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의 능력을 신과 비교한다면 유일한 한계점이 미래를 예측하는 능력이라고 생각된다. 역사를 통해 자기반성과 미래를 계획하기도 한다.
때로는 우주의 원리를 규명하거나 인간의 궁금증에 대하여 다양한 접근을 한다. 규칙성과 불규칙성이 혼재한 현실을 살아내는 근원의 힘은 어떻게 만들어 지는가?
경험이다. 학교라는 공간을 통해서 간접 체험을 하거나 더러는 직접체험을 통해 터득한다. 어떤 길이 옳은지는 확실히 답하기는 어렵다.
내 자신의 경험에 비추어보면 가능하면 스스로 선택하고 다양한 문제와 맞닥뜨리면서 해결책을 찾는 것을 선호한다. 그런 경험이 다른 사람과 다른 문제인식을 하게 되고 해법도 창의적일 때가 많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과연 창의성을 교육할 수 있을까?
학교란 제도는 인류역사의 길이만큼 길다. 그 제도가 유구한 역사를 가졌다는 건 좋은 제도인 동시에 그 제도가 기득권을 유지하는데 유용하다는 부정적 인식도 있는 것이다.
대부분의 동물들도 새끼를 낳아 생존법을 가르쳐 독립시키는 순리와 닮아있을 것이다. 독수리는 나는 법을 가르쳐 둥지에서 떠밀거나 사자는 사냥을 함께하며 생존법을 이어간다.
허나 대한민국의 아이들만큼 긴 시간과 비용을 쓰지는 않을 것이다. 인생의 4분의1 이상을 배우는데 낭비하는 것이라 생각된다. 학교와 학원을 병행하는 아이들은 행복할까를 물어야 하고 행복하지 않다면 바꿔야 한다.
공교육을 뛰어넘어 비대해진 사교육은 어떤 문제를 가져 오는가? 일단 아이들의 청소년 시절을 입시라는 불행의 문을 여는데 쓰는 것은 아닌가.

어른들은 하고 싶은 것을 할 수 있을 때 행복하다. 아이들은 무엇을 하고 싶을까 묻고 그렇게 해도 된다, 라고 답해주어야 한다.
그럼에도 학교가 옳다고 주장하려면 아이들에게 학교와 학원 둘 중에 하나만 선택한다면 어떤 것을 선택할 것인지도 물어야 한다.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시절을 오직 정답을 외우는 시간으로 보내서는 안 된다. 살면서 그렇게 외운 정답이 실제 답이 된 적이 얼마나 많은가?
복잡한 사회관계 속에서는 서로 공감하고 소통하며 다양한 해답을 조정해 가는 것이다. 좋은 스펙은 좋은 머슴이 되는 조건이지 사장이 되는 조건은 아닐 것이다.
세 아이들을 키우면서 나는 말했다. "아빠는 어른도 처음 되었고 아빠도 처음 되어서 서툴단다. 학교에 가는 방법과 안 가는 방법 둘 중에 어느 것이 옳은지 알 수 없으니 스스로 선택하고 책임지면 될 거야."라고 말했다.
아이들은 초등학교만 마치거나 중학교를 마치고 스스로 공부하며 자랐다. 아이들의 물음에 답하는 부모가 되기 위해 함께 성장하며 자랐다.
덕분에 아이들은 자신의 선택을 믿고 건강하고 행복한 사회인이 되었다. 때로는 길 위에서 때로는 생각을 나누며 자기 삶의 주인으로 사는 것을 응원하는 것으로 부모의 역할을 했다. 우리도 나이든 초보였으니까.
아들이 일곱 살 때 세렝게티를 함께 가기로 약속을 했다. 건기가 되면 들소 떼의 대이동을 보기 위함이다.
수백만 마리의 들소는 강 언저리에서 주저하다가 한 마리가 뛰어들면 저마다 급류 속으로 뛰어든다. 급류에 허우적거리다 악어의 밥이 되는 운명을 맞기도 한다. 만약 강폭이 넓은 하류를 선택하면 더 안전하지 않을까? 깊이나 물살의 세기는 생각하지 못하고 강폭이 좁은 것만 보고 선택한 우둔함은 아닐까? 여기에 더해 강 건너도 건기라는 사실을 알았다면 더러는 남고 널리 흩어지면 어땠을까? 수 만년의 반복이 진화의 과정의 산물이겠지만 반드시 옳은 선택은 아니었을 것이다. 이 광경을 같이 보고 싶었다. 스스로 판단하고 선택하는 주체가 되는 것이 중요하다.
교육이 행복을 막고 있지는 않은가? 답을 모르면 그들 스스로 답을 찾도록 기회를 주어야 한다. 문명은 스스로를 기억하지 못할 정도로 빠르게 진보하고 사회는 복잡하다.
모두가 한쪽 방향으로 뛰어가 들러리가 되는 것보다 각자가 다른 방향으로 뛰어 일등이 많아지면 좋겠다. 인간의 능력은 기억력의 크기가 아니라 상상력의 크기여야 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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