져 상재한 창작물 하나가 이렇게 탄생한다.

저자에게 중요한 것은 염상섭이 서울 말투를 구사했다는 사실, 염상섭 소설에 면면히 흐르고 있는 "신문학 시대에 쓰였던 고유어들", "고유어 못지않게 한자어"이며, 그러나 이것보다 중요한 것은 이 셋의 조화로운 운용이다. 이렇게 해서 우리는 한번 해체된 이후 다시 지어올린 염상섭의 영혼, 그러니까 김억이 지적한 것처럼 "삶의 암면(巖面)"을 아주 다른 각도에서 그린 어둡고 축축한 자연주의 소설의 도입을 만나게 된다.

최인훈의 <광장>도 예외는 아니다. 울리포가 감행했던 "명문의 재활용" 실험에서 착안했다는 사실을 <잠재문학실험실>은 이렇게 말한다.

여기서는 이중 우리글로 구현 가능한 일곱 가지 방법을 택한 후, 이 새로운 문장을 엮어 한 단락을 만들어냈다(원문 포함 총 여덟 문장). 변주된 기준은 다음과 같다.

원문
주장, 반복, 되풀이(insistance)
절제(ablation)
다른 관점(autre point de vue)
치환(permutation)
동의(유의)성(synonymie)
탁월한 추론(fine déduction)
의문문(interrogation) (77~78쪽)


그 결과 최인훈 자신이 몇 차례 수정을 가했던 <광장>의 첫 문장이 다음과 같이 모습을 바꾸어 우리 앞에 당도한다.

바다는, 크레파스보다 진한, 흐르고 육중한 비늘을 무겁게 뒤채면서, 숨을 쉰다.

바다, 그래, 그 바다는, 여느 크레파스보다 진하디 진한, 푸르다 못해 검푸르고 거대하며 육중한 비늘을 그토록 무겁게 뒤채면서, 거친 숨을 내쉰다.
바다는 숨 쉰다.
과연!
푸르고, 육중한, 크레파스보다 진한 비늘을 무겁게 뒤채면서, 바다는 숨을 쉰다.
해원(海原)은, 색연필보다 짙은, 거대한 쪽빛 비늘을 둔중히 일으키며, 호흡한다.
수심이 깊었으리라. 짙푸른 파도가 넘실댈 때마다 다소 버거워 보였는데, 저 바닥을 치고 올라와 깊은 숨을 쉬는 듯했다.
바다는, 크레파스보다 진했던가? 푸르고 육중했던가? 그렇게, 숨을 쉬었던가?
('누구의 것도 아닌', 3쪽)


▲ <광장/구운몽>(최인훈 지음, 문학과지성사 펴냄). ⓒ문학과지성사
왜? 대관절 왜 이렇게 변주를 했는가? 차용이나 변형, 그 가치를 캐묻는 우리의 물음은 근본적이어야 한다. 단지 명문을 재활용하기 위해서? "프랑스에서 울리포가 창단된 시기와 같은 때이며 4,19 혁명이 일어난 해이기도 한 1960년 11월"(78쪽)에 최인훈의 소설이 발표되었다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4.19가 일어나지 않았다면 <광장>도 탄생하지 못했을 것이라고 최인훈이 자주 언급했던 것처럼, <잠재문학실험실>의 저자들에게도 이와 같은 자부심이 필요했던 것은 아니었을까? "1960년대 프랑스 현대문학의 흐름 가운데 독특하고도 주요한 실험적 움직임을 보여주었던 '잠재문학작업실' 울리포"에 걸맞은 예로 그들은 최인훈을 염두에 두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최인훈의 기념비적인 작품을 변주하는 행위를 지렛대 삼아, 최인훈과 우리 소설의 혁신성에 균형 잡힌 무게를 부여해야 한다는 제 속마음을 실현한 결과가 아닐까?

3. "걸작의 문턱으로 이끄는 야망"

베케트의 무(無)의 언어가 오롯한 한편의 시로 재탄생하고('13 무(無)를 위한 텍스트'), 입말 위주의 방언으로만 구성된 시 한편이 뚝딱 만들어지고('보루꾸집 가시내는'), 김기영의 영화 <하녀>가 시로 화려하게 변주되고('쥐꼬리'), 조르주 페렉의 소설의 미로 구조(<인생사용법>)가 한국 정형시의 3/4의 운율에 맞추어 기발한 운율 소설("율격 소설")로 둔갑하고('P의 방'), 한 문장에 속담을 반절씩 섞어가며 대칭의 구조가 되게끔 글을 엮어내면서 트위터의 형식을 차용('교훈의 두통')한 작품을 선보였지만, <잠재문학실험실>이 감행한 이 차용-변용-해체는 모두 독창적인 재구성을 최후에 그러쥐기 위한 전주에 불과하다.

한 구절을 임의로 설정한 후, 각각 김승옥, 박태원, 하일지의 문체로 변주한 '강변남녀' 역시, 크노의 <문체 연습>을 그대로 답습한 것이 아니다. 우리는 이들이 왜 이 소설가들을 선택했는지, 왜 이런 제목을 달았는지 의문을 던져야 하고, 변주하려는 글과 변주된 글이 서로 어울리는 방식을 세세히 따져 물으며, 우리 앞에 주어진 '강변남녀'의 가치를 헤아려야 하는 것이다.

그 가치를 하나하나 캐물을 때, 우리는 비로소 <잠재문학실험실>에 수록된 작품들이 그 자체로 훌륭한 산문이자 소설이며 시라는 사실을 깨닫게 될 것이다. (비평이 절실해지는 이유이다) 마지막으로 하나만 더 살펴본다. '뒤엉킨 시간'의 전문이다.

부르지 못하는 자를 부르는 자
부를 수 없는 이를 부르는 이는
잠잘 수 없어 잠자지 못한다
걸을 수 있어 걷는다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고 만져지지 않는 길을
따라갈 수 있어 따라가다
멈추게 되어 멈춘다
시간의 중량을 딛고 서서
시간의 몸집을 조망한다
헤아릴 수 없음을 헤아린다
떠다니는 걸음들 사이로
걸음들이 스쳐 간다
포개어 포개진 자욱 자국마다

길이 난다
틈마다
죽어 쉬는 숨들, 깃든다

죽고 산 숨들, 이제, 이미,
더불어 쉬는.


이 작품을 저자는 "교통수단이 이동할 때에만 생각해야 하고 멈출 때에만 적어야 한다는 규칙"을 지켜가며 쓴 시라고 말한다. 아니, 이보다 훨씬 복잡한 울리포의 11가지 제약을 묵묵히 지켜내며, 고구해낸 시이지만, 이 작품은 그것 외에 또 다른 것을 우리에게 선사한다. 이들의 작업에는 덤으로 주어지는 무엇이라도 있는 것일까? 작품의 원리를 설명하는 제 글을 마무리하면서 <잠재문학실험실>의 저자는 우리에게 이렇게 말한다.

출근길은 이제 막 잠에서, 꿈에서 깨어난 이가 밤과 낮 사이의 경계를 걷게 되는 길이다. 우리가 밤의 꿈을 품고서 낮의 꿈을 꾸듯, 꿈이란 실은 죽은 자의 꿈과 산 자의 꿈이 뒤엉킨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므로 알 듯 모를 듯 결국 미지의 세계로 남고 마는 꿈은 '뒤엉킨 시간'(temps mêlés)이다. (110쪽)

<잠재문학실험실>이 소중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잠재문학실험실>에는 언어의 한계를 끊임없이 실험해낸 글들(시, 산문, 소설의 구분은 중요하지 않다), 우리가 현실이라고 부르는 것이, 기실 언어로 그 지평을 넓혀낸 만큼 우리에게 주어지는, 언어를 궁굴리며 새롭게 열리는, 그러니까, 늘 다른 현실일 뿐이라는 사실을 경험하게 해주는 작품들이 바글거린다.

문자를 어루만지는 저 땀내 나는 과정 전반을 고스란히 백지 위에 쏟아내며, 사유의 지평을 크게 넓혀낸 글들이 우리에게 당도했다. 울리포는 이때, 나와 타자, 외국어와 모국어, 외국문학과 한국문학, 번역과 창작이라는 경계를 가뿐히 넘나들며, 어느 한 곳에 붙박은 뿌리가 되지 못한다. 제약을 통해 선보인 저 당찬 글들이 의미가 탈색된 문자들의 유령이 되어 우리 문학의 이곳저곳을 활보하고 있다.

말할 수 없음의 한계를 깨려는 실험으로, 우리말과 우리 문학의 잠재력을 끌어올리는 일로, <잠재문학실험실>은 소리 없이 문학판에 도전장을 내밀었다. 무모해서 이러한 작업을 실천한 것이 아니다. 어쩌면 이 가명을 고집하는 세 명의 번역가-작가들이 "걸작의 문턱으로 이끄는 야망"(138쪽)을 실현하고자, 오늘도 하얗게 밤을 지새우며, 문자로 지어올린 삶을 만들어 내고 있는 것은 아닐까? <잠재문학실험실>은 무의식과 억압, 현실에 대한 저항의 그림자를 달고 다니는 유령이 되어, 무시하지 못할 힘으로 우리를 육박해올 것이다.

온갖 품사가, 문장이, 기존의 문학이, 우리의 통념이 자율성을 부여받은 후의 상태에 놓이고, 다시 한 번 해방된 말의 덩어리가 되어, 백지 위에서 춤을 추는 모습을 지켜보며 나는 충격을 받았지만, 그것이 내가 충격을 받은 이유를 다 설명해주는 것은 아니다. 무엇보다도 <잠재문학실험실>은 읽는 것이 몹시 즐거운 글들로 넘쳐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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