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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칼럼] 과학기술 시대, 진심과 솔직함의 공동책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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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칼럼] 과학기술 시대, 진심과 솔직함의 공동책임

현대는 인간의 공통욕망 돈과 정치권력을 쥐려는 노력이나 그 견제를 위한 고통과 대립이 주로 표현되는 세상이 되었다. 일반적으로 실제 삶은 그것들이 주가 아니지만 대체로 그것만으로 표현한다.

돈과 정치에 덜 종속되는 삶의 문화는 점점 작게 표현되는 세상이다. 메스컴과 인터넷 정보 소통이 많아지고 빨라지면서 대립은 부각되고 차별지능은 강력해지는 변화다.

갈수록 뇌 시상하부를 자극하는 쪽으로 가고 있는 것이다, 공격적이고 그 공격성을 감추는 두려움과 공포의 편도체는 점점 활성화 되는 뫼비우스의 띠에 갖혀 버린건 아닐까?. 거친 야생에서 생존을 위한 직접 폭력이 돈과 권력의 쟁취하는 능력으로 진화하고 구체성에서는 차별과 혐오, 배제와 편파라는 상대적 폭력이 증가하는 건 아닌지.

스티븐 핑거는 "우리 본성의 선한 천사"에서 전쟁 폭력 살인등 직접 폭력은 줄어들고 있다고 통계와 논리를 제시했다. 그러나 직접 폭력이 줄든 만큼 보이지 않는 형태의 폭력과 빈부격차등 집단 간 집단에 의한 억압으로 상대적 폭력은 고도로 진화한 것이다.

"지능 없는 악이나 폭력 없다"는 말처럼 그 지능은 육체적인 직접 폭력을 넘어서 연성폭력으로 생태적, 경제, 문화, 정치에서 제도와 법률 속에 교묘하고 공고히 자리 잡은 일상이다, 이제는 누구도 이것이 잘못이라고 말해도 소용없는 상태고 마치 경쟁 사회의 당연한 구조거니하고 받아들이고 있는 것 같다.

이런 현상은 전세계적으로 여야, 진보보수, 선진국 후진국 가리지 않고 일어나고 있으며 과거의 사회, 정치, 경제이론들로는 정확히 설명하지 못하는 무언가를 않고 있음을 모두 직감하고 있으나 새로운 현상에 대해 그것을 설명을 못하고 아름아름하며 갑갑해하고 있다. 근래 들어 각종 과학 미래 서적과 새로운 사회현상 설명에 관련된 서적들이 유행하는 이유도 무관하지 않다고 볼 수 있다.

지금 인류가 걸어가고 있는 길은 노마드 이정표에 만족하지 않고 3D의 입체감으로 확인하고 싶어 하는 것이다. 인간의 모든 것들은 결국 정치와 문화로 총화된다. 그리고 "맥락 없는 정치 문화 없다". 과학도 정치와 문화의 맥락에 서로 상응한다. 지난 수천 년 간 종교와 정치 문화가 그랬듯.

르네상스 이후 기존 종교적 정치와 문화의 맥락에서 벗어나 과학에 의한 정치와 문화의 맥락으로 자리잡아가고 있다. 종교 2000년 과학 겨우 200년이다.

과학과 기술을 토대로 한 우주와 자연 기반의 정치 문화 맥락은 이제 시작을 하고 있다. 이 총화는 어떤 형태가 될지 한참을 더 가야한다.

단지 지금 확실히 알 수 있는 것은 르네상스 이후 종교적 맥락에서 벗어난 과학 기술에 의한 정치 문화의 맥락은 아직 제대로 시작도 안했다는 것이다. 과확이 주체가 된 정치와 문화는 어떤 총화(맥락)를 남기게 될까?

흔히 종교니 르네상스니 앞에 지나간 것들 자유 평등 인권등 비교적 잘 정리되지만 아직 닥치지 않는 미래에 관해선 의구심과 두려움으로 대하는 인간의 속성 때문에 더 그렇다. 과학기술의 시대의 자유 인권(박애) 평등은 어떤 모습이 될까? 다른 무엇은 없을까?

사람들이 문화를 찾는 것은 총화와 맥락에 흐르는 진실과 솔직함을 보기 때문이다. 또 다른 총화요 세상의 맥락인 정치의 진실과 솔직은 어떤가? 민주주의가 그간 얼마나 진보 했을까? 그 결과인 법과 제도엔 과거의 왕권과 신권의 일방에서 집단 간 또는 집단에 의한 편파라는 흔적의 흐름과 맥락만 남긴 건 아닐까?

인간이 도전과 모험 희망 앞에서 의구심 두려움을 극복하고 보다 나은 또는 위대한 뭔가를 찾고자 한다면 진심과 솔직함 뿐이다. 창의성도 그것과 함께해야 한다.

불완전하고 결점이 있다고 아무 것도 하지 말라, 그대로 있어라 할 수는 없다, 그래서 진심과 솔직함이 필요한 이유기도 하다. 도전과 모험 희망 앞에서 의구심 두려움을 극복하고 보다 나은 또는 위대한 뭔가를 찾고자 한다면 말이다. 진심과 솔직함이다.

인간에게 입체감이란 해석의 자유를 위해 모호함을 더하는 예술가와 감상자의 교류 같은 것일지도 모른다. 쉴 때 작동하는 뇌(내면을 볼 때). 일할 때 작동하는 뇌(세상을 볼 때) 일상에서 두개는 함께 작동하는 일이 거의 없다. 두 가지 뇌가 한꺼번에 작동하는 때가 예술을 감상할 때이다.

정치와 문화의 맥락이 갖는 힘이 이런 것은 아닐까.

지금 인류가 원하는 것은 예술가의 작품 창작과 감상자가 연결되는 것 같은 뇌의 활동처럼 총화된 입체적 교류를 원하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과학의 시대 진심과 솔직함은 환경 생태문제처럼 소비자와 생산자, 계획가(정치및 학자)들의 공동책임 같은 것이다. 과학은 그자체가 진심과 솔직함을 내포한다. 공동책임(함께)은 이 시대의 또 다른 맥락이 아닐까? 무책임의 반대말이다.

차 없는 날을 함께 만들어가자. 플라스틱을 줄이자. 고기를 덜 먹자. 투표에 꼭 참여하자. 이웃을 소외시키는 일(부동산 투기등)을 살며시 하지말자. 재생과 재활용에 더 친해지자.

높은 자 힘 있는 자들은 자각과 각성으로 더 나은 생태계를 위한 연구에 투자하자. 지속적인 생태계와 공동체를 위한 정책에 개인의 개입을 최소화하자. 크게 더 많이 보다 조화와 지속에 가치를 더 두자.

더 이상 소비자는 광고나 정책의 다스림의 대상자인 대중이 아니고 기획자와 기업가는 책임만 지는 자리도 아니다. 민중으로 참여는 요구나 비판만하고 상대에게 전가하며 서로를 부품으로 취급하지 않아야 한다, 이미 주체이고 공동책임의 일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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