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익의 최전선인 통상외교까지 정쟁의 소재로 삼는 현실을, 저의 양심과 상식으로는 도저히 납득할 수 없다."
2일 한덕수 전 국무총리가 대통령 선거 출마선언에서 한 이야기다. 한 전 총리 본인이 대통령 선거에 나서기 위해 미국과 조기 관세 협상을 타결하고 이를 치적으로 삼으려고 했다는 것이 미국 측에 의해 드러난 상황에서, 누가 통상 문제를 정치적으로 이용하고 있는지 의문이 들게 하는 대목이다.
4월 29일(이하 현지시간) 백악관에서 열린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취임 100일 기자회견에 참석한 스콧 베센트 미 재무장관은 한국이 6월에 있을 대통령 선거 때문에 7월 초까지 미국과 포괄적인 관세 협상을 성사시키기 어려운 것 아니냐는 질문에 "정반대의 전략을 취하고 싶다"며 협상과 관련한 한국 측 입장을 전했다.
그는 "우리가 회담을 통해 알게 된 것은, 이들 정부가 선거 전에 무역 협상의 틀을 마련하고 미국과의 협상에서 성공했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어 한다는 것"이라며 "그래서 실제로는 협상 테이블에 나와 협상을 마무리하고, 이후 돌아가서 선거 운동을 벌이는 데 훨씬 더 적극적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고 답했다.
베센트 장관의 발언이 사실에 근거했다고 평가할 수 있는 이유는 한 전 총리가 대통령 권한대행 시절 했던 언행들이다. <중앙일보>에 따르면 그는 지난달 8일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통화에서 대통령 선거에 출마할 것이냐는 트럼프의 질문에 고민 중이라는 취지로 답했다고 전해지고 있다.
이후 지난달 21일 한 전 총리는 경제안보전략 TF(태스크포스) 회의를 주재한 자리에서 최상목 경제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과 안덕근 산업통상자원부 장관이 미국 워싱턴 D.C에서 스콧 베선트 재무장관 및 제이미슨 그리어 미국무역대표부(USTR) 대표와 '2+2 통상협의'를 가진다고 공개하면서 협상에 속도를 낼 것임을 예고했다.
한 전 총리는 본인과 트럼프의 통화 이후 "미 측의 요청으로 이번 주 양국의 경제, 통상 장관이 만나 협의에 착수하게 됐다"며 "지난 주 일본에 이어 이번 주 우리나라와 협의를 시작하게 된 것은 미국도 우리와의 관계를 중시하고 있음을 보여준 것"이라고 말해 신속한 협상이 마치 미국이 한국을 배려한 것이라는 듯한 주장을 하기도 했다.
그러나 한 전 총리의 의도와는 달리 협의는 신속하게 진행되지 못했다. 베센트 장관은 협의 이후 백악관에서 기자들과 만나 "생각보다 빠르게 진행되고 있다. 이르면 다음 주에 합의에 도달함에 따라 기술적인 용어를 논의할 것"이라고 말했지만 실제 어떤 내용을 협의했는지 공개하지 않았다.
한국 역시 기획재정부가 보도자료를 통해 "양국 재무·통상 분야 장관이 참석하여 미국 관세정책과 관련한 양측의 관심사와 입장을 확인하고 향후 협의 방안 등을 논의하는 최초의 당국간 회의"라고 의미를 부여했으나 구체적 협의 내용이나 결과는 밝히지 않았다.
최상목 경제부총리는 주미국대한민국대사관에서 가진 기자간담회를 통해 미국의 상호 관세 유예 조치가 종료되는 7월 8일 전까지 관세 폐지를 목표로 '줄라이 패키지'(July Package)를 마련할 것이라면서 사실상 결과를 내는 협의는 다음 정부가 해야 할 일이라는 취지의 발언을 하기도 했다.
한 전 총리가 스스로를 '통상 전문가'라면서 본인에게 맡겨달라고 했지만 그의 과거 행적을 보면 이마저도 신뢰하기 어렵다. 한 전 총리는 트럼프 대통령과 전화통화를 하면서 본인이 외교와 통상에 강점이 있다는 점을 어필했으나, 미국 에너지부는 끝내 한국을 '민감국가 및 기타 지정국가 목록'(Sensitive and Other Designated Countries List·SCL)에 포함시켰다. 정상 간 통화를 했다는 사실을 강조한 것만큼, 그에 따르는 내실 있는 협의가 진행됐는지 의문이 드는 부분이다.
한 전 총리는 2002년 이른바 '마늘 파동'으로 인해 대통령 경제수석 자리에서 물러났는데, 자칭 통상 전문가라는 본인의 평가가 무색하게도 '통상' 때문에 경질당하기도 했다.
2000년 중국산 저렴한 마늘이 한국에 수입되면서 한국에서 마늘 농사를 짓는 농가가 상당한 위협을 받게 됐다. 이에 농가는 정부에 문제를 제기했고 정부는 2000년 6월부터 3년 동안 중국산 마늘에 대한 관세를 30%에서 315%까지 올리는 '세이프가드'를 발동했다.
이와 관련 중국 측은 한국산 휴대전화와 폴리에틸렌에 대한 수입을 중단하며 무역 보복 조치에 나섰다. 그해 7월 31일 한중 양국은 협상을 통해 마늘에 대한 세이프가드 종료를 2003년 5월에서 2002년 12월로 앞당기고 매년 3만 톤 이상의 중국산 마늘을 30~50%의 관세율을 매겨 수입하기로 결정했다.
문제는 세이프가드가 2002년 말로 종료된다는 것을 명확하게 알리지 않았다는 데 있다. 해당 내용이 합의문의 '부속 문서'에 담겨 있었는데, 한덕수 당시 경제수석은 이를 대외적으로 확실히 알리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김대중 당시 대통령에게도 제대로 보고하지 않았던 것으로 알려졌다.
이에 협상을 책임졌던 한덕수 당시 경제수석과 서구룡 농림부 차관이 문책 경질됐다. 그런데 이 경질에 대해 한덕수 당시 경제수석은 "정부가 국민에게 더욱 확실하게 알릴 것을 알려주지 않는 데 대해 분명한 비판과 질책이 있다"면서도 "(세이프가드 종료 시점을) 은폐한 것은 아니"라고 주장했다.
외교·안보 문제는 그 특성상 보안이 중요하기 때문에 협상 과정에서 어떠한 일이 벌어지는지 협상에 참가하지 않는 사람들은 알기가 어렵다. 이 때문에 은폐나 이면합의 등이 발생할 여지가 큰데, 국익을 위해 어느 정도 이러한 재량을 발휘해야 할 여지도 있다.
그러나 바로 이 때문에 대외 문제를 다루는 당국자들은 협상 과정에서 국익과 사익을 버무리고 싶은 유혹에 빠질 가능성이 높다. 수십 년 전 이야기를 꺼낼 필요도 없이, 한 전 총리가 이번 미국과 관세 협상에서 의도한 것만 보더라도 이는 충분히 예상 가능한 부분이다.
대외 문제를 처리하는 데 있어 본인의 사익을 가미하려는 자가 다른 국가 정책을 어떻게 처리할 것인지는 어느 정도 예측 가능한 영역이다. 이런 자가 대통령까지 되려는 것은, 한 전 총리의 말을 빌리자면 "유권자의 양심과 상식으로는 도저히 납득할 수 없는"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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