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하나의 근대 국가가 어떻게 탈취되는지, 그리고 어떻게 방어되는지를 보여주려 한다."2010년 7월에 문을 연 '프레시안 books'가 이번 5월 30일, 191호를 끝으로 잠시 문을 닫습니다. 지난 4년간과 같은 형태의 주말 판 업데이트는 중단되나, 서평과 책 관련 기사는 <프레시안> 본지에서 부정기적으로나마 다룰 예정입니다. 아울러 시기를 약속드릴 수 없지만 언젠가 '프레시안 books'를 재개할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또한 지금까지 실린 글을 편하게 검색하고 볼 수 있는 아카이브를 여름 내로 구축하도록 하겠습니다.그동안 '프레시안 books'를 사랑해 주신 독자 여러분, 참여해 주신 필자 여러분, 지켜봐주시고 도와주신 출판계 관련자 여러분들께 감사의 인사를 전합니다. '프레시안 books'가 언젠가 다시 돌아올 수 있도록, 언론 협동조합 프레시안에 조합원으로 함께해 주세요! -프레시안 books 편집부 올림

그러나 저자는 마키아벨리의 <군주>를 생각나게 하는 책 제목과 첫 문장에도 불구하고 마키아벨리와 연결시키는 것을 혐오했다. 그는 1948년 판 서문에서 "나는 이 책을 싫어한다"고 썼다. 1931년 출판 뒤 냉소적이고 잔인한 마키아벨리스트라고 중상을 당했다는 이유였다. 인터넷에 폭탄 제조법을 올려놓는 사람처럼 쿠데타 기술을 가르쳐 줄 테니, 공격용으로든 방어용으로든 마음대로 써 먹으라는 식이었기 때문에 그런 평가를 피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그럼에도 그는 많은 이들이 "이 책의 도덕적 목적을 의심하지는 않았다"고 자신했다.
1898년 이탈리아 피렌체 인근 프라토에서 태어난 저자는 파시스트 운동에 참여했지만 무솔리니의 탄압으로 감옥에 간 뒤 2차 세계대전 때 연합군 편에서 싸운 작가이자 언론인, 저술가다. 공산주의 대의를 추종했지만 파시스트 운동 참여 경력 때문에 끊임없이 자기 해명을 해야 했던 복합적 인물인 그는 당대의 이념적 혼란상을 반영하는 상징 같기도 하다.
그는 무력을 동원해 국가를 탈취하는데 성공하면 찬사를, 그런 시도를 포기하거나 시도했어도 실패하면 비판을 쏟아냈다. 히틀러의 우유부단, 트로츠키의 오판, 나폴레옹의 합법성 집착을 매섭게 지적한 것도 그런 이유였다. 물리력의 사용을 머뭇거리는 자는 좌파든 우파든 그의 냉정한 추궁을 피할 수 없다. 그에게 그건 더 할 나위 없는 악덕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부정적 의미에서든 권력의 본질적 속성을 파헤쳤다는 긍정적 의미에서든 그가 마키아벨리적으로 접근했음을 부인하기는 어렵다. <쿠데타의 기술>은 물리력이 단순한 도구가 아니라, 결정적 상황을 만들어내는 정치 그 자체라는 것을 매우 단순하게, 그리고 매우 과장된 방식으로 보여준다.
우리는 폭력이 많은 경우 가치나 정통성 따위로는 차지할 수 없는 권력과 정치적 힘을 안겨준다는 사실을 자주 잊는다. 그러나 역사적 사건뿐 아니라 동시대 경험을 통해서도 폭력의 동원이 권력을 창출하고 유지하는데 얼마나 중요한지 확인하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다. 튀니지의 재스민 혁명으로 촉발된 중동 민주화도 좋은 예이다.

중동 민주화 과정은 각국이 처한 여건에 따라 그 양상이 매우 다르지만, 두 유형으로 단순화할 수 있다. 하나는 시민 저항으로 정권이 쉽게 무너진 튀니지 유형이고, 다른 하나는 시민 저항에도 정권이 잘 버티고 있는 시리아 유형이다. 튀니지와 시리아를 서로 다르게 만드는 것은 집권세력의 군부 통제력이다. 튀니지의 집권세력은 군부를 장악하지 못했다. 그 때문에 군부는 시위 진압을 거부하며 중립을 지켰고 정권은 무너졌다. 시리아의 집권세력은 군부를 잘 통제했다. 그 결과, 효과적으로 저항세력의 기를 꺾으며 지금도 정권을 유지하고 있다.
리비아의 카다피 정권이 튀니지 제인 엘아비디네 벤 알리 정권의 10배인 10개월간 버틸 수 있었던 힘도 군부의 동원력에 있었다. 이집트의 무바라크 정권이 무너진 것도 군부가 등을 돌렸기 때문이고, 무바라크를 이은 무르시 대통령이 실권한 것도 시민들의 저항이 아니라 군부의 쿠데타 때문이었다. 그동안 군부 실세로 군림했던 압델 파타 엘시시 전 국방장관이 드디어 이집트 대통령 선거에 나서기로 했다. 그가 군을 계속 통제한다면 대통령이 되는데 장애가 없을 것이다.
리비아·시리아 정권은 시민 탄압을 위해 군부를 동원하는 능력에서 차이가 없었다. 그러나 반대세력이 정권에 맞서 동원할 수 있는 군사력에서는 차이가 있었다. 리비아의 카다피보다 시리아의 알아사드의 폭력이 더 강력했다. 카다피와 바샤르 알아사드의 운명을 가른 것이 바로 그것이다. 그리고 유엔은 다국적군을 구성해 카다피 정권을 공격했지만, 시리아에 대해서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게 바로 카다피는 죽고, 알아사드는 살아 있는 이유이다.

동유럽 사회주의권이 무너진 것도 어떤 의미에서는 군부 때문이다. 만일 군부가 중립을 지키지 않고 시민 저항을 분쇄하기로 했다면, 사회주의 체제 전환 과정은 사뭇 달라졌을 것이다. 북한이 동유럽 사회주의 국가와 달리 무너지지 않고 있는 이유의 하나도 집권세력이 군부를 확고히 장악하고 있기 때문이다. 북한 군부는 어떤 저항 움직임도 무자비하게 분쇄하겠다는 의지가 확고하고, 그 의지가 실현될 수 있게 동원 상태를 유지하고 있다. 그게 선군정치의 핵심이다. 태국 군부가 지난 5월 20일 쿠데타를 했다. 1932년 군주정을 무너뜨린 이래 19번째나 반복된 쿠데타는 그때마다 태국에 정치적 변화를 가져다주었다. 군부는 강력한 정치적 실체이다.
사실 어떤 체제라도 군부의 역할 없이는 체제 전환도, 체제 유지도 불가능하다. 무력 동원의 적극적 역할이든, 중립의 소극적 역할이든 군부의 태도가 체제의 존립을 좌우하기 때문이다. 민주주의도 다른 의미에서 군부가 자율적 힘을 행사하지 못하도록 하는 제도라고 할 수 있다. 민주주의 체제에서 군에 대해 문민 통제를 하는 것도 군이 보유한 엄청난 폭력을 제어하기 위함이다.
저자는 나폴레옹, 트로츠키의 볼셰비키 혁명, 스탈린 대 트로츠키 대결, 1920년의 폴란드, 독일 바이마르 공화국을 무너뜨리고 제국을 부활하려던 카프 반란, 1923년 스페인의 프리모 데 리베라 장군의 친정 쿠데타, 무솔리니, 히틀러 등 8개 사례를 분석한다. 그는 의회를 공격했으면서도 그 의회를 통해 쿠데타를 합법화하는 불필요한 절차에 집착했던 나폴레옹 방식에 매우 못마땅해 하지만, 그런 방식이 이후 근대적 쿠데타의 전형이 되었다고 평가한다.
말라파르테는 무솔리니 쿠데타, 트로츠키의 볼셰비키 혁명을 성공 사례로 제시한다. 파시스트 검은 셔츠단이 1922년 전국 각지에서 봉기를 일으킨 다음 로마를 향해 진군하는 로마 진군 계획을 착착 진행시킨 결과, 무솔리니가 권력을 탈취한 것처럼 설명한다. 말라파르테 자신이 참여한 경험을 바탕으로 쓴 것이라고 하는데도 역사적 사실과는 다른 과장, 허위가 섞여 있다는 게 번역자들이 붙인 주석이다.

검은 셔츠단원들은 지휘 통제가 제대로 먹혀들지 않아 엉뚱한 행동이 속출했으며, 공공 기관을 제대로 점거하지도 못했다. 무솔리니는 봉기가 실패하면 스위스로 피신하기 위해 로마가 아닌 밀라노에 머물고 있었다. 로마에서는 정부 청사 점령도 전투나 진군도 없었다. 총리는 계엄령을 내리려 했지만, 국왕이 결재하지 않자 사임했다. 그러나 다수 의석을 확보한 정당이 없어 새 내각을 구성할 수 없게 되자 국왕은 무솔리니에게 전화를 걸어 새 정부 구성을 맡기겠다고 했고, 그 때서야 무솔리니는 기차를 타고 로마에 도착해 국왕을 만났다.
무솔리니 쿠데타는 폭력 혁명도 영웅적 투쟁의 결과도 아니었다. 그보다는 봉기를 일으킨 이들이나 이들의 공격 대상인 사람들이나, 전체적인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모르고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모른 채 혼란 속에서 진행된 한 편의 희극에 가까웠다. 쿠데타는 혼란과 파시스트들의 협박, 그리고 자유주의에 대한 전반적 불신과 불만, 정치적 분열의 결과였다는 것이 더 정확하다. 한마디로 이탈리아 자유주의는 스스로 무너진 것이다. 단지 쿠데타라는 마지막 절차가 필요했을 뿐이었다.
한편 말라파르테는 볼셰비키 혁명을 트로츠키의 전술이 낳은 결과라고 극찬하면서 레닌의 역할은 깎아내렸다. 레닌의 혁명 전략은 1917년 러시아라는 특수 상황에서만 적용될 수 있는 것인 반면, 소수 무장대를 동원한 국가기관 타격이라는 트로츠키 전술은 모든 나라에 적용할 수 있는 독립적 국가 장악 방법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레닌은 혁명이 모의나 일개 당에 의해서가 아니라 발전된 사회 계급의 지지, 전 인민의 혁명적 추진력, 혁명 운동의 고조 국면에 의해 달성된다고 생각했다면서, 이는 현실 감각, 정확성, 균형을 결여한 것이라고 저자는 비판했다. 반면 트로츠키는 전 인민이 봉기하려면 너무 많은 시간이 소요된다면서, 냉철하고 잘 훈련된 소부대면 충분하다고 레닌을 설득한 것으로 되어 있다.
"레닌 동지의 전략은 너무 많은 유리한 상황을 필요로 합니다. 봉기는 (사전 조건으로) 아무 것도 필요하지 않소. 봉기는 그 자체로 충분한 것이니까."

말라파르테는 트로츠키가 노동자·병사·수병 1000명으로 구성된 습격대로 철도, 우편, 통신, 석탄 석유, 발전소, 가스탱크 등 공공 서비스를 장악함으로써 혁명을 성공시켰다고 썼다. 이게 바로 쿠데타의 기술의 핵심이라고 그는 상찬한다. 대신 레닌은 트로츠키가 동원한 1000명의 활약을 지켜보는 것 말고 거의 아무 것도 한 일이 없는 것처럼 묘사하고 있다. 그리고 어떤 근거에서 그랬는지, 레닌을 소심하고 우물쭈물하며 자신감을 잃은 초라한 인물로 취급했다. 가령, 트로츠키의 습격대의 활약으로 혁명이 성공했는데도 겁쟁이처럼 변장하고 있는 레닌을 놀리는 듯한 대목도 나온다.
"그(레닌)의 가발이 이마에서 흘러내리고 있었다. 트로츠키는 그러한 우스꽝스러운 변장을 보면서 웃지 않을 수 없었다. 왜 아직도 변장을 하고 있습니까, 승리자는 모습을 숨기지 않습니다."
저자는 봉기 전술이 개별 국가의 일반적 상황은 물론이고 봉기에 유리한 특정한 혁명적 여건의 존재 여부와도 독립적이라고 주장한다. 말라파르테는 그런 논리로, 트로츠키가 1927년 스탈린과의 대결에서는 1000명의 무력 동원으로 체제 전복에 실패하자, 대중 시위로 맞서면서 권력 장악에 실패했다고 비판했다.
"근대에서 쿠데타의 문제는 기술적인 문제이다. 반란이란 하나의 엔진이라고 트로츠키는 말한다. 반란을 시동하려면 기술자가 필요하고 그 기술자만이 엔진을 멈출 수 있다. 이 엔진을 움직이는 것은 한 국가의 정치, 사회, 경제 상태와 무관하다. 반란은 대중에 의해 행해지는 것이 아니라 모든 준비를 갖춘, 반란 전술에 따라 훈련받은 소수, 국가의 핵심 기술 서비스를 신속하고 격렬하게 타격할 수 있도록 훈련된 소수에 의해 행해진다."
트로츠키는 이런 자기의 전술을 버렸기 때문에 패배했다는 것이다. "잘 단련되고 훈련된 천 명의 인원이 있다면 영국이든 프랑스든 또는 스위스든 스페인이든 독일이든, 즉 유럽 어떤 국가라도 장악할 수 있다." 저자는 1923년 코민테른 지도자 칼 라덱이 제안했다는 이 내용을 강조하며 트로츠키가 스탈린에 맞설 때는 정작 이를 써먹지 않았다고 신랄하게 추궁했다.
저자는 히틀러가 쿠데타에 실패한 뒤 무력을 통한 정부 전복 대신, 재건한 나치당을 통해 합법적 절차로 권력을 장악하는 쪽으로 바꾼 것에 대해서도 격렬하게 비판한다.
"국가를 전복할 수 있는 수많은 기회를 잃었다."
"혁명 군대를 지도하는 독재자가 쿠데타를 감행할 책임에서 움츠러든다는 것은 불행한 일이다."
"술수와 타협의 도움으로 합법적 수단에 의해 권력을 장악할 수는 있지만 타협에서 나온 독재는 준독재일 뿐이다."

무력 그 자체가 정치적 힘의 자원일 뿐 아니라, 상당한 정치적 결과를 낳는다는 점에는 이견이 없다. 그는 "국가의 정복과 방어의 문제는 정치적인 문제가 아니라는 것과, 그것은 기술적 문제라는 것, 쿠데타에 유리한 환경은 정치적 사회적 질서에 관한 것일 필요가 없으며 국가의 일반적 상황에 의존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어떤 조건에서도 무력이 정치적 힘으로 전화하는 것은 아니다. 아무 때나 무력을 동원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동원한다고 항상 정치적 승리를 가져다주는 것도 아니다. 게다가 테러리즘을 정당화하는 논리로 오용될 수도 있다. 그의 주장은 과감한 만큼 위험하기도 하다.
그가 제시한 8개의 쿠데타 사례 가운데 나폴레옹 쿠데타를 제외하면 모두 1차 세계대전과 2차 세계대전 사이의 시기, 즉 전간기에 발생한 것이다. 전간기의 특징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공산주의 혁명의 물결, 민족주의, 자유주의, 국가사회주의, 무정부주의 등 지구상의 모든 이념이 속출해 대결하던 시대였다. 마크 마조워는 <암흑의 대륙>(김준형 옮김, 후마니타스 펴냄)에서 그 시기를 이렇게 특징지었다.
"독일의 카이저가 망명길에 오르고, 차르와 그 가족이 피살되는 구질서의 붕괴 상황에서 정치지도자들이 대중을 자기편으로 만들고자 더 공정한 사회와 독립국가 건설의 전례 없는 공약을 마구 쏟아냈다. 자유주의자 우드로 윌슨은 '민주주의를 수호할 수 있는 안전한' 세계를 제안했으며, 레닌은 착취의 도구였던 과거의 계급 구조를 타파하고 빈곤에서 해방된 공산주의 사회를 약속했다. 아돌프 히틀러는 모든 잡종을 제거하고 순수 혈통의 종족들이 하나의 숭고한 목적을 갖는 제국을 건설하자고 주장했다. 이 경쟁적인 세 개의 이데올로기, 즉 자유민주주의·공산주의·파시즘은 각각 자신만이 인류를 위한 새로운 질서 속에서 사회와 유럽, 나아가 세계를 새롭게 탄생시킬 수 있다고 생각했다."

쿠데타는 바로 이런 정치적 조건, 즉 국가와 지배세력, 시민사회의 분열 속에서 발생했다. 이런 배경은 저자가 제시한 쿠데타 사례에서도 얼마든지 발견할 수 있다. 무솔리니 집권은 저자의 주장대로 로마 진군의 결과가 아니라, 자유주의 정권의 지지 상실과 분열로 스스로 정권을 내준 것의 결과라고 보아야 한다.
체제 전환 연구의 축적은, 봉기의 기술만 익히면 언제든 국가를 탈취하거나 방어할 수 있다는 말라파르테의 주장이 순진한 발상임을 폭로한다. 체제 전환에 관한 좋은 설명으로는 '정치적 기회 구조 이론'이 있다. 정치적 기회 구조 이론은 혁명과 변화가 특정 국가의 맥락에 따른 특수한 정치적 제약과 기회의 광범위한 조합에 의해 형성된다고 설명한다.
정치적 기회 구조는 정치 체제의 개방성과 폐쇄성, 지배 엘리트 구성의 안정성과 불안정성, 지배 엘리트 내 동맹세력의 존재 여부, 국가의 억압 능력과 의지 등 네 개의 차원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 네 개의 차원은 다시 두 개의 차원, 지배 엘리트가 분열되어 있는 정도, 국가의 억압 정도로 압축할 수 있다. 말하자면 이 두 차원이 혁명의 기회를 열어주는 것이다.
동유럽 사회주의 국가들의 지배세력은 분열되어 있었고, 국가는 저항을 억압할 의지가 없었다. 따라서 시민적 저항이 대규모도 아니고 강력하지 않았는데도 국가가 붕괴되었다. 이 사실은 정치적 기회의 창이 열려 있지 않은데 봉기의 기술만 믿고 달려들었다간 고층 빌딩의 유리벽을 향해 돌진하는 가련한 새의 운명이 될 수 있음을 경고하고 있다. 물리적 폭력은 결정적이다. 그러나 언제나 그런 것은 아니다. 따라서 쿠데타를 하고 싶으면 조건을 잘 살펴야 한다.
<쿠데타의 기술>을 읽노라면 자기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한 과장과 왜곡, 논리 비약을 자주 발견할 수 있다. 자기 책이 당대에 얼마나 호평을 받았는지 서문에 지루할 정도로 늘어놓은 자화자찬을 읽는 것도 인내를 요한다. 그러나 다음과 같은 구절은 마음에 든다.
"<플루타르크 영웅전>의 영웅들 가운데 단 한 사람도 신사가 없다."
전체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