잔인한 사월이다.
사상 최악의 해상재난을 겪고 있는 우리 모두의 마음이 비통하다. 사망자와 실종자 가족들의 마음이야 오죽하겠느냐마는, 이를 지켜보는 이들 모두가 슬픔과 비탄에 잠겨 있으며, 많은 사람들은 정신적, 심리적 충격과 공황상태를 토로한다. 지금 TV와 인터넷 등의 매체로 사건을 지켜보는 이들의 슬픔과 분노는 과거의 여느 대형 재난 사건을 지켜보던 것과는 사뭇 다르다. 슬픔과 분노, 희생자들과 실종자들에 대한 우리의 감정적 일체감. 바야흐로 전국민이 마치 희생된, 또는 실종된 사람들과 정서적으로 결속되어 있는 듯한 인상마저 준다.
아마 가장 큰 이유 중 하나는 피해자 대부분이 수학여행에 나선 10대 청소년들이라는 안타까움일 것이다. 이들이 부모에게 남긴 마지막 메세지들을 보고 숨막힐 정도로 가슴이 아프지 않았던 사람은 아마 없을 것이다. 그러나 한 발 더 나아가, 이번 사건에서 우리가 느끼는 이 절망적인 슬픔과 충격, 그리고 분노에는 지금의 이 시대가 우리에게 안겨주는 심리적 불안과 고통이 고스란히 녹아 있다.
발터 벤야민은 특정한 역사적 사건이나 예술작품 등이 형성하는 하나의 고정된 이미지 속에는 한 사회의 구성원들이 집단적으로 간직하고 있는 무의식의 기억이 반영되어 있다는 사실을 인식했다. 그는 이를 “변증법적 이미지”라고 불렀다. 벤야민은 특정한 건축물의 양식 등에는 태고적 무계급 사회의 유토피아에 대한 집단적인 기억이 무의식적으로 남아 있다는 사실을 지적한다. 그러나 변증법적 이미지에는 다른 의미의 집단적 무의식 역시 포함될 수 있다고 해석할 수도 있을 것이다. 즉 고통받는 자들이 겪는 집단적인 경험에 대한 기억 역시 하나의 이미지 속에 무의식적으로 반영되어 있는 경우를 생각해 볼 수 있다. 선수의 푸른 바닥만을 남기고 뒤집혀 바다 속으로 가라앉아버린 거대한 배의 형상 역시 우리에게 어떠한 정서적 효과를 불러일으키는 ‘이미지’를 선사하고 있지 않은가? 우리가 발 딛고 살아가는 이 땅, 이 사회가 침몰하는 것 같은 현기증 말이다.
배가 침몰하기 시작하자 승객들에게 침착하게 자리를 지키라고 안내방송을 한 뒤, 선장이 가장 먼저 안전하게 대피했다. 도착한 병원의 온돌 침대 위에서 젖은 돈을 말리는 여유까지 부렸다. 그 시간에 승객 대부분은 바다 밑으로 가라앉고 있었다. 그의 이러한 행적은 한국 사회에서 '사회지도층'이라 불리는 기득권 지배자들이 위기에 처했을 때 생존하는 방식을 그대로 닮았다. 세월호가 침몰되기 직전 KT는 6000명 정리해고를, 세월호 사건 다음 날에는 삼성생명이 1000명의 정리해고를 발표했다. 쌍용차와 코레일을 보라. 회사가 재정난에 처하면 자본은 노동자들을 어떻게 대하는가? 파업한 노동자들을 ‘어머니와 같은 심정으로’ 기다리겠다던 코레일 사장은, 정작 파업을 끝내고 돌아온 ‘탕아’들을 어떻게 대했는가?
희생자들과 실종자 대부분은 안산 단원 고등학교 학생들, 이들은 인근 시화 반월공단에 다니는 부모를 둔 노동자들의 자녀였다. 그들만이 아니다. 배에 탑승하고 있었던 사람들의 명단을 보자. 제주도의 건설현장을 찾아 가던 화물기사들, 아마도 이주노동자일 것이라고 추측되는 조선 교포들과 필리핀인들. 배에 올라 제주도를 향하던 이들 대부분은 특권층과는 거리가 멀어도 한참은 먼, 노동자 서민 계급의 구성원들이었다. 먼저 안전하게 탈출한 선장에게 버림받은 채, 누군가의 도움 없이 스스로 자신의 목숨을 지켜야 했거나 배에서 채 탈출하지 못한 이들의 운명은 하나의 사회가 위기에 처해있을 때 버려지곤 하는 다른 대부분의 계급 구성원들의 형상을 은유적으로 보여준다.
분명 이번 사건은 이 시대의 트라우마로 남을 것이다. 유가족뿐 아니라 모두가 이토록 함께 슬퍼하며 실종자들을 기다리는 것은, 그들의 형상(선장에게 버림받고 수장된 자들)이 바로 이 시대를 살아가는 '버림받은 세대'에 대한 알레고리로 다가오기 때문이다. 침몰한 세월호 뿐 아니라, 어쩌면 한국사회 전체가 침몰하고 있으며, 우리는 '침착하게 제자리를 지켜라' 라는 윗사람들의 말만 믿고 살아가는 존재들이 아닌가 하는 불안함을 숨길 수가 없다.
결국 지금 우리가 물어야 할 것은, 과연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사회의 조타실을 맡고 있는 사람들에게 우리의 삶과 운명을 맡겨도 좋은가 하는 것이다. 그들은 우리의 삶을 보호할 수 있는가? 우리는 우리의 삶을 그들의 손에 맡겨도 좋은 것인가? 어쩌면 그들이 배의 방향을 급격하게 ‘우향우’하는 과정에서 이 사회가 균형을 잃고 좌초할 위험을 겪고 있는 것은 아닐까? 실종자 가족들의 격분과 항의에도 불구하고 수색 작업에 그다지 열의를 보이지 않고 있으며, 오히려 청와대로 항의방문을 하겠다는 가족들에게 경찰병력 300명을 투입해 그들을 강제로 제지한 지금의 이 정부와 그들이 운영하는 국가비상시스템은 과연 착취하는 자들, 강한 자들의 생명과 재산만이 아니라, 착취받는 자들과 그들의 자녀들의 생명에는 얼마만큼 열의를 보여왔는가?
아도르노에 따르면, 인간에게는 추상적 동일성 사고가 형성되기 이전에 우리가 가지고 있었던 미메시스 능력, 즉 타인 또는 객체와의 유사성을 형성해낼 수 있는 능력이 잠재적으로 남아 있으며, 이는 우리가 타인의 신체적, 정신적 고통을 목격한 뒤, 이성적인 도덕판단을 내리기 이전에 이미 직관적으로 그 고통에 대한 연대의 감정이 생겨나는 것에서 증명된다고 한다. 그러나 프란치스코 교황이 (아프리카 난민들이 타던 배가 침몰해 수백명의 희생자가 나온) 이탈리아 람페두사에서 말한 것처럼, 지금의 신자유주의 세계화는 “무관심의 세계화”로 변질되고, 이는 우리에게서 고통에 공감하는 능력을 빼앗아가버렸는지도 모른다. 지금 침몰한 배가 우리에게 상기시키는 이 ‘버림받은 자들의 트라우마’는, 우리에게 고통받는 자들 사이의 정서적 공감능력과 연대의 숭고한 정신을 가져야 한다고 충고한다.
누군가가 지켜주지 않는 곳에서, 국가가 국민의 생명을 지키는 데 총체적으로 무능하다는 사실이 증명된 한 사회에서는 그 사회를 살아가는 사람들 스스로가 서로를 지켜주어야만 한다. 우리는 서로를 지켜주는 연대를, 서로 구명조끼를 나눠주며 도왔던 단원고 학생들의 숭고한 용기를 실현할 수 있는가? 우리는 출렁거리는 배 위에서처럼 불안정한 삶을 살다 결국 버림받은 사람들, 해고 노동자들, 비정규직, 이주노동자들, 성소수자들, 밀양과 강정의 주민들에게 구명조끼를 건네줄 수 있는가? 안녕하지 못한 시대에, 침몰한 세월호를 슬픔과 분노로 바라보는 ‘버림받은’ 우리의 삶은 어디를 향해 가야만 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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