팬덤이라는 왕국
단호하게 말할 수 있다. 누군가 혹은 무언가의 팬(fan)이 된다는 건 제정신으로는 도무지 불가능한 일이다. 혹 버릇처럼 '팬이에요'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사는 이들이 있다면, 말을 꺼내기 전 다시 한 번 다음의 사항들을 가슴에 손을 얹고 곰곰이 생각해 보라 권하고 싶다. 당신은 그 대상을 위해 시간, 체력, 금전, 때로는 감정의 소모를 어디까지 허용할 수 있는가. 가끔은 그것이 당신 일상을 흔들고 근간을 뒤집어도 그 모든 걸 애정으로 감내할 수 있는가. 그것도 그 누구의 강요도 없이, 100% 자의로 말이다.
거의 마더 테레사 급의 헌신이 요구되는 이 숭고한 감정노동은, 먼 이국의 땅 한국에서 '아이돌'을 만나며 농담이 아닌 현실이 된다. 넓게 보자면 엘비스 프레슬리도 비틀즈도 한 시대를 대표하는 아이돌이었다고 하지만, 우리가 지금 여기서 짚고 가야 할 '아이돌'의 개념은 좀 더 구체적인 설정을 필요로 한다. 21세기 대한민국 땅의 아이돌은 단순히 '대중으로부터 많은 사랑을 받는 우상'이 아닌, '①원천기술의 집대성과 철저한 기획 아래 만들어진, ②춤과 노래, 예능에 능한 남녀불문 1인 이상의 구성원을 가진 그룹'이라 정의함이 옳다.
그리고 여기, 기꺼이 그들의 빛과 그림자를 자청한 '아이돌 팬덤(Fandom)'이 있다. '광신자'라는 의미의 'fanatic'에서 'fan', 왕국이라는 뜻의 'Kingdom'에서 'dom'을 떼어 조합한 이 단어는, 지금 한국 가요계에서 가장 뜨거운 감자인 '아이돌'과 만나며 완벽한 그들만의 리그를 만들어 나가고 있다. 최근에는 '삼촌팬' '누나팬' '이모팬' 같은 계급 분화까지 이루어지며 '팬덤'은 이제 단순히 한 가수를 좋아하는 특정 집단이 아닌 사회·심리·경제적인 측면 모두에서 다양하고 흥미로운 주제를 이끌어낼 수 있는 가장 뜨거운 문화 언어가 되었다. 단순한 '팬의 무리'를 넘어선, 그들의 우상과 함께 공동운명체처럼 먹고 자고 숨 쉬는 존재가 되어버린 이들. 하지만 아직도 대다수의 대중은 이 복잡하고 독특한 생태계를 한 마디로 이렇게 부른다. '빠순이'.

'빠순이'의 족쇄
남성 아이돌을 '오빠'라 부르며 열광적으로 지지하는 여성을 가리키는 이 단어는, 단어 자체의 어감에서 느껴지듯 긍정적이기보다는 부정적인 이미지가 크다. '빠순이'는 팬덤의 바닥 중의 바닥이라 여겨지던 단어 '오타쿠'가 '덕후', '오덕'이라는 귀여운 표현으로 순화되며 대중문화 속으로 파고들고 있는 작금의 현실에서조차 팬덤계의 불가촉천민으로서의 역할을 묵묵히 받아들이며 양 뺨을 내어주고 있다. 자신의 아이돌 팬으로서의 정체성을 스스로 밝히는 행위를 '빠밍아웃(빠순이+커밍아웃)'이라 지칭한다던가, 자신들을 '새우젓(가수의 눈에 비치는 팬들을 새우젓 안의 새우로 비유한 표현)'에 비유하며 스스로 비하하는 행위들을 보고 있노라면 이들의 처해있는 현실과 사회적 위치가 더욱 명확히 다가온다.
비단 이러한 외적으로 불분명한 주체의식만이 문제가 아니다. 빠순이 세계의 내부로 눈을 돌리면 이야기는 더욱 복잡해진다. 예를 들자면 이런 식이다. 아이돌 팬덤 역시 처음엔 여느 분야의 팬이 그렇듯 대상에 대한 단순한 호기심, 혹은 호감에서 출발한다. 하지만 대상에 대한 연모의 마음이 깊으면 깊어질수록 그녀(혹은 그)들은 자신이 애정을 쏟는 이를 대상으로 한 다양한 역할극에 심취하기 시작한다. 남자 아이돌을 좋아하는 여성 팬의 경우, 그들의 자상한 엄마나 누나 역할을 자청하는 한편 까칠한 시어머니와 귀여운 여동생의 역할마저 기쁘게 떠안는다. 이 신출귀몰한 다양한 역할극을 사회적 역할에까지 확대해보면 더욱 놀랍다. 오빠들이 필요로 할 때, 팬들은 그들의 대변인이자 변호사, 심리치료사의 역할마저 기꺼이 자청한다. 역시나 '누가 시키지 않았는데도 굳이' 말이다.
이게 과연 가능한 일일까 혹은 정상적인 사고방식일까 우려하는 이들도 있겠지만, 우리의 머릿속에 가득 찬 고정관념을 내려놓고 생각해보면 그리 놀라울 일도 아니다. 누군가를 향해 한 번쯤 맹목적인 연심(戀心)을 품어본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이해할 수 있는 감정 아닌가. 게다가 기실, 그간 가요계에서 '빠순이 장사'라며 서자 취급을 받던 아이돌 팝이 케이-팝이라는 거창한 감투를 쓰고 금의환향한 지 이제 갓 수년이 지났을 뿐이다. 팬덤을 이끄는 주체조차 아직 온당한 평가를 받지 못하고 있는 상황, 그들을 때로는 무모하게 때로는 격렬하게 따르는 이들에 대한 제대로 된 가치평가가 가능 했을 리 만무하다. 여기에 언론에서 물고 흔들기 딱 좋은 자극적인 소재 '사생팬(아이돌 혹은 유명인의 사생활에 깊숙이 관여하는 팬)'의 존재가 끼얹어지는 순간, 아이돌 팬덤에 대한 사람들의 객관적 판단은 저 먼 안드로메다 너머로 날아가 버리고 마는 것이 당연하고 또 당연한 이치였다.
그 위에 세워진 JYJ 공화국

당시 4집 'Mirotic'의 성공적인 국내 활동과 일본에서의 신드롬 같은 인기로 이제 남은 건 영원한 꽃길 뿐일 것만 같던 이들에게 믿을 수 없는 시련이 닥친다. 아이돌 팬덤에서 가장 금기시되는 사건인 멤버 이탈 문제가 일어난 것이다. 그것도 단순 이탈이 아닌 김재중, 박유천, 김준수 - 후에 JYJ가 되는- 세 사람의 소속사 SM엔터테인먼트를 상대로 한 전속계약에 대한 법정 공방이었다. 이후 짧지 않은 시간 동안 어지럽도록 일어난 사건사고들은 이 책을 통해 혹은 간단한 검색만으로도 넘치도록 접할 수 있다.
JYJ 멤버와 그들의 부모님이 함께 벌였던 사업과 일명 '노예계약'이라 불리던 불공정 계약을 사이에 둔 그룹 해산의 근본적 원인에 대한 사납고 원색적이었던 쌍방의 책임공방, 암묵적으로 이루어졌다던 방송금지 요청 등의 활동 방해 논란, JYJ측 팬덤에게는 승리의 깃발처럼 여겨졌던 공정거래위원회를 통한 표준전속계약서의 등장과 2012년 11월, 그 길고 지난했던 전쟁의 종지부를 찍고 맞이한 일명 'JYJ 독립기념일'까지. SM엔터테인먼트와 이제는 2인조가 된 동방신기, JYJ와 그들을 둘러싼 팬덤 모두에게 단 하루도 바람 잘 날 없던 모진 시간들이었다.
그런데 여기서 놀라운 건, 그렇게 모두가 애타게 알고 싶어 했고 모두가 밝히고 싶어 했던 '진실'이라는 것이 아직까지도 100% 투명하게 밝혀지지 않았다는 점이다. 이는 그 길고 고된 싸움의 시간에도 불구하고 '합의'라는 식으로 지어진 애매한 마무리와 사건이 일어난 곳이 다른 어떤 분야보다 '불투명'한 것들이 많은 연예계라는 특성 때문일 것이다. 따라서 이 책과 이 사건을 둘러싼 팬덤의 움직임에 대한 초점을 단순히 누가 맞다, 틀리다에 맞추는 것은 그다지 생산적이지 않은 선택이다.
오히려 40개월이라는 긴 시간 동안 현실로 존재했던, 자신들의 '오빠'를 제외하고는 누구도, 어디도 믿을 수 없었던 특정집단의 집단행동이 어떤 결과를 낳았고 지금은 어떤 식으로 유지되고 있는지에 관심을 가지는 것이 보다 효율적이고 생산적인 일일 것이다. 자신의, 때로는 자신과 동일시되는 '오빠'들을 지켜내기 위한 수많은 '수니'들의 그 어느 때보다 거룩하고 거대했던 움직임에 귀 기울인다. 저자가 직접 말하고 있듯 "자신들이 선택한 스타와 영욕을 함께 나누며 옳은 일을 하겠다고 나선"(11쪽), "새로운 환경 속에서 다방향 문화유동 현상을 직접 경험"(108쪽)한, "단지 적극적인 삶을 살고 있는 사람"(246쪽)들의 이야기에 말이다.

지금, 여기에서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것
지금, 2014년의 대한민국에서 산다는 것에 대해 생각한다. 적당히 먹고 살만은 하지만 이게 정말 살만한 삶인지는 쉽게 대답하기 어렵다. 다시, IMF 외환 위기로 원 펀치, 88만원 세대로 투 펀치를 맞으며 '즐기는 기쁨' 자체를 거세당한 대한민국의 젊은 세대를 생각한다. '대학가면 다 할 수 있다'는 어른들의 말은 2000년대에 접어들며 취업학원이 되어 버린 상아탑의 현실 앞에 무참히 꺾여나갔고, 이후 운 좋게 바늘구멍을 뚫고 들어가 성공한 낙타가 된다 해도 그들을 기다리고 있는 건 늙고 병든 뒤 한 몸 뉘일 곳에 대한 세간의 아우성 섞인 우려뿐이다.
취미와 적성은 물론 결혼과 육아, 사랑과 도덕이 지닌 가치에 대한 근본적 의문조차 사치가 되어버린 지금, "아직 우리에겐 너희들이 있으니 / 너희에겐 우리들이 있으니"(JYJ의 '이름 없는 노래')라 천명하는 우상에게 자신의 모든 것을 던질 수밖에 없는 건 우리 세대의 피할 수 없는 숙명일지도 모르겠다. 실질적인 '공화국민'이 아닌 이상, 그들이 어떤 생각으로 무엇을 위해 그토록 뜨겁고 간절했는지, 우리는 아마 영원히 알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한 가수의 팬이라는 것만으로 그들이 감내해야 했던 그 수많은 현실과 감정의 굴곡들이 그들을 그토록 단합하게 만들었으리라는 예상만 어렴풋이 해 볼 뿐이다.
다만 이들뿐일까. 남들이 뭐라 하든 누군가를 아무런 대가 없이 사랑하다 그 아름답고 완벽한 세계를 해하려는 이를 향해 작은 조약돌을 꺼내 드는 사람들. 감히 누가 이들에게 손가락질을 할 수 있을까. '내 아이돌'에 대한 깊은 마음을 '한국의 부조리한 연예시스템을 바꾸는 사회운동'으로 치환시켰던, 혹은 지금도 어딘가에서 조용히 대가 없는 사랑을 대기 중에 흩뿌리고 있을 이들에게 아낌없는 격려와 애정을 보내고 싶다. 결국 사랑하는 것만을 가진 채 빈집에 남겨진다 해도, 당신들은 그 누구보다 행복할 것이다. 설령 그 낙인이 '빠순이'라 할지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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