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징병제 폐지를 위한 시민모임'은 지난 10월 말, 베트남 전쟁을 반대하고자 인트레피트 항공모함을 이탈해 스웨덴으로 망명한 크레이그 W. 앤더슨(Craig W. Anderson) 씨를 만났습니다. 이 만남은 50여 년의 세월을 뛰어 넘은 양심적 병역거부의 만남입니다. 우리는 그동안 세계는 어떻게 변했는지, 각자 신념은 어떤 것이었는지, 전쟁이란 무엇이고, 국가란 무엇인지 등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그 여정의 기록을 독자 여러분과 세 번에 걸쳐 나누고자 합니다. 필자.
① 병역거부자들, '프리즌 파이브'를 결성하다
# 릿쿄대학교 14호관
1.
10월 28일 우리는 릿쿄대학으로 향했다. 릿쿄대학에는 '공생사회 연구센터'(共生社会研究センター)가 있다. 이 곳은 시민 사회운동 자료를 아카이빙해 놓은 곳이다. 물론 베헤이렌과 자테크의 자료도 소장되어 있다.
1968년 미 정보기관 요원으로 의심되는 사람이 단체에 침투, 자테크의 밀항 경로가 발각되면서 홋카이도 경로도 막혔다. 이에 자테크 활동가들은 대담하게도 여권을 위조해 탈영병을 출국시켰다. 당시 탈영 미군들이 사용한 위조 여권도 연구센터에 소장되어 있다.
릿쿄대학 정문을 지나자마자, '애국적 탈영병이 말하는 비전(非戦)-인트레피드의 4인으로부터 50년'이라는 간판이 우리를 반겼다.
릿쿄대학 공생사회 연구센터가 주최한 강연회에서는 1960~70년대 당시 역사의 산 증인들을 볼 수 있었다. 그만큼 베헤이렌은 다양한 사람들이 모여 있는 조직이었다. 이번 행사에 코멘테이터인 김경묵 와세다대학 교수도 있었다.

강연회는 1967년 영상을 상영하는 것으로 시작되었다. 영상에는 츠루미 슌스케 씨와 오다 마코토 씨를 비롯한 베헤이렌 활동가들이 등장하고, 4명의 탈영병이 불합리한 전쟁에 반대해 탈영했다는 발언이 담겨 있었다.
당시 상황 중 흥미로운 이야기가 있다. 베헤이렌 활동가들도 미군 탈영병이 4명이나 등장할 것이라고는 상상하지 못했다고 한다. 물론 인트레피드 탈영병 4명이 등장하기 전 한국군 탈영병 김동회 병장과 한국계 미국인이었던 미군 병사 김진수 일병이 있기는 했지만, 이렇게 본격적으로 탈영병들이 베헤이렌을 찾아온 것은 처음이었기 때문이다. 활동가들도 당시 무척 놀랐다고 털어놨다.
그래서인지 기록을 보면, 베헤이렌의 대처는 신속하긴 하지만 허둥대는 모습도 볼 수 있다. 베헤이렌 활동가들이 탈영병들을 소련을 통해 스웨덴으로 보내기는 했지만, 이들은 소련을 완전히 신뢰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만약 탈영병들을 소력 측에서 스웨덴으로 보내기로 한 약속을 어기고 모스크바에 정착시키려고 하거나, 자신들의 프로파간다에 이용하면 어쩌지?' 하는 불안감이 있었다고 한다. 그래서 이들은 11월 13일 인트레피드 탈영병 4명이 소련을 한창 경유하고 있을 때 도쿄 사학회관에서 탈영병 밀항 사실을 발표한 것이다.
상영이 끝나자, 크레이크 앤더슨 씨의 발언이 시작되었다. 그는 "50년 만에 일본에 와 보니, '달라진 게 있느냐?'고 사람들이 계속 묻습니다. 그래서 가만히 생각해 보니, 그때보다 사람들 키가 좀 더 커졌어요"라며 시작부터 친근한 분위기를 연출했다. 그러면서 "강연장 저쪽에는 내가 깊이 리스펙트(respect, 존경)하는 한국에서 온 병역거부자들도 있다"고 짤막하게 덧붙였다. 강연의 전반적인 내용은 전날 우리와 나눈 이야기의 연장선이었다.
"정부에 대항한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60년대 당시 미국에서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정부를 믿었다. 전투가 벌어지는 데에는 다들 이유가 있다고 생각했다."
앤더슨 씨는 자신이 살아온 이야기를 본격적으로 시작했다.
"나는 산 호세 출신이다. 산 호세는 UC 버클리 근처로, 반전 분위기가 강한 곳이었다. 그러나 수송선을 20시간 동안 타고 간 곳, 그곳에서 제트기가 바로 옆으로 날아다니는 것을 보게 되면, 다시 말해 전쟁터에 도착하게 되면, 그때가 되어서야 모든 것이 현실로 다가온다. 전쟁터에서는, 절대로 도망칠 수 없다.
나는 신호수였는데, 나와 다른 병사들은 베트남에 대해 아무것도 교육받은 게 없었다. 그래서 베트남전에 대해서도 아는 것이 별로 없었다. 하루는 전투기들이 계속 네이팜탄을 싣고 출격했는데, 그에 비해 우리에게 돌아오는 것(반격)은 거의 없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베트남은 인구, 산업, 문화, 언어 모든 부분에서 규모가 작았다. 미국은 거대한 군함과 군대가 있었지만, 베트남에는 자신의 땅을 사랑하는 게릴라뿐이었다. 오로지 게릴라만이 육지에서 미군에 대항했다. 하지만 이 가난한 나라에 대한 우리의 폭격은 계속되고 있었다. 나는 이런 상황을 바꾸고자 했다.
그렇게 뜻이 맞는 3명과 탈영했다. 1967년은 세계 2차 대전 종전 후 20년밖에 지나지 않았고, 일본은 아직 전쟁을 치르는 듯 행복해 보이지 않았다. '(후쿠시마 원폭으로) 우리를 싫어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도 했다.
군복도 신분증도 버린 상태에서 앞으로 무엇을 해야 할지 걱정이 앞섰다. 헌병도 걱정됐고, 일본 경찰도 걱정됐다. 그래서 첫날은 신주쿠의 한 공원에서 잤다. 심지어 돈도 별로 없어서 제대로 된 것을 먹을 수도 없었다. 그렇게 이틀 동안 여기저기를 돌아다니며 숨어 지냈다.
그러던 중 우연히 뉴스에서 경찰과 학생들이 충돌하는 장면을 보았다. 나는 신주쿠에서 뉴스에 나온 군중과 비슷한 머리띠를 두른 청년과 마주쳤다. 반전운동을 하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는 영어를 전혀 하지 못했다. 그러다 만나게 된 사람이 바로 켄지 씨였다. 그의 도움으로 베헤이렌을 만났다. 그 전까지는 베헤이렌의 존재도 몰랐다.
베헤이렌 활동가들은 우리를 두고 심각하게 토론했다. 말은 통하지 않았지만, 반전운동을 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들은 한 역사학자에게 전화했는데, 그가 바로 하워드 진(Howard Zinn)이었다. 하워드 진은 어네스트 P. 영(Ernest P. Young) 씨를 보내서 우리와 만나게 했다. 우리는 우리의 사정을 어네스트 씨에게 말했고, 그는 우리의 탈영을 이해했다."
그는 당시 자신들은 어떤 단체에도 속해있지 않았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언급했다.
"우리 4명은 그때 어렸다. 베헤이렌 활동가들은 우리보다 나이도 많고 경험도 많으며, 성공적인 인생을 살아가는 자신감에 넘치는 사람들이었다. 당시 '평화'라는 것은 어떤 전략이나 정책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마음이 얼마만큼 열려있는지에 달려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우리는 베헤이렌 활동가들과 회의를 반복했지만, 베헤이렌 활동가들도 결국 자신들이 우리를 돕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할지 몰랐다. 아무래도 선택지가 적었다. '북한으로 가야 하나?' 하는 생각도 들었지만 곧 그만두었고, 일단 숨어 지내다가 요코하마에서 소련행 배를 타기로 했다. 우리는 소련을 싫어하도록 교육받았기 때문에 소련행 배를 탄다는 사실이 무척 불안했다. 결국 소련을 경유해 서유럽 중립국으로 망명하기로 했다.
하지만 소련이 어떤 반응을 보일지 전혀 알 수 없었다. 배의 선장을 만났는데, 큰 키에 엄청난 수염을 가진 전형적인 러시아 사람이었다. 스웨덴에 도착할 때까지 우리는 소련에서 6주간 머물렀다. 하지만 스웨덴도 안전하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스웨덴은 미국과의 관계가 있었기 때문에, 스웨덴 정부는 미국에 대한 비판을 하지 않을 것을 조건으로 우리에게 망명자 체류 자격을 보장해줬다. 하지만 우리는 이를 따르지 않았다. 기자들과 인터뷰를 하면서 우리의 탈영 사실을 알렸다.
스웨덴 사람들 대부분도 베트남전에 반대했지만, 스웨덴 정부는 사실상 묵인했다. 나는 수년간 스웨덴에 살면서 많은 생각을 했다. 어제 한국에서 온 친구들과 많은 이야기를 나눴는데, 스웨덴에 있던 시절에도 그들과 같은 병역거부자를 위해 공동성명을 발표하기도 했다."
앤더슨 씨는 이어 '애국적 탈영병'의 의미에 대해 설명했다. 그는 당시 시대 상황도 설명했다. 분명 험악한 시대였다. 그의 말에 따르면, 미국 언론들은 미군의 사망 소식만 보도하고 베트남의 피해는 거의 보도하지 않았다. 그는 베트남에서 미군 5만 8000명이 전사했지만, 베트남인들은 100만 명가량이 목숨을 잃었다고 했다. 그러면서 베트남전 당시 미디어는 객관성을 잃었다고 했다.
1971년 그는 캐나다를 통해 미국으로 돌아갔다. 당시 미국은 베트남전에 대한 염증이 광범위하게 퍼져있던 때였다. 하지만 곧 FBI의 수사망에 걸렸고, 9개월가량 수감생활을 했다. 당시 관련 자료에 따르면, 그는 감옥 안에서 많은 고초를 겪었다. 결국 그는 '불명예 전역'으로 처리됐다.
"베트남 전쟁이 끝나고 냉전(冷戰)이라는 형태가 지속되었지만, 한동안 전쟁이 일어나지 않은 뒤에야 정상으로 돌아가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미국은 1990년대 이후 새로운 전쟁을 시작했고, 중국이라는 새로운 변수가 등장했으며, 북한을 둘러싼 문제도 고개를 들기 시작했다. 앤더슨 씨는 이제 '군비 경쟁의 시대'가 다시 도래했으며, 일본의 재군비 또한 이에 일조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그의 이야기는 다소 장황했지만, 한국인이나 동아시아 시민들이 충분히 참고할 만했다. 중국은 일본이 자신들에게 했던 일을 아직 잊지 않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중국이 일본의 재군비를 마냥 목도할 리 없다. 이는 곧, 동아시아 안보 문제와 연결된다.
내가 앤더슨 씨의 이야기 중 가장 공감한 부분은 일본이 미국에 직접적인 영향을 끼칠 수 있는 게 더는 없을 것이라는 대목이었다. 하지만 일본인 나름대로 내부적으로 할 수 있는 것이 있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그래서 시민들의 정부 감시 필요성을 역설했다.
그는 다시 한번 미국은 베트남전에서 아무런 교훈을 얻지 못했으며, 미국이 베트남전에서 어떤 일을 저질렀는지에 대해서는 아직까지도 거의 보도된 바가 없다고 말했다. 물론 미 국무부가 베트남전 상황을 조사했지만, 보도로까지 이어지지는 않았다. 언론에 등장하지 않은 사건은 대중과 유리(遊離)된다. 그는 미국은 점점 문제의식이 옅어지고 있다고 주장했다.
이어 미국, 중국, 러시아 3개국의 위치를 언급하며 결국 이 강대국들이 전쟁에 관한 이야기가 높아질수록 28개의 나토 가맹국 및 미국의 동맹국들 또한 전쟁을 피할 수 없을 것이라고 했다. 그는 "생각보다 핵전쟁 위협이 먼 이야기가 아니"라며 "이런 상황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게 무엇일까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는 말로 강연을 끝냈다.
2.
잠시 휴식시간을 가진 뒤, 당시 베헤이렌 활동가이자 르포르타주 작가인 고나카 요타로(小中陽太郎) 씨가 마이크를 잡았다. 그는 인트레피드 4명의 영상이 담긴 원본 필름을 가지고 나와 감개가 무량하다고 했다. 고나카 씨는 NHK 디렉터 출신으로 영상을 제작했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인데, 고나카 씨는 1973년 김대중 납치사건 당시 삼엄한 경계를 뚫고 가택연금 상태의 김대중 전 대통령을 취재했다. 그만큼 혈기 넘치는 사람들이 1960~70년대 베헤이렌을 이끌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이어 베헤이렌과 자테크의 핵심 활동가였던 요시오카 시노부 씨가 무대에 올랐다. 그는 베헤이렌의 기관지인 <베헤이렌 뉴스>의 편집장이었다. 당시 <베헤이렌 뉴스>의 전 지면은 거의 탈영병 소식으로 채워졌다고 한다. 그에 따르면, 1967년 10월까지 베헤이렌에는 한 달에 20만 엔 정도의 후원금이 들어왔는데, 인트레피드 탈영병 4명의 등장으로 후원금이 30배 넘게 늘었다고 한다. 요시오카 씨는 웃음 가득한 얼굴로, 당시 탈영병에게 얽힌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려줬다.
"탈영병들을 우리 집에서 재운 적이 있다. 아버지가 교육자이셨는데, 아버지에게 소개했더니 내게 몇 마디하고는 경찰에 신고하지는 않았다. 나름대로 이해심이 깊은 사람이셨다. 나와 탈영병들은 음악에 관한 이야기도 하면서 가까워졌다. 그때 외국인과 대화하는 법을 배운 것 같다."
그는 전쟁이 인간을 어떻게 망가트리는지에 대해 힘주어 말했다.
"나는 베트남, 아프가니스탄, 팔레스타인에 간 적이 있다. 그리고 그곳에서 일상이 전쟁으로 어떻게 망가지는지를 봤다. 국익을 위해서라면 수많은 비밀을 덧씌우는 것이 바로 국가고, 권력이다. 그들이(인트레피드 탈영병 4명) 우리에게 이런 사실을 알려줬다고 생각한다. 많은 사람들의 도움으로 당시 활동이 가능했다. 이것 역시 우리에게는 큰 배움이다. 일본의 재군비는 이미 완성되었다. 이제 일본은 '어떻게 전쟁을 할 것인가'를 생각하는 단계라고 본다. 이제 우리는 이에 어떻게 대항할지를 생각해야 한다."
또한 요시오카 씨는 베트남전은 세계 2차대전 이후 세대들에게 너무 옛날이야기가 되었다며, 이는 새 시대의 군사화와 무관하지 않다고 강조했다.
이날 강연회에 애석하게도 참석하지 못한 사람이 있는데, 바로 자테크 여권 위조 작전의 핵심 인물이었던 다카하시 다케토모 씨다. 다카하시 씨는 노환으로 현재 요양 중이다. 그래서 다른 사람이 그의 편지를 대독했다.
먼저 다카하시 씨는 이런 행사가 열리게 되어 매우 기쁘다며, 자신과 동료들이 탈영병을 도운 것은 우리 모두에게 필요한 일이었다고 했다.
우리는 이벤트가 끝난 뒤에도 한동안 자리를 뜨지 못한 채 많은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나는 오늘 강연회에 참여한 많은 이들에게 '징병 반대' 배지를 나누어 주었다. 요시오카 시노부 씨는 배지를 받아들고는 웃음 띤 얼굴로 이야기했다.
"나도 '죽이지 말라' 배지(殺すな, Don’t kill in Vietnam 로고가 들어간 배지로 당시 오카모토 타로의 디자인으로 유명했다)를 만들어서 배포했다. 감회가 새롭다."
분명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매우 적을 것이다. 하지만 옳지 않은 일에 대항해 일어선 개인은 그 자체로 주변에 반향을 일으킨다. 또 조직화된 개인의 움직임은 그 자체로 새로운 움직임의 시작점이 된다.
앞으로의 세계는 어떻게 변할까. 전운이 감도는 동아시아에서 우리는 어떤 일을 할 수 있을까. 사상과 인종을 떠나 평화를 바라는 마음은 분명한데, 이를 현실화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여러 의문 속에 그래도 확실한 것은 '전쟁은 그 자체로 전쟁일 뿐, 평화와 등가 교환할 수는 없다'는 사실이다. 전쟁 후에 찾아오는 것은 평화가 아닌 초토화이기 때문이다.
50년의 세월을 뛰어넘어 과거와 현재의 병역거부자들이 만났고, 과거와 현재의 평화운동가들이 만났다. 우리는 앞으로가 더 중요하다고 입을 모았다. 그리고 각자의 자리에서 새로운 이야기를, 새로운 평화를, 새로운 전쟁 반대를 이야기해야 한다.
# 에필로그
1.
앤더슨 씨는 요코스카의 미 해군기지 주변 평화 활동가들과 만난 뒤, 오키나와로 향했다. 이제 더는 일본에서 베트남을 향해 폭격기도 항공모함도 출진하지는 않지만, 오키나와 사람들에게 미군기지 문제는 여전히 진행형이다. 그는 오키나와에서 몇 차례 강연을 한 뒤, 헤노코 신기지 건설 반대 농성장도 방문했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경찰이 연좌 중인 시민들을 끌어내는 장면을 목격했다.
후에 전해들은 바로는, 앤더슨 씨는 시민들을 끌어내기 위해 동원된 일본 기동대원들이 미군기지 외부가 아닌 내부에서 나왔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았다고 한다. 그는 "일본 경찰은 국민이 아니라 미군 측에 서 있는가"라고 개탄했다고 한다.
한국에서는 흔한 장면이지만, 생각해 보면 아무리 양국 간 안보협정을 맺었다고 해도 타국의 군대를 위해 자국 경찰이 수족처럼 움직인다는 것은 납득하기 어려운 일이다. 이렇듯 국가권력의 군사주의적 억압은 여전히 오키나와에서 진행되고 있다.
한국에게 오키나와 미군기지는 든든한 후방일 수 있지만, 오키나와 사람들에게는 자신의 삶과 평화를 해치는 것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오키나와에서는 오스프리가 언제 떨어질지, 헬기가 언제 떨어질지 알 수 없는 상황이다. 일본의 1%도 안 되는 땅에 주일미군의 70%가 주둔해 있다. 오키나와에는 언제쯤 완전한 평화가 올까.
앤더슨 씨는 미국으로 돌아가면서 "현재 미국은 다소 암울하지만, 일본을 비롯한 동아시아에서는 전쟁을 막기 위해 취할 수 있는 무엇이 있을 것"이라며 희망의 끈을 놓지 않았다고 한다. 그러면서 일본의 군사화를 저지하기 위해 자신이 할 수 있는 행동을 하고 싶다는 의사를 내비쳤다고 한다.

2.
한국으로 돌아오기 전, 우리는 국제 연대 활동을 하는 'AWC 일본연락회의' 활동가들을 만났다. 징병제와 군사주의뿐 아니라 청년빈곤, 노동문제, 사회문제에 관한 광범위한 이야기를 나눴다.
한국에서는 징병제와 군사주의가 너무나도 신성화되어 있어 이를 비판하면, '군 전력이 약화된다'거나 '국방에 악영향을 끼칠 수 있다'는 비난을 받는다고 말했다. 그러자 일본 활동가가 이렇게 물었다.
"그에 대해 함부로 말할 수도, 의문을 제기할 수도, 개혁이나 폐지를 요구할 수도 없다면, 징병제는 한국인들에게 '천황제'와 같은 것인가?"
순간 움찔했지만, 부인하기는 어려웠다. 군사주의는 언제부터인가 우리 삶에 깊숙하게 뿌리박혀 있으며, 징병제는 마치 오래된 관습처럼 여긴다. 외국인들과 군 관련 이야기를 하다 보면, 대부분의 외국인들은 군대를 잘 모른다. 반대로, 한국 예비역들과 이야기하다 보면 자신의 군 경험을 마치 한국 군대의 모든 것으로 확대해석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그리고는 '외국의 징병제도 한국과 별 차이 없겠거니' 하고 생각한다.
하지만 전혀 그렇지 않다. 군사 문화를 재생산하고, 국가를 위해 구시대적인 군대 문화를 끊임없이 재공급하는 사회 분위기는 오로지 한국에만 존재한다. 그리고 이것은 '휴전 국가', '준전시 상황'이라는 마법과 같은 단어로 정당성을 얻는다.
한국 사람들은 준전시 상황을 가정한 채 70년 가까이 살았다. 그 결과 전시(戰時)가 아닌 평시(平時)가 무엇인지 잊어버린 것은 아닐까? 이런 상황에서는 징병제와 군사주의 비정상이라는 주장을 이해시키기 어렵다.
언젠가는 전시가 아닌 평시에서 살 수 있으리라는 희망을 놓지 않고 있다. 오키나와의 사람들도, 한국의 사람들도, 대추리 사람들도, 앞으로 군대에 가야 하는 청소년들도 모두 평시에서 살 수 있기를 바란다.
돌아오는 비행기 안에서 <아사히 신문>에 실린 크레이그 앤더슨 씨의 사진을 봤다. 신문에는 '프리즌 파이브'가 참여한 강연회 이야기가 실렸다. 전시 상황을 중단시키기 위해 탈영과 망명을 감행했던 앤더슨 씨를 생각하면 일종의 경외감 같은 것이 들기도 하지만, 인생과 평화를 찾아 나서는 데는 이론뿐 아니라 직접적인 행동도 중요하다는 교훈을 얻게 된다.
1967년 10월, 인트레피드 탈영병 4명의 인터뷰는 "이것은 끝이 아니고 시작이다"라는 말로 끝난다. 그 말을 되새기며, 나는 새로운 평화를 위한 움직임이 또 싹트려 한다는 느낌을 받는다. 새로운 맥락, 새로운 위기 속에서 새로운 세대가 새로운 반전의 가치를 이야기할 수 있으리라는 기대로 글을 마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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