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을 걷다 보면, 굳이 말하지 않아도 서로 부딪히지 않게 피해간다. 빨간불 앞에서 멈추는 일처럼, 누가 시키지 않았는데도 자연스럽게 따르는 질서가 있다. 그런 걸 우리는 “조리(條理)”라고 부른다. 불문법으로 조용히 숨어 있지만, 법보다 더 빠르게 움직이는 판단의 기준이다.
조리는 법의 빈틈을 메우는 그물망이다. 법조문이 말하지 않아도 “그건 아니잖아요”라고 말할 수 있는 권리이자, 의무다. “법에 명시된 게 없어요”라며 빠져나가려는 이에게 우리는 말할 수 있다. “그래도 그건 아니지.”라고 할때, “아니지”라는 말할 수 있는 느낌, 그게 조리다.
그런데 이 조리는 때때로, 법을 어긋나게 만들기도 한다.
영화 어 퓨 굿 맨(A Few Good Men)에서 미 해병대 내에서 관습처럼 내려오던 비공식 징계, ‘코드 레드(Code Red)’라는 이름의 괴롭힘이 있었다. 병사 하나가 지휘관의 묵인 아래 동료에게 고통을 가했고, 결국 피해 병사는 목숨을 잃는다.
여기서 문제가 된다.
“법에 명시된 규율은 아니었지만, 조직 내에서는 그것이 ‘당연한 일’로 여겨졌다면, 책임은 어디까지 물을 수 있는가?”
이 질문은 조리가 빛을 발하는 장면이자, 동시에 흔들리는 순간이다.
조리란 보편적 상식에 근거한 판단 기준이어야 한다. 그런데 그 보편이 조직 내부에서는 왜곡될 수 있다. 괴롭힘도 ‘규율 유지’라는 이름으로 정당화되고, 불의도 ‘전통’이라는 껍데기를 쓰면 ‘순응’하게 된다.
법이 침묵할 때, 조리가 나서야 한다.
그것은 "남들도 다 해왔어"라는 구실을 뛰어넘어, 진짜 옳고 그름을 따지는 힘이다.
그래서 조리는 늘 살아 있는 감각이어야 한다. 단지 오랜 관습이라고 해서 따를 것이 아니라, 지금 여기의 상식으로 다시 물어봐야 한다.
“이게 정말 옳은가?”
그 물음이 사라질 때, 우리는 괴롭힘을 ‘조직문화’라 부르게 되고, 억울함을 ‘참고 넘길 일’로 둔감해진다.
조리는 법의 그림자 속에서 자란다. 하지만 그 그림자는 단단하고 곧아야 한다.
누군가 말해주지 않아도, 스스로 “이건 좀 아니잖아” 하고 멈출 수 있어야 한다.
조리는 사람을 향한 것이어야 한다. 그래야만, 조리는 침묵하는 정의가 아니라 말하는 양심이 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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