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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미터짜리 특대형 대교라니?**
몇 해 전 필자가 한국산 승용차를 몰고 산둥 일대를 주유하던 추억이 떠오른다.
국도 길섶에 '전방 500미터에 특대형 대교'라고 붉고 큰 글씨의 도로 표지판이 눈에 띄었다. 다리가 얼마나 길기에 특대형 대교라고 할까? 중국 제일의 강 양쯔강을 건너는 난징의 창장(長江)대교나 상하이의 푸둥(浦東)과 푸시(浦西)를 잇는 전장 1킬로미터의 난푸(南浦)대교도 그냥 '대교'인데…….
약간의 긴장감과 기대감도 있어 나도 모르게 가속 페달을 밟는 발끝에 힘이 들어갔다. 이윽고 다리가 나타났다. 웬걸, 지극히 평범한 콘크리트 다리였다. 눈 깜짝할 새에 훌쩍 건넜다. '방금 건넌 이 다리는 50미터 남짓했지, 이게 그 특대형 대교일까?''아니겠지, 훨씬 더 큰, 그야말로 특대형 대교가 앞에 곧 나타나겠지'생각하며 한참을 달렸다. 그러나 특대형 대교는 나타나지 않았다.
"내가 도로표지판을 잘 못 본 게 아닐까?" 그러나 그 다리뿐만이 아니었다. 그날 하루 필자는 100미터가 채 안되는 '산둥의 특대형 대교'를 다섯 개나 훌쩍훌쩍 건넜다. 중국의 창장대교나 난푸대교를 들먹이면서 멀리 갈 것까지 없다. 만약 우리 나라 서해안 고속도로상의 서해대교처럼 매우 긴 다리가 하나가 산둥에 놓인다면, 산둥사람은 그 다리에 어떤 이름을 붙여줄까? 참 궁금하다.
공자는 "선비가 도에 뜻을 두고도 남루한 옷을 수치로 여긴다면 그와 더불어 논하기에는 족하지 못하니라" 라고 한 반면 출세하여 세상에 이름을 날리는 입신양명은 장려하였다. 그래서일까. 산둥상인은 포장에는 신경 쓰지 않지만 광고(특히 과대광고)에는 쉽게 몰입하는 특성이 강하다. "포장은 스톱, 광고는 고!" 이 점은 물건이건 사람이건 마찬가지다.
사람을 포장하는 산업인 의류산업은 산둥에서 맥을 못 추고 있다. 산둥의 기업들 가운데 유명의류 메이커는 찾아보기 힘들고 산둥의 의류구매력은 연해지역에서 가장 낮다. 멀리 떨어진 광둥과는 비할 바도 없이 보하이(渤海)만 건너편 '의류와 패션의 도시' 다롄(大蓮)을 품고 있는 랴오닝과도 매우 대조적이다.
산둥 상경계는 이런 말이 유행한다. "성공한 기업가 남편의 뒤에는 현숙한 아내가 있듯 유명 브랜드의 배후에는 멋진 광고가 있다." 틀린 말은 아니다. 하지만 산둥상인은 광고를 지나치게 중시해서 탈이다. 광고를 마치 시장을 여는 마법의 황금열쇠로 여긴다. 그러다보니 몇몇 산둥의 기업들은 비록 과장되긴 했지만 인구에 회자되는 광고문안을 히트하기도 했다.
예를 들면, 하이알 : "진정한 성의는 영원하다"(眞誠到永遠:진성도영원), 칭치(輕騎)자전거: "칭치를 타면 금방 성공한다", 쌍싱(雙星)신발 : "쌍싱표 신을 신고 세계를 유린하라", 오크마(澳柯瑪)가전제품:"최고는 없으나 더 좋은 것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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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둥의 주류회사 친츠(秦池)는 1997년 CCTV 한군데에만 해도 3.2억 위안이라는 엄청난 액수의 광고비를 쏟아 부었다. 매일 공장에서 갓 뽑은 2000cc급 승용차 6대를 CCTV 대문 안으로 들이 밀어준 꼴에 해당하는 거액이었다. 그 해 친츠 사장은 CCTV측으로부터 'CCTV 최대고객'이라는 감사패를 받고 뛸 듯이 기뻐하며 동네방네에 자랑하고 다녔다.
그러나 중형 규모의 한 지방의 주류회사가 전 중국의 모든 업종을 제치고 CCTV 광고비 1위를 차지한 일은 그렇게 자랑할 일만도 아니었다. 멸망이 멀지 않았음을 예고한 거였다. 아니나 다를까. 2002년 현재 친츠의 술은 중국땅에서 행방이 묘연하다. 친츠말고도 과다한 광고비 투입으로 소비자의 기억 너머 아스라이 사라져 간 산둥기업의 수는 한두 개가 아니다.
상품의 품질과 포장의 취약성을 무차별 광고로 때우려고 하는 걸까. 산둥기업은 대개 품질경쟁력 향상보다는 우선 광고를 잘해서 유명브랜드를 만들려고 하는 경향이 짙다. 산둥에서 사업에 성공하려면 품질경쟁력을 경쟁사보다 월등히 높여놓는 게 급선무다. 그런 다음에 광고비 과다투입으로 기력이 많이 소진되었을 그들과의 한판 광고육박전을 벌려도 전혀 늦지 않다. 이것이야말로 산둥기업과의 경쟁에서 승리하는 가장 유효한 초식이라 할 수 있다.
***같은 값이면 고향제품**
"광둥은 개방에 의지하고 베이징은 중앙에 의지하고 산둥은 고향에 의지한다."
산둥상인의 동향의식의 강렬함은 중원지역의 허난(河南)상인과 함께 중국 상인 서열 공동1위다. 산둥상인은 외지에 나가 장사하면 서로 돕고 단결하는 아주 뚜렷한 특성을 지니고 있다. 산둥상인은 유별나게 고향을 따지길 좋아한다. 동향의식으로 뭉친 단결심은 최근 몇 년간 산둥 경제가 비약적으로 발전하는 데 순기능으로 작용하기도 하였다.
공자와 맹자의 고향이라 그런지 몰라도 산둥상인은 전통과 혈통을 중시한다. 산둥은 유난히 같은 성씨가 모여 사는 집성촌이 많다. 생업에 종사하다보니 멀리 헤어져 산다 해도 얼키설키 얽힌 핏줄은 끊을 수가 없다. 산둥상인은 만약 어떤 일이 닥치면 고향사람한테 도움을 청하는 것을 허물로 여기지 않는다. 객지에 나가서 장사하는 산둥상인은 명절이면 꼭 고향에 돌아온다. 조상의 무덤 앞에 풍족한 제물을 차려놓고 극진한 효성을 보인다.
"같은 고향사람을 만나면 두 눈에 눈물이 글썽이네." 산둥의 속담이다.
고향사람끼리 하는 장사가 타향사람보다는 훨씬 낫다고 산둥상인들은 굳게 믿고 있다. 오랜 옛날부터 '산둥상방'(山東商幇)과 '산둥회관'(山東會館)이란 단체가 전국 상업중심도시에 널리 퍼져 있었다. 그런 상업단체를 하나로 묶는 끈은 고향의 정분, 고향의 추억과 고향의 말씨다. 타향에서 산둥상인은 고향사람을 자기 가족과 마찬가지로 여긴다. 그들은 귀에 익은 고향말씨만 들어도 절로 신이 난다.
동북지방은 산둥사람의 제2의 고향이다. 설날 전후, 동북과 산둥사이를 오가는 열차의 객차는 귀향객들로 발 디딜 틈조차도 없다. 동북지방은 산둥상인의 홈그라운드나 다름없다. 산둥제품은 동북지방 시장에서 사랑을 한 몸에 받고 있다. 동북지방 사람들은 같은 값이면 다홍치마이듯 같은 값이면 고향 제품이다.
예를 하나 들자면 지난(齊南) 시의 '바오투췐' 맥주, 따지파이(大鷄牌) 담배는 여타 지역에서는 별 볼일 없는 브랜드이나 동북지방에서만 유독 인기가 드높다. 동북사람이 산둥제를 좋아해서라기 보다는 그들 대부분의 고향이나 원적지는 산둥이기 때문이다.
산둥에서 사업에 성공하려면 이처럼 유달리 강한 산둥상인의 동향의식을 파악하고 활용하는데 인색하지 말아야 한다. 산둥상인의 '꽌시'(關係)망으로 깊숙이 침투하면 그들과 함께 경쟁업체와 맞서 대응하는 동맹관계의 구축도 가능할뿐더러 사업이 웬만한 난관에 부딪치더라도 손쉽게 돌파할 길도 열리게 되고 큰 돈을 벌 기회도 자주 생길 것이다.
또한 산둥상인은 동향의식과 일란성쌍생아 격인 농촌의식이 매우 강하다. 산둥의 광대한 농촌의 소비시장을 주목해야 한다. 농민만을 위한 신제품을 전문적으로 개발하여 농가를 주공략 대상으로 선정한 광고를 전개하는 전략도 고려해볼만 하다. 광고문안은 교육수준이 낮은 농민들에게 널리 알려질 수 있도록 가급적 쉽고 재미있게 짓도록 힘을 기울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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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 없이 산둥에서 장사할 생각마라**
"간은 상해도 좋으나 정은 상해서는 안 된다."
산둥 상인이 잘 쓰는 말이다. 술을 마셔 몸이 좀 상하더라도 장사는 할 수 있지만 술을 안 마셔 피차간에 감정을 상하면 장사는 끝장이다 라는 뜻이다.
호탕하게 술 마시는 중국 사람은 대개 동북사람 아니면 산둥사람이다. 산둥지방TV 채널을 켜면 최소한 1시간에 2번은 술 광고를 볼 수 있다. 베이징 TV채널의 화장품 광고 수만큼 많다.
산둥성에서 생산되는 술 브랜드 수는 쓰촨성에 이어 2번째로 많다. 산둥성은 현(우리의 군에 해당)마다 1, 2개의 지방 명주를 자랑하고 있다. 공자의 고향 취푸의 콩푸자주(孔府家酒), 콩푸옌주(孔府宴酒)와 맹자의 고향 조우청의 멍푸쟈옌(孟府家宴)을 비롯하여 란링메이주(蘭陵美酒), 쌍시엔(雙喜宴), 반차오옌(板橋宴), 징양춘(景陽春), 징지바이갈(景芝白干)등 상표를 바라보는 눈에 취기가 돌 정도로 많다.
중국 술꾼 서열 중 산둥사람의 술실력은 동북(특히 헤이룽장)지방에 이어 랭킹 2위다. 남쪽지방의 50, 60도의 배갈(백주)용 종짓잔은 산둥성 경내에 들어서면부터 우리 나라 소주잔만한 크기의 잔으로 커지기 시작한다. 하지만 산둥 주당의 술실력은 배갈을 맥주잔으로 '완샷!' 하는 최북방의 헤이룽장 주당보다는 덜하여 천만 다행이다(러시아 주당도 형님으로 모시는 헤이룽장 주당의 가공한 술실력은 다음 기회'동북상인' 편에서 상술하겠다).
술을 마시지 못하면 산둥에서 돈 벌 생각을 말아야한다. 술은 산둥사람의 생존 기초의 하나다. 술 마시지 않고는 일을 이룰 수 없다. 술을 마셔야만 혀가 부드러워지고 모든 게 순조롭게 풀린다. 사람 사이의 이해관계도 술잔을 통해 해결된다. 술 한 모금도 못 마시는 사람은 지체부자유자로 취급당한다. 일반 산둥사람의 인간관계는 술로써 유지된다. 정계도 관계도 그렇고 상경계는 더욱 그렇다. 산둥상인의 눈에는 술 잘 마시는 파트너가 싹수가 있는 자로 보인다. 산둥의 비지니스는 술을 매개로 이루어진다. 술이 없으면 무미건조해서 아무런 신이 안 난다. 대부분 주당들인 산둥상인은 술자리 겸 협상장에서 이렇게 말문을 연다.
"나하고 장사 잘하려면 원샷, 그럭저럭 지내려면 입술만 갖다대라."
산둥의 경제는 술의 바다 위에 떠다닌다. 산둥상인은 그 바다에서 활약하는 뱃사람이다. 그러나 이 점은 중국 남방 상인들에게는 여간 곤혹스런 난제가 아니다. 그들은 보통 술대신 차를 마시거나 술을 마셔도 도수가 낮은 황지우(黃酒)등을 마시기 때문이다. 남방 상인들에게 산둥인과의 술자리는 마치 음치가 돌아가면서 노래를 꼭 불러야만 하는 장소에 있는 것처럼 좌불안석이다. 한 산둥출신 친구는 필자에게 귀뜸해준다.
"동북상인의 술실력은 너무 높아 탈이고 남방상인은 술을 잘 못해 탈이야, 뭐니뭐니 해도 황해 맞은편의 한국 주당의 수준이 우리 산둥주당의 파트너로는 제격이야."
이래저래 산둥은 한국 사람이 제일 많이 진출해 있고 돈 벌기에도 안성맞춤인 곳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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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상인은 나쁜 놈인가?**
산둥은 공자의 고향이자 유교의 발상지다. 유교는 상인에게 매우 혹독한 타격을 가했다. 공자는 제자들에게 군자는 의(義)에 소인은 이(利)에 산다고 했다. 공자의 눈에는 상인은 무조건 소인이고 소인은 절대로 대인(군자)이 될 수 없는 자로 비쳤다. 중농억상의 관념은 자연경제 조건하의 소농의식에 안주하는 습성을 배양했고 전제군주의 지위를 공고히 하는데 부합해왔다.
한무제의 유교 국교화 이후 상업발전은 가혹한 억압과 시련을 받아왔다. 특히 유학의 고향인 산둥 내륙의 노(魯)나라식 중농억상, 상인천시의 정서는 산둥해안 제(濟)나라식 중상주의 대외개방을 일거에 날려버리고 산둥땅 전역을 오랫동안 무겁게 억눌렀다.
산둥에서 상업은 가장 천시되었다. "장사치는 곧 사기꾼"이란 공식 아닌 공식이 산둥땅 을 지배하였고 "상인은 나쁜놈!"이라는 관념이 산둥사람의 영혼을 옭매었다. 가뭄에 콩 나듯 상업에 종사하여 거부가 된 자는 뭔가 구린데가 있는 배덕자로 사갈시되었다. 비록 빌어먹더라도 장사만은 하지 않은 거지 선비가 고결한 품성으로 찬양받았다.
어쩔 수 없이 장사치가 된 산둥사람은 자신의 직업을 치욕으로 여겼으며 어떻게 하든지 간에 이름을 얻고 벼슬 한자리를 차지하려고 애썼다. 이러한 관념과 정서는 산둥땅에서도 개혁개방 이후 완화되어가지만 상인을 최고로 여긴 제나라식 중상주의로의 회귀는 아직 한참 멀었다.
산둥상인은 원래 기민성과 융통성이 모자란 편이다. 그들은 "막히면 돌아가라"는 변통의 능력이 결핍되었다. 인정한 사물에 대해서는 그들은 끝까지 변화하지 않는 특성을 지녔다. 문제해결의 길도 여러 갈래 길이 있겠지만 산둥사람은 한번 선택한 길은 다음번에도 변치 않고 똑같이 그 길만을 선택한다. 기민성과 융통성의 결핍은 산둥상인을 경제발전의 큰 파도에도 뛰어들지 못하게 만들었다. 하지만 전부 그런 것만도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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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년대 초기, 중국 국내 시계산업은 슬럼프에 빠졌다. 수입시계와 조립품이 내수시장의 거의 절반을 점령해버렸다. 지난(齊南)의 캉바스(康巴斯)시계와 더불어 중국 주요 시계제조업체의 하나인 옌타이(煙臺)의 베이지싱(北極星)시계도 심한 불황에 허덕였다.
난관을 돌파하려고 갖은 애를 쓰던 베이지싱 시계의 여사장 싱위메이(邢玉梅)는 1992년 연초에 영양가 높은 정보를 하나 입수하게 되었다. 북한정부가 4월 15일 김일성 주석 탄생 80주년을 대대적으로 치루기 위해 중국에다 손목시계 100만개를 주문한다는 소식이다.
여타 중국의 시계회사들이 긴가민가하고 망설이고 있을 때 싱위메이 여사장의 행동은 매우 기민하고 단호하였다. 즉각 자사생산의 모든 유형의 시계를 있는 대로 싸들고 베이징으로 올라가 북한 구매단이 머무는 숙소로 찾아갔다. 손목시계 하나씩을 구매단 전원에게 예물로 증정한 후 협상을 벌렸다.
그런지 한 달이 채 못되었다. 북한측은 중국내 30여개 시계회사에서 나오는 제품을 면밀히 검사한 결과 '베이지싱'이 품질과 규격과 외형 등 조건에 가장 부합하다고 발표했다. 무엇보다 그 산둥여인의 소박하지만 진지한 태도가 상대방의 마음을 움직였다.
그해 3월 말 베이지싱 전체 사원들의 피와 땀과 눈물이 담긴 화물열차가 압록강을 도하했다. 내수의 부진을 타개하기 위하여 대외수출의 길을 개척함으로써 위기를 기회로 반전시켰던 베이징싱 시계는 현재 미국과 파키스탄 카나다등 10여개국으로 수출되는 등 건재함을 국내외에 과시하고 있다.
산둥상인은 위기를 맞이하여도 예의를 지키며 정공법으로 돌파하려는 특성이 있다. 베이지싱의 성공사례는 이런 특성의 기초 위에다 기민성과 융통성을 가미한 것으로 산둥기업도 얼마든지 도산의 위기를 도약의 기회로 전환시킬 수 있음을 보여준 좋은 물증이라고 할 수 있다. 산둥상인의 특성을 잘 파악하여 이를 인사관리와 사업찬스 장악에 유효 적절히 활용하도록 하는 것이 요구된다.
그들의 구체적 실무능력과 성실하게 노력하는 태도를 인정해주어야 한다. 그들의 성실성을 악용하여 노동력을 과도하게 착취하는 짓은 절대 금물이다. 근면착실한 인재를 과감히 관리직으로 중용하는 등 직원들의 사기를 높여 결국 생산성 향상으로 이어지도록 유도하여야 할 것이다.
***'캉바스 신드롬'과 '캉바스 교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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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둥상인은 대기업가가 될 필수적 자질, 즉 경제적 마인드가 박약한 편이다. 대부분의 산둥상인은 농후한 소농의식과 좀 부유하게 되면 쉽게 만족하는 심리가 지배적이다. 오랜 세월 농업 입국의 중국인은 소농의식이 골수에 뿌리 깊게 박혀 있다. 역시 농업이 주요산업인 산둥주민들은 나날이 치열해지는 시장 경쟁의 격랑을 힘겨워하고 있다.
1980년대 '캉바스 현상(신드롬)'은 전국 상경계를 발칵 뒤흔들어 놓았다. 지난의 캉바스시계는 중국 시계업계가 극심한 적자로 도산 위기에 빠져있을 당시 수정시계(Quartz Watch)를 출시하였다. 남들보다 '반 박자 빠르게' 시장을 독점한 캉바스 수정시계는 1983년에 출시된 지 3년도 채 못되어 '국가우수신제품상'을 수여했고, CCTV 새해 영시 표준시를 알리는 시계로 채택되기도 하였다. 캉바스시계는 단번에 중국시계기업 중 '품질제일', '생산성 제일', '시장점유율 제일'의 국유대형그룹으로 성장하였다.
그러나 캉바스그룹 최고지도층은 '좀 부유하면 만족한다' 자만심과 무사안일에 빠졌다. 그들은 시장경쟁에서 전진하지 않으면 곧 낙오한다는 냉혹한 현실을 인식하지 못했다. 적극적인 창업정신은 사라지고 소극적인 현상유지만을 고집하였다. 캉바스는 위기에서 흥성, 흥성에서 쇠망으로 치달았다.
하늘 높은 곳에서 몇 년간 휘황찬란하던 캉바스는 암흑의 깊은 나락으로 급전직하했다. 생산량과 판매고가 급감하였다. '시장의 총아'에서 시집가지 못한 노처녀처럼 되었다. 1990년대 사람들은 더 이상 캉바스 현상이라 부르지 않았다. '캉바스 교훈'으로 바꿔 불렀다.
캉바스 '현상'에서 '교훈'으로의 추락은 산둥상인의 시장관념의 보수성과 낙후성을 반영하는 일례다. 전통 유교사상이 남긴 사회적 역기능은 하루빨리 잽싸게 시장으로 달려나가야 하는 산둥상인들의 발목을 붙잡고 있다. 이러한 상황을 잘 감안하여 산둥에서의 사업에 있어서 각별한 주의를 요하는 점은 아래 두 가지다.
첫째, 하이알이나 칭다오 맥주처럼 세계적 브랜드 몇 개를 제외하고는 산둥시장에서는 영원한 유명브랜드가 존재하기가 어렵다. 변하는 것만이 유일한 불변의 법칙이다. 시장경제에서는 그저 일편단심 하나만 가지고는 변화무쌍함을 이길 수 없다. 품질경쟁력 저하에 대한 대처능력이 떨어지고 신제품 개발에 굼뜬 산둥기업과 거래시에는 될 수 있으면 장기계약을 하지 않는 게 피차간에 이롭다.
둘째, 항상 요동치는 산둥의 시장수요를 정확히 파악하고 주력 브랜드를 창출하되 그것을 영원한 시장의 총아로 키워나가도록 하는 부단한 이노베이션이 요구된다. 새로울 '신'(新)자를 상품 앞에 붙이고 또 이름만큼 언제나 새로워야 살아남는 이치를 명심해야 할 것 이다. 참고로 동북지방의 소비자는 '대'(大)자가 앞에 붙은 제품을 선호하는 경향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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