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루킹 댓글 조작 사건에서 중요한 문제는 두 가지다. 하나는 온라인 여론 형성에 불법적인 방식으로 관여한 드루킹 김동원과 문재인 대통령 선거운동을 이끌었던 김경수 민주당 경남도지사 후보가 얼마나 긴밀한 관계를 갖고 그런 류의 작업을 도모했느냐는 것이다. 이 문제는 앞으로도 계속 정치권 공방의 중심 소재로 다뤄지겠지만, 여기서 시민이 할 수 있는 일은 별로 없다. 기본적으로 검찰과 법원이 확인하고 판단할 사안인데다 언론이 보도한 사실을 두고 자기 경험과 지지 성향에 비춰 누구 말이 더 옳은지 가늠하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일이 없기 때문이다.
다른 하나는 이 사건을 통해 지금 우리가 생각하는 민주주의에 대한 이해의 폭을 넓히는 것이다. 법이 아닌 정치의 관점에서 드루킹 사건이 의미하는 바를 살펴보자는 것인데, 이 문제라면 시민이든 정치인이든 누구나 쉽게 자기 생각을 밝히기도 좋다. 그렇다면 그 논의의 단초는 어디서 찾을 수 있을까? 댓글 조작, 댓글 알바 같은 현상을 포괄하는 '인조잔디의 정치' 만큼 이 문제를 다루는 데 적합한 개념도 없을 것으로 보인다.
인조잔디 정치는 사이비 풀뿌리 정치
인조잔디 정치(astroturf politics)는 어떤 개인이나 조직 또는 정책이 풀뿌리 시민들의 폭넓은 지지를 받고 있다는 인상을 창출해 그에 대한 신뢰를 높이려는 활동을 일컫는다. 영어 표현 애스트로터프는 인조잔디를 뜻하는데 우리식으로 해석하자면 '사이비 풀뿌리 정치'라고 말할 수 있다. 지금은 정치 영역뿐 아니라 기업 마케팅에서도 널리 활용되고 있지만, 이 말의 정치적 의미는 그것이 처음 사용된 맥락을 통해 쉽게 알 수 있다.
1985년 당시 텍사스 출신 민주당 상원의원 로이드 벤슨은 보험회사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저소득층 건강보험 가입을 확대하는 법률 제정을 주도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 법안에 반대하는 수많은 시민들 명의의 편지와 엽서가 그의 사무실로 날아들었다. 그 우편물 뭉치가 실은 보험회사와 계약한 홍보회사의 작품이라고 판단한 밴슨은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텍사스 출신이라면 누구나 풀뿌리(grass roots)와 인조잔디(AstroTurf)의 차이를 구분할 수 있죠. … 이건 조작된 우편물들입니다." 애스트로터프는 1966년 텍사스주 프로야구단 휴스턴 애스트로스의 홈구장 애스트로돔에 처음으로 깔리며 유명세를 탔지만, 그로부터 20년 후에는 선수들의 부상 위험을 높여 메이저리거들에게는 저주의 대상이 되어 있었다.
미국도 영국도, 보수도 진보도 가리지 않는 인조잔디 정치
민주주의에서는 일반 시민의 관심과 지지가 정당성의 원천으로 받아들여지기에 이와 같은 홍보 전략은 점점 더 폭넓게 활용되었다. 물론 여기에는 인터넷과 함께 블로그, 트위터, 페이스북 같은 소셜미디어 문화의 확산이 기여한 바도 컸다.
미국에서는 2003년 'GOPTeamLeader.com'이 사이트 방문자들에게 부시 대통령을 지지하는 내용의 샘플 편지에 서명해 그것을 지역신문에 투고하면 상품으로 교환 가능한 포인트를 적립할 수 있도록 했다. 이로 인해 100여 개의 지역신문 독자투고란에 서로 다른 사람이 서명한 동일한 내용의 편지가 실렸다. 진보적 시민운동단체인 'MoveOn.org' 역시 이와 유사한 방식으로 마이클 무어의 영화 <화씨 9/11>을 홍보했다.
이뿐만이 아니다. 오바마 대통령의 경제정책에 반대하는 시민들의 자발적 운동으로 알려진 티파티(Tea Party)는 사실 보수 성향의 로비스트들이 조직하고 폭스 뉴스가 홍보한 기획의 산물이기도 하다. 2016년 대선에서는 보트(bot)라는 프로그램을 통해 트럼프에 호의적인 동일 메시지가 대량 트윗되는 일이 벌어졌고, 클린턴과 트럼프 진영 모두는 우리가 흔히 댓글 부대라고 부르는 '풀뿌리 트위터단'(grass-roots tweeters)을 조직하고 조련해 선거에 활용했다.
미국만큼이나 민주주의 전통이 깊은 영국에서도 사정은 다르지 않았다. 블레어-브라운 시대 노동당 정부는 자기 당원들로 하여금 "보통 시민처럼 행세하며" 지역신문에 기고하고 서투른 손 글씨로 쓴 깃발을 가지고 선거운동이나 집회에 참여하도록 독려했다. 금융 위기 당시 은행가들에게 주는 보너스에 반대해 대중적인 항의를 조직했던 존 프레스콧의 온라인 캠페인도 아래로부터의 자발성을 십분 활용했지만, 실제 그 운동은 노동당의 네 번째 임기를 위한 활동을 펼치던 조직 'GoFourth.co.uk'이 주도했다. 브렉시트 투표가 임박한 시기에도 자동화된 트윗과 청원이 수만 개씩 온라인을 떠돌아다니며 EU 탈퇴에 대한 국민적 지지가 실제보다 더 많은 것처럼 보이게 했다.
인조잔디의 문제는 어떻게 해결할 수 있을까?
시민인 것처럼 보이지만 시민이 아닌 사람들이 사실을 왜곡하고 여론을 조작하며 대표 선출과 정책 결정에 영향을 미치는 활동을 어떻게 막을 수 있을까? 선거를 준비하는 사람들이 그 유혹을 쉽게 뿌리칠 수 있을까? 온라인 활동의 익명성이 문제라고 하지만 점점 더 발전하는 첨단기술 시대에 공개는 얼마나 강제할 수 있을까? 그럼에도 시민의 양심이나 홍보기획 회사의 기업 윤리에 호소하며 강력한 법적 규제를 시행하는 방법은 어떨까? 분명 필요한 일이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해 보인다.
사실 기술 발전이 아니어도 아래로부터의 참여와 위로부터의 동원을 구분하기는 생각만큼 쉬운 일이 아니며 어느 편이 더 바람직한지 판단하기도 어렵다. 명절 동안 지역구에 갔다 올라온 국회의원이 유권자들과 나눈 대화를 빌어 자기 입장을 밝힐 때, 그것은 지역구민의 의견일까 그들을 대표한다는 의원의 의견일까? 드루킹이 매크로를 활용하지 않고 민주당 활동가로서 자기 당 지지자들을 규합해 자기 당 후보에게 호의적인 기사에 더 많은 선플을 달고 더 널리 퍼다 나르도록 하는 일을 무슨 근거로 비난할 수 있을까? 18대 대선 당시 문재인 후보 지지자들에게 노란 옷을 입지 말고 유세장에 모이도록 한 탁현민의 결정은 현명한 기획일까, 교묘한 트릭일까?
홍보회사 <보너 앤 어소시이트>의 설립자 잭 보너는 고객 회사가 바라는 정책에 대해 경제적 이해관계가 없는 이른바 '흰 모자' 시민들을 찾아내 그들로 하여금 그 정책을 지지하도록 조력하는 사업을 펼쳤다. 디트로이트의 자동차 제조사들이 에너지 효율적인 자동차를 만들도록 하는 법안에 대해 그는 소형 자동차를 불편하게 느낄 만한 노년층과 장애인들을 조직해 반대 서명을 모으고 그들 명의로 편지나 엽서 등을 의원들에게 보냈다. 보너는 자동차 회사뿐 아니라 중대형 자동차를 선호하는 시민들을 위해 일하고 그 대가를 받은 것은 아닐까?
해법은 민주주의를 풍성하게 이해하기
인조잔디 정치는 민주주의의 양면성을 보여주는 활동 가운데 하나이다. 민주주의에서 최고 권력을 지닌 주권자는 평범한 보통 사람들이다. 그러나 풀뿌리 시민의 권능을 찬양하고 그들의 참여를 칭송할수록 그 외양과 이미지만 따온 인조잔디 정치의 영향력도 커질 수밖에 없다. 선량한 시민과 사악한 기득집단의 대립 구도를 통해 작동하는 포퓰리즘의 시대는 겉으로는 시민을 상찬하고 안으로는 엘리트 이익을 증진하는 인조잔디의 정치가 그 어느 때보다 왕성한 시기이기도 하다. 특히나 한국과 같이 아래로부터 운동을 통해 민주화를 이뤄내고, 광장의 촛불 시민이 대통령을 구하기도 하고 벌하기도 하는 나라에서 풀뿌리에 대한 기대와 인조잔디에 대한 유혹은 다른 어떤 나라보다 크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민주주의는 시민 주권, 시민 참여만으로 단순화될 수 없다. 왜냐하면 민주주의는 '시민에 대한 시민의 통치'의 줄임말이기 때문이다. 통치는 공동체를 구성하는 우리 시민들의 견해와 이익이 서로 다른 데서 비롯된다. 그렇다면 중요한 것은 그 다양한 생각들이 자유롭고 폭넓게 표출되도록 하는 것이다. 차이의 인정과 다양성의 보장이 먼저이고 참여의 자발성은 그 다음 문제이다. 현대 사회에서 통치는 엘리트와 시민의 협력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시민 참여만 강조한 나머지 시민이 선출한 대표를 무시하는 것은 오케스트라에서 지휘자의 역할, 전쟁에서 사령관의 역할을 무시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어느 경우나 혼돈과 무질서, 패퇴만 남을 뿐이다. 시민에 대한 시민의 통치에서는 설명 책임(accountability)의 원리도 중요하다. 무엇이 왜 어떻게 기대와 부합하는 결과를 만들어내는지 늘 토론하고 설득해야 할 뿐만 아니라 예상과 다른 결과가 나타났을 때도 그에 대한 설명이 있어야 한다. 이 역할은 풀뿌리와 인조잔디를 구분하며 서민들에게 더 많은 의료 혜택을 제공하려 했던 로이드 벤슨 같은 정치인의 몫이지 일반 시민이 할 일은 아니다.
아래로부터 자발적인 시민 참여만으로 민주 정치가 발전하고 불평등이 완화된 경우는 없었다. 영국에서도 미국에서도 시민 참여가 지금만큼 강조된 적도 없지만 사회경제적 불평등이 지금만큼 심각한 적도 없었다. 그 속에서 권력은 점점 더 정부 관리와 거대 기업과 로비 집단으로 넘어가고 있다. 한국 또한 다르지 않다. 시민 참여를 강조했던 이른바 민주 정부에서 그 시작에 대한 기대와 끝에서 온 실망 사이의 간극은 어느 정부보다 컸다. 그러나 우리는 그 사실을 쉽게 잊은 채 다시 한 번 '국민주권시대'를 내세운 정부에 이전보다 더 큰 기대를 걸고 있다.
어떻게 풀뿌리 혁명에 대한 확신과 시민 권력 축소가 함께 나타날 수 있을까? 분명 그 답의 일부는 인조잔디 정치가 민주주의를 호도하고 불평등을 조장한 데서 찾을 수 있다. 그럼에도 우리가 인조잔디를 완전히 제거한 채 살아갈 수는 없다. 다만 그 폐해를 줄이기 위해 민주주의를 좀 더 풍성하게 이해하고 실천하는 것, 참여의 자유와 함께 대표와 책임의 연결 고리를 튼실하게 만들 수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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