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벼운 이야기가 오고가는 자리에서, '임을 위한 행진곡'을 5·18 공식 기념가로 제정하기 위한 움직임을 둘러싸고 최근까지 지속적으로 불거지고 있는 논란들을 한 번에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을 꺼내본 적이 있다. 그것은 다름 아니라 노래의 제목에 있는 '행진'이라는 단어만 다른 것으로 바꾸는 것이다. 억눌려있던 시민들의 의지가 마침내는 길거리로 뚫고 나오는 것에 대해 극도로 부정적인 유전자를 가진 지금의 집권 세력에게 바로 그 '길거리'를 직접적으로 상기시키는 '행진'이 제목에 들어간 노래를 받아들인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워 보였기 때문이다.
농담 삼아 꺼내 본 이야기지만, 지난 이명박 정부에 이어 지금의 정권 역시 일종의 '길거리 콤플렉스'를 가지고 있는 것만은 틀림없어 보인다. 그리고 그것은 정용준의 첫 장편소설 <바벨>(문학과지성사 펴냄)에 그려지고 있는 가까운 미래의 정부 또한 마찬가지이다.
▲ <바벨>(정용준 지음, 문학과지성사 펴냄). ⓒ문학과지성사
김태용이나 한유주를 통해 잘 알려진 '텍스트 실험집단 루'의 동인이기도 한 정용준은 그간 기존의 서사방식으로는 어긋날 수밖에 없었던 상황들을 포착하고 이것을 다시 자신만의 서사 안에 담아내기 위해 진지한 고민이 담긴 인상적인 단편들을 발표해왔다. 나아가 <바벨>에서는 아예 소리 내어 말을 하는 방식으로는 의사소통이 불가능한 세계를 그려 보이고 있다. 제목으로 미루어 짐작할 수 있는 대로 그가 그려 낸 소설 속의 세계에서는 말하기가 일종의 형벌처럼 드리워진 시대이다. 그리고 지금의 우리 모습과 똑같이 자본의 차이가 그 형벌의 경중을 결정하기도 한다. 이어 노아, 요나, 아벳 등 성경의 모티브들을 연상시키는 이름을 그대로 부여받은 등장인물들이 그 '바벨'과도 같은 시대-은유인 동시에 소설 속에서 현실을 부르는 단어-를 살아가는 다양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언어를 둘러싸고 벌어지는 인간의 소통과 '공통 감각'(실제 이 단어는 등장인물을 통해 몇 번이나 반복해서 소설 속에 등장한다.)이라는 두터운 질감의 문제의식들을 안고 있으면서도 SF적인 상상력에 기인한 배경 덕분인지 그것들을 선명하고도 구체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이 소설은 그러나 읽는 내내 무엇인가 막혀 있는 듯한 답답함을 떨쳐버릴 수 없게 만든다. 소설의 서두에 놓여 있는 매혹적인 동화 한 편이 어떻게 소설 속 현실과 얽혀 들어가는지 그 전모가 드러나는 중반 즈음에 도달하면 한층 더해진다. 그래서인지 저마다 절체절명의 순간들을 살아가고 있는 등장인물들의 간절함이 어떤 방식으로 뻗어나가는지를 숨죽여 지켜보던 눈길도 어느 순간 시들해지고 만다. 말을 할 수 없어 차라리 스스로 혀를 자르는 선택을 하는 사람들마저 생겨나는 이야기를 아이러니하게도 등장인물들의 수많은 대화들을 통해서 직접적인 방식으로 듣게 되지만, 앞에서 말한 답답함은 좀체 사라지지 않는다.
다소 기계적인 설정이기는 하지만 반대 논리를 가지고 있던 남녀 주인공이 만나 서로 이해하고 동화되는 과정이 이야기의 중심축 가운데 하나인 사실로 미루어 보자면, 작가는 보다 구체적이면서도 희망적인 메시지에 독자들이 도달할 수 있기를 바랐던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그런 작가의 의도와 노력과는 무관하게, 아니 오히려 그 메시지의 효과적 전달을 위해 대척점에 둔 현실의 모습을 세밀하게 묘사한 작가의 의도대로 '바벨'을 온통 뒤덮고 있는 것은 '길거리 콤플렉스'에 걸린 정부의 모습이다. 그래서인지 소설 속 이야기들은 다소 묘하게 '길거리'에서 개인적인 공간으로 조금씩 밀려나고 있는데, 바로 여기에서 현실이 막혀 있는 듯한 감정이 유발된다.
실제 소설 속에 등장하는 배경은 크게 두 가지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정부에 반대하는 사람들의 시위 장소인 '국방청사 앞 시민광장'과 여자 주인공 '마리'의 대저택. 이 두 공간은 말 그대로 정부에 반대를 하는 사람들과 그와는 달리 정부의 태도에 동조하는 인물인 여자 주인공의 처지와 고스란히 연결되어 있다. 흥미로운 설정은 지금 현재 시위 장소로 이용되는 시민광장이 예전에는 정부가 주로 공식적인 발표를 하던 장소였다는 것과, 마리의 저택은 정부에 쫓겨 다니던 남자 주인공 '요나'가 피신을 하게 되면서 등장하는데 그곳으로 이동하기 위해 비밀리에 만나는 장소가 다시 국방청사 부근이라는 점이다. 즉, 애초부터 시민광장이나 마리의 저택은 모두 '정부'의 영향력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점을 암시하고 있다.
▲ 서울광장에서의 시위 모습. (2013년 12월, 사진은 본 서평 기사와 직접적인 관련이 없습니다.) ⓒ프레시안(최형락)
흔히 남자 주인공이 피신해 있는 여자 주인공의 집이라는 설정에서 기대하게 되는 미래의 변화에 대한 가능성 역시 실현되지 않는다. 물론, 서로에 대해 조금씩 마음을 열어가던 마리와 요나가 완전히 소통하고 동화되어 '공통 감각'을 나누는, 소설에서 가장 아름다운 장면 중의 하나가 등장한다. 그리고 독자들에게 이 아름다운 장면을 꼭 직접 확인해보라는 말도 덧붙이고 싶다. 하지만, 개인적인 안락함으로 치장된 마리의 저택은 광장에서 이루어지는 행위들과 아주 근본적으로 차단되어 있는 공간일 수밖에 없다. 따라서 두 남녀 주인공의 중요하고도 의미 있는 행위는 광장에서 벌어진 사건이 비록 영상의 형태였음에도 마리의 저택으로 틈입하는 순간 이내 그 지속력을 잃고 개인적인 사건이라는 원래의 형태대로 축소되고 만다. 굳은 결심으로 다시 광장에 서게 된 요나가 마주한 현실에서 바벨은 이미 끝났음에도 불구하고, 달라진 것이 하나도 없이 오히려 '텅 빈 광장'만 남게 된 모습이 이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이것은 어쩌면 작가가 애써 그리려고 한 의도 너머에 있는 모습일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바벨>이 그리고 있는 현실이 지금 우리의 그것과 닮아 있다는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면, 그것은 '바벨의 시대'가 상징하는 소통의 단절이 아니라 그 어떤 것도 '바벨의 시대'로 만들고 마는 정부의 무능력함과 폐쇄성 때문일 것이다.
바벨탑을 더 이상 올리지 못하게 언어를 흩어놓은 성경의 이야기를 우리는 흔히 형벌로 받아들인다. 하지만 피라미드형 구조일 수밖에 없을 완성된 바벨탑에서 사는 것이 오히려 형벌은 아닐까. 같은 언어를 쓰면서도 고개를 들어 탑의 위층에 목소리를 높여야 하는 것이 오히려 더 고통스러운 일은 아닐까. <바벨> 속 정부의 모습을, 그리고 다시 오늘자 뉴스 속 정부의 모습을 보고 나니, 탑에서 내려와 같은 길 위에 선 채 서로 다른 언어를 이해하기 위해 마주 보는 일이 새삼 불가능한 장면처럼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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