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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르노그래피를 읽은 국민, 국가에 대한 믿음을 잃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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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르노그래피를 읽은 국민, 국가에 대한 믿음을 잃다

[프레시안 books] 로버트 단턴의 <책과 혁명>

<책과 혁명>(로버트 단턴 지음, 주명철 옮김, 알마 펴냄)은 '책의 역사가'로 알려진 로버트 단턴이 1995년에 발표한 《The Forbidden Best-Sellers of Pre-Revolutionary France》의 번역본이다. 저자는 주네브의 뇌샤텔출판사가 보유하고 있는 거래명세서, 회계장부, 고객들과 주고받은 서신 등 방대한 양의 사료를 통해서 혁명 전 프랑스에서의 금서 유통 과정을 추적하고, 금서가 정치적 담론과 여론의 형성에 어떠한 영향을 미쳤으며, 나아가 프랑스혁명과는 어떠한 관계가 있는지를 고찰하고 있다.

▲ <책과 혁명>(로버트 단턴 지음, 주명철 옮김, 알마 펴냄). ⓒ알마
<책과 혁명>은 총 4부로 구성되어 있다. 제1부 '금지된 문학과 문학시장'에서는 뇌샤텔출판사의 사료를 분석하여, 서적상들에 의해 '철학 서적'으로, 당국에 의해서는 '나쁜 책'으로 불린 금서의 제작, 교환, 주문 및 발송 과정을 꼼꼼하게 복원하고, 이에 대한 통계적 분석을 통해서 금서의 베스트셀러 목록을 작성하였다.

그에 따르면, 이른바 '고전'으로 분류되는 계몽 사상가들의 저작들보다 중상비방문, 파렴치한 추문, 포르노그래피 등 음란하고 저급한 작품들이 목록의 윗자리를 차지했다. 저자의 표현을 빌리자면, "18세기 프랑스 문학시장에는 오늘날 거의 완전히 잊혀진 베스트셀러가 넘쳐나고 있었다는 것이다."(124쪽)

제2부 '주요 작품'에서 저자는 18세기 프랑스 독자들의 관점에서 각 장르를 대표하는 세 편의 금서, 즉 철학적 포르노그래피 <계몽사상가 테레즈>(1748), 일종의 공상소설인 메르시에의 <2440년>(1771), 중상비방문에 속하는 <뒤바리 백작부인에 관한 일화>(1775)에 대한 다시 읽기를 시도하였다.

아울러 저자는 작가들이 독자를 설득하는 다양한 기술, 즉 적절한 화법 및 수사법의 채택, 표절에 가까운 텍스트 인용, 삽화 및 각주의 활용 방법 등을 면밀히 분석하였다. 이러한 기술을 통해서 작가들은 "앙시앵 레짐 시대의 기존 가치에 대한 도전"(191쪽)과 "교회의 정신적 정통성에 대한 이의제기"(211쪽)에 독자들을 끌어들였고, 국왕을 탈신성화함으로써 "군주정의 상징적인 장치에 들어있는 권력을 빼앗아버렸다"는(258쪽) 것이다. 제4부 '철학책 모음'에는 이 세 편의 중요 부분이 발췌 번역되었다.

제3부 '책이 혁명을 일으키는가?'에서 저자는 자신의 연구 성과를 토대로 프랑스혁명에서 계몽사상이 수행한 역할에 대한 다양한 견해들을 재검토하고 있다. 우선 다니엘 모르네로부터 키스 베이커에 이르기까지 '책의 역사'에 관한 연구사를 크게 '전파에 관한 연구'와 '담론 분석'으로 대별해서 살펴보고, 서적을 통한 정보 순환의 마지막 단계라 할 수 있는 의미의 수용, 즉 '독서'의 문제를 치밀하게 고찰한다.

저자는 "독자들이 책 속에 인쇄된 내용을 수동적으로 받아들이는 대신 모든 종류의 개인적인 관념들을 제멋대로 책에 투영하면서 나름대로 텍스트를 전유"할 가능성을 조심스럽게 제시한다(284쪽). 그에 따르면, "독서에 대한 문화적 제약을 강조한다고 해서 독자들이 똑같은 책에서 똑같은 내용을 발견해야 한다는 뜻은 아니다. 거의 모든 문화체계는 텍스트에 독창적이고 서로 모순되는 반응을 제공할 만큼 충분히 범위가 넓다."(286~287쪽)

▲ 앙트완 보렐(Antoine Borel)이 그린 <계몽사상가 테레즈> 삽화. ⓒWikimedia Commons
이와 같은 분석을 통해서 저자는 계몽사상이 상층에서 하층으로 침투하였고, 정치적 담론이 주도적 역할을 했다는 견해에 이의를 제기한다. 그에 따르면, 점잖은 계몽 사상가들의 저작이 아니라 <방황하는 창녀>, <루이 15세의 사생활>과 같은 포르노그래피와 중상비방문들이 "앙시앵 레짐의 정통성의 기초를 갉아냈다."(293쪽)

심지어 "앙시앵 레짐의 붕괴로 잃을 것이 가장 많은 사람들", 즉 특권계급이 계몽주의 작품의 수요에서 큰 몫을 차지하고 있었는데, "그들이 실제로 읽은 문학은 '철학책'이 체제에 아무런 위협도 가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증명해" 주는 것이 아니라 전적으로 그 반대였다. 정치체제는 그것이 가장 아끼는 엘리트가 그 정통성을 더 이상 믿지 않게 될 때 가장 위험하기 때문이다. 불법 문학의 주제들은 모든 면에서 앙시앵 레짐의 정통성에 도전하는 방식으로 나타났고, 특권계급도 금서를 읽는 독자로서 모든 범주의 주제에 노출되어 있었고, 그리하여 자신이 누리는 특권의 정통성에 대한 믿음을 잃어버리게 되었다는 것이다.

따라서 1789년 8월4일 밤의 봉건제 폐지 선언은 갑작스러운 대화의 결과라기보다는 장기간에 걸쳐 믿음의 근거를 침식당한 결과였고, 앙시앵 레짐이 입은 손상의 일부를 최소한이나마 '철학책'의 탓으로 돌릴 수 있다는 것이다.

뇌샤텔출판사의 사료에 입각한 단턴의 실증적 연구는 18세기 프랑스의 금서 유통 실태를 실감나게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그의 결론은 그리 설득력 있어 보이지 않는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첫째, 저자는 불법 문학 시장에 대한 분석으로부터 자신이 제시한 결론에 도달하기 위해서 상당히 먼 길을 굽이굽이 거슬러 올라가야 했는데, 그 여정에서 처음에 제시된 불법 문학 시장에 대한 아주 또렷한 그림은 점차 윤곽이 흐릿해졌고 색도 많이 엷어졌다. 왜냐하면, 독서의 결과로 야기되었을 독자의 인식 변화, 나아가 여론의 변화를 보여줄 확실한 증거들을 제시할 수 없기 때문이다.

▲ 단턴이 제시한 '의사소통의 그물'. ⓒ알마 제공

둘째, 저자 자신이 표 7.1 '의사소통의 그물'에서 제시했듯이(282쪽), 불법 문학을 통한 정보 유통 과정에 "경제적·사회적 상황"과 같은 외부적 요인들의 영향을 배제할 수 없는데, 저자는 금서들 그것도 달랑 대표작 세 편의 텍스트 분석만으로 독자들의 의식 변화를 설명함으로써 스스로 결론의 설득력을 제한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저자가 추적한 '의사소통'의 각 단계마다 외부 요인이 미치는 영향력의 정도뿐만 아니라, 금서의 수요와 공급, 또는 문맹률의 변화에서 비롯된 독서 형태의 변화 등에 따라 각 단계가 전후 단계들에 미치는 파급효과도 고려해야 한층 더 설득력 있는 결론에 도달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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