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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녀 승부사' 유예린의 집념 “불안할수록 더 열심히 탁구 연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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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소녀 승부사' 유예린의 집념 “불안할수록 더 열심히 탁구 연습”

'탁구 레전드' 유남규 감독과 '전설' 꿈꾸는 딸의 아름다운 동행

▲세계주니어탁구대회를 휩쓸고 있는 유예린 선수(화성도시공사)가 프레시안과 인터뷰를 하고 있다. ⓒ프레시안

흔히 재능은 '타고난다'고 말한다. 그럼 근성은 어떠할까?

한국탁구의 유망주 유예린(18·화성도시공사)과 인터뷰를 하며 근성은 '닮아가는 것'이란 생각이 갑자기 뇌리를 스쳤다.

올해 나이 열여덟의 그는 그야 말로 '독하게' 연습하는 '소녀 승부사'이다. 공식 훈련은 오전 9시부터 시작되지만 유예린의 하루 일과는 이미 1시간 이전부터 연습 시간으로 짜여 있다.

저녁 식사 후에도 라켓을 손에 쥐고 자신만의 1시간을 2.7g의 탁구공과 고독하게 싸운다. 매일 같은 길을 가는 또래들보다 최소 2시간 이상 더 연습을 하는 셈이다.

흡사 30여 년 전 아버지의 모습이 연상된다. 그의 아버지는 한국탁구의 레전드인 유남규(57) 한국거래소 감독이다.

유 감독은 탁구가 처음 올림픽 종목으로 채택된 1988년 서울올림픽에서 남자단식 금메달을 딴 '탁구 영웅'이다. 전 국민에게 감동을 준 유 감독의 '금메달 포효' 모습을 지금도 기억하는 이들이 많을 정도로 대한민국 탁구 역사상 명장면으로 남아 있다.

하지만 유남규 감독의 무지막지한 연습은 잘 알려져 있지 않다.

88올림픽 당시 고3이었던 유 감독은 선수촌에서 운동시작 1시간 전에 일어나 땀을 흘렸고 야간에도 남들이 잘 때 1시간 더 연습했다. 그렇게 정확히 600일을 독하게, 남몰래 더 노력했다. 그래서 유 감독은 지금도 “금메달은 실력으로 딴 게 아니라 순전히 노력으로 땄다”고 말한다.

유예린의 근성을 말하려다 서두가 장황해졌다.

▲세계주니어탁구대회를 휩쓸고 있는 유예린 선수(화성도시공사)가 프레시안과 인터뷰를 하고 있다. ⓒ프레시안

유예린의 승부사 기질은 아버지를 꼭 빼닮은 것 같다. 아니 더하면 더했지 덜 하진 않을 것 같다. 인터뷰하는 1시간 내내 탁구 외에 다른 소재가 끼어들지 못했다. 열여덟 소녀가 "탁구는 나의 전부"라고 말할 정도이니 정말 대단한 승부 본색이다.

유예린의 출발은 다른 탁구신동에 비해 다소 늦은 편이다. 엄마를 닮은 예린이는 어릴 때 미술 쪽에 많은 관심을 뒀다.

하지만 피는 못 속인다고 했던가. 초등학생 때인 9살에 우연히 아빠를 따라가 라켓을 잡았는데 뛰어난 운동신경이 절로 나왔다. 재능이 있구나, 생각한 아빠의 권유로 탁구공을 손에 쥐었다.

탁구는 11점제 5판3승제 경기방식이다. 11점을 따기 전까지 이긴 게 아니다.

처음에 아버지 유남규는 딸 유예린에게 10점을 주고 게임을 해도 이겼다. 먼저 준 10점은 9점, 7점, 5점 등으로 시간의 흐름과 함께 낮아졌다. '독하게' 연습하는 유예린의 기량이 하루가 다르게 날로 좋아졌기 때문이다.

18살 탁구의 샛별은 아빠와 가벼운 연습 경기조차 승부욕을 불태운다. 덕분에 실력은 완전히 역전됐다. 유남규 감독은 "딸 예린이가 저에게 점수 8점을 주고 시작해도 번번이 지게 된다. 기술에서 예린이가 한수 위"라고 털어놓았다.

유 감독은 "기술적으로는 가르칠 게 없다고 보고 멘탈(정신)적으로만 잡아주고 있다"고 덧붙였다.

▲세계주니어탁구대회를 휩쓸고 있는 유예린 선수(화성도시공사)가 프레시안과 인터뷰를 하고 있다. ⓒ프레시안

아버지 유남규는 어린 선수시절부터 "운동선수는 공부를 잘 못한다"라는 말을 가장 싫어했다. 중학교 재학시절부터 한문과 영어를 섞어서 일기를 썼고 꾸준히 책을 놓지 않아 지금은 석사와 박사 학위까지 받았다.

이런 아버지가 딸에게 공부를 요구한 것은 당연하다. 유예린은 아버지의 뜻에 따라 서너 살 때부터 영어를 배웠고 지금은 회화에 능숙한 경지에 올랐고 중국어도 의사표현에 큰 어려움이 없다.

의무교육인 중학교 졸업 이후 부천상동고 부설 방송통신고로 진학했고 현재 화성도시공사 유스팀 소속으로 뛰면서 어학 공부도 열심이다. 훌륭한 스포츠 선수가 되려면 운동만 할 것이 아니라 공부도 열심히 해야 한다는 아버지의 지론에 딸 유예린의 근성이 꽂힌 까닭이다.

탁구는 심리전 종목이다. 상대 선수와 불과 2m 거리에서 상대방이 공을 되돌릴 수 없도록 공의 구속(球速)과 회전력을 극대화해 몰아붙여야 승리한다.

기가 막힌 스핀을 걸어도 상대가 꿈쩍하지 않으면 심리전이 흔들리기 마련이다. 제 아무리 탁구 신동이라 해도 이런 흔들림이 없을까? 유예린은 "정상에 오른 최근에 더 많은 불안감을 느낀다"고 솔직하게 말했다. 그래서 혼자 책도 읽고 공부도 하고 상담도 받는다고 한다.

승부사적 근성은 여기에서도 나타난다. 유예린은 "불안할수록 연습시간을 늘린다. 연습을 더 많이 하면 불안감이 해소된다"고 말했다.

'고통을 연습으로 극복한다'는 어느 '마에스트라'의 말을 연상케 한다. 마에스트라(maèstra)는 최고 경지에 오른 여성 지휘자를 뜻한다.

주말이면 열여덟 하이틴 소녀에게 깔깔 거리며 놀고 싶은 유혹이 없을 리 만무하다.

▲세계주니어탁구대회를 휩쓸고 있는 유예린 선수(화성도시공사)가 프레시안과 인터뷰를 하고 있다. ⓒ프레시안

시간적 여유가 생긴다면 무엇을 하고 싶으냐는 질문을 던진 이유이다. 그랬더니 "탁구공을 하나라도 더 치면 실력이 늘어난다. 지금 최선의 노력을 다 해야 나중에 후회가 없을 것 같아 연습을 더 많이 한다"며 "노는 것은 나중에 해도 된다"는 묵직한 답변이 돌아 왔다.

심적 불안감이 휘몰아칠 때에도, 일상에서 벗어나 여유를 즐기고 싶을 때에도 연습을 통해 욕구를 통제한다는 말이니 보통 인내력이 아니다.

유예린은 항상 '완벽'에 가까이 가려고 있다.

순발력 강화를 위해 볼 박스에 1000개, 2000개 이상의 공을 넣어 놓고 온몸이 저릴 때까지 연습하다 보면 날아오는 공을 반사적으로 쳐내게 된다.

빠른 속도와 정확한 기술을 필요로 하는 운동이다 보니 무한의 집중력이 요구되고 스트레스도 쌓일 수 있겠지만 유예린은 "더 연습하면 된다"는 식으로 자신과의 싸움을 주저하지 않는다.

▲세계주니어탁구대회를 휩쓸고 있는 유예린 선수(화성도시공사)와 유선수의 아버지이자 올림픽 금메달리스트인 유남규 감독이 프레시안과 인터뷰를 하고 있다. ⓒ프레시안
▲세계주니어탁구대회를 휩쓸고 있는 유예린선수의 아버지이자 올림픽 금메달리스트인 유남규 감독이 프레시안과 인터뷰를 하고 있다. ⓒ프레시안

아버지 유 감독은 수시로 "승부에 너무 집착하지 말라. 질수도 있다. 다음에 이기면 된다"며 "무덤덤하라. 게임을 즐겨라"라는 말로 위로·격려한다. 완벽한 사람은 없고 '완벽'보다 '최선'이 중요하다는 가르침이다.

80~90낸대 한국 탁구의 전설인 아버지와 2020년대 새로운 전설을 써 나갈 딸은 매주 일요일 오후에 1시간 이상 '빅매치'의 땀을 흘리며 소통하고 공감하며 동행하고 있다.

딸은 이렇게 말한다.

"그동안 딸을 위해 너무 잘 해주셨어요. 아빠, 지금처럼만 해 주세요. 내년 아시안게임과 2028년 올림픽에서 꼭 메달을 따고 싶어요."

아버지가 딸에게 말한다.

"운동은 혼자 하는 게 아니라 상대가 있단다. 불안할 때마다 금메달을 목에 건 모습을 상상하렴. 그리고 앞으로 1~2년이 중요한 때인 만큼 즐기면서 운동하렴. 지금까지 너무 잘 해줘서 내가 고맙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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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기홍

전북취재본부 박기홍 기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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