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현대사는 이념갈등으로 인한 국가폭력으로 격심하게 얼룩지고 왜곡되어왔습니다. 이러한 이념시대의 폐해를 청산하지 못하면 친일청산을 하지 못한 부작용 이상의 고통을 후대에 물려주게 될 것입니다. 굴곡진 역사를 직시하여 바로잡고 새로운 역사의 비전을 펼쳐 보이는 일, 그 중심에 민간인학살로 희생된 영령들의 이름을 호명하여 위령하는 일이 있습니다. 이름을 알아내어 부른다는 것은 그 이름을 존재하게 하는 일입니다. 시간 속에 묻혀 잊힐 위기에 처한 민간인학살 사건들을 하나하나 호명하여 기억하고 그 이름에 올바른 위상을 부여해야 합니다. <프레시안>에서는 시인들과 함께 이러한 의미가 담긴 '시로 쓰는 민간인학살' 연재를 진행합니다. (이 연재는 문화법인 목선재에서 후원합니다) 편집자
침묵 56년, 그리고 증언
#. 17세 소년
전쟁이 났다 했지만 조금은 고요한
1950년 7월 어느 무더운 날이었다.
경기도 안성군 보개면 기좌리 머린골산 자락이었다.
허름한 옷을 입은 17세 소년이 도로 옆에서 풀을 베고 있었다.
325번 지방도를 벗어난 군 트럭 두 대가
흙먼지를 매달고 언덕을 올라오고 있었다.
소년은 본능적으로 건너편 수풀 사이로 몸을 숨겼다.
군인들은 트럭에서 흰옷을 입은 사람들에게 빨리 내리라 소리쳤다.
미리 장소를 살핀 듯 군인들은
양손이 머리 뒤로 결박된 흰옷 입은 수십 명을
길옆 도랑까지 오리걸음으로 올라가게 했다.
소년은 숨을 멈추고 지켜봤다.
소년의 손에는 풀을 베던 낫이 쥐어져 있었다.
군복을 입은 사람들은
양손이 머리 뒤로 결박된 이들을 오리걸음으로 도랑까지 올라가게 한 다음
양편에서 서서 총으로 쏘았다.
20여 분간 수십 발의 총성이 울렸고
산에선 뿌연 연기가 피어올랐다.
소년은 눈을 질끈 감았다.
밤마다 악몽에 시달린 소년은 한동안 그 근처에도 가지 못했다.
#. 73세 노인
중절모에 지팡이를 든 주민 유병완 씨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
망설이는 사이 56년이 훌쩍 지났다. 그 일이 있고
그 근처는 얼씬도 하지 않았다.
입에 담는 것조차 금기시했다.
무심코 입을 열었다가도 급히 입을 닫기도 했다.
그런 날이면 한밤에 누군가 잡으러 올 것 같은 두려움에
이불을 뒤집어썼다. 귓가에 와서 소쩍새가 울었다.
소쩍새 울음 끝에 까무룩 잠이 들면 악몽을 꾸었다.
며칠 후 장재울을 따라 지독한 냄새가 흘러내렸다.
썩는 냄새가 사방에 진동하자
마을 어른들은 어른 키 정도 되는 도랑을 흙으로 메웠다.
비 오듯 땀이 흘러내렸지만 아무도 말을 하지 않았다.
서로의 눈빛을 외면한 채 집으로 돌아갔다.
봄마다 그 주변에 고사리가 많이 자랐지만
누구도 고사리를 꺾으러 가지 않았다. 아니 못했다.
철없는 동네 아이들이 칡뿌리를 캐다 사람의 뼈가 나오기도 했다.
어디에서 날아왔는지
소나무 한 그루 그 일을 증언하는 듯 자랐다.
그날 그 일을 아는 사람들이 곁을 떠나자
노인은 어제처럼 생생한 그 일을 입에 올렸다.
지팡이로 가리키며 그날 그 장소를 가리켰다.
#. 60세 시인
노인의 증언이 있고 다시 15년이 흘렀다.
목격자가 있다면 기초조사를 벌인 뒤 유해 발굴 여부를 검토하겠다고 했지만
그새 현장을 목격한 노인도 흙으로 돌아갔지만
변한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현장을 찾기 위해
노인의 사진과 기사 한 장을 들고 면사무소를 찾았다.
지방공무원은 친절했다.
이장의 아내도 친절했다.
6·25전쟁 중에 태어난 동네 노인도 친절했다.
노인의 손가락을 따라 다시 325번 지방도로 나와
너리굴문화마을 가는 길로 접어들었다. 길 오른쪽
녹슨 컨테이너가 아니었으면 그냥 지나칠 뻔했다. 잡초 우거진 사이로
소나무 한 그루 우뚝했다. 언덕 아래로 굽은 몸을 숙이고 있었다.
허름한 비닐하우스가 발굴을 위한 것인지는 불분명했다.
길가에 흰 영산홍 한 무더기 활짝 피어있었다.
길 건너 폐가 쪽에서 나비 떼가 날아와 앉았다.
적막한 한낮이 파닥파닥 소나무 그늘을 일렁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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