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들은 이야기를 좋아해
아이들과 함께 말놀이를 하고 책을 읽어주다 보면 놀라운 경험을 자주 합니다. '아이들은 나이와 상관없이 이야기를 참 좋아하는구나, 그것도 누군가 읽어 주는 걸 듣는 것을 정말 좋아하는구나' 하고 깨닫게 되지요.
아이는 태어나기 전 엄마 뱃속에서부터 소리를 듣고 자랍니다. 그래서 소리를 듣는 것에 익숙합니다. 당연히 문자언어보다는 자연스러운 입말로 이루어진 구술언어를 좋아하지요. 아이들이 말놀이, 시나 이야기 듣기 등으로 다양한 구술언어를 자주 체험할수록 언어에 대한 이해력과 감수성이 풍부해진다고 합니다. 말놀이할 때 아이는 꼭 자기가 만든 말로 놀고 싶어 해요. 이때 아이가 하는 말은 어른들이 보기에는 아무 뜻이 없는 그야말로 말도 안 되는 소리처럼 들리지만, 아이는 그 말에서 나오는 소리와 리듬을 감각하면서 즐깁니다.
구술언어의 체험이 부족할수록 누가 이야기해 주거나 책을 읽어 줄 때 잘 집중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네 살 아이들에게 그림책을 읽어 주는데 유난히 집중을 못하는 아이가 있었어요. 이 아이에게는 책을 잠시 미뤄 두고 짧은 말이 되풀이되는 별 헤기 노래를 불러 주었지요. 아이는 무척 즐거워하며 잘 따라 했어요. 그 후 아이는 나를 만날 때마다 "별 하나 해 줘" 하고는 하루에도 몇 번씩 "별 하나 꽁꽁 / 별 둘 꽁꽁 / 별 셋 꽁꽁" 노래를 불렀습니다. 어느 날 아이는 평소 갖고 놀던 로봇 장난감 이름을 노랫말에 넣어 "별 하나 로봇 / 별 둘 제트제트 / 별 셋 와이와이" 하고 큰소리로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어요. 그러더니 언제부터인가 동무들이 모여서 이야기를 듣고 있는 곳으로 다가왔지요. 이야기를 듣기 시작하면서 그림책에도 관심을 보이고 집중하기 시작했습니다.

교훈보다 즐거움 찾게 해야
말놀이와 이야기 듣기를 풍부하게 체험하는 것은 자발적인 책 읽기로 이어집니다. 아이들은 누군가 좋은 책을 골라 읽어 주면 훨씬 쉽게 이해하고 재미를 느낍니다. 세상에서 가장 편한 자세로 이야기를 들으면서 책 속의 세계로 떠나지요. 주인공을 따라 환상적인 모험을 하기도 하고, 등장인물의 말에 울기도 웃기도 하고, 그들의 행동을 보며 어리석음을 비웃어 주기도 하고 자랑스럽게 여기기도 합니다.
책 읽기를 마치고 자연스레 이야기를 나눠보면 아이들은 저마다의 방식으로 읽고 난 느낌을 표현합니다. 아이들의 표현은 참 다양하고 풍부해서 같은 이야기를 들어도 각자 색다른 즐거움을 찾아내지요. 아이들이 하는 말을 듣다 보면 끊임없이 자기를 표현하고 싶어 하는 그들만의 세계가 더욱 생생하게 드러납니다.
초등학교 5학년 아들을 둔 한 엄마의 말이 떠오릅니다. 아들이 책을 읽고 나면 "이얍! 슉!" 하면서 칼싸움 흉내를 내고 좋아하는데, 책에서 교훈은 얻지 못하고 그런 이상한 짓만 해서 불안하다는 것입니다. 이 아이는 재미나게 책을 읽고 즐거움을 몸과 말로 표현할 줄 아는 아주 건강한 아이입니다. 그런데 엄마의 불안감이 책을 읽고 나서 주제나 교훈 찾기를 강요하는 것으로 이어지게 되면 아이의 책 읽기가 앞으로 어떻게 될지 걱정스럽습니다.

어른이 보기에 전혀 엉뚱한 반응이라 해도 아이의 반응을 격려하고 존중해 주세요. 일방적인 질문으로 아이를 곤란하게 하지 않고 아이가 하는 어떤 표현도 억누르지 않는다면 아이들은 책의 즐거움을 더욱 크게 느끼고, 이는 자발적인 책 읽기로 발전합니다. 또한 자기표현을 충분히 하는 과정을 통해 아이들은 말과 글이 전혀 다른 것이 아님을 깨닫고 글자를 자연스레 받아들입니다. 나아가 자기가 한 말이 글이 되는 경험을 반복하면 글쓰기에도 자신감을 갖게 되겠지요.
아이들이 좋은 문학작품에서 얻는 것은 한둘이 아닙니다. 좋은 문학작품은 세상에 대해 넓고 깊은 눈을 갖게 도와줍니다. 또 눈에 보이지 않는 진실한 세계를 발견하게 하고 올바른 삶의 태도를 갖게 하지요. 그뿐만 아니라 자신이 세상에 큰 기여를 할 수 있다는 긍정의 자아상을 확립하는 데 도움을 줍니다. 이 모든 것은 좋은 작품을 아이 스스로 즐겼을 때 가능합니다. 아이가 책 읽기는 즐거운 것임을 알아갈 때 누가 시키지 않아도 스스로 책을 읽게 됩니다. 자발적인 책 읽기가 준비되지 않은 아이에게 책은 재미없고 이해하기 어려운 과제일 뿐입니다.
책 속 이야기를 느낄 수 있게 기다려 주자
아이들의 자발적인 책 읽기를 방해하는 것은 무엇일까요? 요즘 많은 아이들은 너무 이른 시기에 학습을 통해 글자를 배웁니다. 글자를 배울 적절한 시기는 만 6~7살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네 살도 채 안 된 아이에게 글자를 가르칩니다. 나아가 글자를 빨리 터득해서 스스로 책을 읽기를 바랍니다.
이런 상황은 아이가 초등학교에 입학하고 나면 더욱 심해집니다. 책 속의 이야기가 마음속에 아직 여물기도 전에 주제를 찾아내야 하고 감상문을 써야 합니다. 특히 자발적인 책 읽기를 즐기기 전에 틀에 맞춘 글을 써내거나 정해진 주제를 찾는 것에 훈련된 아이들은 책에서 느낄 수 있는 다양한 즐거움을 찾지 못하고 말과 소리 즉, 언어의 생생한 감각에서 멀어집니다. 이런 아이들이 쓴 독서록을 보면 대개 언어의 생생함이 무뎌져서 형식적이고 일률적인 감상이 대부분입니다. 집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아이가 책을 '제대로' 읽었는지 엄마는 확인하고 싶어 하지요. 그래서 책 내용을 확인하는 질문을 하고 주제나 교훈을 묻기도 합니다. 이렇게 되면 아이에게 책은 즐거움을 주는 존재가 아니라 따분하고 귀찮은 존재가 되어버립니다.
'교과학습 연계도서'라는 이름으로 판매되고 있는 책들도 아이들의 자발적인 책 읽기를 방해합니다. 이런 책들은 "책 읽기는 곧 학습"이라고 생각하는 어른들이 만들었습니다. 책 읽기가 공부라는 생각은 아이들을 책의 즐거움에서 멀어지게 합니다. 또 교과학습 연계도서는 대부분 시리즈로 기획되어 전집으로 판매됩니다. '초등학교 교육과정과 연계한 인물이야기'라는 점을 강조하는 모 출판사 전집의 경우, 해당 나이의 아이들이 이해하기 어려운 사상이나 줄거리를 요약한 듯한 글로 감동이 없는 작품이 많습니다. 더구나 아이들은 책장 가득히 꽂혀 있는 책들을 보며 말로 할 수 없을 만큼 부담감을 가질 것입니다. 아이와 서점에 가서 함께 책을 고르며 좋은 작품을 보는 눈을 키우기 바랍니다.
* 어린이도서연구회 www.childbook.org
언론 협동조합 프레시안은 우리나라 대표 생협 한살림과 함께 '생명 존중, 인간 중심'의 정신을 공유하고자 합니다. 한살림은 1986년 서울 제기동에 쌀가게 '한살림농산'을 열면서 싹을 틔워, 1988년 협동조합을 설립하였습니다. 1989년 '한살림모임'을 결성하고 <한살림선언>을 발표하면서 생명의 세계관을 전파하기 시작했습니다. 한살림은 계간지 <모심과 살림>과 월간지 <살림이야기>를 통해 생명과 인간의 소중함을 전파하고 있습니다. (☞바로 가기 : <살림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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