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가 오시네, 오! 감사합니다!
왜 안오시나. 왜 안오시나.
봄 가뭄은 늘 길었다. 길어서 새들도 꺼이꺼이 목이 메일 만큼 대지가 말랐다. 그래도 찔레꽃은 하얗게 피었다. 내 어릴 적 할머니는 열무 씨를 꺼내놓고 마루 끝에 앉아 그렇게 비를 기다렸다. 기다리면 끝내 비는 오고, “오! 비가 오시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할머니는 두 손을 모으셨다.
내 어린 시절 어느 봄날의 단상이다. 그 시절 비록 가난하였고 배는 고팠으나 하늘과 땅 사이에 감사한 마음은 충만하였다. 하늘이 내어준 산과 들에 몸을 의지하고 햇빛과 바람과 물에 당신의 노고를 더하고 그리고 하늘이 허락한 만큼의 열매에 감사하였다. 입추가 지나 몸에 한기가 들 때쯤 떨어지는 알밤 한 알도 우물에 넣고 부엌에 놓고 장독대에 놓고 천지신명께 감사하였다. 대추 한 알 감 하나도 그러하였다. 그리고 그 후 오십여년이 흘렀다. 오늘.
산을 끼고 도는 길가 알밤도 감도 차로 그냥 갈아버리고 다닌다. 불과 한 생이 가기 전 오십년 사이에 벌어진 이 엄청난 간극이 무섭지 아니한가?
침략과 약탈을 기반으로 한 서구 물질문명, 그리고 거기서 잉태된 자본주의는 태생적으로 폭력성이 흐를 수밖에 없고 그 체제를 호흡하고 사는 우리의 심상 또한 수백년 된 아름드리 나무를 눈 하나 깜짝 않고 베어내는 엔진톱처럼 사나워지고 자동차 바퀴처럼 무심해졌으니.
그 먼 길을 어떻게 걸었을까
산허리를 싹둑 잘라내고 달리는 지금 여기서 그 시절을 보면 어떻게 그 강을 건넜을까 싶다. 그러나 그 시절 배는 고팠고 추웠고 고단하였으나 너무나 당연한 일상이었으므로 먼 길을 걸어도 멀지 않았고 먼다 한들 걸어서 못가는 데 또한 없었으며 늦는 법도 없었다. 돌고 돌아 가는 길에 건너는 징검다리 또한 불편하지 않았다. 외나무 다리는 기다렸다 건넜다.
여름에는 매미소리 시원한 나무 그늘만으로 좋았고, 등줄기 서늘한 등멱만으로도 한 여름 저녁이 족하였다. 문고리 쩍쩍 늘어붙는 추운 겨울날도 할머니가 내어주는 아랫목에 손을 넣으면 언 몸이 녹았고 졸음도 밀려왔고 화로불 냄새가 좋았다. 배는 고팠으나 못 참을 만큼은 아니었고 춥기는 추웠으나 울고 싶은 만큼은 아니었다.
그것으로 살만한 삶이었다. 당연한 일상이었음으로. 본래 물질은 목을 축여주고 허기를 달래주고 추위를 덜어주고 생명을 유지시켜주는 귀한 것이었으나 지금은 반대로 너무나 당연한 것이 되어서 흔하다 못해 먹다 버리고 쓰다 버려 이제 우리의 생존을 위협하는 독이 되었으니 악마의 배설물이 따로 있겠는가.
신열을 못잡으면 죽는다
수천 수만년의 인류 역사에서 근대 문명은 새참 들 새도 되지 않는다. 그 사이 인류의 위대함을 신 앞에 증명하였고, 인류에게 풍요를 선물하였으나 너무 과하였고, 과하였음에도 인간은 족할 줄 모르고 오히려 갈급해지기만 하였으니 근대문명은 실로 득보가 해악이 크다.
그 댓가로 지구는 신열을 앓고 있다. 사람의 몸이 그러하듯 생명이 있는 것은 신열이 가장 위험한 신호다. 사람도 신열을 못잡으면 죽듯 지구 또한 그러하다. 사람의 힌열은 명의가 잡지만 지구의 신열에는 명의가 없다. 오직 원인 제공자 죄 지은 자, 인류의 각성만이 길이다.
그러함에도 어제와 오늘이 같다면, 저를 위해 평생을 어떠한 노고도 마다하지 않은 어미가 내일을 장담할 수 없이 신열을 앓고 있는데, 어미 몰래 통장을 빼내어 어제 밤도 그러했듯 오늘도 유흥가를 배회하는 철없는 그 사내와 무엇이 다르겠는가.
세상의 규칙은 힘을 가진 자가 만든다. 이미 그 규칙에 맞는 조건을 갖춘 자가 힘을 가진 자다. 그리고 그 규칙이 정의다. 조건을 갖춘 자들은 규칙에 따라 더 크고 더 넓고 더 많은 것을 차지한다. 아니 나누어 가진다. 아주 자유롭고 공정하게 나누고 그리고 세습한다. 세습은 더 좋은 조건이 된다. 그래도 세상은 자유와 평등과 평화가 강물처럼 흐른다.
그렇게 살고 싶다
내 할머니는 정의라는 말을 모르고 사셨다. 자유라는 말도 경쟁이라는 말도 공정이라는 말도 다양성이란 말은 더더욱 모르고 사셨다. 그저 한 인연으로 세상에 나와 허리 굽은 당신의 수고로움은 셈하지 않고 춘하추동 이십사절기 때를 기다려 씨뿌리고 때 맞추어 하늘이 주는 대로 거두며 오 비 오시네 감사합니다 그렇게 살다 가셨다.
넉넉지 않은 살림에도 혹 올지 모르는 누구를 위해 늘 밥 한 그릇을 더 해 놓으라 이르셨다. 누군가는 왔다. 세끼 다 먹기 어렵던 그 시절에도 동네마다 얻어먹는 사람 실성한 사람 한 둘은 품고 살았다.
그렇게 살고 싶다. 그런 삶을 볼 수 있어서, 기억할 수 있어서 행복하다. 나는 현재 세상을 지배하는 모든 개념어들을 인정하지 않는다. 서로 부합하지 않는 두 단어를 조합하여 이미지화하고 그 이미지가 현실을 지배하고 그 속에서 가치가 만들어지는 이 허구의 세상을 나는 인정하지 않는다. 자유와 평등, 자유와 경쟁, 공정과 경쟁 등이 특히 그러하다. 원리가 허구이므로 그 곳에서 나오는 가치 또한 허구인 바 추구하는 가치로 인정하지 않는다.
잘난 자, 높은 자, 큰 것, 넓은 것, 좋은 것 모든 것이 그러하다. 큰 것이 좋은 것도 아니고 작다고 나쁜 것도 아니고 좋은 것이 좋은 것도 아니다. 높은 자리가 훌륭한 것도 아니고 낮은 자리가 비천한 것도 아니다. 높은 것도 높은 것이 아니고 낮은 것도 낮은 것이 아니다. 수입의 많고 적음에 따라 큰 것 작은 것 가려 소비하는 삶은 물적 욕망에 영혼이 꼬리처럼 따라다니는 것에 다름 아니다.
마음에서 일어나는 바가 없으면 쓸 바도 없고 하고 싶은 것도 없다. 하고 싶은 것이 없으니 부러울 것도 가고 싶은 곳도 별반 없다. 무슨 재미로 사느냐고? 아무 것도 하고 싶지 않은 재미가 쏠쏠하다.
자본주의에 대한 가장 정밀한 저항
자본주의의 대한 가장 정밀한 저항은 가급적 덜 쓰고 작은 것을 택하고 덜 돌아다니는 것이다. 그것이 생태적 삶이다. 물론 자급적 순환농에 자족하며 사는 것이 자연 순환계에 합치하는 가장 이상적인 삶의 형태이긴 하다. 그러나 인연과 경험치를 벗어날 수 없는 것이 인생이요. 세상 일 또한 조건을 벗어나 뜻만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닌 바에 가장 이상적인 것을 이야기하는 것과 모두가 그래야 한다는 것은 다른 이야기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는 지켜야 할 도리가 있듯 한 생명과 자신이 깃든 하늘 땅에도 지켜야 할 도리가 있다. 가급적 작은 단위에서 소박하게 먹고 근검하게 사는 것이 자연에 대한 도리다.
이제는 돌아와 한 조각 구름으로 좋은 하루를
생야일편부운기 사야일편부운멸.(生也一片浮雲起 死也一片浮雲滅 태어남은 한 조각 구름이 생기는 것이요 죽음은 한 조각 구름이 사라지는 것이라네)
김성동 선생님의 부음을 접한 지인이 내게 보낸 글편이다. 그러하다. 덧없다. 무한한 우주의 시공간에서 우리 다녀가는 칠팝십 평생은 화로에 떨어지는 눈 한송이 만큼의 찰나도 아니다. 그 찰나를 사는 동안 세상에 다녀간 흔적이 적을수록 잘 산 생이 아니겠는가.
내 먼 발치에서 알던 분이 계셨다. 그 분은 멀리 맛집을 찾아가고 오는 길에 분위기 좋은 찻집에서 커피 한 잔 마시는 소소한 즐거움조차도 계율을 범한 수도승처럼 불편해 하셨다. 그 분은 옷은 남루를 면하고 섭생은 소박하셨으나 의는 청죽처럼 푸르렀고 열정은 불이었다. 그리고 따뜻한 사람이었다. 그런 사람이 있었다.
별빛 쏟아지는 몽골 초원의 밤에서 돌아와 이제는 내 작은 텃밭에 물을 주자. 스페인 낯선 어느 골목이거나 남프랑스의 어느 낮은 언덕길에서 이제는 돌아와 눈감아도 떠오르는 내 유년의 길 어디쯤에 앉아 흘러가는 한 조각 구름으로 좋은 하루를 살자. 지구가 아프다. 이제는 가만히 앉아 지구의 상처를 보듬어주자. 한 그루 나무를 심자.
* 이 글은 웹진 <나비>의 '기후@나비'에 동시 게재됩니다.(☞ 바로 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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