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인화면으로
'국가의 적' 동성애자는 어떻게 해방되었나
  • 페이스북 공유하기
  • 트위터 공유하기
  • 카카오스토리 공유하기
  • 밴드 공유하기
  • 인쇄하기
  • 본문 글씨 크게
  • 본문 글씨 작게
정기후원

'국가의 적' 동성애자는 어떻게 해방되었나

역사학자 김학이 씨의 첫 저서 <나치즘과 동성애 : 독일의 동성애 담론과 문화>(문학과지성사 펴냄)는 다소 희한한 책이다. 동성애 역사 연구서지만, 필자에 따르면 본인은 이성애자고, 또 그 점이 대상을 바라보는 관점이나 서술 방식에 적잖이 영향을 미쳤다.

▲ <나치즘과 동성애>(김학이 지음, 문학과지성사 펴냄). ⓒ문학과지성사
이성애자에 의한 동성애/동성애자 연구가 극히 드문 일인 것만은 아니고, 또 으레 예상 가능한 어떤 패턴을 따르기 마련이다. 현대적 동성애/동성애자 개념이 형성된 과정을 연구함으로써 현대적 이성애/이성애자 개념을 재고찰하는 데 의의를 두는 것이 보통이다. 하지만, 김학이 씨의 저서는 현대적 이성애/이성애자라는 문제엔 별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다. 오로지 동성애만, 그것도 거의 남성 동성애만 판다. 그렇다면 그에게 연구 동기는 무엇이었을까? 또 무엇이 연구의 목표였을까? 에필로그에서 그는, 요약을 대신해 자신이 연구를 통해 깨달은 것 몇 가지를 제시한다.

그런데 이 요약 아닌 요약에서 그는, 요즘의 동성애자 연구자라면 하지 않을 소리를 한다. : "(리하르트 폰) 크라프트에빙(Richard von Krafft-Ebing)이 성과학을 정초한 1886년이나 한스 뷔르거프린츠(Hans Bürger-Prinz)가 나치 친위대에 영합하는 동성애론을 전개한 1937년이나, 그리고 오늘날까지도 동성애의 원인은 오리무중이다. 있는 것은 증거가 아니라 담론이다." 동성애의 원인을 묻는 일은 해묵은 동성애자 차별적 프레임으로, 근년의 인문학 저술에선 찾아보기 어렵다. (예전에 동성애자운동가/역사학자들은 꼭 반문했다: "이성애의 원인은 무엇인가?") 반면, 동성애의 원인을 둘러싼 논란을 '담론'으로만 바라보려는 태도는, 필경 미셀 푸코의 영향일 테다.

하지만, 동성애의 원인이 딱히 오리무중인 것도 아니다. 1990년대 초반에 진행된 심리학자 마이클 베일리와 정신과의사 리처드 필러드(Michael Bailey and Richard Pillard)의 연구에 따르면, 일란성 쌍둥이의 한쪽이 게이일 경우 나머지 한 명이 게이일 확률은 약 52%다. 태아기의 호르몬과 성 지향(sexual orientation)의 관계에 대해서도, 1990년대 이래 유의미한 연구 성과가 쏟아졌다. 큰 논란이 된 것은, 성과학자 레이 블랜처드(Ray Blanchard)가 제시한 가설인 '형제 탄생 순서 효과(fraternal birth order effect)'—아들을 낳을수록 게이가 나올 확률이 높아진다는—를 뒷받침하거나 반박하는 연구들이다. 이렇게 새로운 과학적 연구 성과가 꼬리에 꼬리를 물자, 동성애라는 성 지향을 개인 선택의 문제로 보고 정체성을 오로지 사회적 구성물로 바라보려는 시각은 설 자리를 잃었다.

미루어 짐작컨대, 김학이 씨는 LGBT(Lesbian, Gay, Bisexual, and Transgender) 권리운동의 역사와 그 정치학적 변환 과정에 대한 이해는 결여했거나 큰 관심이 없는 모양이다. 그는 독일의 경향을 들어 이렇게 에둘러 변명했다. : "역사 연구에는 "결론"이 없다. 역사학이 아무리 '연구'라고 하더라도 역사는 과정이고, 과정은 열려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독일 대학 역사학과에서 제출되는 박사학위 논문은 거의 언제나 "요약"이라는 장으로 끝난다." 아무튼, 그의 요약 아닌 요약을 다시 거칠게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성과학자 마그누스 히르슈펠트(Magnus Hirschfeld)는 남성 동성애자의 여성성을 확인하기 위해 4만 개가 넘는 설문을 확보했다. 그러나 말해진 어느 것도 사실로 확인되지 않았다. 그럼에도 그에 감응한 동성애자들로부터 수많은 자전적 편지가 쏟아졌고, 많은 방문객들이 내원했다. 그들은 자신들의 "이름 없는 사랑"이 드디어 해명됐다고 기뻐했다. 성과학은 인간을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성적인 존재로 표상하고 그렇게 인간을 성애화했다. 크라프트에빙은 성을 인격의 표현으로 선언했고, 히르슈펠트는 인격이 성의 표현이라 단언했다.

성의 인격화 이후, 성은 정치화 됐다. 건강한 성이 건강한 인간을, 건강한 인간이 건강한 국가와 민족을 만들어낸다는 믿음이 등장하고, 남성 동성애자는 공공의 도덕을 해치는 존재로 받아들여졌다. 그런데 이러한 사회적 차별 기제가 등장하는 과정에서, 동성애자의 인격 또한 확립됐고, 그와 동시에 해방운동이 시작됐다. 1896년에 세계 최초였을 동성애 학술 및 문예 저널이 창간됐고, 이듬해 해방운동 단체가 결성됐다.

이러한 흐름은 바이마르 공화국 출범 이후 더욱 거세졌고, 동성애자 하위문화의 발달로 이어졌다. 게이들은 베를린에서만 100개가 넘던 동성애자 전용 술집에서 매일같이 개최되던 가장무도회에, 게이샤, 카르멘, 음유시인 복장으로 나타나 술 마시고 노래하고 춤을 췄다. 1920년대 유럽 문화의 전위를 뽐내던 바이마르 모더니즘 문화예술의 일부가 됐던 것. 그런데 그것이 문제였다.

나치를 비롯한 품위와 질서의 세력은 바이마르 민주주의와 동성애를 한 쌍으로 보았고, 동성애의 비범죄화를 좌절시켰으며, 끝내 공화국을 무너뜨렸다. 나치의 게슈타포는 남자 동성애자를 "국가의 적"으로 규정했다. 하지만, 강제수용소에 끌려간 동성애자는 기껏 5000명 내지 1만5천명 정도였다. 스스로를 "남성동맹"으로 이해하던 나치는 동성애를 전면적으로 공격할 수 없었다.
(비고 : 강조한 부분은 책에 실린 문장 그대로다. 최소 5000명에서 1만5000명이 동성애자라는 이유만으로 수용소에 강제 수용됐는데, '기껏'이라고? 사회학자 뤼디거 라우트만(Rüdiger Lautmann)의 연구에 따르면, 최대 60% 정도가 수용소에서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 1933년에서 1945년까지 약 10만 명이 동성애자라는 죄로 체포됐고, 5만 명 정도가 공식적으로 선고를 받았으며, 그들 대다수는 일반적인 감옥에 투옥됐다. 비교할만한 예를 제시하자면, 제5공화국 때 삼청교육대에 수용된 인원이 3만9742명이었고, 노태우 정부 당시 진행된 피해 사례 조사에 따르면 부대 내 사망자는 54명, 후유증 사망은 397명이었다.)

결국 나치는 동성애자들을 법적으로 처리했다. 동성애자를 법의 손에 넘긴 만큼 원칙과 절차가 준수돼야 했으니, 게슈타포는 증거를 찾아내야 했고, 그 와중에 고문을 자행했다가 피의자가 법정에서 고문 사실을 발설해버리면 판사가 무죄를 선고하는 일도 벌어졌다. 나치는 동성애에 관한한 법외적인 "자의적 국가"가 아니라 법적인 "규범적 국가"였다. (비고 : 죄 없는 시민을 유대인이나 동성애자라는 이유만으로 수용소에 가둬 죽음에 이르도록 하는 나치의 국가가 "규범적"이라고? 제정신일까?)

나치 치하에서도 동성애자들은 공원과 공중화장실과 동성애자 전용술집에서 파트너를 만나고 대화하고 취했으며, 여성 동성애자 가장무도회에 끼어 함께 놀았다. 전체주의의 틈새는 그토록 넓었고, 남성 동성애자들은 그 틈을 사뿐히 이용했다. (비고 : 나치 치하에서 동성애자들이 마음껏 활개를 쳤다는 식의 해석은 다소 어이가 없다. 그럼, 전두환 치하에서의 민주화 투쟁은 탄압에도 불구하고 아무런 문제 없이 전개됐던 반정부세력의 자유 활동이었나?)

▲ 워싱턴 홀로코스트 나치 희생자 추념관에 소장된, 하인츠 헤거씨의 수형자 번호표. (임근준 제공)

이 연구서의 미덕은, 성의 인격화가 어떻게 남성 동성애자의 새로운 정체성을 조형했는지, 그리고 그것이 나치 시대에 어떠한 기제를 통해 다시 차별받았는지, 극심한 차별을 받으면서도 남성 동성애자들은 제 욕망을 어떻게 표출했는지 등을, 일일이 문헌 자료를 콜라주해가며 입증한다는 데 있다. 따라서 다소 지루한 이 역사 연구서를 재밌게 읽으려면 세부, 즉 제시되는 사료들과 그 생생함에 주목하는 편이 좋다.

하지만, 콜라주가 그려내는 그림이나 해석엔 다소 이해하기 어려운 편향이 있다. 단적인 예를 들면, 1869년에 '동성애(Homosexualität)'라는 단어를 고안해낸 헝가리계 독일인 의사 카를 마리아 벤케르트(Karl Maria Benkert; 필명은 케르트베니[Kertbeny])에 대해선 45쪽에서 딱 한 번 언급할 뿐이고, 1910년 동성애자의 권리를 주장하며 최초의 대중적 동성애자인권운동을 시작한 미국의 무정부주의자 엠마 골드먼—훗날 마그누스 히르쉬펠트는 골드먼을 "대중 앞에서 동성애를 옹호한 최초의 인물"이라 평했다—에 대해선 한 마디도 하지 않는다.

<나치즘과 동성애>는 (서언과 에필로그와 후기를 제하면) 크게 3부로 구성됐다. "성과학"을 제목으로 단 제1부는 크라프트에빙의 "부르주아적 성과학"과 마그누스 히르슈펠트의 "민주적 성과학"과 베네딕트 프래들랜더(Benedict Friedlaender)와 한스 블뤼어(Hans Blüher)의 "파쇼적 성이론"을 다룬다. "동성애 해방운동, 정치 일상"을 제목으로 단 제2부는 "동성애 해방운동과 정치" "대중적 동성애 운동과 저널" "동성애 하위문화"를 하위 장으로 거느린다. "나치즘과 동성애"를 제목으로 단 제3부는 "나치 돌격대 참모장 에른스트 룀의 동성애"를 고찰한 뒤, "나치 시대의 성과학" "나치의 동성애 정책" "일상의 억압과 삶"을 다룬다. 역시 하이라이트는 미시사적 고찰이 돋뵈는 제3부지만, 동성애의 인격화 과정을 분석하는 제1부 1장 "부르주아적 성과학"도 못지않게 중요하다.

저자는 58쪽에서 크라프트에빙의 독자들이 시도한 자가진단을 제시하며 이렇게 적었다: "자가진단이란 물론 푸코의 표현대로 "고백 서사"이고, 성은 그 고백을 통하여 인격이 된다." 하지만, 그는 이 인격화가 전후 미국에서 의사-인종화(擬似-人種化)의 과정을 통해 갱신된다는 점은, 또 그를 통해 현대적 LGBT권리운동이 시작되고 전지구적 동성혼 법제화가 이뤄졌다는 역사적 사실은 이야기하지 않는다. 전후 미국에서 이뤄진 '동성애 인격에서 동성애자 의사-인종으로의 도약'은, 한편으로 앨프리드 킨제이의 연구에 영향을 받고, 다른 한편으론 흑인민권운동의 기제를 모방하는 가운데 귀결된, 역사적 대변환이었다.

▲ 나치 수용소에 갇힌 게이들의 초기 모습. (임근준 제공)

간단하게 줄여 말하면, 인격화의 기반 위에서 의사-인종화를 추진한 결과가, 바로 오늘의 동성애자다. 즉, 동성애라는 성 지향이, 시민권—동성혼 법제화로 대표되는—을 주장하는 근거가 되는 종족적 정체성으로 갱신된 시기는, 빨라봐야 1968년 스톤월 혁명 때였다. 고쳐 말해, 현대적 동성애라는 인격의 개념은 바이마르 공화국에서, 현대적 시민으로서의 동성애자라는 의사-인종적 정체성의 개념은 1960년대 후반 동성애자해방운동 태동기의 미국에서 집단-발현했다.

추신) <나치즘과 동성애>는 동성애자의 고통에 주목하지 않는다. 나치 수용소에 끌려간 동성애자의 삶이 어떠했는지, 관련 수기를 링크한다. (☞바로가기 : "수용소에서의 이야기(A Story of the Camps)")

이 기사의 구독료를 내고 싶습니다.

+1,000 원 추가
+10,000 원 추가
-1,000 원 추가
-10,000 원 추가
매번 결제가 번거롭다면 CMS 정기후원하기
10,000
결제하기
일부 인터넷 환경에서는 결제가 원활히 진행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kb국민은행343601-04-082252 [예금주 프레시안협동조합(후원금)]으로 계좌이체도 가능합니다.
프레시안에 제보하기제보하기
프레시안에 CMS 정기후원하기정기후원하기

전체댓글 0

등록
  • 최신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