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사회는 매년 수능이 끝나면 관심사는 국내 최고의 학부인 ‘서울대’를 어느 명문고가 가장 많이 배출했는가?에 관심이 집중된다.
그리고 사람들은 가장 많은 인재를 배출한 강남8학군으로 오늘도 맹모삼천지교의 ‘新맹모’들이 이사를 간다.
덕분에 똑같은 재료로 집을 짓고도 지방 중소도시에 아파트 서너 채 값보다 비싼 강남의 집값. 하여간 이 땅의 교육열은 조선시대나 지금이나 식지를 못한다. 어쩌면 그런 어머니의 교육의 힘이 땅덩어리도 작고 자원도 없어 강대국 사이에서 살아남은 가장 큰 힘일지 모른다.

그런 생각을 하며, 나는 조선시대 우리나라 최고의 3대 명문가인 김장생 후손의 광산김씨 가문과 이정구 후손의 연안 이씨와 더불어 당대 최고명문가로 꼽히는 대구 서씨 후손 서 성 대감과 그를 키운 ‘조선의 新맹모’ 같은 그의 어머니 묘가 있는 종가를 가기 위해 월요일 아침 포천으로 가는 서울 외곽도로를 들어섰다.
19일 조선왕조 500백년의 역사를 넘어 21세기 대한민국 수도 서울의 아침은 한강에서 해가 시작되고 있었다.
그 한강의 아침을 보며 새로 이전한 경기북부청사가 있는 의정부를 지나 포천으로 가는 43번 국도를 들어섰다. 20여분 후 차는 1시간 만에 경기도 포천시 설운동 1-14번지 서 성 대감의 묘에 도착했다.
풍수학자들이 길룡으로 보는 서 성의 묘 터는 조선 8대 명당 중 하나로 꼽혀왔다.
포천의 아침은 조용했다. 경기도 기념물 제35호로 지정된 서 성 대감의 묘가 있는 설운동은 포천시내 중심시가지에서 벗어나 한적한 들판이 펼쳐졌다.

큰 도로를 빠져나와 작은 외길로 들어서자 학교 운동장 만한 꽤 넓은 마당이 보였다. 마당 입구로 들어가는 길 옆에 연못이 아침을 맞고 있다. 몇 백년은 자랐을 큰 고목이 연못에 그늘을 만들어 주고 있다.
나는 그 연못 옆에 차를 주차했다. 그리고 연못 앞에 기와가 멋들어지게 내려 앉은 재실 대문 앞에 놓인 문인석과 무인석을 보았다. 지난 수백 년간 비와 바람에 깍인 문인석을 한참이나 바라보았다.

조선 광해군에게 귀양을 가기전까지 병조와 호조 판서를 지내다 인조가 즉위하면서 대사헌을 거쳐 영의정에 추종된 충숙공 서성 대감의 모습이 떠올랐다.
율곡 이이가 13살 된 서 성 대감의 인물 됨됨이를 시험하고자 시를 짓게했을 때, “지구가 넓고 넓어 하늘과 땅이 내 술잔 속에 드는구나..”라는 시를 지어 율곡을 놀라게 한 일화는 유명하다. 그 외에도 그를 가르친 훌륭한 멘토 송익필이 있다.
아이러니하게도 아버지 서해는 퇴계 밑에서 공부한 반면 아들 서 성 대감은 퇴계와 학풍이 다른 이이를 따랐다는 것 또한 흥미롭다. 민주주의가 발달한 오늘 날에도 보기 힘든 서성 대감의 자유로운 학문의지가 아닐 수 없다.
이미 13살 초등학교 6학년 나이에 조선반도가 아닌 지구 세계를 술잔 하나에 담은 그의 세계관은 당시 양반들의 좁은 세계관을 뛰어넘는 눈을 가졌기에 가능한 시였다.
그는 7살부터 스스로 독서를 할 만큼 학문에 뛰어난 조선의 어린 인재였다.

그런 생각을 하며 서성의 종가집을 지나 밭둑 언덕 위에 있는 서성의 아버지 서해의 묘가 있는 곳으로 올라갔다.
그곳에는 퇴계의 제자로 유명한 서성의 아버지 서 해의 묘가 있었다. 함재공 서 해는 서애 유성룡과 죽마고우로 동문수학했다. 퇴계가 아끼는 수제자였다 고 한다.
그러나 그는 중국에 동부지사로 갔다오다 젊은 나이에 죽었다. 그 때 서 성의 나이 2상이다. 이 때문에 서성은 백부인 춘원공 밑에서 10년을 살며 글을 배운 것으로 전해졌다.
서성의 아버지 옆에는 어머니 고성 이씨 묘가 있었다. 서성의 어머니는 어려서 용모가 빼어나고 총명했으나 15살 즈음에 눈이 갑자기 멀어져 시력을 잃고 살았다 한다.
서성 어머니는 당대 명문가의 자손이다. 그녀는 청풍군수의 외동딸이다. 이에 아버지의 전 재산을 물려받을 수 있었다.
그녀를 보며 나는 그녀가 ‘한국의 헬렌켈러’나 ‘신사임당’과 견줄만한 한국인의 어머니라고 생각했다.
눈은 멀었지만 14살까지 살아오면서 이미 자연의 풍경과 색깔, 그리고 청풍군수를 지낸 아버지를 보며 조선 양반사회의 질서와 여성으로서 어머니에 보고 자란 음식과 자연의 색깔을 기억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녀가 태어나면서부터 소경인 것으로 오해하고 있다.
15살 까지 모든 것을 눈으로 볼 수 있었던 힘이 남편인 함재공 서해가 죽은 후, 아들 서 성을 당대 최고의 신하로 키웠다고 생각한다.
그녀는 맹자의 어머니와 같은 생각을 가졌다.

종가택을 지키는 서기원 옹(93세)의 아들 서동량 박사는 “그녀는 남편이 죽고나서 아들 서 성을 공부시키기 위해 안동에서 청주로 이사했다”고 말했다. 그러나 “당시 청주에서 아들 서성을 키우기에는 부족한 곳이라 생각되어 서울로 옮겼다”고 했다.
또, “외동딸로 아버지의 유산을 모두 물려받은 그녀는 한양땅(지금의 서울)에 99칸 짜리 집을 사서 서성을 키웠다”고 한다.
그러면서 서동량 박사는 “지금 사람들은 그녀가 약밥과 술을 만들어 팔았다고 하는데 그건 있을 수 없는 일이며, 그녀가 어릴 적 명문가 집에서 어머니로부터 배운 약밥 만드는 솜씨와 술 제조법을 눈으로 보고 배웠다”며 “서울에 온 그녀는 부친이 물려준 재산으로 99칸 집을 사서 서성을 키웠으며, 음식 솜씨가 좋은 그가 방문하는 귀한 손님들에게 약밥을 대접한 것이 잘 못 알려 졌다”고 생각한다며 “당시 눈으로 볼 수 없는 신체적 여건과 함께 양반사회에서 있을 수 없는 일로 이는 바로 잡아야 한다”고 덧붙였다.
그런 점에서 볼 때 “약밥과 술을 만들어 팔았다는 소문은 약밥과 술을 만들어 상업적으로 이용하려던 사람들이 훗날 그런 소문을 냈을 것이라며 바로 잡아 달라”고 말한다.
조선 당대에 사임당과 함께 맹모에 견줄만한 한국인의 어머니 교육의 힘은 서 성 대감을 정승과 대사헌에 이르게 한 힘이었다고 생각하며, 나는 재실을 내려와 200m 가량 떨어진 서성 대감의 묘로 자리를 옮겼다.

늙은 소나무가 묘를 둘러싼 서 성 대감의 묘는 들판을 가로질러 저 멀리 포천 시가지가 내려다 보였다.
연못을 지나 인조 때 김상헌이 비문을 짓고 오준이 글씨를 썼다는 2m가 넘는 ‘서성 신도비’가 보였다.

그 신도비를 따라 왕의 능처럼 넓은 능의 잔디위에 담장이 왕의 능처럼 디귿자로 두른 곡담과 문인석 하나가 서성 대감을 지키고 있었다.
이 곡담은 왕의 명으로 시호를 받은 특별한 신분만이 담장을 장식할 수 있다고 한다.
나는 서성대감의 묘 앞에 앉아 가져 온 커피를 한 잔 마시며 생각했다.
광해군에게 쫒겨나 귀양 간 경상도 청송 영해에서는 그 마을 아이들을 조선의 인재로 키우기 위해 후학을 양성했다고 한다.
그는 7살적부터 읽어 온 독서 습관은 죽는 날 까지 손에서 책을 놓지 않고 읽었다. 이 때문에 그 마을에는 아직도 서 성 재상이 와서 마을아이들의 글을 가르쳤다고 하여 ‘서잿골’이라는 마을 이름이 남아 있다고 한다.
중국에서도 겨우 40명의 진사를 배출한 해령 진 씨가 당대 제1의 명문가로 인정받았다는데, 서성 이후 대구 서씨의 문과 급제자만 123명을 배출했으니 조선 최고의 명문가임은 당연하다.
문과 급제자에서 지금의 국무총리급인 영의정만 3명, 대제학 3명을 배출했다하니 명문가 중에 명문가이다. 여기에 소과와 무과까지 합치면 300명이 넘는다고 하니 놀랄 수밖에 없었다.

서성 대감의 직계 후손 중에서 강원도 감영의 관찰사만 10명을 배출했다. 그래서 올해도 강원 감영이 있던 원주에서 열리는 관찰사 행렬 축제에 대구 서씨 후손들이 축제에 참여한다고 한다.
한 가문에서 지금의 도지사인 강원도 관찰사만 10명을 배출한 서성의 직계 후손 대구 서씨.
조선으로부터 수백 년이 흐른 지금. 서성 대감의 후손으로 이 곳 종가의 손자들이 서울대와 고려대를 나왔고, 얼마 전 서 성 대감처럼 글을 쓰며 15세에 우리나라 최연소 동화작가로 ‘체리새먼’과 ‘피아노가 되고 싶은 나무’, ‘책읽는 루브르‘ 동화를 쓰면서 영어로 직접 번역해 쓴 영어영재로 세상을 놀라게 한 10대 소녀 서 울(徐 蔚)작가 역시 대구 서씨 만사공파로 서성 대감 직계의 13대손이다.
명문가에서 명문 자손이 난다는 말이 우연은 아닐 듯싶다.
그런 생각을 하는 사이. 구름 하나가 빠르게 언덕을 지나간다.
퇴계가 유성룡과 함께 아끼는 제자였던 서 성 대감의 아버지 함재공. 그러나 퇴계와 쌍벽을 이루며 이기론을 두고 논쟁을 벌였던 이이의 문하생이었던 아들 서 성. 그는 ‘약봉 대감’이라는 또 다른 이름으로 우리에게 알려져 있다.

그러나 서 성 대감을 가르친 그의 어머니 고성 이씨가 없었다면 서성대감도 없었을 것이다. 또한 그의 대구 서씨 후손 역시 이 나라 최고의 3대 명문가로 이름을 오래도록 남길 수 없었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였다.
그리고 지금까지 우리나라 3대 명문가인 대구 서씨를 ‘달성 서씨’로 잘못 알았던 나 또한 더 많은 역사 공부를 해야 한다는 것도 깨달았다.
서성 대감의 시조가 조선의 과거에서 처음으로 ‘대구인’이라는 자신의 출신 성분을 밝히면서, ‘달성 서씨’ 가문에서 나와 ‘대구 서씨’의 시조로 출발해 ‘대한민국 3명 명문가’로 역사에 남은 서 성 대감의 문중을 다시 기억했다.

그리고 아침해가 뜨겁게 달아올라 정오로 치달을 무렵. 언덕에 있는 서성의 묘에서 부는 6월의 바람을 맞으며 나는 서쪽 하늘을 바라보았다.
성품이 강직해 떳떳치 못하다고 생각되면 그 어떤 위협에도 굽히지 않았으며, 화려한 옷을 입지 않을 만큼 검소했고, 미천한 사람 앞에서도 거만하지 않은 것으로 알려진 서성대감.
지금 이 나라에도 그런 인재가 필요하다. 그런 인재가 많아야 강대국과의 외교에서도 살아남을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조선의 과거 같은 검증된 인재의 등용이 필요하다 고 생각했다.

언덕에서 부는 6월의 아침 바람에 풀들이 묘지를 향해 드러눕는 것을 보며 나는 묘지가 있는 언덕을 내려왔다.
그리고 나는 인재를 배출하는 명문가들의 학문 수양이 끊임없이 이어지길 기대하며 서울로 가는 43번 국도를 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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