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로부터 자신의 존재를 부정당한 채 미래조차 꿈꿀 수 없는 아이들. 바로 이 땅을 살아가는 미등록 이주아동들의 모습이다.
이들은 부모의 체류자격으로 인해 출생과 성장과정에서 마땅히 누려야 할 권리와 필요한 보호를 제대로 받지 못하고 있으며 자아정체성 확립과 미래를 준비해야 할 청소년기에는 각종 공식 영역에 등록할 수 없는 것은 물론 참여와 소속감에서 소외, 배제를 일상적으로 경험하고 있다. 무엇보다 가장 큰 문제는 현행 국내법 체계 안에 미등록 이주아동이 합법적인 체류자격을 얻을 수 있는 경로가 없다는 것이다. 이에 2012년 17세 몽골학생 강제추방 대책활동으로부터 시작된 이주인권단체, 공익법단체 활동가들의 모임인 '이주배경 아동청소년 기본권향상을 위한 네트워크'에서는 2019년 5월부터 10월까지 유엔아동권리협약의 ‘아동이익 최우선’의 관점에 입각한 미등록 이주아동 체류권 실태조사를 진행했다.
실태조사는 미등록 상태 혹은 체류가 불안정하여 체류권을 보장받지 못하는 이주아동, 청소년과 부모를 면접조사하여 체류상태가 이들 개인의 삶과 사회에 미치는 영향을 살펴보고 해외 법제도를 통해 체류권 보장을 위한 제도, 정책적 대안을 제안하였다.
‘미등록이주아동·청소년- 우리 안의 그들의 이야기’는, 실태조사에서 이들이 연구자들에게 직접 들려준 경험과 생각의 일부라도 한국 사회에 직접 전달함으로써 우리 사회가 이들 아동청소년들을 그저 이렇게 놓아만 두는 것이 능사는 아님을 인식하고 그 해법을 함께 찾자고 제안하기 위하여 정리, 집필한 것이다. 현실만이 아니라 우리 사회를 위한 해법에 도움이 되고자 해외정책도 포함하였다.
무엇보다 미등록 이주아동 청소년들의 이야기가 단지 보고서의 기록이 아닌 살아 숨쉬는 사람들의 생생한 이야기로 들려지고 느껴질 때 우리 모두 그 해법을 향해 나아갈 수 있다는 믿음으로, 아동청소년들의 현황과 실태, 10명의 아동청소년들이 한국사회에 보내는 육성, 외국의 정책 사례, 한국사회의 해법 등으로 나눠 총 14회에 걸쳐 연재할 예정이다.
조시 "컴퓨터 자격증도 따고 싶고 한국에서 계속 살고 싶어요"
조시는 한국에서 태어나 다른 나라에는 한 번도 가 본적이 없이 오직 한국에서만 살아 온, 앞으로도 한국에서 계속 살고 싶다는 중학교 2학년 남학생입니다.
전 아빠와 엄마와 함께 살고 있고 두 분은 필리핀에서 오셨습니다. 저에게 누나가 있다고 들었는데 필리핀에서 살고 있습니다. 누나는 한 번도 만나 본 적이 없습니다. 사진으로만 얼굴을 익혔습니다. 어린 시절 형제 없이 혼자 자랐기에 교회에서 만나는 친구들과 학교 친구들과 제일 많이 놀면서 자랐습니다.

지금까지 살면서 친구들과 다르다고 생각해 본 적이 없습니다.
초등학교를 다닐 때는 학교 수업이 끝나면 친구들과 어울려 학원에 갔고 태권도도 같이 배우고 집에 친구들을 데리고 오고 저도 친구네 집에 가서 놀기도 했습니다.
친구들은 저의 부모님이 필리핀 사람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그 이상으로 궁금해 하거나 질문도 없었습니다. 아빠가 친구들에게 필리핀 음식을 해 주면 맛있게 같이 먹었습니다. 저도 친구들 집에 가면 친구 부모님들이 다른 친구들과 똑같이 대해 주셨습니다.
제가 미등록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은 초등학교 4학년쯤인 것으로 기억합니다. 학교에서 친구들과 놀다가 제가 작은 사고를 일으켰는데 아빠가 사고 치면 안 된다고 하면서 우린 미등록이라고 흔히 이야기하는 불법체류자라고 알려주었습니다. 그땐 불법체류자가 무엇인지 잘 몰랐는데 6학년 때 아빠에게 다시 이야기를 들으며 좀 더 자세히 알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그때도 불법이라는 것이 어떤 것이고 사고를 치면 안 되는 것으로만 알고 있었지 부모님과 제가 어떻게 된다는 것은 잘 몰랐습니다.
그래서인지 어렸을 때는 심리적으로 힘들지는 않았습니다.
하지만 요즘은 가끔 불공평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저도 한국에서 태어났고 지금까지 한국에서만 살아왔는데 왜 한국사람에게만 주민번호가 있고 저에게는 주민번호가 없는지 답답하고 하고 싶은 것을 못하니 차별받는 생각까지 듭니다.
지금의 중학교 친구들은 제가 비자가 없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비자가 없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정확히는 잘 모르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인지 친구들은 지금까지 저를 다르게 대하는 상황은 없었습니다.
비자가 없다는 것, 제가 미등록 청소년이라는 것에 가장 불편한 것은 친구들은 다 하고 있는 인터넷 쇼핑을 할 수 없고 게임을 좋아하는데 회원가입도 할 수 없고 제 이름으로 통장개설도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전 키도 크고 덩치도 커서 인터넷으로 옷을 사지 않는다면 멀리 나가서 사야 합니다. 제가 사는 동네에서는 제 몸에 맞는 옷을 살 수가 없습니다. 정말 많이 불편합니다.
일상생활에서 오는 불편함에 답답함과 차별이 느껴집니다.
초등학교와 중학교를 다니면서 저를 배려해 주시는 선생님과 친구들을 많이 만났습니다. 초등학교에서부터 지금까지 수학여행은 버스 타고 가는 곳만 갔었고 보험을 가입해야 할 때는 담임선생님께서 도움을 주셨기에 큰 어려움은 없었습니다. 만약 지금 중학교에서 제주도로 수학여행을 간다면 못 갈 수도 있겠다라는 생각은 하고 있습니다.
중학생이 되고 학년이 올라가면서 요즘은 제가 차별을 받고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드는 일이 점차 생기고 있습니다.
친구들과 똑같이 잘못을 했어도 저만 더 조심하라는 말을 듣고 억울한 일이 있어도 참고 넘어가야하는 상황이 생기고 있습니다. 일이 커지면 곤란해지니까요.
아빠가 학교에 오셔서 담임 선생님께 사과를 하는 모습을 보았을 때는 정말 죄송했습니다. 다 같이 잘못을 했어도 저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안 되기에 다른 친구들의 부모님보다 저희 부모님들이 더 사과하는 모습을 볼 때 답답하고 죄송하고 불공평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도 지금까지 살면서 제가 미등록이고 불법이어서 엄마와 아빠에게 불평하거나 화를 낸 적은 없었습니다. 그냥 부모님이 미등록이니까 나도 그렇구나 하는 생각만 하고 있었습니다. 어렵거나 의논할 일이 생기면 제가 같이 이야기 할 사람은 아빠밖에 없어서 아빠에게 불평하는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비자도 없는 미등록인 제가 대학을 갈 수 있을까요? 대학을 갈 수 있을지 없을지 모르는 상태여서 딱히 미래에 대해 계획을 세우거나 하지는 않고 있습니다.
만약 대학을 갈 수 있다면 정말 가고 싶습니다. 컴퓨터쪽으로 자격증도 따고 싶고 일도 하고 싶은데 시험을 볼 수 없어서 속상하기만 합니다.
만약 대학을 못 간다 해도 필리핀으로 돌아갈 생각은 안 해 봤습니다. 부모님은 필리핀이 고향이시니 돌아가신다 해도 저는 한국에 남고 싶습니다. 한국에서 계속 살았기 때문에 필리핀으로 가서 산다는 생각을 하면 걱정과 두려움이 생깁니다. 집에서 한국어로만 말을 하고 있어서 전 필리핀 말도 모르고 한 번도 가보지 않은 나라여서 여행은 모르겠지만 가서 살아야 한다면 걱정이 됩니다.
만약 제가 좀 더 자란 후에 부모님이 필리핀으로 돌아간다 해도 전 한국에 남고 싶습니다. 한국에서 컴퓨터쪽으로 일도 하고 돈도 벌며 계속 한국에서 살고 싶습니다.
정부에서 제가 마음 편하게 공부하고 대학도 갈 수 있도록 비자를 주었으면 좋겠습니다.
부모님이 저 때문에 불안 해 하지 않고 저도 하고 싶은 공부를 끝까지 하며 안심하고 학교를 다녔으면 합니다. 나라에서 우리 같은 아이들을 위해 도움을 준다면 정말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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