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사무실 앞이 시끄러워 나가 보니 농성이 한창이었다. 듣자하니 골목 초입에 있는 빵집 하나가 건물주에게 쫓겨나게 됐다는 것이다. 자주 애용하진 않았지만 이름과 달리, 파리가 날리거나 하는 집도 아니었다. 마침 여전히 힘든 시기를 겪고 있는 '테이크아웃드로잉' 분들도 지지하러 왔기에 자초지종을 물었더니, 그곳뿐 아니라 서촌에 있는 '홍X한우' 등도 쫓겨나게 됐다고 한다. 그 와중에 알게 된 사실 하나는 서촌의 유명한 삼계탕집인 '토속촌' 회장님이 서촌에 건물을 여러 채 가지고 계시다는 것. 왜 회장님이라고 부르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만큼 건물이 여럿이라면 왠지 그렇게 불러도 될 것만 같았다. 필자는 그것도 모르고 토속촌 앞을 지날 때마다 '하루에 저 집에서 죽어나가는 닭이 도대체 몇 마리일까?' 하는 철없는 생각만 했더랬다.
닭 이야기가 나와서 말이지만, 요즘 '문화적 치킨집' 역시 성황이다. 얼마나 성황이냐 하면, 지난 4년간 새로 생긴 집이 1만 6900여 개에 달한다. 연평균으로 계산하면 1년에 4225개, 이걸 시간 단위로 환산하면 최소한 두 시간에 한 집씩은 생긴다는 말이다. 총 개수는 2015년 12월 기준으로, 5만 3000여 개. 이는 실제 치킨집 수인 3만 6000개(2013년 기준)를 훨씬 뛰어넘는 수치다. 물론 이 가운데 1년에 신메뉴를 한 번도 출시하지 않는 개점휴업 상태인 문화적 치킨집이 많고, 실제 치킨집 수는 삼계탕 물론이요, 찜닭이나 닭갈비, 심지어 닭꼬치집도 제외한 숫자이긴 하지만, 둘 다 어마 무시한 숫자다.
더군다나 둘은 생겨나는 양상도 비슷하다. 해당 산업이 호황이어서가 아니라, 나이 들고 회사에서 나와 자본도 없고 업종 선택의 자유도 별로 없는 상황에서 뛰어드는 리얼 벤처 산업이라는 점에서 그렇다. 물론 둘이 생산하는 치킨은 근본적으로 다르다. 무엇보다도 전자가 생산하는 치킨은 무겁다(고 인식된다). 이는 연원을 거슬러 올라가면, 태초에 이 치킨을 탄생시킨 구텐베르닭(독일의 활판 인쇄술 발명자 요하네스 구텐베르그를 풍자한 것. 편집자)이라는 선구자가 닭뼈를 아주 무거운, 납이라는 금속으로 만들었기 때문이라는 설이 있다. 물론 요즘에야 닭뼈를 진짜 납으로 만들지는 않지만, 그 흔적이 이어져 오고 있는 것이다.1)
이들은 모두 한국의 여느 산업과 마찬가지로, IMF 이후 찾아든 새로운 자유 앞에 끝 모를 불황 속으로 빠져들고 있다. 그나마 돈을 버는 곳은 커다란 프랜차이즈, 혹은 IMF 전후로 문을 연 배달업체들이다. 특히 배달업체들의 성장세는 괄목할 만했다. 이들은 직접 가서 치킨을 시켜 먹던 과거와 달리, 치킨이란 어디서 먹든 날개 두 개, 다리 두 개라는 점에 착안, 고객들이 여러 치킨집의 메뉴만 보고 고르기만 하면 식기 전에 배달해주는 전략을 채택했다.

전통 치킨집들은 살아남기 위해 서로를 쫓고 쫓으며, 마치 도둑을 잡는 경찰처럼 외쳐댔다. "저자를 잡아라."(물론 가끔씩 이 업계에도 도둑이 나타난다.) 하여간 닭도 잡아야 되고, 매대도 잡아야 하고, 광고도 잡아야 하고, 치킨집들은 잡아야 할 게 많았다. 그러나 아무리 잡아도 상황이 별반 나아지지 않자 사람들은 커다란 자유에는 커다란 책임이 따른다는 것을, 우리 앞에는 커다랗게 망할 자유가 놓여 있다는 것을 새삼 깨닫게 되었다. 급기야 필자는 작년에, 그러니까 '컬러링닭'이라는 새로운 메뉴가 들불처럼 번지는 것을 목격하고 '드디어 올 것이 왔구나'라는 느낌을 받았다. 그건 예전처럼 어떻게든 새로운 품종이나 맛을 개발해 사람들을 유혹하던 것도 아니고, 그나마 '이 닭죽을 먹고 기운 차리세요' 하는 위로의 차원도 아니었다. 그건 닭뼈를 잘게 조각내 무수한 뼛조각을 살코기 속에 집어넣고, 그 뼈를 골라내느라 집중하는 사람들의 머리를 텅 비워버리는 무시무시한 메뉴였다.2)
그렇다고 치킨집들이 미래를 대비하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무엇보다도 주목했던 것은, 20세기 초 엘 리시츠키(El Lissitzky 러시아 화가이자 디자이너)나 라즐로 모호이너지(László Moholy-Nagy 헝가리 태생의 미국 화가) 같은 위대한 닭들이 예견했던 '뼈 없는 닭고기'의 출현이었다. 뼈 없는 닭고기는 기존의 납으로 만든 닭뼈의 무게를, 그 흔적마저 훌훌 벗어던지고 빛의 속도로 배달되는 날렵함을 내세워 업계에 무한한 자유를 약속하는 듯했다. 물론 닭뼈를 뜯는 맛이란 게 있어서 뼈 없는 닭고기가 출시됐다고 기존 메뉴들이 아예 없어지거나 하지는 않겠지만, 아무래도 발라먹는 게 귀찮기는 한 터라 대세는 점점 뼈 없는 쪽으로 넘어가고 있는 중이다. 그러나 저 멀리 정글에서 드론을 타고 날아온 잡식성 닭의 한국 진출이 초읽기에 들어간 상황에서 섣부른 판단은 금물, 그 옛날 조선시대의 어느 현명한 대왕이 품종 개발에 성공한 국내 토종닭의 힘을 믿어볼 뿐이다.
한편 2000년대 중후반을 지나며 '독립치킨'이라는 이상한 닭들이 도처에서 출현하기 시작했다. 이들은 과거의 메뉴에 포섭되지 않는, 기존 업계에서 바라볼 때 도저히 메뉴에 넣을 수 없는 이상한 모습들을 하고 있었다. 머리만 있는 닭, 네발 달린 닭, 아예 닭이라기보다 깃털 공룡에 가까운 모습들까지, 자생적으로 생겨나기 시작했다. 기존 업계는 이들을 후라이드라고 불러야 할지, 양념이라고 불러야 할지, 반반이라고 불러야 할지 몰라서 일단 무시하기로 했다. 물론 그들의 심정은 충분히 이해가 가는 것이었다. 뭐랄까, 오디션에서 노래를 불러보라고 했다가 느닷없이 '황신혜밴드'의 명곡 '닭대가리'를 들은 기분이랄까.
한편 그 닭들로서도 자신들을 '독립치킨'이라고 부르는 게 어리둥절하기는 매한가지였다. 자신들은 무엇으로부터 독립한 적이 없으므로. 그러나 그들에게는 정체성의 문제보다 시급한 게 있었으니, 도대체 식탁에 오를 기회가 없었던 것이다. 그들에게 황신혜밴드의 노래 가사는 의미심장하게 다가왔다.3) 이윽고 몇몇 닭들이 기존 치킨집 문을 두드리다 문전박대당한 후, 이들은 '오냐, 그럼 내가 치킨집 차리고 만다'라는, 그러니까 닭이 키친집을 차린다는 희한한 발상을 하기에 이른다. 그렇게 해서 2008년 무렵부터 '꼬꼬린', '더닭소사이어티', '당신의 가슴살', '감사하는 닭들' 등이 만들어지기 시작했고, 독립치킨들은 자신들이 누울 자리를 하나 둘 늘려가기 시작했다.
2013년을 기점으로 이들은 눈에 띄게 늘어나더니, 현재는 전국에 50개가 훨씬 넘는 독립키친집이 생겨났고, 그 기세는 여전히 수그러들 줄 모르고 계속되고 있다. 급기야 2015년에는 전국적으로 닭들의 위생 및 수집을 책임지는 국립중앙양계장에서 독립치킨들을 위한 장이 만들어졌으며,4) 특히 당신의 가슴살이 2009년부터 시작한 독립치킨들의 축제인 '무한정닭판'은 해마다 규모가 커지며 얼마 전 '아트치킨페어'라는 부제를 달고 서울 사대문 안의 화이트큐브에 입성하기에 이르렀다. 어느덧 독립치킨계도 '씬'이라고 불릴 만한 풍경이 나타나며 -말하자면, 그런대로 파악 가능한 지형지물과 거점, 순환적인 재생산 구조가 구축되며- 하나의 하위문화 장르를 형성하기에 이른 것이다. 특히 주류 업계가 그 반짝이는 빛을 잃어버린 미술이나 영화, 공연예술 등의 분야를 비롯해, 한 번도 반짝여본 적이 없는 다양한 사회적 소수자 그룹을 위한 플랫폼 역할 역시 현재 한국에서 이 씬이 본의 아니게 떠안은 임무 가운데 하나다.
다시 치킨들의 처지를 생각해본다. 사람들이 치킨을 안 먹는다는 이야기는 50년 전에도 있었고 100년 전에도 있었다.5) 필자로서는 닭이 태어나기 전에는 아마 그런 이야기가 없지 않았을까 조심스레 추측해본다. 문제의 본질은 닭들이 충분히 팔리지 않는다는 것이 아니라고 주지하다시피, 닭이 닭으로서 위상과 영향력을 잃고 점점 설 자리를 빼앗기고 있다는 것이다. 김현경은 그의 책 <사람, 장소, 환대>에서 "사람이라는 말은 사회 안에 자기 자리가 있다는 말과 같다"고 했다.6) 비약해보자면, 치킨 역시 마찬가지이다. 치킨이 치킨 사회에서 성원권(membership)을 가지려면 그를 위한 자리가 마련되어 있어야 한다. 지금의 현실은 어떠한가. 많은 치킨들이, 역시 김현경 식으로 말하자면, 태아처럼 머물다 노예처럼 사라진다. 아무도 그가 태어났음을 알아차리지 못하기에 그는 태아로 머물며, 아무도 그의 존재를 인식하지 못하기에 (눈앞에 있어도 인정받지 못하는) 노예로 사라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치킨이라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지만, 그건 그가 날개가 둘이고 다리가 둘이라는 뜻에서 그러할 뿐이다. 슬프지만 그것이 현실이다. 이상한 소리라고, 그 역시 옛날부터 그러지 않았냐고, 달라진 건 상황과 조건일 뿐이라고 반문할 수도 있다. 맞는 소리다. 그럼에도 이상한 말을, 특히 문화적 치킨이라는 듣기에 따라 거북할 수 있는 비유를 늘어놓는 까닭은 그 달라진 상황과 조건이 점점 더 세게 닭 모가지를 비틀고 있기 때문이다. 모두들 변해야 산다고 하는데, 그러다 상할까봐 하는 말이다.
그런 점에서 자본이 아닌 자생에 의한 다양성을 장착하고, 경쟁이 아닌 환대를 지향하는 거점을 중심으로 움직이는 독립치킨 씬이 함축하는 바는 적지 않다. 어쩌면 그들이 닭장을 깨고 더 넓은 세상으로 나가 자유로운 공기를 닭장을 깨고 더 넓은 세상으로 나가 자유로운 공기를 만끽하는 모습을 상상하는 이들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이미 이곳에서 자유로우므로, (물론 제약과 배고픔이 항시 공존하는 자유이지만)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닭장을 부수는 대신 더 넓고 견고한 담장을 설정하고 국내외 네트워크를 활용한 연대를 구축하는 모습도 상상해봄 직하다. 그러나 더 넓고 견고한 담장은 그냥 더 넓고 견고한 담장일 뿐, 이들의 양적 질적 성장을 담보하지는 못할 것이다. 이 씬에 어울리는 담장을 굳이 따져보자면, 밀도에 따라 움직이는 반투막(半透膜)일 것이다. 경계선 안팎에서 작용하는 삼투압에 따라 자유롭게 용매가 넘나들고 용질에 침투하는 모습, 그 징후는 이미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물론 그것이 개별 치킨집들의 존속을 담보하지는 못하겠지만, (얼마 전 꼬꼬린은 문을 닫았다) 적어도 경계를 사이에 두고 막의 안팎에서 개발되는 독특한 신메뉴들의 맛은 기대해도 좋을 것이다. 우리 같이 작은 치킨집은, 당분간 그 경계에 기생해 살아남아 보련다.
추신. 독립치킨 씬을 너무 미화한 경향이 없지 않은데, 연초이고 하니 덕담이 어울릴 것이다. 소식통에 따르면 홍x한우는 여러 조력자들의 도움 탓인지 원만하게 사태가 해결됐다고 한다. 다른 곳에서도 좋은 소식이 들려오길, 앞으로도 삼계탕집에서는 닭만 죽어나가길 바랄 뿐이다. 닭들아, 미안해.
각주정림건축문화재단이 2012년 창간한 계간 <건축신문>은 건축의 내외부에서 발생하는 논의들을 균형 잡힌 눈으로 전달하는 것을 목표로 시작했습니다. 이를 위해 특정 이익 대변이나 건축 내부만의 닫힌 소통을 지양하고, 시각예술, 디자인, 공연예술 등 다양한 분야와의 교류로 건강한 담론을 만들어내는 소통의 창구로 역할을 하고자 합니다. (☞바로 가기 : 정림건축문화재단)
1) 일부 경제학자들 사이에서는 근원이야 어떻든 현재 한국 사회에서 생산, 유통, 소비, 재생산되는 모습에서 둘 사이에 유의미한 차이를 발견할 수 없다고 주장하며 '계골연형설(鷄骨鉛形說)'을 일축하기도 한다.
2) 문화적 치킨이 원래 뇌에 좋은 영양분으로 유명하다는 점을 감안할 때 이는 참으로 아이러니한 일이다. 물론 우리 뇌는 때때로 쉬어야 하고, 요즘처럼 멘붕이 주기적으로 올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는 리부팅이 필요하니 컬러링닭의 유행이 이해 안 가는 바도 아니다.
3) "닭 잡아먹고 오리발을 내밀면 꿩 대신 닭을 잡아먹었지 / 닭 모가지 비틀어서 새벽이 오면 닭 쫓던 개는 어디로 가나요 / 어디로 가나요~ 어디로 가나요~ 어디로 가나요~"
황신혜밴드 '닭대가리야'(1997) 중에서.
4) 사실 딱 보고 닭인지 아닌지 애매하면 안 받을 수 있는 기존 치킨집들과 달리, 정식 유통번호만 달면 의무적으로 닭장 속에 집어넣어야 하는 공공 양계장의 특성상 자신의 통제에서 벗어나 뛰노는 독립치킨들을 계속 간과하고만 있을 수는 없었을 것이다.
5) "뭐, 그냥 딱 잘라 사실을 말하자면, 서점가는 대단히 심각한 불황에 허덕이는 중. 다들 10만 부 찍었네! 4만 부 찍었네! 그러고들 우기는데 그 숫자 중 0자 단 하나도 믿지 말라는 거지… 하다못해 400부를 찍었대도…! 말짱 거짓말이오!"
<제멜바이스 / Y 교수와의 인터뷰>(루이페르디낭 셀린 지음, 김예령 옮김, 워크룸프레스 펴냄) 중 151쪽.
6) <사람, 장소, 환대>(김현경 지음, 문학과지성사 펴냄) 중 6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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