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당으로는 안 된다. 신당이다", "당 간판은 중요치 않다. 문재인을 불러내는 것이 요체다", "내년 지방선거를 앞두고 5.18 광주에서 5.23 봉하까지 전국 순례를 하면서 바람을 일으킨다"….
이같은 백가쟁명 속에서 친노진영의 조직적 흐름은 다양하다. 신당 주비위가 발족했고 시민주권모임, 민주통합시민행동 등도 깃발을 들었다. 성격은 조금 다르지만 노무현 대통령 추모기업사업회도 곧 출범한다. 당장은 양산 10월 재보선에 출마하는 송인배 전 비서관을 적극 지원할 태세다.
하지만 이들 내부에서도 "그 얼굴이 그 얼굴 아니냐", "크게 다른 내용도 아닌데 깃발만 많다"는 지적이 있다.
"김대중 정부, 노무현 정부는 진보의 정권이었는가? 제3의 길, 유럽의 진보주의 기준으로 평가해 보자. 그래도 한계는 분명하다. 본시 그들의 좌표는 어디에 있었을까? 과거의 말과 이력을 살펴보자. 무엇이 발목을 잡았을까?"는 유고에 담긴 노 전 대통령 말년의 문제의식에 비하면 '반MB'에 몰입하는 듯한 '친노진영'의 그것은 협소해 보인다.
참여정부의 이데올로그 중 한 사람이었던 김창호 전 국정홍보처장은 친노진영의 이같은 최근 흐름에 대해 "부족하다"고 평가하는 사람 중의 하나다.
김 전 처장은 16일 오후 한국미래발전연구원에서 비공개로 진행된 '참여정부 이후의 민주주의 과제' 세미나 발제문에서 "이제 필요한 것은 생활세계의 진보적 재구성이다"면서 "이는 기존의 시민운동이 생활세계로의 '하방'과 생활공동체 운동의 정치적 시민성 획득이라는 쌍방향적 운동이 성공적으로 이뤄질 때에만 가능할 것이다"고 강조했다.
특히 김 전 처장은 "노무현 계승을 둘러싸고 이루어진 민주당 개혁이냐 신당 추진이냐는 이분법적 논쟁, 그리로 선거와 의회라는 좁은 의미의 정치적 행위를 목표로 하는 계승은 그 한계가 명확하다"고 지적했다.
그는 "신당 추진론은 민주당 강화론을 대세 추종주의라고 비판하고, 민주당 강화론은 신당 추진론은 모험주의, 분파주의로 비판한다"면서 "이들은 상대방을 비판함으로써 자신들의 정당성을 확보한다. 철학적 개념을 사용한다면 '대립적 의존'(적대적인 것은 아닐지라도)의 관계라 할 수 있다"고 말했다.
김 전 처장은 "이제 애도하는 눈물의 양으로 노무현 계승을 가늠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노무현 대통령과의 시공간적 접근성 여부로 계승의 주체가 결정되는 것도 아니다"면서 "지역적 연대는 물론 다양한 배경을 가진 서로 다른 형태의 시민공동체운동들이 서로 연대하고 그 경험을 공유함으로써 스스로 보편화, 객관화해 나갈 필요가 있다"고 주장했다.
그는 야권의 최대관심사인 내년 지방선거를 위해서도 "첫째, '반MB' 등과 같은 부정적 프레임에서 벗어나 대안적이고 긍정적 프레임을 산출해야 한다"면서 "둘째, 어떻게 대중을 진보 공동체 운동과 결합한 지역정치의 진보적 재편에 적극적으로 참여시킬 수 있을 것인가"라는 화두를 던졌다.
이날 세미나에서는 박승옥 시민발전 대표도 발제자로 나서고 주로 참여정부의 정책파트에 몸담았던 인사들과 시민사회 인사들의 토론이 이어졌다.
어쨌든 친노 진영 다수의 흐름과 결이 다소 다른 김 전 처장의 주장이 새로운 화두로 떠오를 수 있을지 지켜볼 일이다. 다음은 김 전 처장이 <프레시안>에 보내 온 발제문 전문이다.
누가 무엇으로 어떻게 노무현을 계승할 것인가
이제 노무현 대통령에 이어 김대중 대통령마저 이 세상을 떠났다. 그리고 이 두 분의 대통령 유업을 이어가야 할 일은 우리 후세들에게 남겨졌다. 이들 유업을 계승하는 것에는 단순히 유지를 따르는 것 외에 창조적으로 새롭게 진보를 재구성해야 하는 일 또한 포함된다. 그러면 그 유업이란 과연 무엇인가. 특히 노무현 대통령이 자신의 책을 통해 말하고 싶었던 것은 과연 무엇일까.
대통령은 자신의 책 『진보의 미래』를 쓰기 시작하면서 이 책의 목적을 "50년간 이어온, 선투자 후복지, 성장 중심의 틀을 근본적으로 바꾸고 진보의 시대에 대비하고 싶다"라고 말했고, 그리고 그것의 동력을 '깨어었는 시민의 조직된 힘'으로 설명했다. 이는 '이 시대의 진보정치는 무엇이며 어떻게 가능한가'라는 대통령의 오래된 문제의식에 대한 나름의 대답이었다.
노무현 대통령의 문제의식의 핵심은 바로 그를 죽음으로 몰아간 사태 바로 그것이었다. 다시 말해 진보주의 정치는 사회적 기반이 굳건하지 않은 상태에서 '권위주의 권력 연합'(과거의 공안권력과 보수 언론, 그리고 권위주의 정치세력의 연합체)이 복귀하는 과정에서 너무 쉽게 붕괴해버렸다. 대통령의 희생도 이와 같은 권위주의 권력연합의 복귀 과정에서 강요된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그렇다면 여기에서 우리는 솔직히 물어보지 않을 수 없다. '과연 이런 상태로 진보주의 정치는 재집권할 수 있는가. 재집권하더라도 과연 진보주의 정치는 노무현, 김대중 대통령과 달리 지속적인 정치적 위기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가. 그리고 나아가 퇴임한 대통령을 두 번 다시 부엉이 바위에 세우지 않을 자신이 있는가.'
이런 물음들을 한마디로 '어떻게 진보주의 정치는 지속 가능한가'로 요약할 수 있을 것이다. 사실 노무현 대통령이 고민했던 주요 의제, 그리고 스스로 몸을 던져 보여주고자 했던 의제는 바로 이것이었다. 그리고 이에 대답하지 않거나 회피해서는 진보주의 정치가 앞으로 존립할 수 없다는 냉혹하고도 혹독한 문제제기인 셈이다. 이는 또한 '누가 무엇으로 어떻게 노무현 대통령을 계승할 것인가'라는 문제제기와 바로 맞닿아 있는 것이기도 하다. 지속가능한 진보정치가 노무현 대통령이 죽음과 책을 통해 말하고 싶었던 마지막 문제의식이었고, 이 문제의식을 확대발전시켜 나가는 것이 바로 노무현 대통령의 유업을 계승하는 일일 것이다. 이 문제의식에 대한 대답과 고민을 외면한 노무현 대통령의 계승은 허구일 뿐이다.
지역주의 청산과 언론개혁은 계승의 필요조건
노무현 대통령이 추구했던 일은 한마디로 '특권의 폐지'로 요약할 수 있다. 이를 위해 특권의 구조를 가능케 한 지역주의와 언론을 개혁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렇지 않고서는 특권 폐지가 불가능할 뿐 아니라 보다 많은 사람들이 살만한 세상을 만드는 진보적 대안을 추구하는 것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지역주의 청산과 언론개혁은 진보 정치의 지속가능성에 매우 핵심적인 사안이며, 노무현 대통령 계승의 필요조건이라 할 수 있다.
물론 이에 동의하지 않을 사람도 적지 않을 것이다. 이보다 더 중요한 정치사회적 의제들을 제시하면서 이들을 후순위 과제로 밀어두려는 경우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과연 지역주의 청산과 언론개혁이라는 최소한의 조건을 만들지 않고서 진보주의 정치가 지속가능할까. 단순히 정당들의 재편과 몇몇의 새로운 정치 자원들의 진입으로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까. 대통령의 죽음은 바로 단순히 정당정치 차원에서 대통령이 마지막까지 고민한 진보정치의 지속가능성을 확보할 수 없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우리 사회의 민주화는 정치체제적 영역(민족, 해방, 통일, 자유, 평등, 민주주의, 법치 등)에서 출발해 사회경제적 영역(투명성, 절차적 정당성, 인권, 환경, 평화 등)을 거쳐 생활세계적 영역(분배, 생태, 삶의 질, 문화적 다양성, 지속가능발전, 참여, 그리고 균형발전 등)으로 확장되어 왔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적지 않은 민주적 가치를 확보하고 공공성을 확장시켰다. 바로 이들을 새롭게 재구조화해서 풍부한 정치적 자원으로 활용하지 않으면 진보정치의 지속가능성을 확보할 수 없다는 것을 다시 인식해야 하는 상황에 직면하고 있다.
그렇다고 정당정치의 무용성을 주장하는 것도 아니다. 노무현을 계승하겠다는 정치인들이 과거 얼마나 지역주의 청산와 보수 언론과의 싸움에 불편해 하고 어깃장을 놓았는지 말하려 하는 것도 아니다. 앞으로도 이들이 과연 노무현의 가치를 지켜나갈지 의심하는 것도 아니다. 문제는 정당정치만으로는 진보정치가 지속 가능하지도 않고, 설령 다소간 그 가능성이 확보된다 하더라도 그것은 결코 정당하지도 않다는 것이다. 두 분의 서거로 위기의 진보정치는 리더십의 위기라는 또 다른 보다 큰 위기에 봉착하게 되었다. 그런 만큼 진보주의 정치는 단순히 정당 정치를 넘어서는 사회 전체의 변혁과 진보진영의 새로운 전략을 요구하고 있다. 이것은 단순히 정강정책이나 정치 슬로건의 문제가 아니라 한국 정치를 일정 정도 근본적으로 재구조화하는 수준에서 접근해야 할 문제인 것이다.
진보적 공동체가 대안이다
지식사회는 오래 전부터 시민사회를 우리 사회를 진보적으로 재구조화하기 위한 출발점이자 동력으로 간주해 왔다. 이런 인식론적 노력은 권력개념을 기존의 정치경제 중심의 해석을 넘어 시민사회로까지 확장시켰다. 80년대부터 시작한 혁명적 진보주의 운동의 전통과 다양한 형태의 진보적 대중단체들과 더불어, 90년대부터 새롭게 확보된 제도적 공간에서 새로운 형태의 운동, 즉 시민운동이 활성화되기 시작했다.
하지만 진보적 대중운동 단체들이 오늘날 보여주는 결과는 진보적 비전과 공동체 정신의 상실, 혹은 보수주의 담론에의 종속이다. 특히 시민사회는 오히려 상업주의와 지역주의에 오염돼 독자적으로 합리성을 생산하고 경제와 정치를 진보적으로 재구성할 역량을 갖지 못하고 있다. 시민운동 또한 '시민없는 시민 운동'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개별화, 고립화된 시민들은 '권위주의 연합'의 총공세로부터 자신들의 생활세계도 지켜내지 못하고 있다.
진보 정치의 지속가능성 문제는 바로 이 지점에서 발생한다. 필자의 경험에 비춰보면 진보 정치와 시민 사이의 유리된, 추상적 관계가 핵심적 문제였다. 양자 사이의 관계는 선거와 촛불 시위 등 우발적 계기를 제외하고 서로 고립적으로 존재한다. 시민들이 조직화되어 있는 것도 아니고 진보주의 정치와 연대할 수 있는 형식이 마련된 것도 아니다.
교육, 법조, 종교, 지식, 그리고 이것을 정치적으로 동원하는 언론 등 제도화된 권력은 진보주의 정치와 시민을 추상적으로 유리시켜 일상적으로 진보주의 정치를 위협한다. 더욱이 의회는 반공 이데올로기와 지역주의로 인해 지속적인 대의제 위기를 재생산한다. 시민들도 자신의 사회경제적 이익을 투표를 통해 반영하기보다 지역주의 등과 같은 허구적 아젠다에 표(계급배반적 투표)를 던진다. 그리고 이렇게 구성된 또 하나의 제도화된 권력인 의회는 다시 진보주의 정치를 위협하고 있다.
노무현 대통령의 "민주주의 최후의 보루는 깨어있는 시민의 조직된 힘입니다"라는 마지막 묘비명도 바로 이런 문제의식을 그대로 담고 있다. 비록 '깨어있는 시민'이라 하더라도 상업주의, 지역주의에 의해 오염된 시민사회에서 고립적으로 존립할 때, 권위주의 연합이 회귀하는 과정에서 스스로를 방어할 수 없기기 때문이다. 단순히 권위주의 연합에 대한 방어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다. 시민 스스로 창발적으로 조직화하지 않고서는, 그리고 이것을 기반으로 진보주의 정치와 연대하지 않고서는 시민 개개인의 민주적 권리를 지켜내지 못할 뿐 아니라 진보주의 정치의 지속가능성도 더 이상 보장할 수 없다. 설령 우연히 진보정권이 등장하더라도 김대중, 노무현 대통령의 경우처럼 지속적인 정치적 위기 속에 처하게 될 것이며, 경우에 따라 다시 부엉이 바위에서 목숨을 던져야 하는 상황을 또다시 맞게 될 것이다.
우리 사회의 민주화는 공공성의 확장과정이며, 이것은 또한 수많은 민주적 가치를 확보하는 진보의 과정이었다. 돌이켜 보면 진보주의 정치와 운동은 매우 어렵고도 고통스런 과정을 거쳐야만 했다. 그 결과로 오늘날 민주주의(민주화의 결과로서 공공성) 담론의 중심에는 훨씬 구체적인 생활세계적 가치들이 들어서게 되었고, 이제 민주주의는 국가체제에서 시작해 생활세계로까지 확장된 것이다. 하지만 이렇게 역사적 투쟁을 통해 획득한 이같은 가치들을 진보주의 정치의 자산으로 굳건히 다지지 못한 것이 사실이다.
이제 필요한 것은 생활세계의 진보적 재구성이다. 민주화 투쟁을 통해 획득한 진보적 가치들을 녹여낸 공동체, 그것도 구성원들이 '창발성'과 '자기 조직화'에 바탕을 둔 공동체를 형성하는 운동을 이제 새롭게 다시 시작해야 한다. 그리고 진보적 공동체 정신을 바탕으로 정치체제는 물론 사회경제체제, 그리고 이들을 조정하는 제도권력을 진보적으로 재조직화하지 않으면 진보정치의 지속가능성을 보장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는 진보정치의 기반을 생활세계 공동체로 확장하는 일이며, 거꾸로 시민들이 진보적 공동체운동을 통해 정치적 시민성을 획득하는 것이기도 하다.
물론 이것만으로 진보주의 정치의 지속가능성을 보장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이 공동체 운동이 정치적 시민성을 획득하려면 일국적 차원의 문제의식은 물론 세계적 차원의 문제의식을 공유한 네트워크로 확장해나가야 한다. 이는 기존의 시민운동이 생활세계로의 '하방'과 생활공동체 운동의 정치적 시민성 획득이라는 쌍방향적 운동이 성공적으로 이뤄질 때에만 가능할 것이다. 요즘 '민주주의의 민주화'라는 개념도 기존의 민주주의 성과들을 새로운 민주적 가치에 의해 재구성해야 한다는 문제의식을 담고 있다는 점에서 이런 맥락에 서 있다.
'깨어있는 시민' 배려가 없는 진보 정치는 허구
원래의 문제로 돌아가자. 노무현을 계승하는 작업은 단순히 정당정치 차원으로 국한될 수 없다. 정당적 방식(정치적 방식이 아니라)은 노무현 정신의 계승작업을 매우 협애화할 위험이 있다. 정치적인 것은 시민사회는 물론 생활세계 영역으로 확대됨으로써 그 개념의 적용범위가 더욱 확장되었다. 현대 사회는 정치의 영역과 시민의 영역이 구분되지 않는 것이 특징이다. 시민적 의제가 가장 정치적 의제이며, 의회와 정당정치 또한 시민으로부터 괴리된 의제를 생산할 경우 지속적 위기에 처하게 된다. 이처럼 정치가 정당에 국한할 수 없는 것처럼 노무현을 계승하는 작업도 정당의 영역에 국한될 수 없다.
이런 점에서 보면 노무현 계승을 둘러싸고 이루어진 민주당 개혁이냐 신당 추진이냐는 이분법적 논쟁, 그리로 선거와 의회라는 좁은 의미의 정치적 행위를 목표로 하는 계승은 그 한계가 명확하다. 민주당 개혁론이 현실적으로 존재하는 정치적 세력을 인정하는데서 출발한 것이라면, 신당 추진론은 민주당이 갖는 자기 개혁의 한계를 지적한다. 그리고 신당 추진론은 민주당 강화론을 대세 추종주의라고 비판하고, 민주당 강화론은 신당 추진론은 모험주의, 분파주의로 비판한다. 이들은 상대방을 비판함으로써 자신들의 정당성을 확보한다. 철학적 개념을 사용한다면 '대립적 의존'(적대적인 것은 아닐지라도)의 관계라 할 수 있다. 이 대립적 의존의 결정적 한계는 자신의 존립기반이 상대에게 있다는 점이다. 거꾸로 말하면 상대가 소멸되는 순간 자신의 존립의 정당성도 사라져 버린다. 그러면 이같은 순환적 딜레마를 어떻게 해소할 수 있을까.
이들이 공히 가지고 있는 문제는 바로 노무현 계승을 정당적 방식으로 접근하고 있는데 있다. 이들에게 결정적으로 부족한 것은 다름 아닌 '시민에 대한 배려', 즉 시민의 창발성과 자기조직화에 대한 신뢰가 부족하고 그들을 매개로 한 정치에 무관심하다는 점이다. 과거 권위주의 시절, 지역주의 정치는 상층 정치세력들의 합종연횡에 의해 대중을 동원할 수 있었고, 그것이 그들의 정치적 힘이었다. 그러나 이제 그것은 불가능하고, 노무현 대통령도 바로 그것을 넘어서기 위해 고통스런 정치를 한 것이 아닌가. 진보적 시민공동체 운동이 없는 진보주의 정당세력, 시민이 배제된 진보주의 정당세력의 합종연횡으로 노무현의 문제의식을 계승할 수도 없을 뿐 아니라, 노무현이 죽음으로써 제기한 '진보주의 정치는 어떻게 지속가능한가'라는 물음에 대해 대답할 수도 없다.
대립적 공존 속에서 있는 민주당 개혁론이나 신당 추진론 모두 순환적 딜레마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길은 현실적으로 없다. 물론 이 같은 문제제기에 대해 "원칙적으로 부정하지는 않지만 그것은 정치인의 길과 다른 시민운동의 길"이라고 주장할지 모른다. 그리고 "정치의 중요성을 간과한 것이 아니냐"며 반문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것이야말로 진보주의 위기에 대한 인식의 불철저성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리고 정치체제는 물론 사회경제체제, 그리고 생활세계로 이어지는 민주화의 성과를 외면하고 진보주의 정치 자원으로 제대로 인식하지 못한 편협한 정치 개념에 따른 결과이다.
이것은 제레미 리프킨이 설명한 '유러피언 드림'이 바로 68년 학생운동의 정치적 실패와 생활세계 운동의 성공으로 이어지는 진보주의 정치의 장구한 노력의 결과라는 점과 맞닿아 있는 것이기도 하다. 정치란 시대적 의제를 제시하고 그것을 통해 대중을 조직화해 다수를 만들어가는 경쟁을 하는 과정이다. 오늘날 진보주의의 핵심 문제가 중도를 포괄하지 못한데 있는 것이 아니냐는 문제가 일상적으로 제기된다. 그러나 이것은 문제의 핵심을 잘못 짚은 것이다. 문제는 중도가 아니라 생활세계적 공간속에 새로운 접합점을 찾지 않고서는 진보주의의 지속과 가능성은 매우 제한적이지 않을 수 없다는 점이다.
노무현의 주요한 가치가 무엇인가. 다름 아닌 본질적으로 사고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는 본질적으로 묻고 있다. '어떻게 하면 진보주의 정치가 지속가능한가'라고. '나같은 불행한 대통령이 나오지 않으려면 어떻게 정치를 재구성해야 하는가'라고. '이후 진보주의 정치인이 부엉이 바위에 다시 서지 않게 하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느냐'라고. 이제 애도하는 눈물의 양으로 노무현 계승을 가늠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노무현 대통령과의 시공간적 접근성 여부로 계승의 주체가 결정되는 것도 아니다. 계승의 주체는 스스로 '조직화된 힘'으로 무장한 '깨어있는 시민'들 바로 자신이다.
시민공동체와 진보정치의 만남: 지역정치
'그래서 도대체 어떻게 하자는 것인가'
필자의 정책 경험에 비춰보면 진보 지식사회의 넓은 이론적, 이념적 스팩트럼에도 불구하고 현실에서 우리가 선택 가능한 범위가 그리 넓지 않았다. 특히 혁명적 방식이 아니라 제도와 정치, 그리고 시민참여의 형식을 통해 우리 사회의 진보를 추구하는 '제도적 진보'의 관점을 취한다면, 실제로 진보주의 내부의 다양한 이념적 차이에도 불구하고 실제로 선택가능한 수단은 그리 많지 않다는 것이다. 무엇보다 진보적 대안을 추구하는데 정책적 대안이 중요하지만, 그것보다 더욱 중요한 것은 정책을 둘러싼 정치적 환경이었다.
이와 관련해 진보주의 정치의 주체인 시민들에게 진보가 정작 어떻게 인식되는지는 그 선택의 폭을 좁히는 중요한 요인이 아닐 수 없다. 우리 진보주의 정치와 운동의 역사 속에서 형성 축적되어온 가치는 물론 미래지향적 가치를 공동체 운동을 기반으로 해서 생활세계 속에 착근하지 않으면 진보정치의 가능성은 물론 정책의 선택 가능성도 매우 제한적이지 않을 수 없다. 무엇이 진보적이냐 여부도 이들의 생활세계 속에서만 유의미한 질문이다. 이 속에서 정치체제의 민주화->사회경제 민주화->생활세계의 민주화 과정을 통해 축적한 진보적 가치들과 더불어 새로운 미래지향적 가치들이 생활세계 속에서 구현되고 구체화되어야 한다. 이는 동시에 생활세계로부터 진보주의 정치를 새롭게 재구성해 지속가능성을 확보할 수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러기 위해 이런 가치의 실현을 방해하는 지역주의, 성장주의, 권위주의 등을 넘어서기 위한 사회정치적 연대의 노력이 필요할 것이다. 그리고 이런 연대를 이뤄내기 위해 공동체의 '창발성'과 '자기 조직화'의 역량이 무엇보다 강화되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지역적 연대는 물론 다양한 배경을 가진 서로 다른 형태의 시민공동체운동들이 서로 연대하고 그 경험을 공유함으로써 스스로 보편화, 객관화해 나갈 필요가 있다.
그렇다면 현실은 절박한데, 언제까지 공동체 운동이나 하고 있어야 한다는 말인가. 물론 사이버 공동체의 경우처럼 일부 대중의 창발성과 자기 조직화에 의거해 직접 바로 정치적 의제에 참여하기도 하지만, 이런 경우도 넘어야 할 과제가 적지 않은 것이 현실이다. 더구나 '시민없는 시민운동'으로 여전히 그 운동 대상영역이 정부, 언론, 기업 등에 제한되어 있는 상황에서 이를 기반으로 새로운 진보주의 정치의 대안을 찾고 지속가능성을 확보한다는 것은 단기간에 결코 성공할 수 없는 일이다.
그러므로 시민공동체 운동과 진보주의 정치 사이의 관계를 활성화할 수 있는 접점이 만들어지는 기회는 매우 중요하다. 이같은 시민들의 자율과 참여에 의한 시민공동체가 가장 적합한 공간이 '감정이입'이 가능한 지역정치이다.(Benjamin Barber, Strong Democracy - Participatory Politics for a New Age, 1983) 물론 이제 '감정의 이입'이 오늘날 사이버 공동체에서도 활성화되고 있지만, 지자체 선거도 시민공동체 운동과 진보주의 정치가 동시에 활성화되어 접점을 만들어 갈 수 있는 중요한 계기를 제공한다. 평상시와 달리 선거 공간에서 양자의 이같은 접점은 활성화될 것이며, 이를 통해 기존의 추상적, 고립적 관계를 새로운 단계로 진입시킬 수 있다.
기존의 시민운동은 중앙정치와의 연대 속에서 진보주의 정치에 대해 관심을 가져왔다. 그러나 이제 그것은 명백한 한계에 봉착했다. 이제 새로운 가능성과 동력을 제공할 수 있는 공간이 생활세계이고, 그것의 정치적 공간이 지역정치이다. 무엇보다 필요한 것은 중앙 정치 중심으로 전개되어 온 정치체제의 민주화->사회경제적 민주화->생활세계의 민주화를 지역정치로 확장하고 심화시키는 것이다. 이것은 현재 우리 사회 전체를 놓고 볼 때 민주화의 중요한 과제가 아닐 수 없다. 나아가 이를 통해 진보주의 정치의 새로운 기반과 동력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희생정치를 통해 생활정치의 주류화 전략이 필요하다
물론 선거라는 형식이 이 모든 것을 보장해 주는 것은 아니다. 선거 이후 지역정치 단위에서 권위주의적, 성장주의적, 지역주의적 질서를 근본적으로 절연하기 위한 전국적이고 집단적 노력이 필요할 것이다. 그리고 오늘날 이같은 퇴행적, 부정적 질서를 담지하고 있는 새마을 운동 등과 같은 지역의 공동체들을 근본적으로 재편할 필요가 있다. 이처럼 2010의 지자체 선거는 민주주의의 지역적 확장과 심화, 진보주의의 새로운 공동체적 동력 확보라는 민주주의와 진보에 매우 중요하고도 의미있는 계기를 제공한다. 그것도 과거처럼 단순한 운동정치가 아니라 제도적 차원에서 그 가능성을 확보하고 공고화하려 한다는 점에서 이 지역정치 공간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중요한 것은 지역정치가 활성화되는 계기를 어떻게 긍정인 결과를 낳는 방향으로 이끌어갈 수 있느냐이다. 물론 이같은 목표와 문제의식이 곧 지자체 선거의 승리를 보장하는 것은 아니다. 일부에서는 아직도 보수 정치세력들의 실책에 기대 지자체 선거에서 많은 성과를 기대하는 사람도 적지 않다. 대표적으로 '반MB 전선'이라는 부정적 프레임을 들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은 대단히 큰 착각이 아닐 수 없다.
아마도 보수 언론이 만든 중앙 정치적 의제로 인해 지역정치의 새로운 생활세계적 의제는 묻혀버리고 말 것이다. 그나마 한줌도 안되는 온라인, 오프라인 진보 언론들이 있지만, 이들만으로 보수언론에 대응하기는 역부족이다. MB 심판과 같은 의제는 이미 미디어법 통과 이후의 전개과정이 보여준 것처럼 곧 다른 큰 중앙정치적 의제에 의해 묻혀버릴 수 있다. 보수 정치는 현재 중앙정치적 의제로 개발할 수 있는 수많은 자원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두가지 큰 원칙에 대한 고려가 필요하다.
첫째, '반MB' 등과 같은 부정적 프레임에서 벗어나 대안적이고 긍정적 프레임을 산출해야 한다. 그동안 민주화를 통해 얻게 된 진보적 가치를 전면에 내세워 긍정적 대안을 만들어야 한다. 지역이 여전히 권위주의, 성장주의, 지역주의에 포섭되어 있다는 이유로 적당히 여기에 영합하거나 그것을 비판하는 것으로는 이제 대중을 설득할 수 없다. 대안세력으로서 자리매김하지 못하고 여전히 비주류의 부정적 프레임으로는 대중의 신뢰를 얻을 수 없기 때문이다. 지금 당장 어렵더라도 생활세계의 진보적 의제를 개발해 주류화하지 않으면, 결코 대중은 시민공동체 운동과 진보주의 정치에 관심을 갖지 않을 것이다.
둘째, 어떻게 대중을 진보 공동체 운동과 결합한 지역정치의 진보적 재편에 적극적으로 참여시킬 수 있을 것인가. 진보주의 정치는 보수 정치세력과 달리 거대한 담론 권력의 지원이나 경제적, 물적 지원을 받을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그렇다고 대중의 인식 또한 진보주의 정치에 그리 우호적인 것만도 아니다. 오히려 그들은 권위주의, 성장주의, 지역주의의 포로가 되어 있다는 지적이 타당할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도덕주의 전략은 불가피한 선택의 측면이 없지 않다. 그렇다고 여전히 여기에 머물러야 되는 것인가. 여전히 도덕적 청렴성만으로 대중들의 참여를 극대화시킬 수 있을 것인가.
물론 불가능하다. 앞으로 지역정치에서의 연대, 그리고 전국 단위의 연대를 통하지 않고서는 불리한 담론 국면에서 긍정적, 대안적 프레임을 제시하기 쉽지 않다. 그렇다고 단순한 연대만으로 이것이 가능하지도 않을 뿐만 아니라 진부하게 느껴질 것이다. 중요한 것은 '감동있는 연대'이다. 자신의 정치적 기득권을 철저히 희생하는 정치를 통해 대중들에게 우리의 진정성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러면 누가 어떻게 희생을 해야만 지난 민주정부 10년에 마음을 열고 2010년 지자체 선거에서 진보주의 정치의 의제에 대중이 적극 참여할 것인가. 모두 스스로 반문해보기를 희망하는 것에서 일단 이 글을 그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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