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레시안 books'는 2014년 신년호로 아직 나오지 않았지만 나오길 바라는 미래의 책들에 대한 특집을 준비했습니다. 일곱 명의 필자들에게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책, 당신이 읽고 싶은 책, 번역되길 바라는 책과 그 이유를 물었습니다. 아울러 지난해 12월 13일 송년호에서 예고했던 페이지 개편은 기술적인 문제로 1월 17일부터 구현됩니다. 예고한 대로 약속을 지키지 못해 죄송합니다. 독자 여러분, 2014년에도 프레시안 books를 사랑해주시고, 새해 복 많이 받으십시오. |
처음에는 쉬울 거라 생각했는데, 막상 쓰려고 앉으니 참 어려운 청탁이다. 이미 나온 책에 대한 평이 아니라 '나왔으면 하는 책'에 대한 생각이라. 출판업을 하는 것도 아니고 출판동향을 파악하고 있는 사람도 아니고, 사람들과 함께 독서회를 갖는 정도의 활동만 하는 사람이라 시야도 그리 넓지 않고. 그래도 쓰기로 한 걸 어떡하랴.
이런저런 책도 읽고 사람들 만나며 뭐 재미있는 것 없나 고민도 하는 처지라 보고 싶은 책은 많다. 요즘 주변 사람들이 가장 많이 찾는 책은 정치 이야기이다. 시국이 시국인지라 그런 까닭도 있지만, 우리 사회에서 가장 갑갑하고 답이 없는 영역이라 그런 것도 같다. 정치를 소재로 하는 책은 많지만 아나키즘이나 민주주의와 관련된 책들이 좀 많아지면 좋겠다. 어쨌거나 좌표를 보며 길을 찾아가는 건데, 우리 사회에서는 그런 좌표에 관한 논의(품평 말고!)가 부족하다.
▲ 2010년 지방선거를 앞두고 '2010 유권자희망연대' 출범식에서 참가자들이 친환경 무상 급식과 4대강 사업 중단에 찬성하는 후보에게 표를 던지는 퍼포먼스를 벌이고 있다. ⓒ프레시안(선명수) |
그리고 우리의 지적인 편식을 치유하기 위해 남미나 아시아의 철학이나 정치, 민주주의에 관한 책도 좀 나오면 좋겠다. 그나마 차베스와 베네주엘라에 관한 책들은 조금 있지만 헌법에 자연권을 도입한 에콰도르와 같은 나라에 관한 책은 없고, 국민총행복(GNH)을 발표하는 부탄의 정치·경제에 관한 책도 부족하기 때문이다. 북유럽의 복지를 따라잡기 위해 계속 성장해야 한다는 주장보다 지금 가진 것을 나누어 행복하게 사는 방법에 관한 고민이 가슴에 더 와 닿는다.
이런저런 생각이 들지만 가장 절실한 건 지금의 현실을 바꿀 방법이다. 부정한 방법으로 집권한 정치세력이 위선적이고 부패한 방식으로 공공성을 파괴하고 있는데, 이를 막을 '공식적인 방법'이 없다. 사퇴하고 다시 선거하자는 것 말고 권력을 제어할 방법이 없는 나라가 무슨 민주공화국인가. 5년도 참았는데 10년을 못 참겠냐며 체념하는 시민들의 나라가 무슨 민주주의 국가인가. 무관심이나 냉소를 넘어설 방법이 필요한데, 딱히 손에 잡히는 게 없다. 뿅 하고 나올 만병통치약이 없다는 얘기이다.
그러니 고민을 좀 해야 하는데, 한국정치에 관한 책들은 많은 것 같지만 부족하다. 정치에 관해 이래저래 훈수를 두거나 이런저런 외국이론이나 사례를 한국에 적용하려는 책들이 제법 있지만 우리의 정치를 이해하거나 바꾸기엔 턱없이 부족하다. 제아무리 좋은 이론, 제도, 좋은 모델을 가져와도 일이 배배 꼬이는 한국의 상황은 뭔가 특별한데, 그 특별함을 깔끔하게 정리하는 책은 보지 못했다. 그냥 정당정치, 시민참여, 생활정치 같은 키워드들이 여기저기서 다른 방식으로 조합되고 있을 뿐이다.
이런 조합들보다는 정치의 '근원'이 사실 더 궁금하다. 왜 우리의 정치는 이토록 무기력해졌을까? 근현대사를 보면 엄청나게 폭발적인 정서와 활동력을 가진 사람들이었는데, 지금은 왜 이럴까? 뭐가 두려워서일까? 이런 질문에 답하려면 정치인이나 정당만이 아니라 역사와 문화, 전통, 조직이나 단체 등등을 살펴야 한다. 그리고 한국이라고 크게 뭉뚱그리지 말고 구체적인 지역을 섬세하게 들여다봐야 한다. 그래야 정치의 '심연(深淵)'을 엿볼 수 있다.
예를 들어, 대구라는 지역을 보자. 한때 TK(대구경북)이라 불리며 권력을 좌지우지했던 세력이 있었고, 지금도 대구는 보수의 아성이라 불린다. 하지만 대구의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면 꼬장꼬장한 선비들이 많았던 지역이고 김원봉을 비롯한 많은 독립 운동가를 배출했던 지역이다. 그리고 해방 이후 1946년 9, 10월의 총파업과 기아행진, 민중봉기는 '아시아의 모스크바'라는 별명을 대구에 붙였다(최근 민주노총을 비롯한 여러 단체에서 총파업 얘기가 나오고 있지만 대구야말로 총파업이 뭔지를 똑똑히 보여줬던 지역이다). 봉기를 진압하는 과정에서 경찰이 민간인에게 발포하자 분노한 민중들이 경찰서를 점거하고 대구를 해방구로 만들기도 했다(박근혜 대통령의 큰아버지인 박상희가 대구에서 봉기를 조직하다 사살되었다).
대구 지역의 저항정신은 미군정과 이승만 정권의 탄압을 받으면서도 꺾이지 않았고, 1960년 2월 28일 야당 후보의 선거유세에 참여하지 못하도록 학교에 등교령을 내리자 대구 지역 학생들이 학교를 정치도구화하지 말라며 시위를 벌였고(지금의 상황과 정반대이다!), 이는 3월 15일 마산항쟁, 4월 혁명을 자극했다. 당시 대구에는 여러 학생조직들과 교사의 90%를 조직했던 경북교원노조, <매일신문>, <영남일보>와 같은 풀뿌리언론들이 이런 정치를 조직하고 지원했다. 박정희의 등장 이후에도 대구지역은 전국민주청년학생총연맹(민청학련)이나 인민혁명당(인혁당), 남조선민족해방전선(남민전) 등의 근거지였다.
여당의 텃밭인 대구 경북이 과거에는 저항의 근거지였다. 대구는 전국적인 사회운동을 자극했던 중요한 저항지역이었고 많은 조직 활동가들이 행동하던 지역이기도 했다. 그러했기 때문에, 대구는 당시 엄청난 탄압을 받았다. 권력을 장악한 자들이 이런 지역을 다루는 방식은 주로 '당근과 채찍'과 '분할통치'이다. 민청학련이나 인혁당, 남민전 등의 조직사건은 '빨갱이로 찍히면 죽는다'라는 공포심을 널리 퍼뜨렸고, 박정희가 영호남의 지역감정을 동원하며 지역에 자원을 풀자 대구지역의 정서는 서서히 변질된다. 심한 탄압과 눈먼 돈이 사람들을 분할하고 정치를 '봉쇄'했다. 상처를 받은 사람들은 강자에게 저항하지 않고 약자에게 보복한다.
사실 대구만이 아니라 제주도를 비롯한 여러 지역에서 이런 흔적들을 찾을 수 있다. 이런 상처를 꺼내지 않고 정치의 부활을 얘기할 수 없다.
▲ <옥천신문> 홈페이지. ⓒ옥천신문 |
때로는 반대의 경우도 보인다. 예를 들어, 내가 지금 이사를 준비하고 있는 충청북도 옥천군의 경우, 육영수 생가가 있는 보수적인 지역이지만 농민운동의 역사가 깊고 안티조선 운동으로도 유명해진 지역이다. 1989년 지역주민들이 세운 <옥천신문>은 작년으로 창간 24주년을 맞이하기도 했다. 옥천군의 이런 정치는 어떻게 가능했을까? 이런 지역 간의 차이를 무엇으로 설명할 수 있을까? 이런 지역을 세심하게 들여다봐야 참여의 당위성이 아닌 정치의 잠재력을 찾을 수 있지 않을까?
따라서 지금 어떤 지역의 정서가 진보적이나 보수적이라는 말, 어떤 지역의 정당득표율로는 그 지역을 충분히 설명할 수 없고 더더군다나 정치를 논하기엔 턱없이 부족하다. 어떤 사건이나 원인이 그 지역을 보수/진보적으로 만들었는가? 관변단체나 지역토호(土豪)라는 말로 단순화될 수 없는, 어떤 세력들이 지역의 의사결정과정이나 논의과정을 주도하는가? 그 지역의 독특한 정치문화가 존재하는가? 지역민들이 자기 지역의 정치와 경제, 사회, 문화에 관해, 지역 역사에 관해 알 방법은 있는가? 이런 질문을 던지고 난 뒤에야 어떤 정치적인 '판단'이 가능하고 어떤 방법을 찾을 수 있다. 내가 누구인지를 모르는 채 우리가 어디로 갈지를 정할 수는 없는 법 아닌가.
그런 점에서 꼭 나왔으면 좋겠다 싶은 책은 바로 '지역'에 관한 '책들'이다. 여기저기서 등장하지만 그 실체가 모호한 지역이나 지역사회라는 말. 한국에는 오로지 중앙정치, 독점재벌, 중앙언론, 문화자본이 만든 국민, 국익, 국민여론, 한류만 있을 뿐이다. 올해에도 지방선거를 치르지만 정말 그 지역의 내용을 가지고 선거를 치를 곳이 있을까? 그동안의 지방선거는 심판론과 발전론이 난무하는 중앙정치의 바람몰이였고, 말 그대로 지방선거이지 '지역'선거는 아니었다.
협동조합을 하면서도 스페인이나 이탈리아, 캐나다 같은 외국사례에 매달리고 혁신사례에 열광하는 한국사회인지라 이런 책들이 나올 수 있을지, 또 나온들 관심을 받을지 모르겠다. 그럼에도 지금 우리에게 가장 절실한 책은 바로 우리가 살고 있는 지역과 그곳의 정치에 관한 책이라고 생각한다. 막혀 있는 어떤 곳을 뚫어야 하는데, 그건 제도나 조직으로 가능하지 않을 것 같다. 뭔가 함께 느끼고 공유하고 행동하는 문화가 필요하고, 그럴 계기나 사건이 필요하다. 이런 데 기여할 책이 나오면 정말 기쁠 것 같다.
전체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