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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산 안창호의 애국창가운동과 애국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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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도산 안창호의 애국창가운동과 애국가

[애국가에 무슨 일이 일어났나] 11

애국가에 무슨 일이 일어났나? 지금 우리 애국가에는 두 가지 은폐된 진실과 한 가지 전도된 사실이 있다. 은폐된 진실의 하나는 애국가 작곡자 안익태가 심각한 수준의 친일파이자 친나치 부역자로 그러한 사실을 우리 국민들에게 철저히 숨겨왔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그의 애국가 곡조가 불가리아 민요를 표절한 것임에도 끝까지 감춰왔다는 것이다. 한 가지 전도된 사실은 애국가 작사자 문제이다. 세간에는 윤치호 작사설이 우세하지만 임진택 씨는 도산 안창호 선생이 애국가 작사자임을 명백히 증명할 수 있다고 자신한다. 문화운동가이자 창작판소리 명창인 임진택 씨는 "안익태 애국가는 우리 민족의 수치"이지만 안창호 선생의 애국가 노랫말은 우리 민족의 심금을 울린 위대한 가사로 평가받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지난해부터 안익태 곡조 대신 '아리랑'에 애국가 가사를 얹어 부르는 '아리랑 애국가' 운동을 펼치고 있는 그는 '아리랑 애국가'로 민족 정기를 되찾고 장기적으로는 국민들의 뜻과 지혜를 모아 한국을 진정으로 대표할 수 있는 애국가를 만들어야 한다고 역설한다.(☞ 관련 기사 : "친일파 애국가 대신 '아리랑 애국가' 불러야 할 때")

다음은 연재 순서.(편집자)

1. 두 개의 감춰진 진실과 한 개의 뒤집힌 사실

2. 애국가, 언제 어떻게 생겨났나?

3. 안익태의 두 얼굴 - 애국가 작곡 : 친일·친나치 행각

4. 하나씩 벗겨진 안익태의 거짓말

5. 안익태 애국가 곡조의 불가리아 민요 표절설

6. 애국가 작사자 논쟁 – 안창호인가 윤치호인가?

7. '애국가 작사자 조사위원회(1955)' 활동의 전말(顚末)

8. 윤치호 ‘애국가 작사설’ 물적(物的)증거에 대한 검토

9. ‘안창호 애국가 작사설’ 전문증거(傳聞證據)에 대한 검토

10. 애국가의 원형 ‘무궁화노래’의 진실

11. 도산 안창호의 애국창가운동과 애국가

12. 애국가 노랫말에 담긴 뜻 – 애국가 시상(詩想)

13. 만신창이가 된 우리의 애국가, 이제 어찌할 것인가?

14. '아리랑 애국가'로 민족정기 되살리자

1. 도산(島山) 사상의 '혁명적' 성격

도산 안창호 선생은 한국 근대사에서 정치가 사상가 교육가 조직운동가 독립운동가 등의 다양한 활동을 하면서 민족의 단합과 독립을 위해 헌신하시다 일제(日帝)의 잔악한 고문과 투옥의 후유증으로 세상을 떠나신 분이다.

나는 작년 이후 우연히 <애국가>에 관심을 갖게 되면서 특히 작사자 문제에 의문을 품고 자료들을 찾아보다 그동안 가까이 생각지 못했던 안창호 선생의 인품과 행적을 꽤 많이 알게 되었고, 지금은 이분을 존경하는 마음이 크게 우러나고 있다. 아직 그분의 깊은 사상(思想)들, 애기애타(愛己愛他) · 활사개공(活私開公) · 대공주의(大公主義) 같은 심오하면서도 원대한 철학의 깊이와 넓이를 다 안다고 할 수는 없지만, 일단 정치적 입장에서 나는 우리 대한민국(大韓民國)의 진정한 국부(國父)는 도산 안창호 선생과 백범 김구 선생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내가 도산 선생의 행적에 관련해 특히 관심 갖게 된 내용은 두 가지이다. 하나는 도산 사상의 '혁명적(革命的)' 성격이다. 나는 그동안 도산 선생을 인격 수양에 바탕을 둔 도덕적 교육계몽운동가 정도로만 여겨왔는데, 그게 아니었다. 도산 선생은 1905년 을사늑약으로 국권을 사실상 강탈당한 후, 당시로서는 파천황(破天荒)적인 '주권재민(主權在民) 공화국(共和國) 건설'이라는 미증유(未曾有)의 혁명사상을 포지(抱持)하고 이를 실천한 인물이었다.

윤정경 씨가 <동해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닳도록 시상(詩想)과 도산 안창호>라는 책에서 도산 선생의 언술(言述)을 전한 윤형갑님의 구술(口述) 내용을 보면, 도산 선생은 '해외 독립기지 건설'이라는 과제를 대단히 중요시한 바, 그런 생각을 갖게 된 미국에서의 경험담이 무척 흥미로웠다. 도산 선생은 미국이라는 나라가 영국을 떠나 이민(移民) 온 사람들이 자신들이 살고 있는 땅을 독립기지로 삼아 전쟁을 거쳐 새 나라를 세운 과정을 의미심장하게 관찰하였던 것 같다.

그런가 하면 그렇게 해서 세운 미국이라는 나라에서 원주민인 인디언들이 백인들의 침탈(서부 개척)에 맞서 싸우다가 몰살(沒殺)당한 사례를 보고, 정당한 항거를 위해서는 힘을 기르고 때를 기다려 혁명전쟁 역량을 비축할 필요성을 절실히 느꼈던 것 같다.

사실 우리나라도 동학농민전쟁 과정과 의병투쟁 과정에서 무력(武力)의 열세(劣勢)로 강도(强盜) 왜적들에게 얼마나 처참한 살육을 당했는가 돌이켜보면, 독립운동 기지 건설과 혁명전쟁 역량 비축은 필수적인 과제였다.

2. 청년 안창호의 애국가사(愛國歌詞) 짓기

나에게 관심을 불러일으킨 또 다른 안창호 선생의 행적은 일제(日帝)의 국권 침탈 이후 선생이 열렬하게 전개한 '애국가사 짓기'와 '애국창가운동'이다.

1) 안창호 최초의 애국가사 '무궁화노래'

'애국창가운동'의 시작은 1890년대 후반 독립협회 시절 '애국가사 짓기 운동'에서부터 비롯되었다고 볼 수 있다. 조선 혼(魂)을 앗아가는 단발령(1895년 11월)을 목격한 10대 후반의 청년 안창호는 서울로 올라와 독립협회에 가입하여 서양 문물을 비롯한 세상 물정에 눈뜨고, 밀러학당(민노아학당←언더우드학당←구세학당)에서 기독교 찬송가를 통해 서양음악을 처음 접하게 된다.

시가(詩歌)에 감수성이 예민했던 청년 안창호는 찬송가의 노랫말과 곡조가 이를 부르는 이와 듣는 이에게 강한 영성적 효과를 발휘함을 알게 되었다.

청년 안창호는 찬송가·찬미가뿐 아니라 '노래로 하는 말'인 '창가(唱歌)'가 공동체의 화합과 단결, 민족 정서의 고양(高揚)에 막강한 영향력을 줄 수 있음을 깨닫고 본인이 직접 가사를 짓고 곡조를 붙여보는 작업을 시도하게 된다. 그 첫 번째 시도로 밀러학당 밀러 목사의 글짓기 시간에 '독립문 주춧돌 세우는 날 함께 부를 노래'로 안창호가 써낸 노랫말이 '무궁화 삼천리 화려강산, 조선사람 조선으로 길이 보전하세'라는 '무궁화노래'였다.

1896년 11월 독립문 정초식(定礎式) 뒤풀이 단합대회에서 스코틀랜드 민요 '올드 랭 사인' 곡조에 얹어 여타의 애국가들 속에 섞여 처음 선보인 이 '무궁화노래'는 참여자들로부터 뜻밖의 큰 호응을 받았다. 그리하여 다음 해인 1897년 8월 '조선 개국 505년 기원절' 행사에서는 배재학당 측에서 명망가 윤치호로부터 노랫말을 받아 '무궁화 삼천리 화려강산, 조선사람 조선으로 길이 보전하세' 후렴으로 노래함으로써 공식적으로 '무궁화노래'라는 명칭을 얻었다.

그리고 2년 뒤인 1899년 6월 이 '무궁화노래'가 배재학당 방학 예식에서 4절로 정리되어(완성되어) 불림으로써 '성자신손 오백년은 우리 황실이요'로 시작되어 '대한사람 대한으로 길이 보전하세'로 끝나는 '무궁화歌1'이 완성된다.

이렇게 완성된 '성자신손 무궁화歌'는 1910년 한일합병으로 국권을 완전히 상실할 무렵까지 10여 년 동안 국민들 사이에 대표적인 '애국가'로 널리 불리게 된다. 그러다가 1907년 '성자신손'을 대체하여 '동해물과 백두산이'로 시작하는 새로운 '무궁화歌'가 나오자, 달라진 시대 상황(군주국→공화국) 속에서 이 새로운 노랫말이 국민들 가슴속에 파고들어 대표 <애국가> 자리를 넘겨받는다.

혹자는 1878년생인 안창호 선생의 연배(年輩)를 들어 불과 18~19세 나이인 1896~97년에 <애국가>를 만들 수 있었겠느냐는 의문을 제기하는 이가 있는데, 이는 그릇된 견해이다. 왜냐하면 현행 <애국가>는 누가 대번에 작사와 작곡을 완성해서 내놓은 것이 아니고, '무궁화 삼천리 화려강산' 후렴이 먼저 착상되어 '무궁화노래'라는 민요적 틀이 먼저 형성되고 거기에 여러 사람의 본가사 노랫말이 들고나다가 2~3년 만에 '성자신손 무궁화노래(무궁화歌1)'로 완성되어 한번 보급되고, 다시 '동해물과 무궁화노래(무궁화歌2)'로 대체되어 널리 퍼져서 정착한 노래이기 때문이다.

'무궁화노래'를 착상할 때 안창호의 나이는 18세였지만, '동해물과 무궁화歌'가 완성된 1907년에 안창호 선생의 나이는 29세였다.

참고로 비교하자면 내 친구 중에 김민기라는 가객(歌客)이 있는데, 김민기가 불후의 명작 '아침이슬'을 착상한 것은 18세 고등학생 때였고, 세상에 내놓은 것은 19세 대학 1학년생일 때였다.

2) 청년 안창호의 문학적·음악적 탁월성 – 점진가(漸進歌)

안창호 선생이 일찍부터 문학적 · 음악적으로 얼마나 뛰어난 감각을 가지고 있었는지 알 수 있는 좋은 예로 '무궁화노래'뿐 아니라 그가 작사한 '점진가(漸進歌)'를 꼽을 수 있다.

선생은 19세가 된 1897년에 독립협회에 가입하고 관서지부에서 활동했는데, 그해 평양 쾌재정(快哉亭)에서의 만민공동회(萬民共同會) 연설은 청년 안창호가 얼마나 담대하고 뛰어난 연설가였는지를 보여주는 명장면으로 전해오거니와, 2년 뒤인 1899년 독립협회가 해산되자 평남 강서군 바위꽃마을에 '점진학교(漸進學校)'를 설립한 바, '점진가(漸進歌)'는 '점진학교'의 교가(校歌)이다.

점진 점진 점진 기쁜 마음과

점진 점진 점진 기쁜 노래로

학과를 전무(전념)하되 낙심 말고

하겠다 하세 우리 직무를 다

이 '점진가'를 어떤 곡조로 불렀는지는 알려지지 않지만, 노랫말만 가지고도 우리는 <어문일치(語文一致)의 쉬운 우리말 가사>, <동어(同語) 반복(反覆)을 통한 점층적 고양(高揚)>, <문장 도치(倒置)에 의한 결연한 의지>, <제창(齊唱)에 적합한 간략한 문장과 압축된 운율> 등의 문학적·음악적 특징을 잡아낼 수 있다. 얼마나 탁월한 교가(校歌)이고 창가(唱歌)인가?

이때 안창호의 나이는 불과 21세였다.

3. '무궁화노래'와 배재학당 '협성회'와의 관계

'무궁화노래'가 형성되고 확장되던 1896년~99년 기간 중 배재학당 자체 행사는 물론이고 국가적 규모의 행사에 주도적으로 기획 또는 관여된 조직으로 '협성회'라는 단체가 유력시된다. '협성회'는 1896년 11월 배재학당 학생들 10여 명이 모여 결성한 일종의 학생 동아리(서클) 조직이던 것이 점차 외곽으로 참여 인원을 넓혀 1898년에는 배재학당 출신 아닌 타 회원들까지 가입하여 300명에 이르는 세를 과시한 국민계몽 사회단체이다.

이 협성회의 회원으로 우리가 아는 이름으로는 이익채와 이승만이 있다. 두 사람 다 이 단체의 회장직을 맡은 경력이 있는데, 이익채는 '협성회 무궁화歌'라는 국한문 혼용체의 가사(歌詞) 자료를 남김으로써 '협성회'와 '무궁화노래' 간 친밀한 관계를 증빙한 인물이다.(<한국학보> 1982 겨울호 참조) 그런데 바로 이 '협성회'에 당시 배재학당 출신 아닌 밀러학당(민노아학당←언더우드학당←구세학당) 출신 안창호가 '찬성원'으로 가입해 있었음이 뒤늦게 밝혀졌다.

▲ 자료1. 배재학당 '협성회'의 1898년 당시 회원과 찬성원 명단. <배재 100년사> 91~92쪽.


애국가 연구에 있어 '안창호 작사설'을 강력하게 주장하고 있는 안용환 교수의 견해에 의하면, '협성회'는 배재학당에서 강의를 맡은 서재필이 외국학생들의 자치 활동을 소개함으로써 태동한 모임으로, 자주민권운동의 정치적 성격을 띠고 만들어진 우리나라 최초의 학생서클이다.

'협성회'는 세가 불어나면서 정규 회원뿐 아니라 외곽지원 동참세력인 '찬성원'으로 확대 구성하게 되는 바, 밀러학당 출신 안창호가 이 '협성회'에 '찬성원'으로 가입하면서 배재학당과 활발한 교류를 하는 계기가 된다.

'협성회'를 통해 청년 안창호는 자신이 작사한 '무궁화노래'의 공동창작과 보급에 협력관계를 갖게 될 뿐 아니라, 이 무렵 배재학당의 교사였던 남궁억 선생과도 교류하면서 이후 '무궁화 사랑과 보급운동'을 함께 벌이는 친분 관계를 갖게 된다.

안용환 교수의 이 같은 견해는 매우 신빙성 있고 설득력 있다고 판단된다.

이런 관점에서 '무궁화노래'의 생성 및 완성 과정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현행 '애국가'는 밀러학당 학생 안창호가 창작한 무궁화 노랫말을 후렴으로 해서 '올드랭사인' 곡에 맞추어 부른 민요(民謠) 형식의 '무궁화노래'가, '협성회'라는 단체의 인맥을 통해 배재학당의 대표 애국가 레퍼토리로 취택됨으로써 1차 완성된 충군 황실가로서의 '무궁화歌1'이, 10년 후 민족지도자로 성장한 도산 안창호가 본가사를 시대에 맞는(군주국→공화국) 새로운 노랫말로 교체하여 주권재민 국민가로 혁신(革新)한 '무궁화歌2'로 재차 완성된 것이다.

4. 안창호와 신민회(新民會)의 애국창가운동

도산 안창호 선생의 애국창가운동에 관해서는 이명화 박사(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수석연구위원)의 선행연구가 있으므로 이번 항(項) 글은 이명화 박사의 연구에 바탕하여 내 생각을 전개한 것임을 미리 밝혀둔다.

1) 주권재민 애국가 '무궁화歌2'의 화창(和唱)과 보급

1900년대 초 미국에 유학을 갔던 안창호는 뿌리뽑힌 삶을 살아가던 한인동포들의 어려움을 보고는 유학공부를 중단하고 한인노동자들을 교육하고 훈련하며 함께 '공립협회'를 만들었다. '공립협회'는 '독립협회'의 발전적 계승이다. 그러다가 1905년 을사늑약으로 일제(日帝)에 나라를 빼앗기자, 안창호는 국권을 회복하여 독립된 새 나라를 세울 결심을 하고 1907년 1월 캘리포니아에서 대한신민회(大韓新民會)를 결성한다. 그리고는 곧바로 대한신민회 전권위원(全權委員) 자격으로 일본을 경유하여 2월 20일 조국에 돌아왔다.

안창호는 입국하자마자 <대한매일신보>의 주필 양기탁과 상동교회 목사 전덕기 등 애국지사들을 만나 곧바로 신민회(新民會) 결성을 추진한다.

신민회 조직을 위해 안창호는 3월 초부터 관북지방 일대를 여행하며 유세하고 다녔다. 이때에 안창호는 선천교회를 방문, 윤형관 집사를 비롯한 동지들을 만나 규합하던 중, 그가 10년 전에 지은 '무궁화노래'가 이곳까지 퍼져서 찬미가로 불리는 것을 목격한다. 선천 지역 사람들이 그들 나름대로 자기 상황에 맞게 '백두산 돌이 다 닳고 두만강 물이 마르도록(白頭山石磨刀盡 豆滿江水飮馬無)' 하는 노랫말로 부르는 것에 크게 느낀 바 있어, 안창호는 바로 평양으로 와서 이틀간 금식기도하면서 '동해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닳도록'으로 시작하는 4절짜리 애국찬미가 노랫말을 만들어 선천교회로 보내준다.

이 무렵 안창호는 서울과 평양에서 각종 연설회를 가지면서 의무교육의 중요성과 국민의례의 필요성을 역설한 바, 특히 3월 18일에 서울 균명학교에서 학생들에게 행한 배기창가례(拜旗唱歌例)에 관한 연설은 주목할 만하다. 이날 안창호는 자신이 새로 지은 '동해물과 백두산이' 애국가 노랫말을 갖고 처음으로 학생들과 함께 화창(和唱)하며 보급을 시작하였다.

▲ 자료2. 1955년 애국가작사자조사자료 중 안창호 애국가 화창 사례.


도산의 일거수일투족이 일제 통감부의 감시 대상이었으므로 신민회(新民會)는 비밀결사로 출범할 수밖에 없었다. 도산의 회고에 의하면 평북지방은 이승훈이, 평남지방은 안태국이, 함경도 지방은 이동휘가 관장하여 비밀 회합을 주선하며 회원들을 조직해나갔다.

항일의병이 전국적으로 번져가는 중에 신민회는 이제 국권 회복이라는 사명에 앞서 본격적인 독립운동에 뛰어들어야 했다. 교육·언론·출판·종교·문화 등 각 방면에서 실력을 양성해 통일적인 구국운동을 점진적으로 전개하는 일에 병행하여, 상황은 이제 바로 독립전쟁 단계로 전환하지 않으면 안 되게 되었다.

이런 정세 속에서 신민회 활동은 신민회 이름이 아닌 표면단체인 학회와 교육단체, 그리고 사립학교들의 교육운동을 통해 활발하게 전개되었다. 다행히 애국계몽운동기에 설립된 대부분의 근대 학교들이 필수 교과와 함께 창가(唱歌)와 체조(體操) 과목을 설치함으로써 창가교육이 일반화되었고, 신민회는 이를 활용해 애국창가운동을 구국운동(救國運動)의 일환으로 적극적으로 펼쳐나갔다.

일제 통감부는 정서적으로 한국민이 하나가 되어 통일되고 단합하는 것을 두려워하고 훼방하려 하였다. 이에 대해 안창호와 신민회는 배기창가례(拜旗唱歌例)를 보급하여 애국가를 제창케 하고, 합동운동회를 개최하여 우리 국민의 애국심과 단결심을 고취함으로써 일제에 대항할 힘을 비축해 나갔다.

신민회 계열 조직이 기획한 대규모 연합운동회에 수천 명이 운집하여 일제히 애국가를 부르는 장면은 일제(日帝)에 큰 경계 대상이었다.

안창호는 독립협회 때부터 민간에 유행하기 시작하여 이미 '국민가'의 반열에 올라선 '무궁화歌'를 황제에 대한 충성의 노래가 아닌 주권재민 '국민 애국가'로 바꾸어내는 시도를 한다. '무궁화歌'의 노래 골격은 그대로 유지한 채, 주권재민의 시대 의식을 담아내어 자신의 의지와 염원을 달구는 새로운 노랫말로 가사를 교체하는 운동을 매우 의도적으로 시도한 것이다.

이 애국창가운동의 중심지는 1908년 안창호가 평양에 세운 '대성학교'였고, 외곽으로의 보급 확장은 '신민회' 조직을 통해서 이루어졌다.

2) 또 다른 애국가 '긴 날이 맛도록' 작사(作詞)와 보급(普及)

문학과 음악에 뛰어난 감각을 지녔던 청년지도자 안창호는 이처럼 '국민 애국가'로서 '무궁화노래'의 재창조를 꾀하면서 동시에 또 다른 다양한 애국가들을 만들어내는 일을 쉬지 않고 추진하였다.

그 무렵 안창호가 작사하여 보급한 또 다른 애국가로는 1908년 2월 일본 유학생들이 내는 잡지 <태극학보>에 '애국생(愛國生)이라는 필명으로 발표한 '긴 날이 맛도록'이란 '애국가'가 있다.

애국가를 또 만들었다? 이는 무엇을 뜻하는가?

안창호에게는 '애국가'가 특정한 하나의 작품에 대한 '고유명사'가 아니라 각기 다른 상황에서 다양한 방식으로 민족혼을 일깨우고 나라사랑을 북돋우는 모든 '애국의 노래'를 통칭하는 '보통명사'였던 것이다.

안창호가 작사한 '거국가'나 '한반도가' 같은 노래도 각기 고유명사로서 제목을 갖고 있지만, 보통명사로 치면 '애국가'의 범주에 들어간다고 해야 할 것이다. 그런 관점에서 볼 때 현행 <애국가>의 고유명사는 '무궁화歌'이고, '긴 날이 맛도록'으로 시작하는 애국가에 고유명사를 준다면 '나라사랑 노래' 정도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이 노래의 가사는 다음과 같다.

1절. 긴 날이 맛도록 생각하고

깊은 밤 들도록 생각함은

우리 나라로다 우리 나라로다

길이 생각하네 길이 생각

4절. 태산이 변하여 바다 되고

바다가 변하여 돌이 된들

나라 사랑하는 내 맘 변할손가

길이 불변하네 길이 불변

5절. 내 나라를 내가 사랑하지

누가 내 나라를 사랑할고

내 몸이 죽어도 내 나라 보존해

길이 보존하세 길이 보존

여섯 절로 되어있는 노랫말 중 세 절만 발췌해본 것인데, 가사를 보면 '민족의 터전인 이 나라를 길이 사랑하고 보존하자'는 염원을 간절히 담아낸 내용들로, 이 가사를 읽고 있노라면 나라 걱정에 잠 못 이루는 작가 자신의 모습이 떠오른다.

안창호는 이 작품을 태극학보에 투고하면서 보통명사 '애국가'로 명명(命名)하고, 그 곡(曲)으로는 1895년에 발행된 찬송가집 '찬셩시'의 '하나님 가까이' 곡조를 지정하였다. 다시 말해 애초 이 노랫말을 지을 때 찬송가 '하나님 가까이' 곡조에 맞추어 말을 놓아가며 운율(韻律)을 짰다는 뜻이다.

'하나님 가까이'는 미국 찬송가의 아버지로 불리는 로웰 메이슨 작곡으로, 기독교인이 아니라도 누구나 들으면 금방 알 수 있는 익숙한 곡조이다.

여기 악보를 제공할테니 한번 불러보시기 바란다.

▲ 자료3. 애국가 '긴 날이 맛도록' 악보. <항일음악 330곡집> 118쪽.

주목할 점은 이 노래의 가사에 '동해물과 백두산이'로 시작되는 애국가 즉 '무궁화歌2'의 노랫말과 서로 통하는 시어(詩語)들이 곳곳에 등장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예를 들어보자.

무궁화歌2 -애국가- 긴 날이 맛도록

동해물, 백두산 = 태산, 바다

마르고 닳도록 = 바다 되고 돌이 된들

길이 보전하세 = 길이 보존하세

바람 이슬 불변함은 = 길이 불변하네

나라 사랑하세 = 내 나라를 사랑하지

괴로우나 즐거우나 = 내 몸이 죽어도

두 작품이 거의 같은 시기에 나왔음을 생각할 때, '무궁화歌2'의 작사자와 '긴 날이 맛도록'의 작사자가 동일인임을 우리는 분명히 감지할 수 있다.

3) 안창호 作 심주가(心舟歌)의 민요적 특성

청년 안창호는 1908년 2월 관인구락부에서 열린 대한협회총회에서 '우리 한국의 전도(前途)는 여하한가'라는 주제의 강연을 하였는데, 강연 자체도 감동적이었지만 말미에 스스로 지은 노래 '심주가'를 불러 참석자들을 더욱 감동시켰다고 전한다. 이에 관한 기사는 <대한매일신보> 1908년 2월 12일 자에 실려있고, 노래 가사는 1914년 간도 지역 광성중학교에서 간행된 '최신창가집'에 수록되어 지금까지 전해온다.


▲자료4. <대한매일신보> 1908년 2월 12일 자 기사.

▲ 자료5. <광성중학교 최신창가집> 1914년, 127쪽 .

이 노래의 가사를 요즘 말로 옮겨보면 다음과 같다.

어야지야 어서가자 모든풍파 무릅쓰고

문명계와 독립계로 어서빨리 나아가자

멸망파에 든자들아 길이멀다 한탄말고

희망키를 굳이꽂고 실행돛을 높이달아

부는바람 자기전에 어야지야 어서가자

'심주가'는 우리 민족의 위기를 풍파 속의 배에 비유하여, 모두 한마음으로 서로 힘을 합쳐 난관을 뚫고 저어가 문명독립을 이룩하자는 노래이다.

이 노래는 노동은 편저(編著) <항일음악 330곡집>에도 재수록되어 있는 바, 작사자는 안창호이고 작곡자는 미상(未詳)으로 나와 있다.

나는 이 노래를 청년 안창호가 강연 후에 즉석에서 직접 불렀다는 사실을 염두에 두고 그 상황을 상상해 보았다. 그러면서 이 노래의 곡조를 되풀이 읊어본즉, 이 노래는 작곡자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전통민요의 하나인 '뱃노래'를 원용(援用)하여 불렀으리라는 심증을 갖게 되었다.

우선 이 노래의 박자에 관한 것인데, 4/4박자로 채보되어 있는 이 노래는 우리 장단의 잦은모리 삼채가락이다. 그러므로 이 노래를 부를 때 북이나 장구를 쳐주거나 풍물 장단을 맞춰주었다면 훨씬 더 흥이 났을 것이다.

악보를 보면 특히 놀라운 기교는 사설 중에 둘째 소절 '문명계와 독립계로 어서 빨리 나아가자'의 경우 다른 소절보다 두 배 분량의 사설을 걸어놓음으로써 두 배 빠른 느낌으로 몰아가고 있다는 점이다. '빨리 나아가자'라는 사설의 이면(裏面)을 살리려는 경쾌한 말붙임 기법인 바, 보통 솜씨가 아닌 것이다.

그다음에 이 노래의 선율에 관한 것인데, 이 선율은 누가 작곡했다기보다 실제 불린 '뱃노래' 곡조를 채보(採譜)한 것이라는 느낌을 강하게 주고 있다. 이 노래의 기본 선율은 어촌(漁村) 민요 '뱃노래'의 '메기고 받는' 선율이다. 주선율(主旋律)의 음높이를 보면 이 노래의 선율은 '노래한다'기 보다 '소리한다'에 더 가까운, 이를테면 '내지르는' 음정(音程)들로 구성되어 있는 것이다.

나는 '심주가'라고 하는 이 노래가 1898년 관인구락부에서 처음 불려질 때 안창호 혼자 부른 것이 아니라 '창자(唱者)가 메기면 청중들이 받는' 민요 형식 '뱃노래'로 불리었으리라 추정한다. 처음과 마지막에 배치되어 있는 '어야지야 어서가자'라는 노랫말은 이 노래의 '후렴(後斂)' 또는 전렴(前斂)으로서 청중 모두 함께 불렀을 가능성이 높다.

안창호 선생은 청년 시절부터 찬송가뿐 아니라 우리 민요에 관심을 많이 가지고 있었고, 노랫말 작사나 선곡(選曲)에 있어 민요적인 양식(樣式)과 청중과의 공감대(共感帶) 형성을 매우 중요하게 생각했던 것 같다.

그리고 그러한 미적(美的) 가치가 창작에서부터 보급 확장까지 가장 성공적으로 발현된 사례가 바로 '무궁화노래'였던 것이다.

5. '무궁화歌'로서 <애국가>의 미적(美的) 특성

애국가 작사자 논쟁에 관련된 증인들 중에서 최남선·이광수·주요한 세 사람은 대체로 같은 견해를 보였다. 세 사람은 우선 모두 우리나라 문화·언론계에서 두각을 나타낸 인물이라는 것, 세 사람 모두 도산 안창호 선생과 가까운 사이로 신민회 시절부터 임시정부 활동까지 한때 독립운동을 했다는 것, 세 사람 모두 아쉽게도 막판에 친일 부역을 했다는 점에 있어 공통된다.

그런데 이 세 사람이 또 애국가 작사자가 도산 안창호임을 은연중에 비추고 있는 점이 공통된다. 똑 부러지게 밝히기에는 안팎으로 사정이 있었을 터, 그럼에도 그들은 대체로 "도산 선생이 많은 애국가를 지었으며, 그 중 '동해물과 백두산이'로 된 애국가가 가장 잘된 작품"이라는 취지로 증언하였다.

그렇다면 '가장 잘된 작품'이란 무슨 뜻일까?

첫째는 민요(民謠)적 발상이다.

청년 안창호는 애초부터 '무궁화 삼천리 화려강산, 조선사람 조선으로 길이 보전하세'라는 노랫말을 본가사가 아닌 후렴으로 배치했다. 전통민요의 '받는 소리'를 먼저 창안한 것이다.

안창호 선생은 자신의 전언(傳言)에서 "이 노래가 민요처럼 퍼져나가기 바란다"는 말을 했다고 한다. 그러면서 "본가사를 누구라도 더 만들어내고 바꿀 수 있어야 혁명적인 가사가 나올 수 있다"는 말까지 했다고 한다. 민요의 핵심을 꿰뚫은 말이다. ''받는 소리'는 공동체의 단일성과 통합을 담지(擔持) 하는 요소이고 '멕이는 소리'는 개개인의 창발성을 보장하는 요소'라고 하는, 민요 구연(口演) 방식의 핵심을 안창호 선생이 진즉에 꿰뚫고 있었던 것이다.

예를 들어 애국가 작사자의 한사람으로 거론되기도 한 음악인 김인식 씨가 작사한 또 다른 애국가 1절 "화려강산 동반도는 우리 본국이요, 품질좋은 단군자손 우리 국민일세"라는 본가사가 만주 간도 지역에서는 '동해물과 백두산이' 애국가 만큼이나 많이 불렸다는 사실이 이를 증명한다.

바로 그러한 민요적 특성을 기대하고 열어놓았기 때문에 '무궁화歌1'이 성립될 수 있었고, 또 '무궁화歌2'로의 교체가 이루어질 수 있었던 것이다.

둘째는 이 노랫말을 '올드랭사인' 곡에 입혀 부르도록 한 발상이다.

'올드랭사인' 곡조의 선택이 청년 안창호의 판단이었는지, 밀러목사의 권유였는지, 아니면 또 다른 어떤 음악가의 추천이었는지 알 수 없지만, 나는 이것이 안창호 자신의 결정이었으리라고 추정한다. 왜냐하면 '무궁화노래'는 가사가 먼저 만들어져서 곡을 붙인 것이 아니라, 원곡을 먼저 있어 이를 감안하고 가사의 운율을 맞추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앞서 '긴 날이 맛도록'이라는 또 다른 애국가 작품을 태극학보에 투고하면서 안창호 자신이 찬송가 '하나님 가까이' 곡조를 지정했다는 사실이 이를 증명한다. 다시 말해 작사자 안창호는 '무궁화노래'나 '긴 날이 맛도록'의 노랫말을 지을 때 외국 민요든 찬송가든 어떤 특정곡(올드랭사인, 하나님 가까이)을 염두에 두고 그 곡조에 맞추어 말을 놓아가며 운율(韻律)을 짠 것이 틀림없다.

그렇다면 '올드랭사인'의 어떤 특성이 '무궁화노래'를 돋보이게 했을까?

우선 그 민요의 생성지인 스코틀랜드라는 지역의 정치적 환경이 우리나라와 유사했으므로 정서적 일체감을 느낄 수 있었던 측면을 고려했음직하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설명이 안 되고 구체적으로 음악적 특성이 어떻게 작동했는지 살펴볼 필요가 있는 바, 나의 생각은 이렇다.

① '올드랭사인' 노래의 구성이 4소절로 되어있고 그 전개가 A→B→C→B로 진행되고 있다는 점이다. 이것은 춘하추동 사계절을 사는 사람들에게 기본적으로 체화되어 있는 리듬이며, 우리의 오래된 악가무(樂歌舞) 시서화(詩書畵)의 기본원리인 기승전결(起承轉結)의 전개와 일치한다.

비교하자면, 우리에게 가장 친숙한 '아리랑' 곡조도 똑같은 4소절에 A→B→C→B로 전개된다.

② '올드랭사인' 노래의 선율이 단조(短調-minor)여서 나라를 잃은 우리 민족의 설움을 담아내는 데 적합했음은 당연하거니와, 그보다 더 핵심적이고 적합한 요소는 음계(音階)의 동질성에 있다. 서양음악은 기본적으로 7음계로 진행되는데 반해 우리 음악은 기본이 5음계이다. 그런데 '올드랭사인'의 음계가 7음계보다는 5음계에 가까운 음정(音程)으로 되어있어 그것이 우리 국민의 정서에 맞아떨어졌던 것이다.

'무궁화노래'의 곡조로 '올드랭사인'을 선택한 것은 '신의 한 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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