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년 전 대기업 본부장까지 지내고 정년퇴직한 엄홍섭(59) 씨. 퇴직 이후에도 여전히 생활비는 필요했다. 이래저래 궁리하다 퇴직금을 종잣돈으로 강남에 10평 규모 카페 ‘라떼킹’을 개업했다. 은행대출도 받았다. 평생 직장생활만 해온 그였기에 선택 폭은 좁았다. 권리금 1억6000만 원, 임대보증금 4800만 원, 시설 및 인테리어 비용으로 6000만 원 가량 들었다.
열심히 일했다. 한 번도 임대료를 밀리지 않았다. 그렇게 일한 지 2년이 됐을까. 엄 씨가 세 들어 있던 강남 빌딩의 건물주가 재건축을 통보했다. 갑작스러운 일이었다. 계약할 당시 재건축은 없다고 했었다. "5년이고 10년이고 계속 장사를 하시라"고 했다.
법원에 명도소송을 제기했으나 소용없었다. 법원은 9월 25일까지 카페에서 나가라는 계고장을 발부했다. 빈털터리로 나가라는 판결을 내린 것.
그렇다고 나갈 수도 없는 노릇이다. 퇴직금에다 은행대출까지 해서 2억6000만여 원이나 이 가게에 쏟아 부었기 때문이다. 이대로 나가면 생계가 막막해졌다. 나가서 죽으나 안에서 죽으나 마찬가지라고 생각했다. 25일 이후 집행관이 언제 올까 걱정하면서도 영업을 이어나가고 있다.

가수 리쌍도 쫓겨나
건물주는 현재 지상 3층 건물을 헐고 지하 3층 지상 14층으로 건물을 재건축할 예정이다. 알려진 바로는 이 건물에는 10명의 임차인이 있었으며 이들 상가 10개의 권리금은 40억 원 이상에 이른다.
10개 점포 중 6개 점포가 장사를 시작한 지 2년이 채 안 됐고, 3개가 3년 정도 영업을 했다. 그 중 한 곳은 계약한 지 3개월도 안 됐는데, 재건축을 이유로 나가달라는 통보를 받았다. 건물주의 압박에 견디다 못해 세입자 10명 중 7명은 이미 이 건물을 떠났다. 권리금은 고사하고 인테리어 비용 10원도 받지 못하고 무일푼으로 길거리로 나앉은 것.
이 중에는 가수 리쌍도 포함됐다. 세입자였던 리쌍은 올해 6월 재건축을 이유로 쫓겨났다. 곱창가게를 운영한 지 2년 10개월 만이었다. 권리금은 약 5억 원이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구멍 뚫린 상가세입자 보호법 개정안
전국상가세입자협회, 맘편히장사하고픈상인모임, 경제민주화실현전국네트워크, 참여연대 민생희망본부 등은 17일 서울 강남구 서울빌딩 '라떼킹' 카페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지난 24일 발표한 상가건물임대차보호법 개정안의 문제점을 극명하게 노출한 게 강남역 라떼킹 사태"라며 "개정안이 그대로 통과되면 재건축으로 인한 피해자는 계속해서 양산될 수밖에 없는 게 개정안의 한계"라고 지적했다.

하지만 재개발‧재건축 상가의 권리금은 보호 대상에서 빠져 있어 현재 재개발‧재건축을 앞두고 있거나 현재 진행되는 지역의 세입자에게는 개정안이 '그림의 떡'이라는 비판을 받았다.
문제는 상가 세입자 피해사례의 절반 이상이 재건축으로 인해 발생한다는 점이다. 맘편히장사하고픈상인모임이 지난 9월 발간한 피해사례집을 보면 임대차 분쟁으로 인한 피해사례 중 60%가 재건축으로 발생한 것으로 나타났다.
맘상모 등은 "이번 '라떼킹' 피해 사례를 보더라도 재건축 부분에 대한 보완이 절실하게 필요하다"며 "재건축에 대한 보완책이 없는 법 개정은 60%의 구멍이 뚫린 그물에 비유될 수 있다"고 개정안을 비판했다.
라떼킹 주인 엄홍섭 씨는 "일한 죄밖에 없는 내가 하루아침에 길거리로 쫓겨나게 생겼다"며 "이것은 나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 사회의 문제라고 생각한다. 법과 제도 모순을 개선하기 위해 싸우겠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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