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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린룸과 방진복은 그녀를 보호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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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클린룸과 방진복은 그녀를 보호하지 않았다"

비디오 아트 <무색무취>·<섬섬옥수> 속 '카나리아 걸'과 '반도체 소녀'

"일할 때는 잘 몰랐어요. '삼성은, 내가 일하는 작업장은 진짜 안전하다'라고 생각했어요. 맞아요. 진짜로 안전한 곳이고, 깨끗한 곳이고. '일하다 암에 걸려 죽는, 설마 그런 일이 일어나겠어?' 그랬어요. 막연하게. 그리고 '삼성에서 그런 일이 일어난다면 가만히 있겠어?' 그랬죠. 진짜로."

삼성전자 반도체 기흥사업장에서 21년간 오퍼레이터(Operator·반도체 제조 공정 담당)로 일한 정향숙 씨는 "회사는 날 보호해 줄 것"이라고 믿었다. 생리통에 시달리며 유산을 경험했고 자궁적출 수술과 척추 수술도 했지만 회사에 대한 애정은 변함없었다.

정 씨는 퇴사 후 중이염을 앓다 뇌에 혹이 있다는 걸 알게 됐고, 그 혹이 '거대세포종'이라는 희귀병이며 생명의 위협이 될 수 있다는 말에 "회사에서 썼던 유독 화학물질 때문인가"라는 의심이 들었다. '반올림(반도체 노동자의 건강과 인권지킴이)'에 전화를 한 것도 이 무렵이었다.

정 씨는 혹 제거를 위한 세 번의 수술 과정에서 왼쪽 청력을 잃었다. 그는 지난해 9월 근로복지공단에 산업재해 보상 신청을 했으며, 현재는 반올림 상임활동가로 자신과 같은 반도체 노동자들을 지원하고 있다.

제26회 전주국제영화제 한국경쟁 장편 부문에 선정된 <무색무취(無色無臭·Colorless Odorless)>는 정 씨 외에도 삼성전자 반도체 사업장 퇴직 노동자들, 삼성전자 1차 협력업체 케이엠텍 노동자들, 앰코테크놀로지코리아(옛 아남반도체) 노동자들, 그리고 대만 전자 산업 노동자들이 최첨단 기술 산업의 이면을 직접 이야기한다.

<무색무취> 출연자 정 씨와 연출자 이은희 영상 작가, 김신재 프로듀서를 지난 달 29일 만났다. 이 작가와 김 프로듀서는 디지털 대상과 기계의 관계를 물질성의 차원에서 접근한 <머신 돈 다이(Machines don’t die)>(2022)을 시작으로 함께 작업하고 있다.

▲<무색무취>(2024, 단채널 영상, 컬러, 사운드, 54분 9초) ©이은희

"클린룸과 방진복은 반도체 보호용일 뿐 그녀를 보호하지 않았다"

<무색무취>는 지난 2007년 3월 삼성전자 기흥사업장에서 일하다 급성 백혈병으로 사망한 고(故) 황유미 씨의 '클린노트(Clean Note)'로 시작한다. 클린노트는 오퍼레이터가 반도체 공정이 이뤄지는 '클린룸(Clean Room)'에서 쓰는 근무일지로, 먼지(Particle)가 발생되지 않는 종이로 만들어졌다.

노동자들은 방진복을 입고 마스크를 낀 채 클린룸에 들어가지만 반도체 생산 과정에서 벤젠, 포름알데히드, 전리방사선 등의 백혈병 유발 물질이 발생한다. 또 반도체 집적회로의 핵심 재료인 원형 기판 '웨이퍼(wafer)'에 사용되는 감광제(PR), 비소(As), 황산 등은 모두 발암 물질이다.

"황유미 씨는 여러 화학물질이 담긴 수조 앞에서 반도체 원형 기판인 웨이퍼를 세척하는 작업을 했다. 그러나 이러한 위험물질 노출에 대한 안전교육과 보호를 받지 못했다. 클린룸과 방진복은 반도체만 보호했을 뿐 그녀를 보호하지 않았다."(<무색무취> 중)

▲<무색무취>(2024, 단채널 영상, 컬러, 사운드, 54분 9초) ©이은희

<무색무취>는 하루 종일 24시간 한시도 손에서 놓지 않는 핸드폰을 누가, 어떻게 만들었을까라는 호기심에서 출발했다. 여기에 이은희 작가의 화두였던 '기술'과 '신체'에 대한 문제의식이 결합되면서 최첨단 기술 현장에서 독성 유해물질에 노출된 노동자들의 이야기가 영상으로 만들어졌다.

<무색무취>는 한국과 대만을 오가며 반도체 산업, 즉 전자 산업 노동자들의 아픔(피해)은 현재 진행형이며 구조적인 문제라는 점을 강조한다.

카메라는 대만의 대표적인 전자 산업 피해 사례인 RCA 사건을 계기로 만들어진 대만산재희생자협회(TAVOI)를 조명한다. 미국의 무선 전기회사인 RCA는 미국 내 환경오염 문제로 1970년대 대만에 진출했다. 이후 1992년 대만에서 철수할 때까지 숱한 환경오염 문제를 야기했다. 지금도 RCA 공장이 있던 곳은 영구오염구역으로 관리되고 있다. 대만 RCA 노동자들은 보호 장비 없이 맨손으로 납땜을 했으며 지금도 각종 직업성 암에 시달리고 있다.

카메라는 또 현재 대만에서 일하고 있는 필리핀 국적의 반도체 노동자들도 비춘다. 최첨단 혁신 기업인 애플(Apple)과 에이수스(Asus)에 공급되는 반도체를 만드는 이들은 독성 유해물질에 수시로 노출되는 환경에서 일하고 있으며, 부서 인력의 5분의 4는 자신들과 같은 이주 노동자들이라고 말한다.

이 작가는 "노동자들이 자신의 아픔을 개인화하지 않고 구조적인 문제라는 사실을 인지하고 다른 노동자들과 연대해야겠다고 생각하는 게 중요하다"며 "'나만 아파'가 아닌 '내가 아파서 이런 고통을 겪었는데 이 아픔을 통해서 타인의 아픔도 이해하게 됐고, 또 다른 아픔이 일어나지 않도록 내가 무언가를 해야겠다'라고 나서는 사람들이 있다는 걸 이야기하고 싶었다"고 했다.

이어 "영화제에 선정됐다는 소식을 황유미 씨 추모제 촬영 중 들었다"며 "반올림과 노동자들이 자신들의 이야기를 흔쾌히 내어준 덕분이다. 그래서 더 특별한 기분이었다"고 했다. 그는 영화제를 통해 반도체 산업의 이면이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지면 좋겠다고 했다.

<무색무취>는 5월 2일, 4일, 6일 전주에서 관객들과 만난다. 전주국제영화제 심사위원들은 "소재나 만듦새가 모두 완성도 높은 영화"라고 평가했다.

▲<무색무취>(2024, 단채널 영상, 컬러, 사운드, 54분 9초) ©이은희

"얼마나 많은 밤과 낮을 그렇게 선 채로 잠들었던가"

이 작가는 지난해 9월 <무색무취> 작업을 마치고 <섬섬옥수(纖纖玉手·Body Alerts)>를 연이어 작업했다. <섬섬옥수>는 산업혁명 시기의 직업병 문제가 오늘날의 전자 산업에서도 유사한 방식으로 반복되고 있다는 사실에 주목했다.

1887년 미국의 고무공장 노동자들이 이황화탄소(CS₂) 중독으로 정신착란 등을 일으켰다. 이황화탄소는 세계 2차 대전 당시 독일이 신경 독가스의 원료로 쓴 유독 화학물질이다.

1988년 한국의 원진레이온 노동자들이 이황화탄소 중독 증세를 보였으며, 최초 사례가 확인된 이래 지난 2007년까지 원진레이온 직업병을 인정받은 노동자는 900명이 넘는다. 원진레이온은 1964년에 일본 도레이레이온사의 중고 기계를 들여와 1966년 한국에서 첫 레이온 가공 사업을 시작했다. 노동자들의 이황화탄소 중독이 사회적 문제로 대두되자, 1993년 창립 29년 만에 폐업했다. 그러나 이듬해 이황화탄소를 내뿜는 기계를 중국에 수출했다.

1985년 미국 IBM에서 일하던 화학자 게리 애덤스는 동료 10명 가운데 8명에게서 뇌종양·림프종 등이 발병했다고 알렸으나 회사는 이를 무시, 20여 년 뒤 각종 암에 걸린 노동자들과 선천적 장애를 갖고 태어난 자녀들이 집단 소송을 제기했다.

2010년 한 해 동안 미국 애플의 하청 제조업체인 중국 폭스콘에서는 동료 간 대화 금지 등 각종 통제 속에 24시간 3교대 격무에 시달리던 10·20대 노동자 14명이 투신자살했다. 회사는 건물 밖에 자살 방지용 그물을 설치하고 노동자들에게는 자살 금지 서약서를 받는 등 통제를 더 강화했지만 노동자들의 자살을 완전히 막지는 못했다.

▲ <섬섬옥수>(2025, 2채널 영상, 컬러, 사운드, 32분) ©이은희

<섬섬옥수>는 시대를 초월한 유사성을 표현하기 위해 산업혁명 시대 노동자들과 첨단 기술 시대 노동자들을 한 화면에 나란히 보여주는 편집 방식(2채널)을 택했으며, 과거 피해 사례와 노동자들의 글을 낭독 형식으로 전했다.

"누렇게 변한 내 눈 앞 종이에 강철 펜으로 울퉁불퉁 검은 칠을 새겨 넣어 온통 노동에 관한 말들로 가득해. 작업장, 조립라인, 기계, 출근카드, 야근, 월급. 난 그들에게 유순해지도록 훈육되어 소리 지르거나 반항할 줄 몰라. 불평하거나 비난할 줄도 몰라. 그저 묵묵히 피로를 견딜 뿐. (…) 생산라인 옆 쇠처럼 붙어 서서 얼마나 많은 밤과 낮을 그렇게 선 채로 잠들었던가."(2014년 폭스콘 룽화 공장에서 투신해 생을 마감한 24세 노동자의 시 '그냥 그렇게 서서 잠들어' 중)

▲ <섬섬옥수>(2025, 2채널 영상, 컬러, 사운드, 32분) ©이은희

<섬섬옥수>라는 제목의 함의도 크다. 산업혁명 초기 여성의 손은 정밀함이 요구되는 특정 산업 분야에 적합한 것으로 여겨지면서 '섬세한 손가락(nimble fingers·손재주)'으로 상징됐다. 산업과 자본이 섬세한 손가락을 강조하는 사이 여성 노동자들은 독성 유해물질에 무차별적으로 노출돼 피부와 손톱이 노랗게 변했다. 당시 이들은 '카나리아 걸(Canary Girls)'로 불렸다.

산업혁명 시대 '카나리아 걸'이 첨단 기술 시대의 '반도체 소녀'로 이어지고 있는 셈이다.

이 작가는 "과거와 현재가 다르지 않다. 놀라울 만큼 비슷한 일이 계속되고 있다"며 "심지어 어떤 문제들은 (원진레이온 사례처럼) 한 공장에서 다른 공장으로 한 나라에서 다른 나라로 넘어가면서 반복되고 있다"고 했다. 김 프로듀서도 "작업 중 만난 아시아 산업안전보건단체와 '전자 산업이 서구에서 아시아로, 다시 개발도상국으로 넘어가는 패턴을 이해하기 위해 '매핑(Mapping)'이 필요하다'는 이야기를 했을 정도"라며 심각성을 주지했다.

<섬섬옥수>는 국립현대미술관의 대표적인 정례 전시 '젊은모색'(신진 작가 지원 프로그램)의 의뢰로 작업됐으며, 지난 달 24일부터 국립현대미술관 과천에서 전시되고 있다.

▲ <섬섬옥수>(2025, 2채널 영상, 컬러, 사운드, 32분) ©이은희

삼성 백혈병 문제, 끝나지 않았다

지난 2019년 10월 삼성전자 반도체 사업장에서 일하다 백혈병과 암 등에 걸린 노동자 모두가 보상을 받게 됐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23살 꽃다운 나이에 급성 백혈병으로 사망한 황유미 씨 사례가 알려진지 11년 만이었다.

하지만 삼성 백혈병 문제에 대한 사회적 논란은 끝나지 않았다. 노동자들은 지금도 반도체 보호용 시설(클린룸)에서 독성 유해물질을 다루고 있으며, 그에 따른 부작용은 자신에게 혹은 자녀에게 고스란히 전가되고 있다.

"반도체 칩 하나를 만드는 데에는 1.7kg의 화석연료와 화학약품, 그리고 32kg의 물이 필요하다. 데스크톱 PC와 모니터를 만드는데 필요한 원자재는 평균 1.8톤에 이른다.

새로운 물질이나 산업이 인류사회로 도입될 때 그 부작용은 즉시 나타나지 않는다.

기업은 반도체 공정에서 사용하는 대부분의 화학물질을 '영업 비밀'이라는 이유로 공개하지 않는다. 공개하지 않는 내용에는 보호구 지급여부, 국소배기장치 등도 있다.

최첨단 전자 산업 속의 위험은 철저하게 가려져 오직 노동자들의 증언 속에서만 흉흉하게 떠돈다. 그리고 그들의 병든 신체만이 유일한 증거로 존재한다."(<무색무취> 중)

▲ <무색무취>(2024, 단채널 영상, 컬러, 사운드, 54분 9초) ©이은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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