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소 길더라도 근래 목격되는 현상들을 나열하면서 시작해보자. 지난 국정원 여직원의 대선 개입 사건에 대한 유무죄 판결 여부는 희석되고 얼굴을 가린 채 철통같은 경호를 받으며 레드카펫을 지나가듯 스포트라이트를 받으며 등장하는 여직원, 이어지는 노무현 대통령의 남북정상회담 NLL 발언 쟁점부터 검찰총장의 사생활 폭로까지 이어지는 국면전환용 막장극, 최근 국정원의 탈북화교 공무원 간첩 증거 조작사건에 대한 국가기관의 불법행위 처벌 문제는 온데간데없고 온갖 물타기로 사건의 전말을 혼란시키면서 막장극을 펼치는 국정원과 검찰, 이러한 사건에 저항하거나 시위에 참여할 경우 아무런 상관없는 종북이나 좌빨로 몰아세우는 보수언론들.
의사에서 컴퓨터 프로그래머 벤처기업가로 그 다음엔 대학 교수에서 현재는 정치 이력이 전무함에도 인기몰이를 하고 있는 국회의원 안철수, 선거일만 되면 인증샷 올리기 바쁜 유명 인사들과 SNS 이용자들, 선거를 앞두고 이미지 쇄신을 위해 포장마차와 재래시장을 찾는 '온화한' 미소를 띤 친절한 후보자들, 자신들의 미래를 '박정희 향수'를 통해 찾는 보수정당, 취업을 위해 자기소개서를 소설로 치장해야하는 구직자들, 우리 사회 곳곳에 방치된 빈민들을 두고도 먼 나라까지 빈곤 퇴치하러 가는 대학생 글로벌 자원봉사단들.
자기만의 음악세계와 노래 실력으로 단독 콘서트를 열만한 가수들이 흘러간 옛 노래를 청중 앞에서 벌벌 떨며 불러대고 이에 감탄하면서 경외심을 보내는 관들, 이름 좀 알려졌다 싶으면 토크쇼에 나와 꼭 한 번은 눈물을 흘리는 성공한 셀러브러티들, 사회적 책임을 앞세워 '따뜻하고 착한' 자본으로 위신을 쌓는 재벌 기업들, 주변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겪는 불공정한 처우와 해고를 숱하게 보면서도 부산까지 버스를 타고 가서 촛불을 밝히는 시민들, 서울역 광장에서 좀비처럼 비틀거리는 노숙인에게는 무심하면서 TV에 나오는 노숙인에게는 연민을 느껴 전화번호를 누르는 시청자들, 이제 겨우 40줄에 들어섰을 법한 세대가 벌써 과거를 그리워하고 낭만화하는 늙은 텍스트 <응답하라 1994>, 그리고 탈역사화된 분노와 혐오감을 표출하는 일베 등등. 언급하다보니 밑도 끝도 없어 보인다.



이는 지금 이 시대에 한국사회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나고 있는 현상들이며, 이들 간에는 특별한 관련성이 없어 보인다. 분명히 그렇게 보인다. 그리고 이 글을 읽는 독자가 포스트모더니즘 이론에 익숙하거나 잘 알고 있다면 보드리야르를 따라 다음과 같이 말할 것이다. 지금 현실세계는 "어떠한 준거대상이나 기원을 가지지 않는, 마음대로 떠도는 뿌리 없는 허구" 또는 하이퍼리얼리티 세계라고 말이다. 즉, 우리는 탈분화, 해체, 시뮬레이션, 재생, 향수가 지배적인 세계에서 기원도 본질도 원인도 역사적 인과성도 알 수 없게 된 것이다.
그러나 이 책 <탈감정사회>(박형신 옮김, 한울 펴냄)의 저자 스테판 G. 메스트로비치는 이 같은 해석에 비판적으로 대응한다. 그는 이 같은 현상들을 관통하는 공통 논리가 있다고 말한다. 그것은 바로 저자가 야심차게 내세우는 탈감정주의(postemotionalism)라는 개념이다. 생경하게 다가오는 이 탈감정주의란 무엇을 의미하는가? 저자에 따르면, 탈감정주의는 "문화산업이 신오웰적, 기계적, 석화(石化)된 방식으로 죽은 추상화된 감정을 사용하는 것"을 의미한다. 좀 더 자세한 구절을 인용해보자.
"탈감정주의는 감정적 무질서를 피하기 위해, 감정교환이 매듭지어지지 않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감정적 삶이라는 '야생'지대를 문명화하기 위해, 그리고 일반적으로는 사회세계가 잘 정비된 기계처럼 순조롭게 움직이도록 감정을 질서지우기 위해 설계된 하나의 체계이다."(285쪽)

하지만 모더니즘부터 포스트모더니즘적 이론에 이르기까지 사회학에서 감정의 역할은 소홀히 다뤄지거나 간과되어 왔다. 계몽주의적 기획은 물론 이를 비판하는 막스 베버의 합리화 테제에서도 엿볼 수 있듯이, 사회의 맥도날드화가 가속화되면서 감정은 소멸되고 이성의 승리로 끝날 것이라는 모더니즘적 전망이 대표적이다. 나아가 포스트모더니즘적 전망 또한 근대성 비판에도 불구하고 거기에는 감정에 대한 이성의 '비극적인' 승리가 깔려 있을 뿐이다. 결국 감정이 인간세계에서 점차 들어설 자리가 없게 된 것이다.
그러나 메스트로비치는 포스트모더니즘의 문화적 분석에는 일정 부분 동의하면서도 감정의 소멸 혹은 축소에 대해서는 전혀 동의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인간 사회에서 감정은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사회역사적 변화 과정에 따라 단지 변형될 뿐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가 보기에 우리 시대에 감정은 소멸된 것이 아니라 오히려 문화산업에 의해 대량으로 생산되고, 기계화되며, 거대한 정치권력에 의해 조직적이고 조작되며 과잉 표출된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이 때 감정은 자발적인 진정성이 탈색된 감정이며, 인위적이고 합리화된 '죽은' 감정이다. 즉 우리의 이성은 인위적으로 생산되고 맥도날드화된 '죽은' 감정에 뿌리를 두게 된다. 보드리야르가 표현하는 하이퍼리얼리티도 "구조화된 기계적인 탈감정적 현실"일 뿐이다. 결국 데이비드 리즈먼이 주장하듯이, "이전 시대라면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였을 사건과 위기에 사람들이 반응하지 않는 사회"가 도래한 것이다.
메스트로비치는 이러한 통찰력을 보드리야르, 조지 리처, 데이비드 리즈먼, 에밀 뒤르켐, 크리스 로젝, 허버트 마르쿠제, 게오르그 짐멜, 조지 오웰, 그리고 표트르 도스토예프스키에 이르기까지 고전과 현대를 오가면서 '탈감정사회'의 도래를 이론적으로 도출해내고 있다. 그의 탁월한 이론적 독해와 호쾌한 글쓰기는 그 자체로 매력이기도 하지만 고전과 현대이론을 현대적 감각으로 끌어들여 도발적으로 문제를 제기하는 통찰력은 감탄스럽기까지 하다. 그러나 그는 순수한 이론가로서의 면모보다는 자신이 직접 목격한 당대의 문제, 대표적으로 보스니아 전쟁과 O. J 심슨 재판을 사례로 들면서 우리의 삶의 거시적 차원과 미시적 차원을 아우르는 경험적 사례들을 통해 탈감정주의를 개념화한다. 이러한 그의 전략은 이 책이 미국에서 1997년에 출간되었다고 하더라도 2010년대 우리가 경험하고 있는 여러 현상들을 분석하는 데에도 매우 적실해 보인다.
앞서 여러 사례들을 언급했듯이, 한국 사회도 탈감정사회의 면모를 충분히 갖추고 있다. 오늘날 우리는 진정한 감정을 TV 속에서나 찾아볼 수 있다. 진정한 아빠는 <아빠 어디가>와 <슈퍼맨이 돌아왔다>에서, 진정한 남자는 <진짜 사나이>에서, 진정한 사위는 <백년손님-자기야>에서, 진정성을 품은 인물은 <무릎팍 도사>나 <힐링캠프>에서나 만나볼 수 있다. TV 밖에서 진정성이 인정받는 시대는 흘러간 지 오래다. 진정성이 불가능한 시대에 진정성은 이제 문화산업을 통해 대량으로 유통되고 소비된다. 이렇게 보면 우리는 진정성의 결핍을 느끼는 것이 아니라 과잉된 진정성, 즉 '진정성 피로'를 경험하는 시대에 살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이 진성성은 메스트로비치의 표현대로 '진정성 산업'이 낳은 허구적인 '가짜' 진정성에 불과하다. 이처럼 탈감정사회는 "기계 숭배의 확장이며, 따라서 감정은 맥도날드화되고, 무정해지고, 판에 박힌 것이 되거나, 아니면 인위적으로 만들어져 왔다. 기계화는 그것의 제국주의적 영역을 기술과 산업으로부터 확장하여 자연의 마지막 요새, 즉 감정을 식민화해왔다."(278쪽) 점점 우리는 대기업이 깔아놓은 놀이공원에서 가족 간의 행복을 확인하고, 대형극장에서 예술적 감각을 키우며, 프랜차이즈 식당에서 미각을 키워나간다. 대학은 이미 오래 전부터 비판적 인문학과 사회과학 담론을 생산하기보다는 대량의 논문실적, 영어강의, 강의평가, 대학순위, 명사강연, 외관꾸미기, 졸업생 취업률에 집착하고 있다. 진정성이 사라진 시대에 대학이 교수와 학생들에게 요청하는 것은 자신의 연구능력과 학업능력을 ‘잘 포장해서 멋지고 세련되게 보여주라’는 것이다.
진정성이 소멸한 탈감정사회에서 떠오르는 감정은 '친절함', '상냥함' 또는 '행복한 의식'이다. 메스트로비치는 이러한 특징을 리즈먼의 '타자지향형' 인간에게서 찾는다. 이와 대비되는 내부지향형 인간은 자신의 감정을 충실하게 행위로 옮기는 반면, 타자지향형은 친절함과 관용을 내세운 인위적인 감정을 활용하여 자신을 잘 포장해야한다. 진짜 감정은 되도록 숨기고 드러내지 말아야 한다. 분노는 친절함 앞에서 점점 무력해져간다. 아니 불필요해졌다.
오늘날 부모는 아이들을 엄격한 도덕적 지침이 아니라 사기를 드높이는 방식으로 상냥하게 대해야한다. 아이는왕이 되었다. 교사들도 학생들에게 상냥하게 굴고 고객만족을 위한 서비스제공자로서의 역할에 충실해야 한다. 이제 악당, 독재자, 살인자, 파렴치한 자본가, 무능한 정치가도 친절하고 상냥하면 멋스러워진다. 팬이나 추종자도 따른다. 친절하고 따뜻한 자본은 노동자들의 분노 섞인 저항을 무력하게 만든다. '친절함의 횡포' 앞에서 우리 자신은 응어리 진 분노를 내화하거나 깊은 냉소와 회의가 깃든 삶에 익숙해져야 한다. 분노가 저항으로 이어지기까지 가로막고 있는 친절한 장벽들이 겹겹이 쌓여져 있다. 분노가 저항으로 이어지기까지 제도화된 규칙의 네트워크를 통과해야한다. 진정한 분노를 표출할 회로는 막혀 있고, 합리화되고 제도화된 분노만을 표출해야한다. 그렇지 않을 경우 우리는 관용을 중시하는 '정치적 올바름'(political correctness)의 덫에 빠져 '집단적 죄의식' 상태에 빠지거나 온갖 소송전쟁에 휘말릴 것에 대비해야 한다.

메스트로비치는 탈감정사회에서 저항이나 반란은 거의 불가능해졌다고 진단한다. 뒤르켐의 비판적 연구자이기도 한 그는 뒤르켐이 언급하는 열정적 감정의 집합적 결과로서의 성스러운 것, 즉 집합표상은 이제 신성한 의미를 지닐 수 없게 되었고, 집합적 감정은 개인들에 의해 쉽게 해체되고 변형되며 순식간에 소멸될 수 있게 되었다고 주장한다. 탈감정적 유형의 개인들은 '마음 가는대로 못하는' 인간들이기 때문에 진정한 집합적 흥분을 경험하기에는 너무나 냉소적이고 해체에 너무나도 능숙하다. 촛불집회도 희망버스도 한 판의 쇼로 끝나고 곧바로 공중 분해된다. 죽은 감정들이 공중에 떠돌면서 배회하기 때문이다. 오늘날 신성한 것은 완전히 탈감정화되어 리메이크와 시뮬레이션을 통해 죽은 과거를 활용하는 데 지나지 않는다.
따라서 반란이 좌절된 사람들이 택할 수 있는 선택은 대체로 두 갈래로 나뉜다. 하나는 외진 곳으로 고요히 탈출하는 것이며, 다른 하나는 '그리운 옛날'을 동경하면서 향수에 젖는 것이다. 이제 사람들은 정확히 파악하고 있다. 지배 권력이나 엘리트들이 얼마나 위선적이고 뻔뻔한 줄도 알고 그들 때문에 너무 많이 속아왔다는 것을 알고 있다. 하지만 이 세계는 마음 가는 대로 할 수 없는 곳이고 저항도 반란도 꿈꿀 수 없는 곳이라는 것도 안다. 냉소주의와 회의주의는 이렇게 영혼으로 파고 들어온다. 이렇듯 메스트로비치는 우리가 '문명화된 야만'의 시대에 살고 있으며, 끝내 오웰의 승리로 마무리 될 것이라고 진단한다.
이 책은 읽는 내내 통쾌하면서도 파국적인 현실과 미래를 받아들여야 하는 불편함을 가져다준다. 그래서 어쩌란 말인가? 이러한 질문에 대해 메스트로비치는 자신 스스로 명쾌한 답이나 대안을 제시하지는 않는다. 어쩌면 그의 몫이 아닐 수도 있다. 다만 그는 책 곳곳에서 우리가 궁극적으로 도달해야하는 지점들을 언급하고 있다. 그것은 바로 다시금 진정한 사랑과 소통 그리고 집합적 흥분으로 가득 찬 카리타스의 세계이다. 언제가 우리는 탈감정사회를 넘어선 감정적 유대의 세계를 기대할 수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인간세계에서 감정은 소멸하지 않고 언제나 따라다닐 것이며, 탈감정사회를 탈출할 수 있는 가능성 또한 감정으로부터 비롯될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 당장은 메스트로비치가 책에서 밝힌 바와 같이 탈감정사회 파라미터의 윤곽을 그려보는 것으로 만족하면 어떨까.
이제 마무리를 해야겠다. 우리(아니 정확하게는 필자)가 기대하는 것은 국정원 대선 개입 사건에 대한 막장 같은 청문회가 아닌 유무죄를 가르는 합법적 판결과 처벌이며, '노무현 정신'을 계승하겠다는 선전이 아닌 노무현처럼 살거나 그를 뛰어넘는 진정한 인물의 등장이며, 화려한 슬로건이나 이슈 파이팅 게임에 능숙한 정치전문가가 아 사람들과 뒤엉키며 작은 세계를 만들어가는 혁명가이며, '그리운 과거'에 기대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가치를 창출할 줄 아는 정치적 우파와 좌파의 출현이며, 위로와 위안의 인문학을 내세워 뷔페식 글쓰기로 또는 소통이라는 그럴싸한 포장으로 인기몰이하는 지식인이 아니라 비판과 과학적 글쓰기에 몰두하는 골방 지식인의 부활이다. 좀 더 바란다면 악을 악이라고 당당하게 비판하고, 부정의에 대해 진정으로 분노하면서 저항할 수 있고, 정의를 정의라고 외치면서 흥분할 수 있는 자유이다. 지금 이 시대에 이게 그리 불가능한 일이 된 것일까. 어쨌든 지금 원고를 쓰는 이 시간에도 야당은 ‘공천’이냐 ‘무공천’이냐를 둘러싼 소모적인 논쟁을 벌이면서 마치 민주주의의 발전인 것처럼 법석을 떨고 있다. 이것이 바로 탈감정화된 민주주의의 전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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