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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실이 불편하다는 아이들, 그 이유는?

[민들레] 교실을 지배하는 법(法)

교실이 불편하다고 호소하는 아이들

중학교 2학년 교실. 사춘기 아이들이 교사를 만나 공부하는 곳이자 친구들과 관계를 맺으며 성장하는 특별한 공간이다. 아이들은 아침 8시 30분부터 오후 4시까지 하루 중 많은 시간을 이곳에서 생활한다. 언젠가부터 아이들의 불만이 늘었다. 교실이 '불편하다'는 것이다. 아이들 스스로 교실의 불편함을 말하는 것은 전에 없던 일이다. 선배들도 교실 공간의 불편함을 느꼈지만 아마도 그들은 '성장을 위한 훈련의 공간'쯤으로 받아들였을 것이다. 사각형의 교실에서 딱딱한 의자에 앉아 스마트폰을 들여다보는 아이의 모습은 요즘 교실을 상징적으로 드러내는 풍경이다. 그런데 교실이 불편하다고 호소하는 아이들의 이야기는 단지 공간 문제에 국한된 것일까?

교육받은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의 차이 중 하나는 '자유의지'를 인식하고 실천하느냐의 여부다. 자유의지 아래 한 인간은 스스로 선택하고 판단하며, 그에 따라 행동하고 행위의 결과에 마땅한 책임을 진다. 교육의 궁극적 목적인 '전인적 발달'은 자유의지를 갖춘 상태를 전제 조건으로 한다. 그런데 아이들은 교실에 들어서는 순간 법과 규칙, 약속의 지배를 받는다. 교실은 본인의 의지와 상관없이 꼭 해야 할 것이 있고, 하지 말아야 할 것이 있는 폐쇄적인 공간이다. 이런 까닭에 아이들이 느끼는 교실 속 압박감은 공간이 주는 불편함 이상이다. 그것은 본인의 자유의지와 무관하게 자신을 지배하는 각종 규칙 앞에서 속절없이 무력해지는 자신의 모습에 대한 좌절감에서 나온다. 중학교 2학년 상우의 모습을 통해 교실 일상에서 어떻게 아이들이 규칙과 권위 앞에서 자유의지를 상실해가는지 살펴보자.

▲ 위 사진은 기사 내용과 무관합니다. ⓒ연합뉴스

상우의 아침을 지배하는 교복

"상우야 일어나! 밥 먹고 학교 가야지!"

매일 아침마다 듣는 엄마의 목소리다. 기말시험이라 밤늦게까지 공부를 했더니 아침에 일어나는 일이 쉽지 않다. 겨우 밥을 한 술 뜨고 대충 씻은 다음, 교복을 입는다. 마음 같아서는 집에서 입던 옷 그대로 학교에 갔으면 좋겠다. 날이 부쩍 더워졌는데 교복 윗도리 단추를 다 잠그고 긴 바지를 챙겨 입는 건 여간 고역이 아니다. 그렇다고 사복을 입고 학교에 가면 교문에서부터 태클을 당할 게 뻔하다. 생활부장 샘의 잔소리와 함께 벌점을 받아야 할 것이고, 담임은 물론 모든 교과 시간마다 샘들한테 왜 교복을 안 입었냐고 추궁 당할 거다. 사실 내가 교복을 입는다고 우리 학교에 대한 전통이나 자부심을 더 느끼는 건 아니다. 불편하지만 학교 규칙이고, 이걸 어기면 결국 나만 힘들어지니까 그냥 입는 거다. 그렇게 교복이 좋으면 선생님들도 입어야 할 것 아닌가? 난 교복을 왜 입는지 정말 모르겠다.

- 대도시 중학교 2학년 남학생(이하 같은 학생)
상우의 아침을 지배하는 것은 교복이다. 초등학교 때는 입지 않았던 교복을 중학교부터 입으라고 하더니, 이게 그냥 입으면 되는 것이 아니라 '교복 착용 규정'을 지켜야 한다는 것이다. 바지의 통을 폼나게 줄여 입거나, 혹은 칠 부 정도로 단을 잘라 입는 것은 규정에 어긋난다. 마찬가지로 여학생들이 치마를 짧게 고쳐 입는 것도 규정 위반이다. 교복 안에 원색 티셔츠를 입어도 안 되고, 속옷이 교복 밖으로 나와도 안 된다. 한때 교복 자율화의 시기도 있었다. 내가 처음 교단에 섰을 때는 모든 학교에서 교복을 입지 않았다. 그러다가 몇 년 뒤 슬그머니 교복이 부활했다. '의류산업 활성화' 차원에서 교복을 부활시켰다는 말이 떠돌기도 했고, 교복이 빈부 차를 드러나지 않게 한다는 그럴듯한 말도 있었다. 교복은 학교에서 입는 '제복(uniform)'이다. 제복을 입는 대표적 집단을 살펴보자. 군인, 경찰, 비행기나 여객선의 승무원, 경기에 임하는 운동선수 등 그가 하는 일에 비추어 타인과 구분이 필요한 경우이다. 학생이 '하는 일에 비춰' 반드시 교복을 입어야 한다는 규정은 설득력이 떨어진다. 다시 상우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교복을 제대로 갖추어 입었다고 해서 내가 맘 편하게 학교에 가는 건 아니다. 우선 여덟 시 반이 되기 전에 반드시 교문 안으로 들어가야 한다. 두발 자율화가 됐다고는 하지만 그래도 머리가 너무 길면 지적을 받고, 염색을 하거나 레게머리 스타일로 땋는 건 규정 위반이다. 귀고리나 피어싱 같은 건 꿈도 못 꾼다. 사실 요즘 난 문신을 하고 싶다. 연예인들이 문신한 걸 보면 왠지 멋져 보이고, 자유의 힘이 느껴진다. 아차, 잡생각을 하다가 여덟시 반을 넘겨 교실에 도착했다. 담임은 교탁 뒤에 근엄하게 서서 지각한 학생들을 파악하고 있었다. 난 오늘 지각을 한 것이다. 처음으로 적발되면 가벼운 주의만 받지만, 또 한 번 그러면 난 벌점을 받고 그 사실이 문자를 통해 집으로 날아갈 것이다. 실시간 문자를 받은 엄마는 어쩌다 지각을 했냐고 나를 또 들들 볶겠지.

서울을 비롯한 몇몇 시도의 경우 '학생인권조례'가 제정돼 있다. 이 조례에 의하면 학생들의 두발이나 복장을 자유롭게 하도록 권장하고 있다. 그럼에도 단위학교에서는 학교 차원의 '용의복장 규정'을 따로 두고 있다. 당연히 학생들은 조례가 아닌 이 규정에 따라 단속이 되기도 하고, 벌을 받기도 한다. 오늘 상우는 지각을 함으로써 '학생근태 규정'을 어겼다. 이제 상우는 '상벌점 운영규정'에 따라 벌점을 받게 될 것이다. 지각하는 버릇이 개선되지 않아 몇 번 더 적발이 되면 '학생선도규정'에 따라 처벌을 받을지도 모른다. 아울러 담임교사에게 지각의 사유를 솔직하게 말한 후, '질병지각' 혹은 '무단지각' 등 지각 사유와 함께 출석부에 적혀야 한다. 이것은 '교칙'이고, 교칙은 누구에게나 차별 없이 적용돼야 하기 때문이다. 아예 학교에 등교하지 않으면 결석으로 처리하는데, 결석에도 여러 종류가 있다. 아무 말 없이 학교에 오지 않으면 '무단결석', 진단서나 약봉지를 첨부하면 '질병결석', 가정의 특별한 사유 때문이면 '인정결석' 등으로 기록된다. 지각, 결석, 조퇴 등의 관리와 운영은 '학생근태 규정'으로 정한다.


교실에서 해야 할 것, 하지 말아야 할 것

상우는 교실에 앉아 1교시 수업을 준비한다. 눈을 들어 교실 앞의 벽면을 보니 가운데에는 태극기가 걸려 있고 왼쪽에는 교훈이, 오른쪽에는 급훈이 걸려 있다. 급훈에는 '최선을 다하자'라고 간결하게 적혀 있다. 말하자면, 이 학급의 다짐은 모든 면에 최선을 다하는 것이다. 그 아래 칠판이 보이고 칠판의 왼쪽에는 주간 시간표가, 오른쪽에는 '학급규칙'이 붙어 있다. 시간표에 따르면, 아이들은 매일 9시에 1교시 수업을 시작하고 45분 수업에 10분 휴식을 하게 돼 있다. 요샌 이동수업이 많아 휴식 시간 동안 화장실 다녀오기가 빠듯할 때도 있다. 6교시까지 있는 날은 3시에 수업이 끝나고, 일주일에 이틀은 7교시까지 하는데 그땐 3시 55분에 수업이 끝난다. 7교시까지 있는 날은 정말 바쁘다. 특히 청소 당번인 날은 더 그렇다. 늑장 부리다가는 학원 수업시간에 맞출 수 없기 때문이다. 교실 벽에 붙어 있는 '학급규칙'에는 아이들이 지켜야 할 사항 열 가지 정도가 빼곡하게 적혀있다. 등교는 8시 30분까지 해야 하고, 담당자는 매시간 칠판을 깨끗이 닦아야 하며, 급식시간에는 질서 정연하게 줄을 서고, 이동수업을 갈 때는 선풍기를 꼭 끄고 교실 출입문을 잠가야 하며, 학교에서는 핸드폰을 쓸 수 없고, 절대로 친구 사이에 싸우지 말라고 한다. 만약 이 중 어느 하나라도 제대로 이행하지 못한 학생은 종종 앞으로 불려 나와 담임교사에게 지적을 받고, 학급규칙을 큰 소리로 읽어야 할지도 모른다. 요즘 상우는 축구에 빠져있다. 그래서 수업시간에 자주 늦게 들어온다. 지난번엔 쉬는 시간에 축구를 하다가 수업에 늦었다는 이유로 한 시간 동안 복도에 서 있었던 적도 있다.

전국의 거의 모든 학교에서 오전 9시에 1교시를 시작한다. 뚜렷한 이유는 없다. 오래도록 그리 해왔기 때문이다. 학교의 수업시간 운영은 학교장의 책임 아래 정하도록 돼 있다. 아침 8시에 시작하든, 10시에 시작하든 구성원의 의사를 물어 학교장이 결단을 내리면 된다. 또 1·2교시를 묶어 연속 진행하고, 3·4교시도 그런 방법으로 한다면 그 사이 쉬는 시간을 30분까지 늘릴 수도 있다. 이른바 '블록타임제'다. 이 시간에 상우는 지금보다 더 자유롭게 축구를 즐길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아마도 거의 모든 교장들은 이런 결단을 내리지 못한다. 그들 상식으로 학교에서 30분은 꽤 긴 시간이며, 이 시간 동안 아이들의 자유의지에 따라 활동하게 했을 때 사고라도 나면 그 책임이 두렵기 때문이다. 학교의 오랜 관행은 참으로 넘어서기 힘든 벽이다.

납득할 수 없는 '규정의 횡포'

규칙이나 약속이 어떻게 교실을 지배하는지 상우의 말을 더 들어보자.
난 오늘 또 선생님한테 혼났다. 누군가 대걸레를 교실 출입문에 가로 걸쳐 놓아서 선생님이 들어오시다가 걸려 넘어질 뻔한 것이다. 선생님은 화를 내며 "이거 어떤 놈이 그랬어? 당장 치워!" 하고 소리를 질렀다. 다들 고개 숙이고 딴청을 피우자, 선생님은 더 목소리를 높여서 "대걸레 담당 누구야? 이리 나와!" 이러시는 거다. 우리 반 '1인1역'에 의하면, 대걸레를 관리하는 일은 내 역할이었기 때문에 내가 나가서 그놈을 들어다가 교실 뒷벽에 걸었다. 선생님은 계속해서 내 뒤통수에 대고 "담당자가 항상 신경을 쓰고 잘 관리해야지. 자기 책임은 똑바로 완수하란 말이야. 알았지?"라고 다짐을 줬다. 난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예…"라고 말했지만, 너무 억울했다. 대걸레를 출입문에 걸쳐 놓은 놈이 잘못한 건데, 왜 내가 야단을 맞아야 하나? 나는 오늘 학교 끝날 때까지 기분이 더럽고 우울했다. 도대체 1인1역 같은 건 누가 만든 거야?

▲ <교육사유>(함영기 지음, 바로세움 펴냄). ⓒ바로세움
책 <교육사유>(바로세움 펴냄)의 한 꼭지에서도 말한 바 있는 교실의 1인1역은 교무실을 지배하는 교사의 '업무분장'과 닮은 꼴이다. 교사의 업무분장이나 교실의 1인1역은 일감을 세분화해 담당자를 두면, 그 일이 제대로 이행되지 않았을 때 책임져야 사람을 정확히 가려낼 수 있다는 가정에 근거하고 있다. 일감의 세분화와 분업화는 업무 효율성을 최우선으로 하자는 동기에서 생겨났다. 여기에 위에서 아래로 책임을 묻는 관료주의가 더해진다. 교사는 자신이 관료주의와 성과주의의 큰 피해자라는 사실을 잠시 잊은 채 부지불식 간에 같은 방법으로 아이들에게 책임을 부과한다.


도덕 시간에는 절대로 자리를 바꾸면 안 된다. 친한 친구랑 앉고 싶어 자리를 바꿨다가 샘한테 적발되면, 여지없이 수행평가 태도 점수에서 감점을 당한다. 그뿐이 아니다. 교과서를 안 가져와도 감점, 수업시간에 짝꿍과 얘기만 해도 감점이다. 한 번은 너무 잠이 와서 나도 모르게 졸았는데, 수업 중에 잠을 잤다고 또 감점을 당했다. 아마 이번에 내 도덕 수행평가는 빵점일 거다. 근데 내가 생각하기에 난 항상 착하게 살고 있고, 나보다 어려운 친구가 있으면 먼저 나서서 도우려고 하고, 봉사활동도 열심히 한다. 그런 건 도덕 수행평가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나 보다.

상우가 착하게 사는 것은 도덕적 실천이기는 하나, 이것을 확인하고 계량화할 방법이 없다. 마찬가지로 어려운 친구를 돕는 경우도 도덕 수행평가 기준에 들어있지 않기 때문에 제외된다. 도덕 교과의 수행평가에서 높은 성적을 얻고 싶다면 학기 초에 공지한 '교과별 수행평가 기준'을 잘 숙지해야 한다. 수행평가는 각 교사들이 '교과협의회'를 거쳐 학생들이 수행한 학습활동 중 가시적으로 드러나는 것, 계량화가 가능한 것으로 정한다. 그렇지 않으면 당장 공정성 시비가 날 수 있으니 확인하기 힘든 것을 평가 항목을 넣는 것은 모험이다. 책을 몇 번 가져오지 않았는지, 수업 시간에 자리를 몇 번 바꾸어 앉았는지가 도덕적 실천으로 치환된다. 상우 입장에서는 이것 역시 납득하기 힘든 '규정의 횡포'다. 한 학기에 두 번 보는 시험도 마찬가지다. 학교에서는 매 시험을 앞두고 부정행위 유형을 공지한다. 공지는 부정행위가 이뤄졌을 때 처벌의 근거로 작용한다. 만약 누군가 성적을 올릴 욕심에 부정행위를 저질렀다면 학교는 '학업성적 관리규정'을 적용해 부정행위자의 성적을 0점 처리하고, 학생선도위원회의 결과에 따라 '교내봉사·사회봉사·출석정지' 등의 처벌을 부과한다.

민주적 교실 생태계를 상상하며

교실에서 아이들의 일상을 지배하는 수많은 규칙들은 친구와 함께하는 삶을 촉진하기보다 요령 있게 살아남는 방법을 가르친다. 이런 곳에서 협력과 상생의 문화를 기대한다는 것은 욕심이다. 공간의 불편함과 아이들을 압박하는 수많이 규칙 속에 경쟁만이 남아 있는 이곳에서 아이들은 자유의지를 상실할 수밖에 없고, 상상력은 고갈돼 공부하는 기계로 전락해간다. 하루 종일 불편한 공간을 견디고, 깨알 같은 규칙 속에서 점수 경쟁을 하는 아이들이 과연 '주인된 삶'을 살 수 있을까?

성인 세계도 마찬가지다. 민주화가 진전되었다고 하나 선거에 참여하여 투표권을 행사하는 것 이상의 어떤 실천적 경험을 공유하고 있는가? 자유의지를 바탕으로 형성되는 민주적 시민성은 절차 민주주의에 참여하는 것 이상이다. 민주적 시민성은 규칙과 절차를 지키는 것을 넘어 '자유의지를 가진 인간의 삶 속에 용해된 일종의 양식'이기 때문이다. 주인된 삶은 심신의 발달이 조화로운 가운데 건강한 사회참여를 바탕으로 하는 전인적 발달 과정이다. 이미 100년 전에 듀이는 제도와 절차도 중요하지만 개개의 삶 속에 뿌리박혀 있는 민주적 양식을 강조했다. 불이익을 보지 않으려는 소극적 마음이 '절차적 민주주의'라면, 자유의지를 바탕으로 정의로운 행복을 추구하고자 하는 마음이 민주적 시민성이다.

깨알 같은 규칙과 절차만 작동하는 공간이 아니라 아이들의 자유로운 숨결과 대화가 만나서 이루어지는 교실을 상상하는 일은 민주적 시민성을 향한 시작이다. 아이들의 실천이 낱낱의 개별적 경험으로 남아 있는 것이 아니라 연속적 재구성의 과정을 통해 성장하는 것, 그것에 대한 믿음이 민주적 교실 생태계를 약속한다.

(그런데 상우는 교실에서 자신이 수많은 규정으로 통제당하고 있다는 사실만 불편할 뿐, 선생님의 사정은 어떠한지 모르고 있다. 상우의 선생님은 '국가공무원법·교육공무원법·초중등교육법' 등의 '교육관계법'에 따라 '교장의 명'에 의해 학생들의 교육을 담당한다. 아울러 '공무원복무규정'에 따라 정치적 견해를 밝힐 수 없고, 직무상 비밀을 엄수해야 하며, 성실과 복종으로 품위를 유지해야 그나마 그 직을 유지할 수 있다.)

* 언론 협동조합 프레시안은 격월간 교육전문지 <민들레>와 함께 대안적인 삶과 교육에 관한 이야기를 하고자 합니다. <민들레>는 1999년 창간 이래, '스스로 서서 서로를 살리는 교육'을 구현하고자 출판 및 교육 연구 활동을 꾸준히 진행하고 있습니다. 특히 '교육은 곧 학교 교육'이라는 통념을 깨고, 어른과 아이가 함께 성장하는 '다양한 배움'의 길을 열고자 애쓰고 있습니다.(☞ <민들레> 바로 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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